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랍어 시간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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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작가님의 책은 늘.. 묘하다. 굉장히 몽환적이랄까. 이전에 읽었던 <작별하지 않는다>도 어느순간 생과 사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몽환적인 느낌을 받았는데, 희랍어 시간은 생과 사의 경계는 아니지만 책속의 남자와 여자가 서로 얽혀있는듯, 아닌듯한 느낌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이 책은 사랑이야기가 아니다. 한남자와 한여자가 만나는 이야기?랄까? 정말 만남이라는 것에 방점을 찍고 있다. 뭐지? 얇은 장편소설이지만 눈을 뗄 수 없는. 내가 지금 보고 있는 이는 누구일까. 누구의 심연속일까하는 생각을 계속해서 하게하는..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와 말을 잃어버린 여자. 고대 희랍어에 대한 수업 시간에 만난 강사와 제자. 
남자는 어렸을 적 독일로 가 그곳에서 자랐지만 “모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강사로 희랍어를 가르친다. 아버지의 병을 유전으로 받아 점점 시력을 잃어가지만, 아직은 누구에게도 들키진 않았다.
여자는 어느날 부터인가 말을 할 수 없었다. 입밖으로 말을 내고 싶어도, 힘을내어도, 낼 수 없었다. 어렸을 때도 그랬다. 하지만 고등학교 프랑스어시간에 타국언어를 배우던 중이 무심코 나왔던 낯선 언어는 그녀에게 말을 가져다 주었지만, 어느날 다시 사라졌다. 마치 그녀에겐 말이 원래 없었던 것처럼.
그런 그녀가 희랍어를 배운다.
단어하나로 모든 의미를 표현할 수 있는 지금은 쓰지않는. 고어를.

왜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와 말을 잃어버린 여자였을까.
독일에서 한국인으로, 아버지의 병으로 힘들게 살았던 이의 아픔과 아이를 잃고 모든 것을 내려놓아버린 여자의 힘듦. 그것의 표출이였을까. 각자의 아픔을 느끼고, 낯설고 어렵지만 가까스로 맞닿은 두 사람의 희망을 보고 있는 걸까.
각자의 입장을 보고 있다보면, 끝없이 떨어지고 있는 마음을 보는 것 같았다. 꼭 그 여자와 남자의 심연처럼. 그러다 가까쓰로 물위로 올라와 한 숨을 한번 휴.하고 내쉴 때즘 이 소설은 끝난다.

뭘까. 이토록 힘들게 읽히는 이 소설은.
그래도 그 한번의 숨이 이토록 단 이유는.

“안경점이 
문을 열
시간이에요.” p. 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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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책 - 금서기행
김유태 지음 / 글항아리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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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책” 온통 빨간색인 표지에 까만 사진. 사진 속 남자는 어두운 곳에서 촛불 하나로 무언가를 쓰고 있는 듯한 모습.

부제에서 보여지듯 ”금서“를 읽고 있는듯? 또는 ”금서“로 지정될 만한 글을 쓰고 있는듯 해 보이는 이 책은 제목만 으로도 눈길을 확 사로 잡았다. 모름지기 인간의 심리란 하지 말라는 것을 더 하고 싶은 법인데...
근데...금서. 요즘도 금서가 있나? 싶은 생각을 하며 가볍기 읽기 시작. 진짜로..아직도 있다. 
 각 나라의 정치적, 종교적 이유로 금서로 지정되고, 심지어 작가는 자국에 돌아가지도 못한 채 망명 생활을 하기도 하고, 어떤 작가는 종교적 이유로 폭탄 테러에 칼까지 맞기도 했다니..

이 책을 읽으며 드는 생각은 ”불편함“이다. 
책의 내용이 불편하다는 것이 아니라, 불편함을 받아들이지 못한 결과가 만들어낸 것 중 하나가 금서라는 것.
체제. 정치적 이유 등으로 인해 금서로 정해지고, 시대에 따라 그 책은 금서이기도하고 권장도서이기도 했다. 말 그대로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라는 것.
그런 행위는 체제 정치적 사유 뿐 아니라 종교적 이유도 있다. 이슬람 뿐아니라 기독교에서도 비슷하다는 점.

