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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억 번째 여름 (양장) ㅣ 소설Y
청예 지음 / 창비 / 2025년 5월
평점 :
더위가 많이 늦는다 싶던 올해. 4월에는 비 소식도 잦고, 원래 생각하던 계절감과 해당하는 계절에 맞는 온도의 스펙트럼과 달리 유독 기온이 위아래로 심하게 요동쳤다. 그러다 정말 정점을 찍으려는 듯 스멀스멀 올라가는 더위의 기운이 느껴지는 요즘, 청예 작가의 새 장편소설 『일억 번째 여름』을 읽게 되었다. 몰랐는데, 작년에 재밌게 읽고 친구에게 추천까지 했던 『오렌지와 빵칼』의 작가였다.
아무튼 『일억 번째 여름』이라는 제목은 참 아득한 느낌을 준다. 내게 남아 있는 계절들을 아무리 모아본들 일억 번이라는 숫자에 닿을 수는 없겠지. 너무나 당연히, 터무니없게도. 그래서인지 이 소설이 품고 있을 시간의 감각이 궁금해졌다. 나의 일억 번째 여름은 없겠지만, 누군가의 일억 번째 여름에 무엇이 있는지를 살짝 들여다보고 싶었다.
🌳 결코 낯설지만은 않은 진화된 신인류의 이야기
『일억 번째 여름』은 인류 멸망 이후 유전 씨앗으로 태어난 신인류 ‘네오인’들의 이야기다. 이들은 유전 형질에 따라 까만 털만 자라는 ‘두두족’, 다양한 색의 털을 지닌 ‘미미족’으로 나뉜다. 미미족은 자연과 가까운 삶을 살고, 두두족은 과학과 기술 중심의 공간에 머문다. 태초는 같았던 두 부족 사이에 시간이 흐르며 물리적, 정신적 거리가 커지고, 결국 미묘한 계급이 형성된다. 그러던 중, 선조가 남긴 예언이 이 세계의 중심에 놓인다.
“어두운 꽃이 푸르러지는 일억 번째 여름이 오면 낡은 한 종족은 반드시 멸망한다.”
예언은 곧 현실이 되고, 네오인들의 세계에 종말의 조짐이 다가온다. 피할 수 없는 끝을 앞에 두고 다섯 인물(주홍, 이록, 일록, 연두, 백금)은 각자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며 쓰임을 찾아간다.
“우리에게는 반드시 살리고 싶은 사람이 있다.” (p.11)
“그럼에도 두꺼운 진심을 얄팍하게 으깨며 미소 지었고, 내가 자신의 쓰임을 완성한다고 말해 줬다.” (p.165)
나도 문득 그런 상상을 해본 적이 있다. 기꺼이 내 삶을 내어주고 싶은 사람이 있는가? 이 문장은 작가의 편지에도 있듯, 『일억 번째 여름』의 근간을 이루는 물음이다.
나의 쓰임은 무엇인가?
나는 누군가에게 어떤 의미로 존재하는가?
그 사람을 위해 나의 모든 것을 기꺼이 내놓을 수 있는가?
그저 감정의 깊이를 묻는 말처럼 보이지만, 『일억 번째 여름』 안에서 이 질문은 훨씬 더 깊은 층위로 가라앉는다. 작품 속 인물들은 각자 자신의 쓰임을 찾고, 그 쓰임을 통해 다른 존재를 살리고자 한다.
예컨대, 신체적으로는 미약하지만 고대어를 해독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이록’, 그리고 그를 업고 다니며 해석의 여정을 함께하는 ‘주홍’의 관계는 단순한 우정이나 연대를 넘어, 서로의 쓰임을 인정하고 지켜주는 사랑의 방식으로 그려진다. 이들이 서로를 도우며 나아가는 모습은 결국 위의 질문들로 수렴된다. 나는 나의 쓰임을 통해 누군가의 존재를 지켜주고 싶은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사랑이나 책임을 넘어, ‘내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나의 생이 가진 의미는 무엇인가’를 묻게 만든다.
그리고 그 대답은 무언가를 이루어야만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쓰임을 다하지 못하더라도 여전히 살아갈 이유가 있다는 것을 책을 통해 깨닫게 된다. 종말 이후의 세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일억 번째 여름』에 담긴 질문은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유효하다. 그리고 그 쓰임은 다분히 사적인 쓰임일 수도 있다.
‘쓰임’이라는 개념은 단순한 역할이나 직무를 넘어, 존재의 이유와 삶의 방향성을 의미한다. 특히 이 작품의 세계관처럼 생존 그 자체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가 중요해진 곳에서는, 쓰임은 곧 ‘나의 존재가 누구에게 닿고 있는가’라는 질문과 맞닿는다.
책을 읽으며 내 삶에서의 쓰임에 대해서도 고민해보게 됐다. 쓰임이란 꼭 거창하거나 사회적으로 유의미해야만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됐다. 누군가를 안심하게 만드는 말 한마디, 함께 길을 걸어주는 하루, 의미 없어 보일 수 있는 반복된 다정함 같은 것들. 작고 헤픈 것들도 누군가에게는 세상의 균형을 되돌리는 일일 수 있으니까.
이록과 주홍은 서로가 서로에게 지탱점이 되어주는 방식으로 이 쓰임을 보여준다. 이록이 아니었다면 주홍은 결코 세상을 구할 지식에 닿을 수 없었고, 주홍이 없었다면 이록은 세상을 구할 힌트가 있는 현장에 발을 디딜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이 서로에게 쓰임이 되어준다는 건, 서로가 없으면 완성될 수 없는 생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이록 없이 주홍은 이후를 어떻게 살게 될까.
중간중간 나오는 실마리들도 재미있었다. 특히 해독해야 하는 고대어로 등장하는 영어, 한국어, 불어 등등. 사전을 뒤적이며 주인공들보다 먼저 의미를 알아가는 과정이 꽤 스릴 있었다.
이야기는 종종 눈부시게 찬란하다. 그러나 그 빛에 눈이 멀어버린 사람처럼, 무언가 알 수 없고 막연한 슬픔에 빠지게 되기도 했다. 쓰임에 대해 나도 처음으로 생각해봤다. 특히 ‘역할’이 아닌 ‘관계’에서의 쓰임이라 더욱. 쓰임을 끝까지 다하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살아도 괜찮은 걸까? 혹은, 상실을 껴안고 그저 울고 있어도 괜찮은 걸까? 어떤 관계의 끝에 닿아보기 전에, 그 답을 내리고 싶다.
우리에게는 일억 번보다 더 소중할, 어쩌면 손으로 셀 수 있을 만큼의 여름만이 남아 있다. 여름이 주는 숨막히고 갑갑한 열기와 에어컨 아래의 시리게 서늘한 냉기를 한 번에 느낄 수 있는 소설. 비현실 세계를 선호하지 않지만, 철학적 질문에 빠져 인상을 깊게 쓰고 고민을 많이 하며 읽었다. 가볍고 쉽게 읽히는 구절 속에 이런 질문을 넣어두는 것도 정말 대단한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끝나지 않는 여름 속에서도, 결국 이야기가 향하는 곳은 ‘연결’이라는 말일지도.
이제 여름의 문턱에 아주 가까이 서 있다. 무언가를 지켜내고 싶은 마음, 그리고 그 마음으로 인해 나의 삶이 더 깊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셀 수 있는 찬란한 여름들을 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