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44
차오위 지음, 오수경 옮김 / 민음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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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황후화를 보면서 영상미에 놀랐고, 말 그대로 막장 스토리에 놀랐었다. 그 화려한 영상 속에 흐르는 얽히고 섥힌  가족사. 그 영화의 원작 소설이 뇌우.
사실 소설은 아니고 희곡이다. 희곡을 읽기 어려워하는 분들을 위해 먼저 말하자면 이 책은 잘~ 읽힌다.(나도 어려워하는 사람 중 하나라..)
할아버지 한분이 아내를 찾아온 요양원을 배경으로 과거로 흐르는 이야기.

조우 씨와 루씨 집의 이야기. 조우 집안은 대대로 유지로 광산을 가진 부잣집이고, 루 집안은 가난하여, 조우 가에서 허드렛일을 하고 있다. 루구이는 조우 가의 일을 하며 도박과 술을 즐기는 난봉꾼. 그런 루구이의 딸 루쓰펑은 착하고 밝은 아이다. 루쓰펑은 조우핑인 조우푸위안의 첫째 아들과 사귀는 사이. 그런 조우핑의 동생 조우펑 또한 루쓰펑을 좋아한다. 
재밌는 점은 루구이의 첫째 아들 루다하이는 광산 노동조합의 대표로, 조우푸위안 즉 조우핑의 아버지이자 이 책에서 가장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존재에게 대항하는 인물.

이런 두 집안에 얽힌 하루의 이야기이다. 정신없이 읽고 있다 보면 아직 하루가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또 한번 놀라는 스토리.
하루 동안 루구이의 아내인 루스핑이 외지에서 일하다 돌아온 그 순간부터 이 연극은 절정을 향해 간다.
잊지 못한 과거와 그 과거에 얽힌 인물의 파멸.
그로 인해 가장 아름다웠던 인물들이 어떻게 할 수 없는 현실에 의해 한 명씩 자멸해 간다.
이 스토리의 가장 안타까운 점은 이 비극의 원인만이 남았다는 것.. 부조리한 현실만이 남은 집안에서 늙어가는 것은 형벌일까 축복일까.

제목인 뇌우는 그들이 처한 어쩔 수 없는 암흑과도 같은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그날 밤의 묘사 중 하나다.
모두가 떠나고 싶어했지만, 뇌우 속에 갖혀 버린 젊음의 감옥이 되어버린.

작가는 가장 뇌우같은 인물로 조우판이를 꼽았지만, 글쎄 살아남은 이도 죽은 이도 모두 한 때의 뇌우를 벗어날 수 없었던 현실이 슬플 뿐.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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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올리버 색스 지음, 조석현 옮김, 이정호 그림 / 알마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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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책을 TV를 통해 알았다. 몇년 전 독서 관련 프로그램에서. 신기한 제목이네. 싶었는데(그 프로그램은 보지 않았다. 책 제목만 보고 보지 않았던 기억이..) 그리고는 엄밀히 말하자면, 제목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할 수 있는가..? 라는 의문 이였던 듯.


이 책은 신경 학자인 저자가 신경학 질환을 가진 24명의 환자에 대해 기록한 책이다. 전문가이지만, 어렵지 않았고, 무엇보다 그가 환자를 대하는 태도에 많이 놀랐다. 
 해당 질환에 대하여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이라 가능했을 지도.  
 하지만, 그 조차도 어떤 알려지지 않은 질환, 특히나 신경학적 질환인지 아니면 정신의학적 질환인지 조차 명확치 않은 환자를 바라보는 그의 태도는 의사로써 바라보는 관점도 있지만, 그 전에 인간으로써 환자를 바라보는 시선이 놀라웠달까. 
 