문학은 결국 인간 삶의 전반을 닮고 있다. 작가의 의도가 불편함을 만들어낸다면, 생각해봐야 할 것은 그 내용이 우리가 눈감고 있는 무엇은 아닌지를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눈감고 귀 막는다 한들 그 불편함이 사라질까..? 그리고 묻어버린 채 지나가는 무엇은 어쩌면 우리 삶에 결국 더 큰 사태로 돌아올 수 있다.
아마도 그래서 저자가 조지오웰의 <1984>를 가장 마지막에 두었는지도 모르겠다. 40년전 의 소설이 아직도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이유에 대해.

”하지만 이 책이 우리에게 건낸  주제의식은 여전히 유효하며, 미래에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좌우 이데올로기를 떠나 개인과 사회는 영원히 길항하기 마련이며 이는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개인이 당면하는 문제니까요. 오웰의 소설은 바로 이 위기의 징후를 파악하도록 만드는, 하나의 진실한 종인 것이지요.“ p.383

 나의 예상보다 많은 금서들이 있어왔고, 여전히 유효한 책들도 상당하다. 저자가 오웰의 책을 두고 했던 말 처럼 문학은 탄광의 카나리아와 같다. 우리에게 어떤 책은 즐거움을 주지만,, 어떤 책은 위험을 알린다. 
 문학은 인간의 삶을 기반하여 만들어진 창작물이다. 그래서 더 개인적으로는 디스토피아 소설을 읽을 때 두렵다. 멀지 않은 미래일지도 몰라서. 그것이 결코 과장이라 느껴지지 않는 요소들을 우리는 현실에서 보고 있기에 더.


굿.
제목과 정 반대로, 


추천! 추천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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맡겨진 소녀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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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어 키건. 2024년을 달궜던 작가 중 한분. “맡겨진 소녀”나는 이 제목을 보고, 정 반대로 생각했다. 

넉넉하지 못한 집안 형편과 어머니의 5째 출산을 두고 먼 친척에 맡겨진 나. 낯선 곳에 아빠는 나를 두고 떠났다. 킨셀라 부부는 ‘나‘를 꽤나 반가운듯 맞이하지도, 그렇다고 귀찮은듯 맞이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첫날. 나는 실수를 했다. 하지만 아주머니는 아저씨에게 습한 방에 재워 아이의 매트리스가 젖었다고 하며 모른척 한다. 
그리고 따뜻한 밥을 먹이고, 예의를 가르치고, 나의 손을 잡아주고, 내가 뛰는 것을 보며 칭찬해준다. 책을 읽어주고, 나와 함께 옷을 사러가는 여름을 보내던 중, ’나’는 아주머니, 아저씨가 아들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그날 밤 아저씨는 나의 손을 잡고 해변으로 산책을 갔고, 나는 아빠가 아저씨같이 나의 손을 잡아준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아저씨는 내게 ‘말하지 않아야 할 것을 하지 않는 아이’라는 칭찬을 해주고, 나는 알게된다.

’맡겨진 아이‘ 라는 제목의 대상은 어디일까. 킨셀라 부부의 집에 맡겨진 아이일까. 아니면 나의 집에 맡겨진 아이일까. 정서적으로도 물질적으로도 아이를 돌보지 않는 나의 부모와 나의 부모는 아니지만 부모보다 더 아이과 교감하는 킨셀라 부부.
그리고 마지막에 “아빠”라 불렀던 나의 말은 누구를 향하고 있을까를 생각해보면 단연코 나는 후자다.

