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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시오랑을 읽는 오후
장석주 지음 / 현암사 / 2023년 6월
평점 :
에세이라길래 가볍고 산뜻하게 부담없이 읽기 좋을 책이겠거니 지레 짐작했다. 아.. 물론 제목에 낯선 “에밀시오랑”이 있어 누군지 궁금했고 간단히 검색했을 때 그래도 마냥 가볍지만은 않겠군, 조금은 심오하겠네 했다. 책을 받았을 때 500페이지인 걸 보고 두께에 놀래긴 했지만 초록초록한 바탕에 해변가에서 책 읽는 사진이 있으니 괜찮을 거야... 했는데, 세상에나…
책머리 "책과 책들 사이에 서성이며" 3페이지 반만 읽고 난 알아버렸다. 만만치 않은 책임을... 빠져들 수밖에 없음을... 나같은 ‘문장수집가“는 포스트잇을 수십개를 붙이게 될 거라는 걸...
이런게 인문학자들이, 시인들이 사유하는 방법이구나. 작가가 수많은 단어와 문장을 가지고 노는 느낌이다. 생각이 그냥 쉬지 않고 물흐르듯이 술술 이어져나온다. 바둑과 무라카미 하루키를 이렇게 사유하고, 그 안에서 철학과 교훈을 발견해서, 이런 단어들로 표현하여, 읽는 사람을 납득시킬 수도 있구나 놀랬다. 짧은 시간에 다 읽을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첫페이지를 넘기고는 멈출 수가 없었다. 아... 이제 다른 에세이들을 어떻게 읽을까? 에세이에 대한 기준이 너무 높아질 것 같다.
이 표지처럼, 한적한 바닷가에서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아이팟으로 들으면서 다시 한번 더 읽어보고 싶다.
✍️그러니까 "불행을 방법 삼아서는 불행에서 벗어나지 못 한다."는 문장의 기원은 바로 시인 프랑시스 퐁주다. 불행을 방법 삼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불행은 존재의 가능성을 무너뜨리고 뭉갠다. 이상하게도 불행의 그림자만을 밟는 사람은 늘 자신의 태어남을 문제 삼는다. 불행의 원인이 태어남에 있다는 믿음이 그들의 뇌 속에서 깊이 뿌리를 내리는 모양이다. 태어남에 대한 반감을 가진 사람을 비관론자라고 할 수 있다. 에밀 시오랑은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 그 것을 꿈꾼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행복이며, 자유이며, 공간인가!"라고 말한다. 사람의 태어남이 필연의 운명이라면 태어나지 않음을 가정하는 사유는 패러독스이고 형용 모순이다.
✍️사랑은 우리 안의 살아 있다는 기척이고, 사로잡힘이며, 자기모순에 빠지는 사태다. 아울러 해방이자 구속, 에로스의 날갯짓, 헌신과 열정으로 포장된 욕망의 몸짓이다. 사랑이 심심함에 대한 모반이고, 불멸에의 욕망이 일으킨 불꽃이라면 그 핵심은 에로스다. 이것은 육체의 헐떡이는 갈망이며 숭고성의 승리에 대한 염원이다. 사랑은 그 자체의 동력으로 할 수 없음을 넘어선다. 믿기 어렵겠지만 사랑은 종종 재난이고 위험한 투자다. 사랑이 뜻밖에도 실존의 위기를 불러온다는 사실이 그 증거다. 누군가를 죽도록 사랑하겠다는 결의를 다진 자는 실제로 죽기도 쉽다.
✍️통증은 과거와 미래를 집어삼키고 실존 자체를 현재에 가둔다. 누군가는 통증을 참지 못하고 그 운명에 분노하고 비명을 지른다. 과연 누가 통증의 촘촘함으로 수놓인 고통의 서사를 읽을 것인가? 권태로운 사람에게 이 고통의 서사를 전해주고 싶다. 그 이유는 권태가 고통 없는 나날이 불러 들인 마비이고, 고통을 배제한 안락의 과잉이 만드는 표장인 까닭이다. 날것인 고통의 낯섦 앞에서 권태는 사치, 부끄러운 과잉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좋은 삶의 최소 조건이 통증 없는 삶이라면, 어쩌면 우리는 이미 좋은 삶을 누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당신을 이해한다는 게 가능한가? 당신을 이해하는 일은 우주를 아는 것과 맞먹는다. 아니 당신이 곧 우주다. 몇 억 광년이 흐른다 해도 당신을 이해할 수는 없다. 당신을 생각하며 먼저 작은 한숨을 내쉰다. 당신은 손당을 수 없는 무한, 불가능한 영역에 속한다. 거울 속에서 깨어나는 당신은 아름답다. 그것은 당신이 세상에 도착하지 않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언제나 미래에 도착한다. 바람이 문을 두드리면 나는 당신의 바깥에서 당신을 두드린다. 당신의 문을 열어 나를 들여 보내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