이 책의 다양한 신경학적 질환 중 내가 가장 놀랐던 ”크리스티너‘의 질환이였다. 인간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을 잃어버릴 수 있다니.. 내가 나의 몸을 인지하지 못한다는 감각, 그로인해 삶을 아니 나 그자체를 송두리째 잃어버린 “존재 상실감”을 가진채 살아가야 하는 건 어떤 것일까.
그리고 그와 정 반대로, 이미 없는 신체에 대해 느끼는 감각 ”환각“에 대한 신경학적 질환.
두가지는 질환은 정 반대인데...이미 존재하는 나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 그리고 없는 기관에 대한 감각을 가지는 환각.
있는 몸에 대한 감각을 염증으로 잃어 “척추가 빠져나간 상태“와 없는 기관에 대한 통증을 느끼는 ”환각“
어떻게도 돌아오지 않는 감각, 어떻게도 사라지지 않는 감각.
저자는 의사로 케이스들에 대해 환자의 삶을 지켜주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고안한다. 하지만 결국 완전한 치료가 불가능한 질환들이고, 그 질환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것은 환자의 몫이다. 

‘아무도 경험 한 적이 없는 상황에 맞서 상상을 뛰어 넘는 어려움과 장애를 상대로 싸워온 그녀는 불굴의 혼을 지닌 훌륭한 인간으로 오늘날까지 살아왔다. p.101’

이 책을 읽으며 한편 나는 다름에 대해 생각했다. 누군가 나와 다르다.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그리고 그것이 이상하다가 아니라,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어떻게 달리 보이는지를 말이다.
특히 지능이 떨어지는 이들에 대해 말하는 부분에서.

“그것은 마음의 ’질’과 관계가 있다. 게다가 조금도 손상되지 않고 오히려 높아지기까지 한 마음의 ‘질‘이다. p.290”

이 한마디가 나를 얼마나 부끄럽게 했는지. 이상해서 피해야 하는 사람, 이상해서 대화가 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나보다 질 높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는 태도. 마음가짐.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마치 마음 따듯해지는 소설을 한편 읽은듯했다. 내가 알지 못했던 또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눈을 가지게 해주는.

오래도록 사람들이 찾는 책은 그 이유가 있다. 지식을 알게 해주는 것에 더해 사람이 사람을 보는 태도를 바꾸게 해주는 책.


추천!

”아무리 기묘하고 이상하게 여겨질지라도 이를 ’병적‘이라고 불러서는 안된다. 우리들에게는 그렇게 부를 권리가 없기 때문이다. p.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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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이고 싶은 아이 - 2021 아르코 문학나눔 선정 죽이고 싶은 아이 (무선) 1
이꽃님 지음 / 우리학교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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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진실과 믿음에 관한 이야기이다"라는 작가님의 글을 보고 읽기 시작했다. 청소년 소설임에도 꽤나 두려운 말 "죽이고 싶은". 

서은이가 공터에서 죽었다. 그리고 범인은 서은이의 단짝친구 주연이가 지목되었다. 둘은 분명 단짝이였는데, 어느순간 서은이를 끊임없이 괴롭히던 사람이 주연이가 되어버렸다.
아무리 '내가 안죽였어'라고 항변해도, 주연의 변호사도, 아버지도, 어머니도 아무도 믿지 않는다. 
서은은 왕따를 당해 친구가 없던 때, 주연만이 친구가 되어 주었고, 주연은 인기도 많고 공부도 잘하는 부잣집 딸이였지만 매일이 외로웠다. 그런 각자에게 서로에게 큰 위로가 되었는데..

남자친구가 생겨버린 서은에게 주연은 질투가 났다. 나만의 친구여야 했는데,,, 그리고 서은이 죽던 날 주연과 공터에서 만났다.
'미안해..'라는 서은의 말. 그것만 기억하는 주연.  주연에게 그날이 기억이 흐릿하다. 프로파일러의 질문에도, 변호사의 질문에도 주연은 대답할 수가 없다. 기억이 나질 않으니.. 그래서 더 주연은 살인자로 낙인이 찍혀버렸다. 그리고 계속해서 양산되는 카더라...에 '내가 죽였나봐요'라고 말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더 언론은 끊임없이 주연은 악마화하고, 서은은 착한 아이가 되어버렸고, 이젠 어떤 사람도 주연을 믿지 않는다.

주연의 항변,
사람들의 말말말,
책을 읽는 내내 혼란스러운 나. 누구를 믿어야할까. 제 3자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음에도, 진실은 무엇일까를 끊임없이 생각하면서도 계속해서 흔들린다. 
 진실이란 절대적인 사실임에도,,,,, 그럼에도 믿는 것에 따라 바뀌는 것에 나조차도 혼란스럽다.

