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이고 싶은 아이 - 2021 아르코 문학나눔 선정 죽이고 싶은 아이 (무선) 1
이꽃님 지음 / 우리학교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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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진실과 믿음에 관한 이야기이다"라는 작가님의 글을 보고 읽기 시작했다. 청소년 소설임에도 꽤나 두려운 말 "죽이고 싶은". 

서은이가 공터에서 죽었다. 그리고 범인은 서은이의 단짝친구 주연이가 지목되었다. 둘은 분명 단짝이였는데, 어느순간 서은이를 끊임없이 괴롭히던 사람이 주연이가 되어버렸다.
아무리 '내가 안죽였어'라고 항변해도, 주연의 변호사도, 아버지도, 어머니도 아무도 믿지 않는다. 
서은은 왕따를 당해 친구가 없던 때, 주연만이 친구가 되어 주었고, 주연은 인기도 많고 공부도 잘하는 부잣집 딸이였지만 매일이 외로웠다. 그런 각자에게 서로에게 큰 위로가 되었는데..

남자친구가 생겨버린 서은에게 주연은 질투가 났다. 나만의 친구여야 했는데,,, 그리고 서은이 죽던 날 주연과 공터에서 만났다.
'미안해..'라는 서은의 말. 그것만 기억하는 주연.  주연에게 그날이 기억이 흐릿하다. 프로파일러의 질문에도, 변호사의 질문에도 주연은 대답할 수가 없다. 기억이 나질 않으니.. 그래서 더 주연은 살인자로 낙인이 찍혀버렸다. 그리고 계속해서 양산되는 카더라...에 '내가 죽였나봐요'라고 말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더 언론은 끊임없이 주연은 악마화하고, 서은은 착한 아이가 되어버렸고, 이젠 어떤 사람도 주연을 믿지 않는다.

주연의 항변,
사람들의 말말말,
책을 읽는 내내 혼란스러운 나. 누구를 믿어야할까. 제 3자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음에도, 진실은 무엇일까를 끊임없이 생각하면서도 계속해서 흔들린다. 
 진실이란 절대적인 사실임에도,,,,, 그럼에도 믿는 것에 따라 바뀌는 것에 나조차도 혼란스럽다.

이 책의 다수의 인물들이 모두 진실을 쫒지만, 누구도 완전히 객관화 된 입장에서 바라보고 있지는 않다. 그저 각자가 처한 입장과, 누군가의 말에 휘둘려서 바라볼 뿐...

 그럼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진실을 알 수 있을까.
아직은 덜 성숙한 아이들. 그런 아이들의 말에 주연과 서은을 양 극단으로 몰아가며 호도하는 언론들. 그말에 놀아나는 대중들. 나는 책을 읽는 내내 두려웠다. 누구라도 그 상황이면 '내가 죽였을 것'이라고 말하게 되지 않을까..


 진실은 절대적 사실이 아니라 믿는 사람들이 많은 쪽이 사실이 되어버린 사회. 그래서 더 자극적인 워딩 만이 살아남아 버린 극단이 한 아이를 살인자, 괴물로 만들었다.
그런데 ... 정말 사실이 밝혀진다면, 그걸 진실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난, 이 책을 보며 '아니..'라는 말이 되뇌어졌다.

그저 "죽이고 싶은 아이"만이 남은 것이지.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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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전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 아노크라시, 민주주의 국가의 위기
바버라 F. 월터 지음, 유강은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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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노크라시, 민주주의 국가의 위기” 아노크라시라는 말은독재(autocracy)와 민주주의(democracy)의 합성어로, 독재와 민주주의의 중간상태를 이르는 말이다. 우리나라에서 2024년 12월부터 지금까지 발생한 일련의 사태가 없었다면, 아마 나는 이 책에 관심이 가질 않았을 것이다. 
 외국에서만 보던 일이 우리나라 수도 서울에서 일어났기에 나는 궁금했다. 대체 왜 일까.


