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된 단어 - 정치적 올바름은 어떻게 우리를 침묵시키는가
르네 피스터 지음, 배명자 옮김 / 문예출판사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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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올바름은 어떻게 우리를 침묵시키는가"라는 부제가 달린 책이다. 무슨 말일까. 궁금했다. 선거가 다가오는 철일 수록 나는 정치인들의 말이 더 궁금해진다.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그들이 내뱉는 수많은 말들, 그 말 중 취사선택되어 언론을 통해 재 편집되어 또 전해지는 그 수많은 말들이.

이 책은 독일인인 저자가 현재의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해 말하고 있다. 절대 선을 추구하는 말들, 그로 인해 입을 닫은 시민들, 그에 반발하여 쏟아지는 각종 헤이트스피치에 열광하는 시민들. 이 책은 미국의 정치를 통해 왜 민주당의 위기가 왔으며, 극우가 득세하는 지를 "언어"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사실 번역의 이슈인지, 주제 자체의 어려움인지는 모르겠으나, 내게는 조금 어려웠다. 중첩된 부정어들이 등장해서 였을까.ㅠ 
하지만 나의 이해도와는 별개로 갈수록 화합이 되어가는 사회가 아니라 양극단으로 쪼개지는 사회를 봐야 하는 것인지, 우리가 갖혀있는 사고는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본질을 흐리는 언어의 사용까지.

과거의 미국은 인종차별에 대한 주제를 놓고 말한다면, 다양한 의견을 주고 받는 토론이 가능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의 인종차별은 말그대로 차별받는 대상이 하는 말 이외에는 의미가 없고, 그 대상이 아닌 이들(예를들면 백인) 말하는 인종차별관련 의견에는 위선이라는 날선 반응이 앞선다고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 'N워드' 그 단어를 그대로 지칭하는 것이 상대에 대한 모욕이기에 대체 수단으로 쓰는 저 단어조차 함부로 내뱉을 수가 없는 분위기인 것. 특정 주제 대하여 단어 사용의 '허용한계선'이 너무나 빠르게 바뀌고, 범위가 넓어지면서, 선의를 가진 사람 조차 그 한계선을 자기도 모르게 넘어서는 순간 인종차별주의가가 되어버리는 형국이다. 그렇다면 인종차별을 해결하기 위한 토의나 토론이 가능해지겠는가? 누구도 그 말을 꺼내지 못하는 사회가 되어버린 셈이다. 내가 쓰는 말이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질지 아무도 모르기에. 그렇기에 학교에서조차 이런 논의를 할수 없다고 한다. 양쪽 모두에게서 비난이 쏟아지는 형국이기에 말이다. 
그렇다면 그 사회는 어떤 이슈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그런 소수자에 대한 인식, 지원 정책, 교육 정책은 어떻게 해야 할까? 해결이란 것이 가능할까? 결국은 이런 논의조차 할수 없는 사회는 정말 민주주의 사회일까. 
나는 미국의 이 부분을 읽으며, 우리의 청년정책, 양성평등정책, 노인우대 정책등을 논하는 부분에서 지난 대선에 쏟아졌던 서로에 대한 비난이 생각났다. 여성을 이야기하면, 남성이 외면당했다고 말하던 이들, 노인을 말하면 청년이 외면당했다고 말하던 이들, 그 반대의 이들. 왜 우리는 문제에 대한 문제 제기 조차 못하는 사회가 되어 버렸을까. 모두가 침묵하고, 아니면 아예 대놓고 한쪽만을 지지하는 말도안되는 말들이 쏟아지는 것일까.

저자는 이 문제를 정치의 언어에서 설명하고 있다. 독단적 좌파와 극단적 우파의 언어를 통해서 말이다.
"절대선"을 추구하는 정치 역시 극우의 언어만큼이나 위험한 것. 그리고 미국의 좌파 즉 민주당이 놓치고 외면했던 부분, 그리고 '개탄스러운 자들'이라는 표현과 같이 잘못된 단어가 어떻게 상대의 분노를 이끌었는지, 그리고 그렇게 소외된 이들을 트럼프가 캐치하여 끌어들였는지를 말이다.


