역사법학의 문제점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사비니가 처음으로 지적한 이래, 빠르게 일반의 승인을 받은 법과 언어 및 예술의 발전이 유사하다는 생각을 단호하게 배척해야 한다.
그것은 이론적 견해로서는 틀린 것이지만 특별히 위험하지는 않다. 반면 그것을 정치적 원리로 생각하는경우에는 가장 우려할 만한 잘못을 포함해 엄청난 재앙을 불러일킨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이 반드시 행동해야 할 경우, 즉 목적을완전하고도 명확하게 정하고 전력을 기울여 행동해야만 하는 경우임에도, 그렇게 하지 않고도 문제는 스스로 해결된다고 주장하면서, 그들이 말하는 법의 원천, 즉 국민의 법적 확신으로부터 서서히 나타나게 된다는 것을 믿고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기다리는 것이 최선이라고 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 때문에 사비니와 그의 모든 제자는 입법의 개입에 반대하고 푸흐타의 관습법론은 관습의 참된 의의를 완전히 왜곡한 것이다.
푸흐타가 말한 관습이란 법적 확신의 단순한 인식 수단에 불과하다. 그 확신이 행동으로 비로소 형성된다는 것, 행동함으로써 확신이 실제로 그 힘을 보여주고 생활을 지배하는 사명을 수행하게 된다는 것, 요컨대 법은 힘과 결부된 개념이라는 명제가 관습법에도 적용된다는 점에 대해 저 석학은 눈을 완전히 감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푸흐타는 오로지 자기 시대의 조류에 따랐다. 그것은 독일문학의 낭만주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낭만주의라는 개념을 법학에 적용해 문학과 법학의 두 분야에서 유사한 경향을 비교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은 사람은 내가 역사학과를 낭만주의학파라고 불러도 좋다고 주장해도 그것을 부당하다고 보지 않을 것이다. 법이 들판의 초목과 같이 어떤 고통이나 노력이나 행동도 하지 않고 형성된다고 하는 것은 전적으로 낭만주의적인 즉 과거상태의 잘못된 이상화에 근거한 생각일 뿐이다.
그러나 가혹한 현실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바는 그 반대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현실의 단면, 즉 현재 거의 모든 점에서 여러 국민의 실력 투쟁을 보여주는 이 현실만이 그런 생각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과거 시대를 보아도 받는 인상에 변함은 없다.
따라서 사비니의 학설이 적용되는 것은 어떤 사료도 없는 선사시대뿐이다. 그러나 선사시대에 대해 추측할 수 있다고 한다면, 나는 선사시대가 민족의 확신에서 비롯된 무사 평온한 법형성의 무대였다고 본 사비니의 추측과는 정반대로 보고 싶다. 내 추측은 적어도 유사 이래 법 발전으로부터의 유추에 근거하는 것이고, 사건에 따르면 이러한 소급적 유추의 방법은 인간 심리의 연속성으로부터 옳은 결론으로 이끌 개연성이 크다고 생각되는데, 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원시시대가 후대에 비해 쉽게 법을 확보할 수 있다는 상정은 더 이상 믿기 어렵다. 내 생각으로는 원시시대에 법을 확보하기위해 지불해야 했던 노력 쪽이 훨씬 더 컸다.
가령 자신의 물건을점유자로부터 뺏는 소유자의 권능, 지불불능한 채무자를 타인에게 노예로 매각하는 채권자의 권능에 대한 초기 로마법의 법명제와 같은 가장 단순한 법명제도, 어려운 투쟁으로 얻어진 뒤에 비로소 투쟁의 여지가 없이 일반적인 승인을 얻게 되었음에 틀림없다. 문서 사료의 출현 이래의 역사가 법의 생성에 대해 가르쳐주는 점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것에 따르면 법의 탄생은 인간의 탄생과마찬가지로 통상 격렬한 진통을 수반했다.
그렇다면 상황이 이렇다고 개탄만 해야 하는가? 여러 국민이 어떤 수고도 하지 않고 법을 확보한 것이 아니라, 법을 추구해 고심하고 다투고 싸우고 피를 흘려야 했기 때문에, 각각 국민과 그 법 사이에는 생명의 위험을 수반하는 출산을 통해 모자간에 생기는 것과 같은 두터운 유대관계가 생기는 것이 아닐까? 어떤 노력도 하지않고 확보하는 법은 황새가 물어온 아이의 처지와 같은 것이다.
