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란 무엇인지 생각해 볼 때가 되었다 - 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죽음에 관한 철학
나이토 리에코 지음, 오정화 옮김 / 이사빛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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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도서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 받아 개인적으로 작성된 리뷰입니다."

가까운 이의 죽음을 지켜보며, 죽음이란 것은 대체 무엇일까라는 것을 생각해볼 계기가 있었다. 다만, 무엇인지 모르겠다는것. 죽음에는 호상이 없다는 것. 타인이 보기엔 소위 호상이라는 말이 내게는 아니라는 것 정도만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나에 대한 죽음이란. 죽음이 내게는 무얼까라는 것은 글쎄. 하루가 소중하다기보다 나는 영원히 살 것같은 마인드로 살고 있다보니..(아무 생각없이 산단 소리다.) 

궁금했다. 
죽음은 무엇일까.

저자는 철학자들이 말한 죽음에 대한 글들을 통해 죽음을 말하고 있다. 다만 철학자들의 언어이다 보니 내게는 조금 어려웠다. 이해한 바에 따르면 죽음이후의 삶을 말했던 이(결국 차원의 문제랄까, 한 세계를 접고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무엇)과 니체의 영원회귀와 같이 계속해서 반복된 무엇을 말하는 삶. 그리고 죽음은 The End다 말했던 사르트르 같은 이. 보다 복잡하고, 자신만의 철학으로 이른 결론이였지만, (단순한 나같은 이가 보기엔) 죽음을 이렇게 3가지로 분류하고 있는 듯했다. 
물론 죽음에 이르는 길, 그리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생각들에는 차이가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에드먼드 후설의 장송 의례와 사르트르의 죽음의 생각이 와 닿았다. (사르트르는  본인의 생각과 다른 마지막을 맞이했지만..) 
후설의 현상학에서 말하는 에포케(일시적 판단을 중지하고 체험을 통해 나타나는 자기 내면의 의식으로 상황을 살펴보는 p.124) 행위는 죽음이라는 사건을 수용할 시간을 갖는 우리의 장송 의식과 관계가 있는 것이댜. 유족으로써 가족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는 것. 고인이 없는 세계를 수용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개념인 것이다.
후설의 말이 내게 와 닿았던 것은 아마도 내가 가족의 장례식을 치르며, 사랑했던 그 이가 더 나와 함께하는 더 이상 이 공간에 함께하지 않다는 사실을 비로소야 인식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였는지도.


사르트르가 말하는 죽음은 비로소야 나의 죽음에 대해 내가 어떤 생각을 막연히 했었구나를 정리할 수 있었다. 물론 나도 죽음을 앞두고서 본인의 생각을 바꾸었다는 사르트르처럼 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죽음을 ‘끝‘이라 생각한다. 니체의 영원 회귀도, 키에르케고르처럼 더 나은 곳으로 가는 단계 정도로 생각하고 싶지 않다. 삶은 삶이고 죽음은 죽음일 뿐. 야스퍼스도 유사한 생각을 했으나 죽음에 종교적 의미 부여가 있기에 글쎄. 나는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 않다. 그저 시작이 있으니 끝이 존재한다는 것 뿐. 니체의 영원 회귀와 같은 영생(?)을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개인적으로 나는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는 철학자들의 생각에 왜?!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책에서 이 부분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긴하지만, 사실 좀 어렵고, 이 책  한권으로 그런 의미까지 설명하자면 끝이 없겠지. 말한들 이해할까 싶기도 하고,ㅎㅎ
 그저 나의 짧은 이해에 따르면 결국 그 부분은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의 삶과 연관을 갖는 것 같다. 죽음이라는 경험하지 못하는 무엇을 삶 속에서 부여되는 의미가 있어야, 인간의 마지막이 좀더 덜 비참하지 않을까..하는 그런거? 
 아니면 죽음 이후 죽음에 대한 종교적 의미 부여는 결국 우리가 지금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에 대한 목적이 되지 않을까 하는 그런....

“죽어가면서 나는 죽음을 겪지만, 결코 죽음 자체를 경험하지는 않는다.” P.166
라는 하이데거의 말이 새삼 콱 꽂힌다.
죽음을 말해야하지만, 결국은 죽음을 통해 말하는 건 늘 삶이다. 어짜피 삶이 있어야 죽음이 있으니까.