저자는 “내전”은 고대, 중세에는 없었던 일이라고 한다. 현대사회 들어와서야 발생한 현상이라는 것.
그런 내전에 대하여 이 책은 과거에 발생했던 사건들을 분석하여 발생하는 원인, 과정을 분석한 책이다. 책 속의 내용 중 개인적으로 내게 제일 아이러니 한 부분은 현대 사회에 있어 발생한 내전의 기반에는 민주주의가 있었다는 점.(사실상 표면적 민주주의였고, 급진적 형태로 진행될 경우 그런 현상이 더 도드라졌다.) 그리고 이런 민주주의가 아노크라시로 변환하는 그 사이에는 “선출된 지도자”들이 있었다. 히틀러와 같이 민주적 절차를 통해 선출된 권력. 그들은 쥐게 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그 나라가 민주주의를 위해 만들어 놓은 절차적 안전장치를 무시한다. 그리고 그것을 감추기 위해, 경제, 안전등의 슬로건으로 공포를 양산한다. 타자화를 통해 적을 만들고, 적들에 의한 두려움을 해결하는 유일한 자가 '나'라고 말하는 것.

“파벌화 되었다 p.60” 
그런 이들을 <종족 사업가>라 칭한다. (전문가들이 만들어낸 용어임). 그들은 파벌화를 통해 너와 나의 선을 긋고, ‘나‘가 아닌 타인을 전부 적대화한다. 르완다에서 후투족이 투치족을 <바퀴벌레>라 칭한것도 그러했고, 어쩌면 우리가 70,80년대 냉전시대 속에서 북한의 지도자를 각종 동물에 비교하며 완전한 악인을 만들어낸 것도 그러했다. 히틀러가 “우생학”을 들먹이며, 유대인을 인간 이하의 종족으로 분류한 것도 같은 맥락.
현재는 인도의 모디 총리가 그런 모습을 띄고 있고,2018년 브라질의 보우소나루가 그랬다. 그들은 종교, 인종을 이용해 인종의 단층선을 만들어냄으로써 지지자들의 강력한 결속력을 만들어냈다. 

대체 그럼 왜 시민들은 그런 이들에게 동조하며 점점 더 폭력적으로 발전하는 것일까. 저자는 “폭력적으로 바뀐 집단들이 대체로 정치 과정에서 배제된다고 느끼다는 것이다.p.92”라고 한다. 사람들은 가난이나 실업, 차별을 참을 수 있으나, 원래 ’내‘것이라고 믿는 것의 상실을 견딜 수 없다는 것. 그렇기에 21세기 가장 위험한 집단은 과거에 지배적 집단의 위치에서 현재 그렇지 못한 집단이라고 한다. 아무리 현재 차별 받아도, 힘들어도 언젠간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 그것은 곧 불확실성을 의미하지만, 그 불확실성이 확실성로 바뀌는 순간이 곧 그 집단이 폭력적으로 바뀌는 계기가 되며, 내전의 시발점이 된다고.. 결국 국가가 '나'를 챙기지 않는다는 완전한 절망감을 이용하는 집단인 것이다. 고작 말 한마디로 말이다.

그렇다면 이런 불안을 이용해 공포로 바꿔 폭력적으로 변하게 만드는 <종족 사업가>들이 과거에는 없었을까. 있었다. 하지만 말도 안되는 논리에, 의견들로 인해 그들의 말은 힘을 갖지 못했다. 그런 그들의 말이 지금은 힘을 가지고 퍼져나간다. 그들의 권력으로 향하는 꿈을 현실화 시킨 것은 ”소셜 미디어“이다. 
”소셜 미디어는 모든 종족사업가의 꿈이 실현된 공간이다. 알고리즘은 충격적인 자료를 두드러지게 내세움으로써 극단적 민족주의자들이 사람들에게 <타자>에 대한 유독한 견해를 심어주게 도와준다.“ p.156
소셜 미디어를 통해 그들의 언어는 희망이 사라진 집단에게 연료가 되어 퍼져간다. 자극적이고 폭력적인 언어로. 그리고 소셜 미디어의 알고리즘은 계속해서 듣고 싶은 말만 들을 수 있도록 돕는다. 
트럼프가 바이든에게 선거에 지고서도 수십 일동안 지지자들에게 불법 선거 운운하며 선동한 수단도 소셜 미디어였고, 그로 인해 미국 국회의사당 폭동 사건이 일어났다.