이토록 짧은 여름의 시간속에 좋은 어른과의 교감에 어색해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체득하여 성장하는 어린아이의 이야기가 깊은 감동을 주는 것은 작가의 담백한 글이 보여주는 묘미인것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2024년에 단연코 핫했던 작가였던 것일까.
묘하게 빨간머리앤을 떠올리게 하는 이 소설은 “맡겨진 소녀”라는 제목 뒤에 있는 옅은 슬픔을 책의 표지에 있는 문구처럼 “찬란한 여름”으로 바꿔준다. 다만, 끝에서 다시 보여지는 슬픔이 있지만.

추천.

“바로 그때 아저씨가 두팔로 나를 감싸더니 내가 아저씨 딸이라도 되는 것처럼 꼭 끌어안는다”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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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각사 (무선) 웅진지식하우스 일문학선집 시리즈 3
미시마 유키오 지음, 허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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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 작가님의 팟케스트를 통해 알게된 책. 김영하 작가님은 이 책의 일부분만을 읽어주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와닿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궁금했다. 탐미주의가 뭘까… 싶어서…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은 너무나 묘하다.

주인공 미조구치. 태어났을 때무터 말을 더듬었고, 추남이다. 아버지는 스님이다. 그래서인지 열등감에 사로잡혀있다. 그런 그가 처음으로 마음에 품었던 우이코. 그녀가 새벽에 일찍 등교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녀 앞에 나타나 마음을 표현하려했으나 대차게 말그대로 차인다. 그리고 그녀의 죽음. 그래서 일까.. 그는 이후 만나는 모든 여자를 우이코와 동일시한다.
컴플렉스 덩어리인 그가 유일하게 집착하는 것이 있다. 금각. 아버지로부터 금각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순간부터 그는 모든 미의 중심을 금각으로 인식한다.
실제 아버지가 녹원사(금각사)에 대려가 금각을 보여주었지만, 사실 그는 처음 금각을 보고는 실망한다. 자신이 상상했던 그것이 아니였으니까.
그리고 그곳의 도제가된다.

그는 그곳에서 쓰루가와와 가시와기를 만난다.
두 사람은 정 반대의 위치에 서있다. 한쪽은 미조구치에게 삧이고 한쪽은 어둠이다.
열등감과 컴플렉스에 사로잡힌 미조구치가 만나는 여자는 우이코와 금각이다.
“미“를 절대적인 가치에 두는 미조구치.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수레바퀴 밑에서“가 생각이났다. 10대 후반 20대 초반의 나이를 두고 뭔가 그들의 의식의 흐름속에서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느낌이들어서.
혼란스러우면서 생각의 흐름이 극단으로 치닫는 느낌이라.
수레바퀴 밑에서의 절대적 가치는 그의 동생이였던것 같고, 이 책에서는 그것이 금각이다.
하지만, 금각사의 미조구치는 자신의 벗어날수 없는 열등감으로 가득찼던 그의 삶을 자신에게 가장 가치있는 인식으로 여겼던 금각을 불태움으로서  자신의 열등감으로부터 벗어나려한다.왜....였을까.

10,20대의 가장 혼란스러웠던 내면의 상황과 2차세계대전 직후부터 한국전쟁 발발 전까지 폐전국가이자 인접국가에서 일어난 전쟁의 여파로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던 일본의 상황은  당신의 젊은이들들을 파멸로밖에 이끌 수 없었던 것일까.

책에서 보이는 미조구치의 생각의 흐름과 가시와기의 어둠에 대한 대화를 읽다보면 인간이 가진 가장 내면의 들키고싶지 않은 무언가를 건드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뭐지. 이 책의 묘함은.

개인적으로는 책을 읽고 난 후의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묘함도 있지만, 그보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을 쓴 작가의 결말은 꽤나 충격이였다. 작가 자신의 결말은...주인공 미조구치의 결말이였을까.  아니면 어둠의 가시와기의 결말이였을까.