북유럽 전설에 따르면, 창조의 바다에서 떠다니는 태아를 황새가 발견해 사람에게전해주었다고 한다. 출생을 뜻하는 ‘Birth‘라는 말의 어원은 ‘나르다‘라는 의미의 고대영어 ‘Beran‘인데 이 말은 스칸디나비아어에서 유래했다. 서양에서는 아이들로부터 출생에 관한 곤란한 질문을 받을 경우 황새가 물어서 날라다 주었다"고 말한다.
그 아이는 여우나 독수리가 다시 채갈지도 모른다. 반면 아기를 낳은 어머니는 아기를 빼앗기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피를 흘릴 정도의 노고를 통해 법과 제도를 쟁취해야 했던 국민은 이를 빼앗기지않는다. 이를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다. 어떤 국민이 자신의 법에 힘을 쏟고 자신의 법을 관철하기 위해 뒷받침하는 애정의 힘은, 그 법을 얻기 위해 쏟은 노력과 노고의 크기에 비례한다고 국민과그 사이의 가장 튼튼한 유대관계를 만들어내는 것은 단순한 관습이 아니라, 그것에 지불된 희생이다.
그리고 신이 어떤 국민을 선택한다고 해도 신은 국민이 필요로하는 것을 그들에게 주지 않고 국민의 노고를 경감해주지도 않는다. 도리어 신은 그것을 더욱 무겁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아무런 주저 없이 말한다. 법이 탄생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투쟁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라고.
민사소송은 권리를 위한 투쟁
눈을 돌려 주관적 내지 구체적 레히트, 즉 권리를 위한 투쟁을 살펴보자. 이 투쟁은 권리가 침해되거나 빼앗긴 채로 있는 경우에 시작된다.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는 권리자의 이익에 대해, 이를 무시하려는 자의 이익이 언제나 대립하는 이상, 개인의 권리이든, 국민의 권리이든 침해의 위험을 면하는 것은 없다. 따라서 권리를 위한 투쟁은 어떤 법 분야에서도, 즉 아래로는 사법에서 위로는 헌법과 국제법에 이르는 모든 분야에서 반복된다.
전쟁이라고 하는 형태의 권리침해에 대한 국제법상의 주장, 국가권력의 자의적 행사나 헌법 위반에 대한 봉기와 반란과 혁명과같은 형태의 국민의 반항, 중세의 소위 린치법Lynchgesetz이나 권리실현을 위한 자력구제권Faustrecht, 그리고 그것의 현대 유물인 결투Fehidereche라는 형태의 사적 권리의 거친 실현, 정당방위라는 형태의 자위권, 민사소송이라는 규제된 형태의 권리주장은 모두 분쟁 목적물이나 투입된 힘, 투쟁의 형태나 차원이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권리를 위한 투쟁이라는 점에서 모두 하나인 것의 여러 형태와 장면이다.
이제부터는 이러한 형태 중에서 가장 냉정하게 행해지는 것, 즉 소송이라는 형태를 취한, 사적 권리를 위한 법적 투쟁에 대해 논의하고자 한다.
이는 법률가인 나에게 익숙해서가 아니라, 민사소송의 실상이 법률가에게도 일반인에게도 매우 알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 밖의 경우에는 실상이 분명하므로 커다란 힘을 투입할 정도로 가치가 높은 목적물이 다투어지고 있다는 점은 바보라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경우에는 왜 싸워야 하는지, 왜 양보하지 않는지를 묻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사법상의 다툼에서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분쟁의 목적이 되는 이익(보통은 소유권)의 가치는 비교적 근소하다. 그러한 문제의 처리에 관련된 무미건조한 법률론을 보면, 이러한 종류의 분쟁은 오로지 냉철한 타산과 인생관의 분야에 속하는 것처럼 보인다. 민사분쟁이 처리되는 형식도, 그 형식의 기계적 성격도, 당사자의 자유롭고 강력한 자기주장의 금지도, 민사소송의 차가운 인상을 도리어 강렬하게 만들 것이다.