총 1~6단계, 분류와 상징화, 차별, 비인간화, 조직화. 양극화의 단계로 진행되는 내전의 양상은 정치적 양극화가 반드시 내전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실제로는 파벌화가 가장 중요한 원인인셈. 지리, 종교, 인종을 통해 파벌을 만들고, 약탈적으로 상대를 배제하고, 오로지 자신의 파벌에만 유용한 정책을 펼침으로 파벌화가 완성될 때가 내전이 시작되는 시점이다. 그리고 그들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 소셜미디어인셈.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이런 ”내전“을 막을 수 있을까.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 저자가 만족할 만한 답을 주진 않는다. 이 책 자체가 내전의 원인에 초점이 맞춰진 책이기도 하고,,
저자는 정치가 포용 정책을 펼침으로써 내 나라에서 배제되지 않고 있다는 안정감이 내전을 막을 수 있다고 말하지만, 너무 원론적인 이야기 아닐까…. 물론 내전의 가능성이 가장 높았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예를 통해 그 가능성을 말하고 있지만, 사람만이 그것을 막을 수 있다는 말도 맞지만, 반대로 이런 불안을 만들어낸 것도 사람인 셈이니까. 

책을 읽으며 가장 두려웠던 점은 우리나라는 견고한 민주주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우리도 사람에 의해 흔들렸다. 물론 사람들로 간신히 지켜내기도 했지만. 
그럼 이런 일들을 막기 위해 우리는  특정 인만 배제하면 괜찮은 것일까?! 그 질문에 “아니다”라고 답하는 책.
그래서 그럼 왜? 라고 질문을 던지며, 내가 가진 생각을 다시 되돌아보게 하는 책. 그래서 내가 앞으로는 어떻게 해?라는 질문에 생각하라고 말하는 책이다.

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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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식 존엄사 - 의사 딸이 동행한 엄마의 죽음
비류잉 지음, 채안나 옮김 / 글항아리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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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식 존엄사"라는 제목에 끌렸다. 그중에서도 존엄사 앞에 "단식"이라는 단어가.
이 책은 의사로써 저자가 자신의 어머니의 죽음을 지켜본 과정과 결국 인간 으로써의 존엄을 지키며 죽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게 한다.
개인적으로는 조 부모님과 이별하던 과정이 떠올랐다. 오로지 산 자의 입장으로만 서있었던 내가.

저자의 집안은 소뇌실조증의 유전자가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어머니 쪽이. 그 질환은 치료 약이 없고, 뇌가 기능을 잃어가며 운동 감각이 떨어지는 것을 시작으로 나중에는 음식, 호흡까지 점차적으로 전체의 운동 기능이 떨어져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어머니는 60세에 발병하셨으나, 어머니의 남동생은 이른 나이에 발병했고, 그 자식들에게 까지 이어져 온 가족이 소뇌실조증으로 사망하였다. 그 과정 중에서 자살한 이도 있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자신의 병에 대해 정확히 알고 계셨고, 오랜 기간 요가를 해오셨기에 병의 진행을 더디게 할 수 있었으나, 결국 타인의 도움이 절대적인 상태가 이르렀을 때 스스로 점차적으로 곡기를 끊으시며 돌아가시길 원했고, 충분히 자식들과의 의논을 통해 말 그대로 존엄사를 진행하셨고, 편안한 상태에서 돌아가셨다.
 이 책은 그 어머니와 아버지의 이야기를 비롯하여, 어머니가 그런 결심을 하시게 되는 과정이다.