진짜 난해한 주제다. 그래서 어려웠나.. 
그래도 흥미로웠다. 죽음은 하이데거의 말처럼 경험하지 못하기에 매력적이면서 두렵고, 늘 궁금하면서, 결론은 늘 삶을 생각하게 하는 묘한 주제.

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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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탈로니아 찬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6
조지 오웰 지음, 정영목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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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문명이 기록된 이래 가장 평화로운 시기라고 말하는 현재 이지만, 과연 그럴까?!
이 책은 막연히 역사 책이나 뉴스에서만 알고 있는 나에게 전쟁의 민낯을 설명하는 듯했다.
전쟁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나 책을 꽤나 읽어보았지만 이 책은 그와는 사뭇 달리 전쟁이라는 현실을 알게 했다.

조지 오웰이 참전했던 스페인 내전 또는 혁명의 한가운데에 외국인으로 참전했던 그의 기록이 이 책 "카탈루니아 찬가"이다.  
왕정 국가였던 스페인이 공화정, 왕정, 그에 반대하는 노동자 세력의 반란 등등 1차 세계 대전을 거치며 스페인 내부 상황이 점점 더 복잡해지고 혼란스러워진다. 결국 파시스트와 반파시스트의 대결이 분명해지던 시기 오웰이 반파시스트로 본 전쟁에 뛰어든다. 파시스트 세력의 등장은 당시 발생했던 노동 혁명을 잠시 주춤하게 만들며, 반파시스트로 연합이 탄생하게 된다. 하지만 그들 내부는 각기 다른 이념 논쟁, 무엇이 선이고 후인지 등으로 계속 시끄러운 상태.

전쟁은 현실이다. 정의를 위해 뛰어들었지만, 그런 생각이나 판단을 하기보다는 그저 하루를 버텨내며 생존해야 하는 상황.

적과의 대치 상황 속에서도 수 십년 전 모델로 동작 여부 조차 알 수 없는 수류탄과 제대로 동작하는 지조차 의문인 총, 한없이 모자란 총알에 내 목숨이 달려있다. 그렇기에 극한의 대치 상황 속에서도 상대가 그저 물러나주기를 바라는 수밖에.
수 개월 동안 제대로 된 목욕은 어불성설.  썩어가는 냄새가 풍기는 옷을 입고도  하루 한끼조차 제대로 먹을 수도 없다. 먹을 물도 부족하고, 온몸에는 이가 들끓는다.
막상 국지전이 펼쳐지면 아군인지 적군인지 조차 알 수 없어 그저 총질 할 뿐. 오웰 역시 같은 편이 쏜 총알에 얼굴을 다쳤다. 그런 와중 불발 될지도 모르는 수류탄을 던지면서도 상대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게 만든다.

반파시스트라는 같은 목표 아래 함께 했지만, 결국은 내부 분열로 이어져 분명 같은 편이였던 이들에게 박해를 당하는 상황까지 이어지는 이 책을 읽으며 우리에게 이념이란 정의란 무엇인지도 생각하게 했다. 
결국 조지 오웰은 그런 상황을 피해 영국으로 피신했지만, 그렇지 못했던 많은 이들이 놓인 현실은 얼마나 처참했을까.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우리의 현대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이라는 적을 두고 싸웠던 이들이 해방 이후 각자의 이념 논쟁 속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겨눴던 총구. 6.25 기간 동안 함락하고, 함락 당하는 아노미상태 속에 놓였던 일반 시민들의 혼란이 왜 오버랩이 되는 것인지.


나의 주장, 나의 의견을 상대를 설득하지 못해 강요에서 폭압이 되었을 때, 그 반대를 위해 시작된 것이 전쟁이라면, 전쟁을 끝내고도 우리는 결국 누군가를 설득하지도, 설득 되지도 못했다. 수십만이 죽고도 으르렁대며 싸울 준비를 늘 하고 있고, 그 사이 어디쯤에서 일반 시민들은 한없는 피해자로 남을 뿐이다. 그럼 정치는 무얼까..