"그러나 자유주의는 개인의 보호만을 위한 철학이 아니다. 사회에서 상충되는 이해관계를 중재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p. 204

책을 어렵다고 느꼈던 이유 중 하나는 그러면 어떤 언어를 써야 하는가? 절대적인 선도, 절대적인 악도 아닌 중간의 언어는 과연 있는가? 그 누군가의 의도와 다르게 이해되는 언어의 한계 허용선은 어디까지 일까? 등이 기준을 잡는 부분이 명확치가 않아서 였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런 기준선의 무너짐은 선의의 말을, 누군가의 의견을 그 의견 자체로 놓고 판단하는 여유가 사라져서 일까. 요즘은 누군가에 대한 분노와 혐오 발언만 기억한다. 왜지? 

 노인에 대한 정책은 어떤 사회 취약층에 대한 정책일 뿐이다. 그것이 청년을 배제하거나, 아이를 배제하는 정책이 아닌것. 배제되었다는 생각이 들면, 그 사실을 우리는 또다른 이슈로 제기하면 되는 것이다. 대체 왜 우리는 그 자체를 자체로 바라보는 여유를 잊은 것일까? 
 아니면 정치의 언어가, 언론의 언어가 분노의 연료가 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책을 읽으며, 문득문득 잘못된 단어를 쓰는 대상이 정치일까? 언론일까? 아니면 우리 자신일까? 궁금하다. 결국은 모두겠지만, 정말 모두일까하는 생각이 든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듣고 말해야지. 정신 똑바로 차리고!

굿.

"본 도서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개인적인 감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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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 이방원
이도형 지음 / 북레시피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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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박한 제목. “국회의원 이방원”이라니. 내가 아는 그 이방원 맞는가…? 싶었는데, 내가 알던 그 이방원이 맞았다. 태종 이방원이 2024년의 신입국회의원 이동진의 몸에 빙의되었다는 소재로 쓰여진 소설. 단순히 생각해보면, 모두 죽여라!할 것 같은데..

제목그대로 조선 시대 세종대왕의 아버지 태종 이방원이 2024년 초선 비례 국회의원 이동진의 몸에 들어왔다. 이것은 사고 였을까. 이동진이라는 국회의원은 여당 비례대표이고 정치학과 교수였다. 여당이지만 말그대로 팽당할 위치에 놓인 그저그런 국회의원. 그런 그의 몸에 사고?로 들어온 이방원은 이동진의 보좌관 선호와 다혜, 수찬의 도움으로 빠르게 현대에 적응해간다. 하지만 작금의 정치상황은 공황장애라는 핑계로도 더이상 동진의 상태를 숨길 수 없는 국면에 접어든다. 여당의 패권과 다음 대권, 그리고 대통령과의 힘싸움을 두고, 동진은 모두에게 팽당한 입장이 아니라, 양쪽 모두에게 일종의 캐스팅 보트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선호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겠고, 정치부기자 한주는 동진의 행동 모든 것에 의심을 품으며 다가온다.
이런 혼란스러움 속에서 이동진 속의 방원은 빠르게 현실 정치에 적응하고, 정치의 수가 아니라 사람의 수를 읽어가며, 다소 이상하지만, 누구보다 기민하게, 대한민국 정치판을 흔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 동진. 동진은 수개월동안 자신이 이뤄던 것들이 자신의 정치가 아니였고, 자신이 내세운 가치와 달랐다는 것, 그리고 자신의 보좌관 선호의 야망이 반영된 정치였다는 이유로 정계은퇴를 결정한다.
정말, 정치는 가치만으로, 누군가의 소신만으로 이뤄질 수 있는 것일까?

판타지를 통해 정치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저자의 소설을 읽으며, 아주 오래전에 보았던 정치 드라마가 생각이 났다. 현실과 소신 사이에서 방황하는 초짜 정치인의 딜레마.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 어느정도는 소위 X물에 발을 담궈야 하고, 결국 권력은 나의 소신을 이뤄줄 도구이기에 가져야 하는 무엇이면서도, 나의 소신과 나의 날것 그대로의 야망에 나 스스로도 당황하는 상황을 그린 드라마였는데, 정치 9단의 이방원은 그런 나의 딜레마 사이에서, 또 권력의 중심부로 가기위한 줄타기에서 정치인 이동진의 소신과 현실 사이의 외줄타기를 보며, 정말 이건 판타지겠지 싶은 나의 헛웃음은 무엇일까.ㅎ

정치인의 딜레마.
그래도 국민의 대표라고 뽑아놓은 이들이 이 딜레마를 딛고, 현실에서 소신의 정치를 하길 바라는 개인적인 소망.