이 책은 죽음의 관점을 가족의 입장인지, 환자 본인의 입장인지를 생각케 한다. 가족의 입장이라면 오래토록 그가 살아 계시길 원하겠지만, 당사자라면 과연 그럴까...? 그래서 나는 나의 할아버지가 생각 났다. 오랜 기간 병원에 계시다 가신 할아버지. 우리 가족은 모두 할아버지를 오래토록 살아계시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정말 최선이 였을까. 물론 그런 노력을 하지 않았다면 또 다른 후회를 하고 있겠지. 
할아버지는 무엇을 원하셨을까. 모르겠다. 어머니와 할머니의 마지막을 자주 떠올린다. 말기암으로 돌아가셨지만, 나는 늘 할머니가 더 오래사셨어야 한다는 말을 한다. 하지만 할머니의 주변 분들은 오래 아프지 않고 편히 잘 갔다는 말씀을 하실때마다 드는 서운함은..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결국 내 욕심인가 싶었다. 나의 마지막이라면 나도 저자의 어머니와 같은 선택을 할 것이고, 어쩌면 내 나라에서 그런 죽음을 허용하지 않고, 나의 가족이 반대를 한다면 나도 스위스로 갈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했으니까.
나의 마지막에서 나의 죽음을 내가 선택하는 것. (건강할 때의 자살이 아니다.) 악용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지만, 무조건 그 케이스만을 들어 '그것은 옳지않아'라고 말할 수 있을까.

 책을 읽으며 다시 한번 사회적으로 "존엄사"라는 것을 심도 깊게 논의했으면 한다. 종교적 이유로, 사회 통념상의 이유로 무조건 '아니다'라고 하기엔 우리의 마지막을 어떻게 맞이하는가도 인간으로써 존엄을 지키는 이유가 되지 않을까. 그것은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의 '질'과도 관계가 있다. 연명 장치에서 가족과의 이별을 준비할 시간마저 없는 마지막은 과연 가족과 본인에게 좋은 것일까?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에게 죽음이라는 단어가 너무나 부정적이기에 섣불리 꺼내기 힘들다는 사실이 가장 비중을 차지하는 것 같다.. 죽음에 대해 가족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 자체가 어려운.. 현실.

여전히 내 가족, 내 지인의 죽음은 슬프고 힘들다... 남은 시간이 얼마든 간에..
반대로 나의 죽음이라면...나는 무조건 적인 연명을 바라지 않는다.

이 양가적인 감정. 어떻게 해야 할까.

"강제 인공 영양 법은 최선을 다해 반드시 환자를 살리려는 의료 인의 사명감과 환자를 굶겨 죽게 내버려둘 수 없다는 가족의 죄책감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이런 관념 이면에 '사망'을 직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숨기고 있다."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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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랍어 시간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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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작가님의 책은 늘.. 묘하다. 굉장히 몽환적이랄까. 이전에 읽었던 <작별하지 않는다>도 어느순간 생과 사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몽환적인 느낌을 받았는데, 희랍어 시간은 생과 사의 경계는 아니지만 책속의 남자와 여자가 서로 얽혀있는듯, 아닌듯한 느낌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이 책은 사랑이야기가 아니다. 한남자와 한여자가 만나는 이야기?랄까? 정말 만남이라는 것에 방점을 찍고 있다. 뭐지? 얇은 장편소설이지만 눈을 뗄 수 없는. 내가 지금 보고 있는 이는 누구일까. 누구의 심연속일까하는 생각을 계속해서 하게하는..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와 말을 잃어버린 여자. 고대 희랍어에 대한 수업 시간에 만난 강사와 제자. 
남자는 어렸을 적 독일로 가 그곳에서 자랐지만 “모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강사로 희랍어를 가르친다. 아버지의 병을 유전으로 받아 점점 시력을 잃어가지만, 아직은 누구에게도 들키진 않았다.
여자는 어느날 부터인가 말을 할 수 없었다. 입밖으로 말을 내고 싶어도, 힘을내어도, 낼 수 없었다. 어렸을 때도 그랬다. 하지만 고등학교 프랑스어시간에 타국언어를 배우던 중이 무심코 나왔던 낯선 언어는 그녀에게 말을 가져다 주었지만, 어느날 다시 사라졌다. 마치 그녀에겐 말이 원래 없었던 것처럼.
그런 그녀가 희랍어를 배운다.
단어하나로 모든 의미를 표현할 수 있는 지금은 쓰지않는. 고어를.