이 책의 다수의 인물들이 모두 진실을 쫒지만, 누구도 완전히 객관화 된 입장에서 바라보고 있지는 않다. 그저 각자가 처한 입장과, 누군가의 말에 휘둘려서 바라볼 뿐...

 그럼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진실을 알 수 있을까.
아직은 덜 성숙한 아이들. 그런 아이들의 말에 주연과 서은을 양 극단으로 몰아가며 호도하는 언론들. 그말에 놀아나는 대중들. 나는 책을 읽는 내내 두려웠다. 누구라도 그 상황이면 '내가 죽였을 것'이라고 말하게 되지 않을까..


 진실은 절대적 사실이 아니라 믿는 사람들이 많은 쪽이 사실이 되어버린 사회. 그래서 더 자극적인 워딩 만이 살아남아 버린 극단이 한 아이를 살인자, 괴물로 만들었다.
그런데 ... 정말 사실이 밝혀진다면, 그걸 진실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난, 이 책을 보며 '아니..'라는 말이 되뇌어졌다.

그저 "죽이고 싶은 아이"만이 남은 것이지.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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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전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 아노크라시, 민주주의 국가의 위기
바버라 F. 월터 지음, 유강은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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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노크라시, 민주주의 국가의 위기” 아노크라시라는 말은독재(autocracy)와 민주주의(democracy)의 합성어로, 독재와 민주주의의 중간상태를 이르는 말이다. 우리나라에서 2024년 12월부터 지금까지 발생한 일련의 사태가 없었다면, 아마 나는 이 책에 관심이 가질 않았을 것이다. 
 외국에서만 보던 일이 우리나라 수도 서울에서 일어났기에 나는 궁금했다. 대체 왜 일까.


저자는 “내전”은 고대, 중세에는 없었던 일이라고 한다. 현대사회 들어와서야 발생한 현상이라는 것.
그런 내전에 대하여 이 책은 과거에 발생했던 사건들을 분석하여 발생하는 원인, 과정을 분석한 책이다. 책 속의 내용 중 개인적으로 내게 제일 아이러니 한 부분은 현대 사회에 있어 발생한 내전의 기반에는 민주주의가 있었다는 점.(사실상 표면적 민주주의였고, 급진적 형태로 진행될 경우 그런 현상이 더 도드라졌다.) 그리고 이런 민주주의가 아노크라시로 변환하는 그 사이에는 “선출된 지도자”들이 있었다. 히틀러와 같이 민주적 절차를 통해 선출된 권력. 그들은 쥐게 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그 나라가 민주주의를 위해 만들어 놓은 절차적 안전장치를 무시한다. 그리고 그것을 감추기 위해, 경제, 안전등의 슬로건으로 공포를 양산한다. 타자화를 통해 적을 만들고, 적들에 의한 두려움을 해결하는 유일한 자가 '나'라고 말하는 것.

“파벌화 되었다 p.60” 
그런 이들을 <종족 사업가>라 칭한다. (전문가들이 만들어낸 용어임). 그들은 파벌화를 통해 너와 나의 선을 긋고, ‘나‘가 아닌 타인을 전부 적대화한다. 르완다에서 후투족이 투치족을 <바퀴벌레>라 칭한것도 그러했고, 어쩌면 우리가 70,80년대 냉전시대 속에서 북한의 지도자를 각종 동물에 비교하며 완전한 악인을 만들어낸 것도 그러했다. 히틀러가 “우생학”을 들먹이며, 유대인을 인간 이하의 종족으로 분류한 것도 같은 맥락.
현재는 인도의 모디 총리가 그런 모습을 띄고 있고,2018년 브라질의 보우소나루가 그랬다. 그들은 종교, 인종을 이용해 인종의 단층선을 만들어냄으로써 지지자들의 강력한 결속력을 만들어냈다. 