재밌다아!

"본 도서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개인적인 감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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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거인 (15만 부 기념 스페셜 에디션)
프랑수아 플라스 글 그림, 윤정임 옮김 / 디자인하우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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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책이다. 책을 받고, 책 표지의 띠지를 걷어내고 나니, 거대한 거인과 작은 인간이 한곳을 바라보고 있는 그림이 드러났다. 마지막이라. 인간과 더큰 인간의 교감을 그리는 동화인가? 


나는 부두에서 어느 노인에게 2기니를 주고 ‘거인의 이’라는 물건을 구입했다. 속임수라고 생각했지만, 재밌다는 생각이 들어 구입했다. 나는 '이'를 유심히 보다가 지도를 발견하고, 그곳이 실존하는 곳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바로 그곳을 찾아 떠난다. 중앙아시아의 어느 쯤. 다 죽어가던 중에 찾은 거인들. 나는 그들에 의해 살았고, 그들과 교감하며 그곳에서 10개월을 보낸다. 그들을 찾던 중 찾은 그들의 시체는 100구가 넘었지만, 남아있는 거인들은 고작 9명. 어느 날 나는 그곳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그들은 나를 사람이 있는 곳 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 영국에서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강연을 했다. 그렇게 나는 유명해졌고, 그들을 다시 만나고 싶어, 그곳을 찾았을 때 그들은 그곳에 없었다. 


이 책은 거인을 통해 인간의 관심이 무엇을 어떻게 망치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거인은 지금의 우리에게 자연이다. 우리의 호기심이 지나간 곳에 남은 것은 황폐화 뿐. 아주 예전에 우리의 독도에는 강치라는 생물이 살았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무분별한 남획과 이후 독도 인근에서 일어난 군사훈련등으로 인해 현재는 멸종되고 없다. 그리하여 독도 근처 생태계에 문제가 생겼었다는 글을 본적이 있다. 정말 인간이라는 종은 자연과 공존할 수 있는 것인가?

그저 궁금함과 호기심 뿐이였다는 별것 아닌 동기에도 사람들이 모이면, 결국 그것을 이용하여 돈을 벌려는 세력이 모이고, 그곳은 그 자체의 본질을 잃는다. 결국 여느 관광지와 다를바 없어지는 상황이 되고, 그 중간에서 훼손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를 생각한다. 


무관심과 강력한 통제만이 지켜낼 유일한 방법인 세상이 되어버렸다. 작가는 그것을 “침묵을 지킬 수는 없었니?”라는 말로 대신하는 듯 했다.


슬프네. 자연의 일부의 인간이 자연을 지키는 방법이란 것은 결국 그것을 모르거나, 모른척하거나 하는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란게..

모른척 해야 하는 것이겠지. 

마지막 거인이라도 지키려면 말이다. 그래야 결국 인간이라는 종도 유지 될 수 있을테니..



좋은 책. 아이들이 읽는 동화지만, 어른에게 더 필요치 않을까하는 생각을 한다. 우리가 알고 있어야, 아이들에게도 알려줄 수 있으니까.

동화책을 읽으며, 그림 한장이 이토록 슬프게 다가올 수 있다니….(다시 찾은 거인의 땅에서 보여지는 그림은 정말 가슴을 쿵.하고 내려 앉게 만든다)


“침묵을 지킬 수는 없었니?” p.72


"본 도서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개인적인 감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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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의 빛, 청자 2
정찬주 지음 / 불광출판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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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청자” 학창시절 국사책을 벗어나고는 별로 들어본적 없는 단어. 책은 그런 청자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소설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고려청자라기보다 탐진청자의 발자취이다. 재밌다. 청자의 발자취라니. 