예술이 정치적이면 안된다던 사람들에게 조지 오웰은 모든 글은 정치적이라고 했다지만, 나는 이 책이 오웰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라는 생각을 했다. 너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너는 어떻게 할 것이냐고, 그리고 극한의 현실 속에서도 너는 흔들리지 않는 너의 신념이란 것을 지켜낼 수 있는지? 아니면, 너는 너의 생각이 옳지 않을 수도 있다는 비판적 사고를 하고는 있는 것인지...냐고 말이다.


전쟁 전, 전쟁 그자체, 전쟁 이후.

가볍게 묘사된 장면도 있지만, 그 참상 자체는 너무나 현실적으로 쓰여진 민낯.
물리적 전쟁은 끝났지만, 결국은 해결되지 않은 많은 이들의 이념 논쟁이 가져온 또 다른 내전.

지금은 진짜 평화로운 나날들일까?


"이 무렵 내가 만난 모두가 목에 관통상을 입고도 살아남은 사람은 지상에서 가장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이야기했지만, 나는 선뜻 그 말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아예 총을 맞지 않아더라면 더 큰 행운이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p.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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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비즈니스 트렌드 2026 - 미리 보는 AI 트렌드 리포트
이소영.이예림.업폴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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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도서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 받아 개인적인 감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AI. 
2022년 말 혜성같이 등장한 ChatGPT를 시작으로 IT 기술 트렌드를 순식간에 바꿔놓은 매직이다.  이제는 IT뿐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에서 대체 불가 기술이면서, 10년 후의 미래가 어떨지 그려지지가 않는다. AI가 어디까지 어떻게 뻗어나갈지가 가늠이 되지 않아서.

 최근에 나온 영화 “중간계”의 감독이 CG가 아니라 AI를 이용하여 영화를 만들었는데, 영화를 찍는 7개월 동안에 AI의 발전이 어마어마했었다고 한다. 영화 시작에는 한방향에서 밖에 만들수 없었던 영화 화면이 사람의 전체가 3D로 표현되며 카메라 무빙이 실제로 그렇게 일어나는 것과 같이 바뀌는데 불과 2-3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영화가 중간중간 바뀌어 갔다고. 실제 CG를 이용했다면 가격, 시간 등을 절대 맞출 수 없었지만, AI여서 가능했다는 말에 진짜 이 기술이 인간을 대체할 타이밍이 턱밑까지 왔다는 점을 실감했다.


이 책은 각 분야 별로 대표되는 AI 기술이 무엇이고, 현재 어디까지 기술이 진행되었고, 미래에 어디까지 커버가능한지를 설명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에 Only 인간으로만 할 수 있는 것들은 무엇일지를 조심스럽게 설명하고 있다.


내가 이 책을 보며 가장 많이 놀랐던 점은 현재의 발전 정도라기 보다, 2022년 이후 현재의 기술 발전 정도의 양상은 2026년을 감히 상상하기 힘들 정도라는 점이다. 책에서는 AI는 현재 인간의 요청 처리를 빠르고 정확하게 할 수는 있으나 인간의 INPUT 즉 요구 사항이 없다면 무용 지물이라하지만 2026년의 AI는 나도 모르는 나의 필요를 찾아내는 AI시대이지 않을까. 싶은 두려움이 일기도 했다. 그리고 젠슨 황이 말했든 ‘피지컬 AI’ 시대 즉 AI의 두뇌를 가진 로봇의 시대가 곧 이지 않을까. 영화 바이센테니얼맨의 가정부 로봇이 상용화 된 시대가 100년후는 아닐 것이라는 점이다. 아마도 곧. 이지 않을까..?!

