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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캐나다의 한국인 응급구조사 - 나를 살리러 떠난 곳에서 환자를 살리며 깨달은 것들
김준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2월
평점 :

“파라메딕이에요!
911에 전화하셨잖아요!
도와드리러 온 거예요!” (41p)
파라메딕(Paramedic). 응급구조사.
응급의학과 전문의를 대신해 응급처치, 상담, 이송 등을 하며, 더 넓게는 “삶의 현장에서 죽음의 현장으로 이어주는 일”을 하는 의료전문인. 911로 걸려온 전화를 상황실에서 연결해 주면 출동한다.
파라메딕은 원래 장의사에게 시신을 옮겨주는 일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금방 죽지 않고 고통을 호소하는 환자의 경우가 많아서 ’그럴거면 아예 살려서 치료 받게 하자‘는 생각에 응급 치료를 하던 게 오늘날 파라메딕의 기원이 됐다고 한다.
나는 ’파라메딕‘이 우리나라의 소방관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는데, 검색해보니 소방관과는 약간 차이가 있었다. 우리나라에도 ‘응급구조사’라는 전문직이 따로 있고, 응급구조사 국가자격을 취득한 사람은 소방공무원이나 병원 소속 응급구조사 등으로 진로를 선택할 수 있다고 한다. 소방관을 응급구조사를 포괄하는 조금 더 넓은 범주로 봐야하지 않을까. 소방관은 응급구조뿐 아니라 화재 진압, 길고양이 보호, 심지어 벌집제거까지 하니까.
저자 김준일이 캐나다에서 파라메딕이 된 건, 생명과 죽음에 대한 뭐 거창한 사명감 때문은 아니었다. 삶에 회의감이 찾아와 캐나다로 이민을 갔는데, 반복되는 취업 실패로 생계에 빨간 불이 켜진 것이다. 저자는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불혹의 나이에 파라메딕에 눈길을 돌리게 되었다. 그리고 2년의 칼리지를 3년만에 (겨우) 졸업하고 파라메딕에 합격하게 된다.
체력테스트 때 채용 담당 간부의 팔에 매달리며 ”나, 나 정말 이거 꼭 돼야 해요!“를 외쳤다는 이야기, 칼리지의 마지막 과정인 현장실습 때 한참 어린 현장실습 지도자에게 인신공격성 질책을 받으며 울기도 했다는 이야기 등 저자의 절박한 심정이 그대로 느껴지는 이야기에 코끝이 시렸다. 명색이 파라메딕으로서 멋진 영웅담만 책에 실었을 것 같은데, 이토록 안쓰럽고 짠한 과정을 그대로 보여주다니.
저자는 비록 희생정신이나 사명감으로 파라메딕이 된 건 아니었지만, 점차 환자를 ‘돕고’ ‘살리며’ 환자의 ’마지막 가는 길에 손을 잡아주는’ 멋진 파라메딕으로 성장해 간다. 생사의 기로에 서있는 환자를 생명으로 끌어당겨주는 일, 죽음을 앞둔 환자의 마지막 순간을 잠시나마 연장해주는 일, 그리고 소중한 이를 먼저 보낸 자에게 묵묵한 위로를 전하는 일... 등을 멋지게 해내는 저자가 참 멋있다고 생각했다. PTSD도 겪을 수 있는 분명 쉽지 않은 일이지만, 최선을 다하는 저자를 칭찬해주고 싶어졌다.
그러고보면 저자에게 ‘파라메딕’이라는 직업은, 자기자신을 구조하는 은인 같은 게 아니었을까. 저자의 절망으로 무너져 있던 마음과 벼랑끝에 서있던 삶을 구조해 주었으니까 말이다.
예기치 못한 사고로 죽고, 갑작스런 심정지로 죽고, 부자연스럽게 죽고, 불의하게 죽는, 여러 죽음의 양상을 보면서 ‘오늘도 무탈하시라’는 인사가 이토록 안온하고 다정한 인사였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 별다를 것 없는 관계 등에 우리는 쉬이 권태감을 느끼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건 신의 축복인 것이다. 그러니 저자의 말대로 ”주어진 삶의 순간마다 크고 작은 행복이 자주 깃들 수 있게“ 더 감사하고, 자신에게 더 친절해져 보는 게 어떨까.
오늘 하루, 모두 무탈하시길 마음으로 빈다!
📍어쩌면 내가 하는 일은 정말 대단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 아이가 빨리 낫도록 도와서 다시 친구들과 어울리고 힘차게 트램펄린 위에서 뛰어놀고, 그날 있었던 일을 식구들 앞에서 얘기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일 것이다. 오전의 그 환자 억시 죽지 않고 다시 살 수 있도록 ‘돕는’ 일이 우리가 하는 일이다. / 29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대단한 일을 한다고 여기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어쩌면 우리는 스스로를 위해 일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을 돕는 과정에서 생채기 나고 찢긴 마음을 겉으로 드러내거나 쉽게 털어 놓지 못하고 그렇다고 위로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는 우리들은 (...) 남을 돕는 자들에게만 허락 되는 따뜻함으로 우리의 다친 마음을 스스로 어루만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 17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