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다잉 프로젝트 - SF, 판타지, 블랙코미디 본격 장르만화 단편집
봉봉 지음 / 씨네21북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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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봉 작가의 그래픽노블 첫 작품집 웰다잉 프로젝트≫. 블랙코미디, 드라마, SF, 판타지 등 다양한 장르의 단편 만화 6편을 한 권에 실었다. 봉봉 작가는 <회색방, 소녀>로 창작만화 공모전에서 다수 수상 한 바 있는,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아온 실력파 작가다. 이 작품집도 그 명성에 걸맞게, 시공간을 초월한 상상력과 흥미로운 서사를 보여주고 있다. 동시에 소름 돋게 낯설고 묘하게 익숙한 우리네 이야기를 날카롭게 그려내 섬뜩함도 자아낸다. 나는 이런 유형의 만화는 처음 접해서, 솔직히 엄청 충격 받았다.


1. 생명을 잉태하는 통로, 그러나 생명력은 상실해 가는 인공자궁 이야기 「ANA」. 최초로 인공자궁을 통해 태어난 소녀 ‘ANA(아나)’의 마지막 말은 인간을 상품처럼 생산하고 소비하는 비인간적인 행태에 경종을 울린다.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인공자궁의 상징, 프로파간다의 천사, 자본주의의 인형, 메디테크의 창녀라고 불렀지만. 나는 아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2. 타인의 죽음도 오락과 돈벌이로 소비되는 현실 「웰다잉 프로젝트」. 인간의 존엄이 자본 앞에 무참히 짓밟히는 게 어디 죽음 뿐이겠는가.

3. 외모교정술로 대변되는, 인간을 무한 경쟁으로 내모는 욕망 「붉은 여왕」. 다양성과 차이를 없앤 평등은 진정한 평등이 아님을, 성찰이 없는 경쟁은 모두를 파멸에 이르게 한다는 점을 깨닫게 한다.

“우리가 어렸을 적 꿈꿨던 ‘평범한 얼굴’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너는 기억할 수 있어? 우리는 결승선 없는 달리기를 하고 있을 뿐이야. … 나는 더 이상 달리고 싶지 않아.” (루이스 리들리의 대사)

4. 관심의 정도가 돈이 되는 미디어에 양심과 윤리를 저버린 사람들, 이에 무비판적인 사회를 고발하는 「마지막 비행」. 유튜버 하이재킹은 단지 관심을 받기 위해 일탈을 했던 것일 뿐인데, 의도와 다르게 영웅이 되고 투사가 되고 시대의 자화상이 된다. 사람들은 우리의 영웅이 되어줄, 우리를 대신해 죽어줄 ‘마녀’를 찾지만, 사실 ‘마녀’는 그 어디에도 없다는 걸 일깨워 주는 것 같다.

5. 손톱을 먹고 사람이 된 쥐 설화에 착안, 내 손톱을 먹고 또 다른 내가 된 햄스터와 나쁘지 않은 동거 이야기 「햄스터가 손톱을 먹었다」. 타자와의 공존 속에서 끊임 없이 고독한 우리. 그런데 어쩌면 가장 공존하지 못하고 있는 타자는 바로 나 자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6. 인간의 더러운 죄성을 씻겨주고 천국의 자유를 준다는 사이비 종교, 그 비이성적이고 기괴한 믿음의 실체 「신은 변기」. 이성의 작용을 상실한 믿음은 사이비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게 했다.


작가의 만화는 언뜻 보면 희극적이지만 자세히 보면 지독히도 비극적이다. 인간성의 상실과 단절의 단면이 작품 전체에 배어 있어, 읽는 내내 나는 할 말을 잃어 버렸다. 작가는 작품집 그 어디에도 직접적으로 선악을 판단하진 않는다. 인간의 욕망과 어리석음을 풍자하면서 해석을 독자의 몫으로 넘길 뿐이다. 스스로 고민하게 하는 지점을 만들어 준다는 점에서, 작가의 만화는 힘이 있었다.

나는 이 작품집을 읽으면서, 인간 존재의 본질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가. 인간의 존엄은 누가 결정하는가. 아니, 인간은 과연 어떤 존재인가…

많은 독자들에게도 추천하고 싶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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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학교 결혼예비학교 워크북
서상복.김은숙 지음 / 세움북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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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직접 운영하고 있는 [해피가정사역연구소]의 연애학교/결혼예비학교에서 사용하고 있는 워크북. 