컴퓨터에서 휴대폰으로,  클라우드나 웹에서 동작하는 것이 아니라 온디바이스로 옮겨온 AI는 어느 순간 우리와 공존하기 시작했다. ChatGPT가 등장한지 2년만에 대중화를 마쳤고, 각 분야별로 특징을 드러내기 시작한 생성형 AI는 빠르게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격차를 드러내고 있다. 가장 늦게 일자리의 변화를 일으킬 것 같았던 IT개발분야의 일자리가 빠르게 소멸되고 있고, 대부분의 기업에서 신입을 더 이상 고용하지 않는다. AI가 그들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성형 AI를 잘다루는 직원 1명이 여러명의 역할을 대신 할 수 있는 시대인것. 
 그렇기에 실제 AI기술을 이끌어가는 0.001%의 인재의 몸값은 감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이다. 미국, 중국은 이미 개인은 물론 국가 주도로 인재 양성에 나섰고, AI시장에서 가장 빠르게 치고 나가는 쪽이 중국이라 하니, 우리는 뭐하고 있나..싶은 아쉬움이 앞서는 부분이기도 했다. 

 AI기술은 1인 유니콘 기업을 만들기도 하고, 시장의 니즈를 빠르게 캐치하는 기획자가 IT 기술자 없이 AI를 이용한 아웃풋을 만들어내는 시대가 현재다. 
이야. 진짜 피지컬AI는 먼 미래가 아니라 근 미래일 것이라는 젠슨 황의 말이 새삼스럽다.

저자는 그럼에도 기술이 절대 대체할 수 없는 것은 인간의 경험일 것이다. 사고 싶은 물건을 미리 나의 삶에 시뮬레이션 해보는 기술이 있을지라도, 내가 가고 싶은 여행지를 가본 것 같은 생생하게 전달하는 증강현실이 있을지라도, 내가 직접 그곳에서 먹고, 보고, 만지며 경험하는 경험에 대한 즐거움은 아직은 기술이 대체할 수 없을 것이라 말한다. 
 근데 나는 왜 이것도 가능해지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드는 걸까. 방법은 모르겠지만. ㅠ 
뇌를 속이는 나노기술. 뭐 이런거면 가능하지 않을까. 
 거기까지 미치는 생각이 두렵네. 이런 생각들을 하다보면 나는 왜 꼭 디스토피아의 세상으로 가게되는 것인지.ㅋ

뭐 아무튼 미래는 모르겠지만, 현재의 기술이 어디까지 와있고, 내가 그것으로 무엇을 해볼 수 있는지, 내가 일하는 분야에서 좀더 나은 AI는 엇이 있을지를 알고 빠르게 이용해 봐야 하는 지금 읽어보면 좋은 책이다!
 2026년을 맞이하는 지금 나의 경력 증진을 위해 무엇을 해볼 수 있을지를 시뮬레이션 해볼 수 있는 책.(근데 이 책이 이미 출간된 지금, 더 나은 AI가 나오고 있을지도.)

흥미롭고,
재밌지만,
뭘 해야 하지..를 고민하게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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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소리 수확자 시리즈 3
닐 셔스터먼 지음, 이수현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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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확자의 마지막 편. 종소리.
미래의 어느시점. 죽음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과학으로 증명되고 기술로 모든 것이 제어 가능한 시대. 나는 책 속의 시대가 유발 하라리가 말한 인간이 호모데우스가 된 시점인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완전한 존재를 위해 계속 발전한 인류가 결국은 그 끝에서 다시 불완전함을 선택하는 스토리라니....
사망 후 시대라고 불리는 현재에  죽음으로 생을 제어하기 위해  수확자는 지위가 존재하고, 죽음을 제외한 모든 것은 AI인 선더헤드로 가능한 시대.

모든 것이 완전해보이는 그 시대에도 늘 변수는 인간이였다.
수확자라는 존재. 인간의 생을 관장하는 절대 권력의 끝은 결국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라는 증명의 근거가 되어버린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그런 불완전한 세상 속에서 완벽함으로 상징되는 AI 선더헤드는 어쩌면 자신이 선택한 인간 그레이스를 통해 완전한 자신을 벗어나 불완전한 인간의 감정과 물성을 추구한다.

 고더드가 트리거가 되어버린 수확시스템의 대량학살의 폭주를 막기 위해 선대의 수확자들이 만들어 놓았을지도 모를 무엇을 찾기위해 간 무인도에 간 무니라와 페러데이. 
 하지만 그곳에서 페러데이는 오랜 지인 퀴리와 자신의 두 제자 아나스타샤, 로언의 사망 소식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은둔을 택한다.