본래 민사소송에서도 당사자자신이 심판의 장에서 주역을 연기한 시대, 그 덕분에 분쟁 투쟁Kampf의 참된 의의가 분명했던 시대가 존재했다. 아직 검으로 소유분쟁을 해결하고, 중세의 기사가 상대에게 결투요구서를 보낸 시대에는 제3자라고 해도, 이러한 분쟁 = 투쟁이 단순히 물건의 가치를 둘러싼 것, 즉 금전적 손실의 방위를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당해 물건과 관련되어 당사자의 인격, 그 권리와 명예가 다투어지고 주장되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형태는 다르지만 실질적으로는 완전히 그것과 같은 현재문제의 해석에 도움이 될 것이 없으므로 오늘날에 와서까지 과거의 상태를 상기할 필요는 없다. 현재 생활의 여러 가지 현상을 일별하고, 우리 자신의 심리에 대해 자기 관찰을 시도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권리를 침해당하면 권리자는 다음과 같은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권리를 주장하며 침해자에게 저항하는 것, 즉 싸움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투쟁을 회피하기 위해 권리를 포기해야 할 것인가? 그는 이에 대해 스스로 결단해야 한다. 어떤 길을 택하든, 그 결단은 희생을 수반한다.
권리를 희생해 평화를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평화를 선택해 권리를 희생할 것인가?
이 문제를 더욱 깊이 파고들면 다음과 같다. 즉 사실관계와 당사자의 구체적 사정에 따라 무엇을 희생하는 쪽이 참기 쉬운가? 부자는 평화를 위해 자신에게는 근소한 소송액을 희생하지만, 같은 액수를 크다고 생각하는 빈민은 그것을 위해 평화를 희생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권리를 위한 투쟁이라는 문제는 순수한 계산문제가 되고 만다. 이 계산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사자 각자가 이해득실을 비교 형량해야 한다는 것이 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일상적으로 알 수 있듯이 예상되는 노고와 정신적 소모, 비용의 크기에비해 소송물의 액이 부족한 소송은 얼마든지 있다.
물속에 떨어진1탈러를 줍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 2달러를 지불할 사람은있을 수 없다. 이 경우에 얼마까지라면 지불할 것이라는 문제는 오로지 계산문제다.
그렇다고 한다면 왜 사람들은 소송의 경우에도 같은 계산을 하지 않을까? 원고는 재판에 이긴다고 믿고, 비용을 피고에게 부담시킬 작정이라고 설명하는 것으로 이 문제는 풀리지 않는다. 법률가가 잘 알고 있듯이, 이기기 위해 방대한 비용이 필요한 것이 분명한데도 소송을 포기하지 않는 당사자가 상당수 있다. 사건의 어려움을 설명하고, 소송을 포기하도록 권하는 변호사를 향해 아무리 돈이 들어도 소송을 하겠다고 말하는 의뢰인도 얼마나 많은가?
합리적인 이해타산의 견지에서 본다면 비상식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이러한 행동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해 자주 듣는 답은 모두 잘 알고 있다.
그것은 소송중독증이나 권리주장증이라고 하는 혐오스러운 병이라든가, 철저한 싸움 취향이라든가, 상대방과 같은 정도의 희생, 경우에 따라서는 상대방보다도 큰 희생을 지불해야 하는 것이 확실하다고 해도 여하튼 상대방에게 화풀이를 하고 싶어 하는 충동 때문이라고 한다.
일단 개인 간의 분쟁에서 벗어나 두 국민 사이의 분쟁을 먼저 생각해보자. 한 국가의 국민이 다른 국가의 국민에게서 1제곱마 일의 무가치한 황무지를 위법하게 빼앗았다고 가정하자. 피해국은 전쟁을 시작해야 하는가?
경계선의 2, 3피트 안까지 이웃이 경작해서피해를 본 농민이나 이웃이 모은 밭의 돌을 자기 밭으로 던져 피해를 본 농민이 소송을 제기하는 것을 소송중독증이라고 보는 것처럼, 이 국제분쟁을 고찰해보도록 하자.