시작은 해상왕 장보고라는 인물부터이다. 당나라 월주청자를 장보고가 가져오면서부터, 탐진청자의 시작을 알린다. 당구(지금의 해적)들에 의해 당나라에 노예로 팔려가 월주청자를 만들던 신라인들을 구제해 탐진으로 데려와 당시 탐진에서 만들던 청자를 더 발전시키기 시작하는 장보고. 그는 해상무역을 통해 그런 탐진청자의 아름다움과 우수성을 곳곳에 퍼뜨린다. 소위 K-컬처의 시작인셈. 
월주청자가 찐한 녹색이라면 탐진청자는 바다색과 같은 투명한 비취색을 띠는 것이 특색이다. 책의 1권이 이런 장보고와 탐진의 도공들이 탐진청자의 시작을 말한다면, 2권은 그런 청자가 고려로 넘어오면서 지금의 가치를 가지게 된 과정을 그리고 있다. 
장보고라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인가 싶었던 소설은 1권 말미에서 장보고의 죽음으로 뭍혔던 청자가 다시 100년을 지나 고려 광종의 노비안검으로 인해, 다시 청자의 명맥을 잇기 시작한다.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탐진청자를 기억하고 만들어온 이름모를 도공들의 노력과, 청자의 가치를 알았던 당시 귀족과 스님들의 노력, 결국에 이르러서는 탐진 출신의 공예 태후의 손을 지나, 고려 말기까지 이어지는 과정을 보며, 그토록 오랜 세월 사랑받았던 우리의 청자가 문득 궁금해지기도 한다.
나에게 그저 수업으로 외워야할 대상으로만 기억되는 우리의 청자가 다시 새로움으로 다가오는 순간이였다. 

어떤 유형의 물건이 지금까지 전해져, 우리에게 그 가치의 중요성이 전달되었다는 것은 지금도 흉내내가 힘든 무엇이 있어서 이지 않을까. 
 청자를 만드는 과정에서  그림이나 무늬에 그토록 공을 들이고도 유약이 잘못 발려서, 굽는 온도, 가마 문제등등 수도 얺는 이유로 말그대로 도공의 ‘성’에 차지 않는 결과물은 가차 없이 깨버리는 그들의 자존심. 그래서 최상품만을 팔고, 진상했던 그들의 의지가 새삼 나를 두근거리게 한다.

박물관을 간다면 청자 앞에서 오랜 시간을 서있을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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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의 빛, 청자 1
정찬주 지음 / 불광출판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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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청자” 학창시절 국사책을 벗어나고는 별로 들어본적 없는 단어. 책은 그런 청자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소설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고려청자라기보다 탐진청자의 발자취이다. 재밌다. 청자의 발자취라니. 


시작은 해상왕 장보고라는 인물부터이다. 당나라 월주청자를 장보고가 가져오면서부터, 탐진청자의 시작을 알린다. 당구(지금의 해적)들에 의해 당나라에 노예로 팔려가 월주청자를 만들던 신라인들을 구제해 탐진으로 데려와 당시 탐진에서 만들던 청자를 더 발전시키기 시작하는 장보고. 그는 해상무역을 통해 그런 탐진청자의 아름다움과 우수성을 곳곳에 퍼뜨린다. 소위 K-컬처의 시작인셈. 
월주청자가 찐한 녹색이라면 탐진청자는 바다색과 같은 투명한 비취색을 띠는 것이 특색이다. 책의 1권이 이런 장보고와 탐진의 도공들이 탐진청자의 시작을 말한다면, 2권은 그런 청자가 고려로 넘어오면서 지금의 가치를 가지게 된 과정을 그리고 있다. 
장보고라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인가 싶었던 소설은 1권 말미에서 장보고의 죽음으로 뭍혔던 청자가 다시 100년을 지나 고려 광종의 노비안검으로 인해, 다시 청자의 명맥을 잇기 시작한다.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탐진청자를 기억하고 만들어온 이름모를 도공들의 노력과, 청자의 가치를 알았던 당시 귀족과 스님들의 노력, 결국에 이르러서는 탐진 출신의 공예 태후의 손을 지나, 고려 말기까지 이어지는 과정을 보며, 그토록 오랜 세월 사랑받았던 우리의 청자가 문득 궁금해지기도 한다.
나에게 그저 수업으로 외워야할 대상으로만 기억되는 우리의 청자가 다시 새로움으로 다가오는 순간이였다. 

어떤 유형의 물건이 지금까지 전해져, 우리에게 그 가치의 중요성이 전달되었다는 것은 지금도 흉내내가 힘든 무엇이 있어서 이지 않을까. 
 청자를 만드는 과정에서  그림이나 무늬에 그토록 공을 들이고도 유약이 잘못 발려서, 굽는 온도, 가마 문제등등 수도 얺는 이유로 말그대로 도공의 ‘성’에 차지 않는 결과물은 가차 없이 깨버리는 그들의 자존심. 그래서 최상품만을 팔고, 진상했던 그들의 의지가 새삼 나를 두근거리게 한다.

박물관을 간다면 청자 앞에서 오랜 시간을 서있을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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