”거울을 보지 않으면 자신이 보이지 않는다고 사람들은 생각하겠지만, 불구라는 사실은 언제나 눈앞에 놓여 있는 거울이야. 그 거울에 종일 내 전신이 비치고 있지. 망각은 불가능해. 그러니까 나에게는 세상에서 말하는 불안 따위는 어린애 장난처럼 보일 뿐이지. 불안은 없어.” p.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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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둘 수는 없습니다 - 조영래변호사 남긴 글 모음
조영래 지음, 조영래변호사를 추모하는 모임 엮음 / 창비 / 199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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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분이 누구인지 몰랐다. 최근까지. SBS의 모 프로그램을 통해 이분의 성함을 처음 들었고, 자신이 알지도 못했더 이의 평전을 쓰신분이라는 말에 이 책을 찾았다. 그리고는 이분을 추모하는 모임에서 엮은 이 분의 글과 그를 사랑했던 이들의 글이 쓰여진 책을 읽었다.

“조영래”

창비에서 출간된 이 책은 초판이 그대로 유지된 채 현재까지 이어졌다. 그래서인지 궁서체로 쓰여졌고(진짜 오랜만..),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에 주로 쓰여진 글이다보니 글 속에 한자가 섞여있었다.
문득 어렸을 적 부모님이 보시던 신문이 생각났다. 순 한자로 가득해 대제목도 읽기 힘들었던 그때가.

처음의 낯섬도 잠시.. 그저 놀라웠다. 한 사람이 이런 굵직한 사건들에 모두 임해왔단 말인가. 싶어서. 
 지금은 당연하지만 당시로써는 당연하지 않았던 여성정년이 25살이 아니라, 남성과 같은 정년이라는 사실을 법적으로 증명해 낸 재판.
 부천서 성고문사건으로 유명한 문귀동을 재판장에 세워 처벌받게했던 재판.
누구도 선뜻 나설수 없었던 망원동 수해소송이 천재나 인재냐를 두고 열린 재판에서 인재임을 밝혀낸 변호사. 
 강자의 편에서 전문가들이 증언을 꺼릴 때 스스로 수년간 공부하고 연구하여 증명해낸 이 사건은 당시 법조인들 모두 조영래이기에 가능했다라고 말할정도 였다고 한다.

어느 사건에서든 늘 약자의 편에 있었던 분.
 이분이 찾아가 도움을 주었던 분들이 오히려 조변호사의 생계를 걱정할 정도였으니 말 다했지...
 서울대 법대를 수석으로 입학했지만 민청학련사건으로 7년간 도피생활을 하면서도 끝내 소신을 버리지 않고, 자신이 옳다고 믿는 신념 그대로 살았던 인물이다.
그래서 이분의 짧은 생에 안타까움만 남았다.

 이 책을 읽으며 좀 당황스러웠던 점은 80년대 쓰여진 글임에도 이 글이 결코 오래된 글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대가 바뀌었음에도 말이다. 
 대통령의 비상계엄이 어떻게 한정지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글(아마도 이 글은 지금이 아니라면 크게 와닿지 않았겠지만, 지금이기에 더 내겐 더 크게 보였다.) 그리고 근로기준법에 대한 글을 읽으며 분명 40여년 전의 글이 왜 아직도 유효하게 느껴질까.

“개를 침묵시킴으로써 유지되는 ‘질서‘ ?? 그것은 민주주의가 원하는 질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정반대이다. 부당하게 걷어차인 개는 마땅히 시끄럽게 짖어대야 하고 그같은 소란을 통하여 신사와 개 사이의 올바른 관계가 회복되어가는 바로 그것이 민주주의가 바라는 역동적인 질서 ?- 즉 ’민주적 기본질서’이다. ” p.96

책 제목은 이 분이 “성고문 사건의 반론 요지”에 쓰인 글의 일부다. 이런 분들이 있었기에 야만의 시대라 불리는 7,80년대를 버텨내어, 지금의 우리가 있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한강작가님의 
“죽은 사람이 산자를 도울 수 있는가.”라는 말이 깊이 와닿았다.
오래 사셨다면 우리가 좋은 어른을 만나 뵐 수 있었을텐데...


강력 추천.
진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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