수천 명의 사람이 죽고 신분에 상관없이 비탄과 곤궁이 초래되며, 엄청난 국비가 소모되고 국가의 존립조차 위협당하는 전쟁에 비하면 1제곱마일의 황무지에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는 것일까! 그만큼의 전과를 위해 그 정도의 희생을 지불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예로 든 농민과 국가를 동일 척도로 본다면 위와 같이 판단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위 농민에게 소송을 포기하도록 권하는 사람이라도, 국가에 대해서 같은 조언을 할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누구라도 알 수 있듯이 이러한 권리침해를 묵인하는 국민은 자신에대한 사형 판결에 서명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웃 나라에게 제곱마일의 영토를 뺏기면서도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나라는 그밖의 영토도 빼앗기에 되고, 마침내 영토를 전부 상실한 국가로 존립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런 국민은 그런 운명에 처할 수 밖에없다.
그러나 더욱더 생각해보면, 어떤 국민이 1제곱마일의 영토를 위해 그 가치의 대소에 관계없이 싸워야 한다고 하면, 왜 농민에 대해서도 약간의 토지를 지키기 위해 일어서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주피터에게 허용된 것도 소에게는 허용되지 않는다‘는 격언에 따라 농민을 포기시켜야 하는가?
사실 국민이 단지 1제곱마일의 영토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즉 자신의 명예와 독립을 위해 싸우는 것처럼, 농부가 자기 권리를 무례하게 무시당한 것을 제거하기 위해 하는 소송도 근소한 가치밖에 없는 소송물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념적인 목적을 위해서, 즉 인격 자체와 그 권리감각을 보여주기 위해 수행되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에 비추어보면 소송에서 생기는 여러 가지 희생과 불편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권리자는 생각한다. 목적 때문에 수단을 다하는 보람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피해자를 압박해 소송을 제기하게 하는 것은 냉정하게 숙고된 금전적 이해관계가 아니라 가해진 불법에 대한 윤리적 불쾌감이다. 피해자에게 소중한것은 소송물을 되찾기 위해서가 아니라-이러한 종류의 소송에서 소를 제기한 참된 동기를 보여주기 위해 종종 행해지듯이, 원고가 배상금을 구빈시설에 기부하도록 결정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도리어 자기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다.
내면의 소리가 그에게 물러서서는 안 된다고 하며, 자신에게 소중한 것은 무가치한 소송물이 아니라 자신의 인격과 명예와 권리감각과 긍지라고 말하는 것이다. 요컨대 그에게 소송은 단순한 이해관계의 문제로부터 품격의 문제로, 즉 인격을 주장하는가, 아니면 포기하는가의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역시 경험이 가르쳐주는 바에 따르면, 동일한 상황에서정반대의 결심을 하는 사람도 분명히 있다. 힘들게 주장해야 하는 권리보다도 평화 쪽이 낫다고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생각하면 좋을까? 그것은 각자의 취미와 기질의 문제로 싸움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평화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권리는 권리를 주장하거나 포기하는 것을 권리자의 선택에 맡기고 있으므로 권리의 입장에서 본다면 싸움도 좋고 싸우지 않 는 것도 좋다고 말해 끝내야 하는가?
알다시피 그런 의견을 실생활에서 종종 듣게 되지만, 나로서는 그것이 대단히 잘못된 생각이고 권리의 궁극적인 성질을 오해한것이라고 본다. 그런 잘못된 생각이 지배적이 된다고 한다면 권리자체가 부정될 것이다. 왜냐하면 권리의 존립을 위해서는 불법대한 용감한 저항이 필요하다는 점에 대해, 앞서 본 잘못된 생각은불법에서 도망치는 비겁한 태도를 장려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잘못된 견해와 맞서는 내 생각은 다음과 같다. 인격 자체에 도전하는 무례한 불법, 권리를 무시하고 인격을 모독하는 형태의권리침해에 대해 저항하는 것은 의무다. 그것은 먼저 권리자 자기자신에 대한 의무다. 그리고 또한 국가공동체에 대한 의무다. 법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권리침해에 대한 저항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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