대체 그럼 왜 시민들은 그런 이들에게 동조하며 점점 더 폭력적으로 발전하는 것일까. 저자는 “폭력적으로 바뀐 집단들이 대체로 정치 과정에서 배제된다고 느끼다는 것이다.p.92”라고 한다. 사람들은 가난이나 실업, 차별을 참을 수 있으나, 원래 ’내‘것이라고 믿는 것의 상실을 견딜 수 없다는 것. 그렇기에 21세기 가장 위험한 집단은 과거에 지배적 집단의 위치에서 현재 그렇지 못한 집단이라고 한다. 아무리 현재 차별 받아도, 힘들어도 언젠간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 그것은 곧 불확실성을 의미하지만, 그 불확실성이 확실성로 바뀌는 순간이 곧 그 집단이 폭력적으로 바뀌는 계기가 되며, 내전의 시발점이 된다고.. 결국 국가가 '나'를 챙기지 않는다는 완전한 절망감을 이용하는 집단인 것이다. 고작 말 한마디로 말이다.

그렇다면 이런 불안을 이용해 공포로 바꿔 폭력적으로 변하게 만드는 <종족 사업가>들이 과거에는 없었을까. 있었다. 하지만 말도 안되는 논리에, 의견들로 인해 그들의 말은 힘을 갖지 못했다. 그런 그들의 말이 지금은 힘을 가지고 퍼져나간다. 그들의 권력으로 향하는 꿈을 현실화 시킨 것은 ”소셜 미디어“이다. 
”소셜 미디어는 모든 종족사업가의 꿈이 실현된 공간이다. 알고리즘은 충격적인 자료를 두드러지게 내세움으로써 극단적 민족주의자들이 사람들에게 <타자>에 대한 유독한 견해를 심어주게 도와준다.“ p.156
소셜 미디어를 통해 그들의 언어는 희망이 사라진 집단에게 연료가 되어 퍼져간다. 자극적이고 폭력적인 언어로. 그리고 소셜 미디어의 알고리즘은 계속해서 듣고 싶은 말만 들을 수 있도록 돕는다. 
트럼프가 바이든에게 선거에 지고서도 수십 일동안 지지자들에게 불법 선거 운운하며 선동한 수단도 소셜 미디어였고, 그로 인해 미국 국회의사당 폭동 사건이 일어났다.

총 1~6단계, 분류와 상징화, 차별, 비인간화, 조직화. 양극화의 단계로 진행되는 내전의 양상은 정치적 양극화가 반드시 내전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실제로는 파벌화가 가장 중요한 원인인셈. 지리, 종교, 인종을 통해 파벌을 만들고, 약탈적으로 상대를 배제하고, 오로지 자신의 파벌에만 유용한 정책을 펼침으로 파벌화가 완성될 때가 내전이 시작되는 시점이다. 그리고 그들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 소셜미디어인셈.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이런 ”내전“을 막을 수 있을까.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 저자가 만족할 만한 답을 주진 않는다. 이 책 자체가 내전의 원인에 초점이 맞춰진 책이기도 하고,,
저자는 정치가 포용 정책을 펼침으로써 내 나라에서 배제되지 않고 있다는 안정감이 내전을 막을 수 있다고 말하지만, 너무 원론적인 이야기 아닐까…. 물론 내전의 가능성이 가장 높았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예를 통해 그 가능성을 말하고 있지만, 사람만이 그것을 막을 수 있다는 말도 맞지만, 반대로 이런 불안을 만들어낸 것도 사람인 셈이니까. 

책을 읽으며 가장 두려웠던 점은 우리나라는 견고한 민주주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우리도 사람에 의해 흔들렸다. 물론 사람들로 간신히 지켜내기도 했지만. 
그럼 이런 일들을 막기 위해 우리는  특정 인만 배제하면 괜찮은 것일까?! 그 질문에 “아니다”라고 답하는 책.
그래서 그럼 왜? 라고 질문을 던지며, 내가 가진 생각을 다시 되돌아보게 하는 책. 그래서 내가 앞으로는 어떻게 해?라는 질문에 생각하라고 말하는 책이다.

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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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식 존엄사 - 의사 딸이 동행한 엄마의 죽음
비류잉 지음, 채안나 옮김 / 글항아리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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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식 존엄사"라는 제목에 끌렸다. 그중에서도 존엄사 앞에 "단식"이라는 단어가.
이 책은 의사로써 저자가 자신의 어머니의 죽음을 지켜본 과정과 결국 인간 으로써의 존엄을 지키며 죽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게 한다.
개인적으로는 조 부모님과 이별하던 과정이 떠올랐다. 오로지 산 자의 입장으로만 서있었던 내가.