책을 받자마자 대번에 ‘아, 이건 교육용 교재구나’라고 생각했다. 순간 인쇄소에서 흑백 제본했던 대학교 강의안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이 워크북은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세련되고 컬러풀하다. 이런 교재로 공부하면 공부 할 맛 제대로 날 것 같다.ㅎㅎ


이 워크북에는 총 6주의 과정이 담겨 있고, 수료하면 "연애/결혼 면허증"을 발급해 준다. 운전 면허증도 아니고, 연애/결혼 면허증이라니! 이거 쫌, 신박한데? ㅎㅎ


운전면허증은 '운전을 할 수 있다'는 일종의 허가증이다. 교통질서를 지키고 서로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선 운전하는 법을 배워야 하고, 정식 시험을 거쳐 국가기관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물론 운전면허증을 소지한다고 해서 다 운전을 잘하는 것도 아니고 (장롱면허가 대표적인 예ㅎㅎㅎ) 운전면허증을 땄다고 다 정석대로 운전하는 건 아니지만 (음주운전, 보복운전, 위법운전, 얌체운전... 다 운전면허증 소지자가 하는 잘못된 운전!), 그럼에도 운전을 하기 위해선 운전면허증이 필수인 것처럼, 저자 서상복 소장은 '연애/결혼을 하기 전에 반드시 성경적인 연애와 결혼을 배우고 준비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연애와 결혼에도 면허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연애와 결혼은 모두 '관계'이므로, 하나님 안에서, 성경이 알려주는 방법대로 건강하고 바르게 관계를 맺어나가야 한다. 따라서 이 책은, 먼저 성경 안에서 관계의 본질을 재정립한 후에 본격적으로 연애와 결혼, 그리고 가정에 관해 다룬다. 성경, 특히 언약 신학으로 답을 찾아가려는 저자의 노력이 보였다. 

워크북을 읽는 것만으로도 유용한 지식을 많이 배울 수 있었다. 나는 이미 결혼을 했기 때문에, 남편과의 관계를 되돌아보고 성찰과 반성하는 시간을 가졌다. 기독교 상담학에 기초한 여러 질문지도 아낌 없이 이 워크북에 실려 있어서 자신을 객관적으로 점검하고 성장의 계기로 활용하면 좋겠다. (근데 이 질문지들, 이렇게 다 공개해도 되나? 일종의 영업비밀 아닌가? ㅎㅎ)


연애와 결혼을 하기 앞서 건강한 자아를 세우고 바르게 관계하는 법을 가르쳐 준다는 점에서, 하나님 앞에서 순결하게 연애하고 결혼으로 가정의 천국을 이루어가도록 돕는다는 점에서 유익한 워크북이지만, 공부하는 데서 절대 멈추지 말자! 중요한 건 실전이 아니겠는가!ㅎㅎ 자고로 연애와 결혼은 실전! 학원에서 운전을 배우고 면허증을 땄지만, 실제로 도로 주행을 많이 해야 실력이 느는 것처럼, 독자들이여- 배웠으면 당장 밖으로 나가 사람을 만나고 연애를 하자!

당신의 연애와 결혼생활에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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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세움북스 신춘문예 작품집 - 단편소설, 수필 세움 문학 5
윤덕남 외 지음 / 세움북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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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움북스의 제3회 신춘문예 개최소식이 얼마 지나지도 않은 것 같은데 훌륭한 작품집이 세상에 나왔다. 이 작품집은 총 40편의 응모작 중 우수한 작품들을 모아 발간한 것이다.

단편소설과 수필이라 분량은 짧지만, 한 편 읽고 묵상하고 한 편 읽고 생각하느라 다른 책 한 권 읽는 것보다 시간이 더 걸렸던 것 같다. ㅎㅎ 작품들은 하나같이 기독교 세계관과 복음의 가치가 은은하게 묻어나 기독교 문학으로 손색이 없었고, 묵직한 감동과 교훈도 주었다. 전체적으로 진지하고 무게감 있는 게 이번 작품집의 특징이 아닌가 싶다. ‘크리스천 글쟁이들‘ 여기에 다 모인 것 같은데…ㅎㅎ

작년엔 수필 부문에 대상이 있었는데 올해는 단편소설 부문에 대상이 있었다. 대상 수상작을 읽고나면, 음, 대상 받으려면 이 정도는 써야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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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좋았지만, 나는 단편소설 선외가작 <엄마가 죽었다>와 수필 우수작 <온기에 대한 고찰>, 수필 가작 <새 생명 자매모임>을 감명 깊게 읽었다. 아직도 마음이 뭉클하다. 독자들도 이 작품집으로 기독교 문학작품이 주는 감동과 교훈, 은혜를 누려보시길 바란다!