왜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와 말을 잃어버린 여자였을까.
독일에서 한국인으로, 아버지의 병으로 힘들게 살았던 이의 아픔과 아이를 잃고 모든 것을 내려놓아버린 여자의 힘듦. 그것의 표출이였을까. 각자의 아픔을 느끼고, 낯설고 어렵지만 가까스로 맞닿은 두 사람의 희망을 보고 있는 걸까.
각자의 입장을 보고 있다보면, 끝없이 떨어지고 있는 마음을 보는 것 같았다. 꼭 그 여자와 남자의 심연처럼. 그러다 가까쓰로 물위로 올라와 한 숨을 한번 휴.하고 내쉴 때즘 이 소설은 끝난다.

뭘까. 이토록 힘들게 읽히는 이 소설은.
그래도 그 한번의 숨이 이토록 단 이유는.

“안경점이 
문을 열
시간이에요.” p. 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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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책 - 금서기행
김유태 지음 / 글항아리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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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책” 온통 빨간색인 표지에 까만 사진. 사진 속 남자는 어두운 곳에서 촛불 하나로 무언가를 쓰고 있는 듯한 모습.

부제에서 보여지듯 ”금서“를 읽고 있는듯? 또는 ”금서“로 지정될 만한 글을 쓰고 있는듯 해 보이는 이 책은 제목만 으로도 눈길을 확 사로 잡았다. 모름지기 인간의 심리란 하지 말라는 것을 더 하고 싶은 법인데...
근데...금서. 요즘도 금서가 있나? 싶은 생각을 하며 가볍기 읽기 시작. 진짜로..아직도 있다. 
 각 나라의 정치적, 종교적 이유로 금서로 지정되고, 심지어 작가는 자국에 돌아가지도 못한 채 망명 생활을 하기도 하고, 어떤 작가는 종교적 이유로 폭탄 테러에 칼까지 맞기도 했다니..

이 책을 읽으며 드는 생각은 ”불편함“이다. 
책의 내용이 불편하다는 것이 아니라, 불편함을 받아들이지 못한 결과가 만들어낸 것 중 하나가 금서라는 것.
체제. 정치적 이유 등으로 인해 금서로 정해지고, 시대에 따라 그 책은 금서이기도하고 권장도서이기도 했다. 말 그대로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라는 것.
그런 행위는 체제 정치적 사유 뿐 아니라 종교적 이유도 있다. 이슬람 뿐아니라 기독교에서도 비슷하다는 점.

문학은 결국 인간 삶의 전반을 닮고 있다. 작가의 의도가 불편함을 만들어낸다면, 생각해봐야 할 것은 그 내용이 우리가 눈감고 있는 무엇은 아닌지를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눈감고 귀 막는다 한들 그 불편함이 사라질까..? 그리고 묻어버린 채 지나가는 무엇은 어쩌면 우리 삶에 결국 더 큰 사태로 돌아올 수 있다.
아마도 그래서 저자가 조지오웰의 <1984>를 가장 마지막에 두었는지도 모르겠다. 40년전 의 소설이 아직도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이유에 대해.

”하지만 이 책이 우리에게 건낸  주제의식은 여전히 유효하며, 미래에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좌우 이데올로기를 떠나 개인과 사회는 영원히 길항하기 마련이며 이는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개인이 당면하는 문제니까요. 오웰의 소설은 바로 이 위기의 징후를 파악하도록 만드는, 하나의 진실한 종인 것이지요.“ p.383

 나의 예상보다 많은 금서들이 있어왔고, 여전히 유효한 책들도 상당하다. 저자가 오웰의 책을 두고 했던 말 처럼 문학은 탄광의 카나리아와 같다. 우리에게 어떤 책은 즐거움을 주지만,, 어떤 책은 위험을 알린다. 
 문학은 인간의 삶을 기반하여 만들어진 창작물이다. 그래서 더 개인적으로는 디스토피아 소설을 읽을 때 두렵다. 멀지 않은 미래일지도 몰라서. 그것이 결코 과장이라 느껴지지 않는 요소들을 우리는 현실에서 보고 있기에 더.


굿.
제목과 정 반대로, 


추천! 추천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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