저자의 집안은 소뇌실조증의 유전자가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어머니 쪽이. 그 질환은 치료 약이 없고, 뇌가 기능을 잃어가며 운동 감각이 떨어지는 것을 시작으로 나중에는 음식, 호흡까지 점차적으로 전체의 운동 기능이 떨어져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어머니는 60세에 발병하셨으나, 어머니의 남동생은 이른 나이에 발병했고, 그 자식들에게 까지 이어져 온 가족이 소뇌실조증으로 사망하였다. 그 과정 중에서 자살한 이도 있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자신의 병에 대해 정확히 알고 계셨고, 오랜 기간 요가를 해오셨기에 병의 진행을 더디게 할 수 있었으나, 결국 타인의 도움이 절대적인 상태가 이르렀을 때 스스로 점차적으로 곡기를 끊으시며 돌아가시길 원했고, 충분히 자식들과의 의논을 통해 말 그대로 존엄사를 진행하셨고, 편안한 상태에서 돌아가셨다.
 이 책은 그 어머니와 아버지의 이야기를 비롯하여, 어머니가 그런 결심을 하시게 되는 과정이다.

이 책은 죽음의 관점을 가족의 입장인지, 환자 본인의 입장인지를 생각케 한다. 가족의 입장이라면 오래토록 그가 살아 계시길 원하겠지만, 당사자라면 과연 그럴까...? 그래서 나는 나의 할아버지가 생각 났다. 오랜 기간 병원에 계시다 가신 할아버지. 우리 가족은 모두 할아버지를 오래토록 살아계시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정말 최선이 였을까. 물론 그런 노력을 하지 않았다면 또 다른 후회를 하고 있겠지. 
할아버지는 무엇을 원하셨을까. 모르겠다. 어머니와 할머니의 마지막을 자주 떠올린다. 말기암으로 돌아가셨지만, 나는 늘 할머니가 더 오래사셨어야 한다는 말을 한다. 하지만 할머니의 주변 분들은 오래 아프지 않고 편히 잘 갔다는 말씀을 하실때마다 드는 서운함은..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결국 내 욕심인가 싶었다. 나의 마지막이라면 나도 저자의 어머니와 같은 선택을 할 것이고, 어쩌면 내 나라에서 그런 죽음을 허용하지 않고, 나의 가족이 반대를 한다면 나도 스위스로 갈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했으니까.
나의 마지막에서 나의 죽음을 내가 선택하는 것. (건강할 때의 자살이 아니다.) 악용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지만, 무조건 그 케이스만을 들어 '그것은 옳지않아'라고 말할 수 있을까.

 책을 읽으며 다시 한번 사회적으로 "존엄사"라는 것을 심도 깊게 논의했으면 한다. 종교적 이유로, 사회 통념상의 이유로 무조건 '아니다'라고 하기엔 우리의 마지막을 어떻게 맞이하는가도 인간으로써 존엄을 지키는 이유가 되지 않을까. 그것은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의 '질'과도 관계가 있다. 연명 장치에서 가족과의 이별을 준비할 시간마저 없는 마지막은 과연 가족과 본인에게 좋은 것일까?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에게 죽음이라는 단어가 너무나 부정적이기에 섣불리 꺼내기 힘들다는 사실이 가장 비중을 차지하는 것 같다.. 죽음에 대해 가족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 자체가 어려운.. 현실.

여전히 내 가족, 내 지인의 죽음은 슬프고 힘들다... 남은 시간이 얼마든 간에..
반대로 나의 죽음이라면...나는 무조건 적인 연명을 바라지 않는다.

이 양가적인 감정. 어떻게 해야 할까.

"강제 인공 영양 법은 최선을 다해 반드시 환자를 살리려는 의료 인의 사명감과 환자를 굶겨 죽게 내버려둘 수 없다는 가족의 죄책감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이런 관념 이면에 '사망'을 직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숨기고 있다."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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