소설 <엄마가 죽었다>는 엄마의 갑작스런 사망 소식을 시작으로 장례를 치르고 유품을 정리하는 4일의 시간을 배경으로 한다. 그러나 여기에 화자의 과거 회상이 교차되면서, 몇십 년간 축적된 과거의 시간이 현재와 버무려져 이야기가 확장되고 있다. ‘엄마’라는 이름에 묻힌 한 여성의 인생사도 볼 수 있었고, 한 사람의 인생과 관계에 개입하시는 하나님도 묵상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딸의 시점에서, 그간 잘 몰랐던 엄마에 대해 알게 되고 엄마와의 응어리졌던 마음의 고리를 풀면서 끝내 엄마와 화해하게 되는 설정이 내 마음을 깊게 때렸다. 작가의 감수성과 섬세한 필력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뚜껑을 덮기 전에 고인의 귀가 열려 있다며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라고 한다. 나는 영희 씨에게 “영희씨 수고 많았어요.”라고 전했다.”(142)

하나님은 기어코 화해하게 하신다...


수필 <온기에 관한 고찰>은 ‘따뜻함’이라 말할 수 있는 ‘온기’에 관해 사유한 글이다. 주제가 신선했고, 사유의 확장이 생생하게 표현 되어 차분히 따라가기 좋았다. 또 온기를 다룬 글이니만큼 따뜻한 기운이 느껴지는 글이었다. ’관계적 개념’인 온기... 내 온기가 너에게 흘러가지만 내 온기는 결코 빼앗기거나 잃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너의 한기가 내 온기로 인해 잃어지고 한기는 온기에 더욱 가까워진다... 온기의 신비를 잘 표현한 글이어서 마음에 남았다.


수필 <새 생명 자매 모임>은 생명력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 글이었다. 임신을 준비하는 세 명의 여성들이 처음엔 “아이를 기다리는 비슷한 입장에서 마음을 나누며 함께 기도”하기 위해 모임을 시작했지만 이 모임은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님 안에서 전인격적으로 성장하는 모임으로, 그리고 정신적/정서적 약자를 돕는 생명을 나누는 모임으로 확장되어 간다. 난임 여성의 고민도 볼 수 있었고, 생명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만이 생명을 주시고 생명을 살리시고 생명을 유지하게 하시고 생명이 흘러가게 하신다는 것도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이번 작품집에서 내 원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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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움북스는 규모가 작은 출판사이지만, 교회와 사람을 세우고 기독교 문화를 건강하게 선도하는 곳이다. 해가 거듭할 수록 업그레이드 된 작품성을 보여주는 신춘문예가 제4회, 제5회... 끊기지 않고 이어지기를 바란다. 세움북스에게 무한한 지지와 응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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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 핵심 강독 설교 - 십계명·사도신경·주기도문, 기독교강요로 설교하기 세움클래식 12
임종구 지음 / 세움북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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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구 목사의 ≪기독교강요 핵심 강독 설교≫는 칼뱅의 『기독교강요』 프랑스어 초판(1541년, 박건택 역)의 십계명, 사도신경, 주기도문을 발췌하여 설교의 형태로 해설하고 있는 책이다. 저자가 섬기는 교회에서 주일예배 때 실제 설교한 내용들을 책으로 엮었다.


텍스트에만 천착한 군더더기 없이 명료한 해설, 한 눈에 정리할 수 있는 도식 형태, 머리로의 이해에서 가슴으로의 공감과 삶으로의 실천까지 균형을 잡아주는 전개(이 때문에 ‘해설서’가 아닌 ‘강독설교’라 제목을 붙인 건 적절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원전 텍스트를 실어 놓아 독자가 저자의 해설에만 의존하지 않고 곱씹어 읽어보게 한다는 점도 좋았다.