하지만 고더드에 의한 인듀라의 침몰 속에서도 퀴리의 희생에 의해 살아난 아나스타샤와 로언은 서로 다른 길을 걷는다. 
아나스타샤는 폭주하는 고더드를 막기위한 노력을. 
로언은 고더드에게서 탈출해 아나스타샤를 찾기 위한 노력을.
선더헤드의 선택을 받은 그레이슨은 수확자로 인해 폭주하는 음파교의 안정을 찾기위한 노력을. 
하지만 그 누구의 노력도 무엇 하나 쉽지 않다.

스스로의 완벽히 제어할 수 있다고 믿었던 수확 시스템은 고더드로 인해 붕괴된듯 보이지만, 어쩌면 견줄 것 없었던 절대 권력의 마지막은 예견되었던 미래였는지도 모르겠다. 수확 시스템에는 결코 개입하지 않는다는 절대 원칙을 가진 선더헤드도 그들의 폭주를 막지 못했다. 고더드와 그를 추종하는 세력의 최종 광기는 마치 1900년대의 히틀러와 나치 세력을 보는 것 같았다. 

어쩌면 신을 필요로 하지 않을 정도로 완전해진 인간은 죽음을 제어하기 위해 인간을 선택했고, 그 선택된 인간은 스스로 신이 되고자 한다. 이 같은 인간의 본성은 결국 인간이 신이 되었던 완전한 세상 속에서도 인간은 결국 신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그 자체 였던 걸까.

고더드의 보조 수확자로써 곁에 있던 자들조차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면서도 "아니요"라 대답하지 못한다.
아나스타샤는 고더드와 그 시스템이 만들어낸 현재의 결과의 원인을 선더헤드의 후뇌에서 찾아내 방송을 하지만, 고더드의 집요한 추적으로 계속해서 도망쳐야 하는 신세이고,
음파교를 통제하려 했던 그레이슨은 음파교내부와 그를 수확하려는 수확자들의  위협에 시달리는 신세다.
아. 왜 옳은 선택은 늘 이렇게 힘든 것일까?.

수확자도, 선더헤드도, 종소리도.
이 각 시리즈의 제목은 믿었던 절대자들이면서 어쩌면 현재의 신이였지만,  그들 스스로 다시  불완전한 인간으로 돌아오는 현재를 만들어내는 선택을 한다. 이것은 후퇴일까 진전일까.
어쩌면 이 선택은 보기에는 후퇴이지만, 나를 제대로 인식한다는 측면에서는 어쩌면 반발쯤은 앞선 전진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여기서 가장 흥미로웠던 선택은 선더헤드가 제리를 통해 그레이스에게 했던 행위 역시, 완전한 선더헤드조차 인간을 선망 아니 어쩌면 욕망하는 스스로에 대한 각성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이것은 선더헤드에게 반발 쯤 내딛은 무엇인 걸까? 

흥미로운 책이다.
죽음에 대해 말하는 줄 알았는데, 인간을 말하고 있었다.
우리는 완전한 존재가 될 수 있을까.
완전한 존재가 된 그 시대는 유토피아 일까. 디스토피아 일까. 왜 이 결말에 이르러서는 디스토피아를 그린 오랜 고전이 생각나는 걸까. 그저 우리는 완전함을 추구하는 불완전한 존재로써가 가장 안전한 인간의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는 방법인지도.

재밌다.

"로언이 그동안 배운 게 하나 있다면, 변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는 사실이었다. 이상은 약해지고, 미덕은 흐려졌으며, 곧게 뻗은 길이라고 해도 어두운 우회로는 있는 법이었다." p.5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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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한강을 읽는 한 해 (주제 2 : 인간 삶의 연약함) - 전3권 - 바람이 분다, 가라 + 채식주의자 (리마스터판) + 내 여자의 열매,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을 읽는 한 해 2
한강 지음 / 알라딘 이벤트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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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작가님의 단편모음 집. 개인적으로는 작가님이 장편소설을 좀 더 선호한다. 내가 읽었던 단편소설집은 “채식주의자” 이후 두번재 인데, 단편들의 내용이 내게는 좀 어려웠다.(채식주의자를 이해하지 못한 일인..)