나는 책에 실린 칼뱅의 기독교강요 강독본문을 먼저 꼼꼼히 읽고 저자의 해설을 읽었는데, 이렇게 하니까 더 이해가 잘 되고 오래 기억에 남았다. 질문이 생겼을 때 저자의 해설에서 답을 찾아보기도 했다. 독자들도 그렇게 읽어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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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계명] 에서 내가 새롭게 배운 점은, 율법을 대할 때 윤리적 차원에서만 머무르지 않고 계명의 본질과 성격, 즉 율법의 정신을 추구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가령 6계명 ’살인하지 말라‘는 건 ”손으로 피를 흘리는 살인“뿐 아니라 ”인간을 가볍게 여기는 어떤 형태의 말과 행동”도 살인에 포함 되고, 8계명 ’도둑질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분배를 훼손하는 죄“도 포함된다는 점이다. 여기엔 ”자신의 직무를 게을리하는 것“도 해당된다. 월급루팡들 뼈를 때리는 지점..ㅎㅎ

십계명 파트는 계명 하나하나에 담긴 본질과 정신에 대해 많이 배울 수 있어 유익했다.


[사도신경] 파트는 특히 삼위일체에 대해서 이단의 주장과 비교해가며 배울 수 있어 유익했다. 삼위일체는 이성으론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영역인데 그에 관련한 이단들의 주장을 같이 보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또 사도신경에는 예수님의 지옥강하(“지옥에 내려가시고”)가 없는데 칼뱅은 기독교강요에서 지옥강하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 새로웠다. 칼뱅에 의하면 예수님이 ‘지옥에 내려가신‘ 것은, ‘장사 되신’ 것(장례)과는 다른 말이며 모든 교부들이 언급했고 정통신앙에도 어긋나지 않기에 사도신경에서 고백되어야 하는 내용이라고 한다. 근데 사도신경에 왜 빠진걸까? 책에선 그 이유를 다루고 있진 않았지만 나중에 꼭 저자에게 물어보고 싶다.


마지막으로 [주기도문]은 주기도 전체를 구조적으로 배울 수 있었다. 십계명과 구조적인 면에서 비슷하다는 점도 신기했다. 다섯째 간구(“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사면해 주듯이 우리의 빚을 사면해 주시고”)에서 ’용서‘와 ’사면‘을 굳이 구별한 것은 잘 이해되지 않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었다. 여기서 용서를 비는 기도는 ‘구원과 관련한 기도’가 아닌 일상생활에서의 기도로 봐야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는데, 이 부분도 좀 더 공부를 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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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로 베고 누워자도 전혀 이질감이 없는 벽돌책 칼뱅의 기독교강요. 아무리 읽어도 심리적 거리가 좀체 좁혀지지 않아 ‘칼뱅은 어찌하여 기독교를 강요(強要)하는가!’ 포효하곤 했던 지난 날의 나를 떠올려본다.ㅎㅎ 이런 절규는 비단 나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기독교강요와 좀 가까워지고 싶다면, 기독교의 3대 요지 십계명,사도신경,주기도문을 배워보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보면 좋겠다. 나는 읽으면서 공부도 많이 됐지만, 가랑비에 옷 젖듯 이성과 감성이 모두 터치되는 느낌을 받았다. 독자들에게도 추천하고 싶다.


*강요(綱要): 일의 으뜸 줄기가 될 만한 요점. 가장 중요한 부분 / 강요(強要): 억지로 또는 강제로 요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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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맛집 산책 - 식민지 시대 소설로 만나는 경성의 줄 서는 식당들
박현수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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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맛집 산책≫ 박현수


제목이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경성’이라는 지명이 주는 역사적 위압감과 ‘맛집’이라는 설렘 가득한 신조어가 ‘산책’이라는 단어로 버무려진, 묘하게 이질적인 제목이라는 생각에서다. 게다가 미식가와는 거리가 먼 나로서는, 461쪽에 달하는 분량을 보니 ’맛집을 뭐 이렇게까지 연구했어?‘하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드는 거다. 음식은 균형 있는 영양소에 배만 부르면 그만 아닌가. 그런데 생각해보면 나도 ‘인스타그램 핫플 지도‘를 보고 맛집을 가보는 수고를 아끼지 않으니, 이 책은 그런 의미로 이해해도 되지 않을까.


긴가민가한 첫인상을 가지고 읽어가다가 어느새 나는 이 책에 푹 빠져버렸다. 내 예상보다 더 신박하고 유익한 책. 식민지 시대 경성의 맛집 10곳을 소개하는데, 단순히 음식점을 탐방하는 것을 넘어 당시의 생활상과 “근대의 흔적 전반”을 살펴볼 수 있는 책이었다. 방대한 문헌과 사료를 통해 맛집의 메뉴, 가격, 맛을 밝혀내고, 여러 근대 문학을 분석해 분위기와 풍경까지 재현한, 저자의 폭넓은 노력이 보였다. 객관적이고 촘촘한 역사 고증은, 오늘날 우리의 식탁 위의 다채로운 음식이 어떤 줄기에서 뻗어나왔는지를 알 수 있게 했고, 식민 지배라는 어두운 그림자도 잊지 않고 다시금 주목할 수 있게 했다.

이 책은 미식가에겐 100년 전 맛집을 탐방하는 식도락 여행, 문학도에겐 근대 문학을 톺아보는 문학 여행, 역사에 관심 있는 이에겐 그 시대 생활상을 들여다보는 과거여행이 될 것 같다. 어떤 독자이든 유익하고 흥미로운 여행이 될 것임을 확신한다.


총 3부로 나뉘어, 1부는 본정의 맛집 4곳, 2부는 종로의 맛집 3곳, 그리고 3부는 장곡천정과 황금정에서 영업 했던 맛집 3곳을 살펴본다. 서양요리점, 일본 요리옥, 디저트 카페, 설렁탕집, 중화요리집 등으로 종류도 다양하다.


📍커피네 홍차네 제각금들 청하니까 “커피는 이 집이 아마 서울서는 제일 조흘걸요.” 영옥이 그 방면의 조예를 자랑한다. “그래요?” 경아가 대답하는데, “미스코시 것이 제일 조타더니.” 보순이 불복을 한다. ”건 그렇지만 이런 차집 중에서 말이지.“ 말하는 영옥을 건너다보며 문득 시영은 나란히 안즌 영옥과 경아와의 대조를 생각하는 것이엇다. / 164


유진오의 <화상보>에 나오는, 경성의 커피 맛집을 두고 겨루는 대화다. 여기서 언급 되는 곳은 ‘가네보 프루츠팔러’와 ‘미쓰코시백화점 식당’. 가네보 프루츠팔러는 당시 파르페를 팔았던 ‘핫플레이스’였다고 한다. 파르페가 역사가 오래된 디저트라는 게 놀라웠고, 100년 전 커피가 맛있으면 얼마나 맛있는지 약간 궁금하기도 하다.


여러 근대소설의 줄거리도 같이 살펴보며 굉장히 재미있게 책을 읽다가도, 한편으로 나는 이 책이 주목하고 있는 시대, 일본에 주권을 빼앗기고 식민 지배를 받던 암울한 그 때를 마주하게 되어 마음이 무거웠다.

번화가의 고급스럽고 화려했던 맛집과 가난한 조선인들이 이용했던 시장통의 식당이 왜 이리도 대조 되어 보였던 걸까. 조선 서민들의 한 달 식비보다 더 비쌌던 조선호텔 식당의 정식은 부유층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알 수 있게 했고, 비싼 서양음식점에서 생긴 ‘런치’는 일본의 서구화를 향한 열망을 엿보게 했다. 조선인들의 ‘소울 푸드’ 설렁탕과 냉면은 식민지의 가난과 설움을 보여주는 음식이었다는 점이 마음에 남았다. 소설 <운수 좋은 날>에서 김 첨지의 아내가 왜 설렁탕을 먹고 싶어했는지 이해되는 부분이었다.

또 고급 서양요리점에선 조선 음식을 전혀 팔지 않았고 일본인 손님을 주된 타깃으로 잡았다는 점, 일본의 철도 이용 편의를 위해 경성에 건립한 철도호텔이 ‘조선 호텔’로 바뀌었다는 점 등에서도 짙게 드리워진 식민지의 그늘을 볼 수 있었다. 내가 느꼈던 책의 무게감은 단지 두께가 주는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저자는 이 책이 경성의 맛집을 다룬다 하여 식민지 경험까지 수긍하는 것은 아니라며 우려하기도 했다. 경성 맛집으로 우리가 정말 기억해야 할 역사를 조명하는 유익하고 흥미로운 책이었다.


📍이를 종합해보면 미쓰코시, 미나카이, 조지아 등의 백화점은 경성에 위치하고는 있었지만 식민지를 지배하고 관리하는 제국을 위한 공간이었다. / 104

조선과 일본 전체로 따져도 경성은 도쿄 다음으로 큰 도시였다. 하지만 경성의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며 조선인 손님의 비중이 늘어났더라도 일본인이 운영했던 백화점의 영업 방침은 변하지 않았다. 아무리 그 수가 늘어났더라도 식민지인은 식민지인이었기 때문이다. / 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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