나는 이 책중 “흰 꽃”이 가장 고통스러웠다. 4.3사건을 말하는 부분에서 “생빈눌”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죽고나서 매장의 좋은 택일을 받지 못한 이를 택일이 될때까지 매장하지 못하고, 땅 위에 두는 것을 말한다. 죽고서도 묻히지 못하는 기간은 어쩌면 살아있는 이의 욕심인 걸까. 왜 이 단어가 이 소설에서는 제주 4.3과 엮인 것일까. 한강작가님은 제주 4.3을 사삼이라는 단어로 말한다. 마치 책을 꼼꼼히 읽지 않는다면 그저 아들을 묻지 못한 어머니의 어떤 일이 되어버린 것 같이. 나에게 사삼이라는 단어가 왜 이리 생경했을까.
“생빈눌” 아들을 묻지 못한 어머니의 한. 아들의 죽음의 냄새를 맡고도 아들을 애도하지 못한 그 어머니의 감정을 어찌 감히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또다른 단편인 “어느날 그는“는 이 단편들 중 가장 감정의 흐름을 따라가기가 어려웠다고 해야하나.. 감정의 고조의 차이가 너무 커 힘들어다고 해야하나...  이 책의 단편들 중 감정의 흐름 폭이 가장 컸던 작품인거 같다. 다른 작품들은 어느 정도의 절제된 감정안에서 슬픔, 고통, 안도, 위로 등이 느껴졌다면, ”어느날 그는“는 사랑이라는 감정의 흐름에 너무나도 솔직한 여자와 사랑이라는 감정에 너무나 심취해버린 남자가 그 끝을 향했을 때, 그리고 그 끝의 이휴까지를 한번에 후루루루룩 지나갔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이 단편이 한강작가님 소설 중 가장 낯선 느낌이였다.

표제작인 “내여자의 열매”와 “아기 부처”는 다소 수동적이였던 아내들이 자신을 자각하면서 변모해가는 모습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떤 선반 위의 장식물 같은 느낌과 같은 주인공이 어느날 식물이 되었다. 그리고 나서야 남편은 강렬하게 아내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아내에게 최선을 다한다. 식물이란 가장 정적인 생물임에도 인간이였던 아내가 마치 장식품 같고, 가장 강렬한 사랑을 가장 정적인 생물이 되어버린 아내에게 쏟는 남편의 모습은 너무나 생경하다. 아내는 가장 능동적인 사랑을 하게된 것일까? 아니면 정 반대의 모습으로 드디어 자신을 찾게된 것일까. 정말 묘하다.
“아기부처”는 타인이 보기에 완벽한 남편의 내밀함을 알고 있는 여자는 그 내밀함으로 남편과 결혼했지만, 그 것으로 더 싫어졌다. 그렇기에 그녀는 타인의 매끈한 몸에 대한 갈망을 통해 그녀의 변한 감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어쩌면 진짜 사랑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연민으로 결혼한 여성에게 남편의 화상 자국은 자신 안에 아로새겨진 상처가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남편과 헤어지고서야 아기부처의 꿈을 꾸지 않는 여자. 왜 아기부처 였을까. 가장 순수한 모습의 꿈이 그녀에겐 왜 악몽같았던 것일까. 늦은 후회여서였을까. 아니면 빠른 후회여서 였을까.

진짜 이 책의 단편들은 묘하다. 딱 나에겐 그랬다. 생각할수록 오묘했고, 생각할 수록 뭐지..? 싶은 의문을 낳았다. 뭐랄까 누군가의 감정을 읽고 있음에도 어떤 빈 공간이 느껴졌달까.. 그러면서도 어떤 문장은 뼈때리는 듯 훅을 날리는 느낌이였고, 또 다른 글은 아픈 현실이지만 그럼에도 어쩌겠니 라는 체념을 말하는듯 하면서도, 또다시 그렇기에 뚫고 나아가야 함을 나지막히 말하고 있는 듯도 했다.

흥미로운 책.
각 단편이 결고 가볍지 않은 책.

‘선생님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네 마음속에 살아있잖니“라고 대답했다. 그말은 옳지 않았다. 그의 마음에 있는 윤이의 얼굴은 만져볼 수 없었고 결코 살아있지도 않았다’ p.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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