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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미래에게 창비청소년문학 142
주민선 지음 / 창비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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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미래에게-주민선

책을 다 읽고 난 뒤에 제목을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나의 미래에게, 이 여섯글자에 나는 눈물이 났다.

<나의 미래에게>는 소중한 언니 미래에게 전하고 싶은 미아의 진심임과 동시에
미래를 지켜주고 싶은 동생에게 건네는 편지였다.
집을 떠나오기 전 미아의 눈을 마주고 나지막히 말해주던 ‘괜찮을거야’라는 미래의 말 덕분에
미아는 자신의 미래를 향해 걸어 갈 수 있었다.
그 길에는 분명 힘들고 포기하고 싶은 순간들도 있겠지만
그것만큼 살길 잘했다고, 여기까지 오길 잘했다고 미소 짓는 순간도 찾아올 것이다. 반드시.

전염병이 퍼지고 있다. 미아는 전염병 확진을 받고 집에서 격리하고 있다.
평소에 언니인 미래와 함께 쓰는 방을 독차지해서 아픈게 싫지만은 않다.
미아는 열병에 시달리며 희미한 정신 속에서 깨어난다.
눈을 뜨자 자신의 원수같은 언니 미래가 있다.
근데 이게 뭐야. 단 한번도 긴머리가 아니였던 적이 없던 언니의 머리가 형편없이 단발로 잘려져 있다.
“머리가 왜 그 모양이야?”
득달같이 달려들 것 같았는데 미래가 이상하다.
“머리카락에 무슨 짓을 한거야?”
다시 한번 묻지만 미래는 그저 미아의 열을 재본다.
“열이 떨어지면 끝난다고 했어. 괜찮을 거야. 넌 어른이 아니니까.”

그렇다. 이 세계의 모든 어른들이 죽어버렸다. 아이들만 살아남았기에 이 병은 피터팬 바이러스라고 불리운다.
미래의 말에 의하면 엄마 아빠는 방 안에서 죽었다고 한다. 피터팬 바이러스에 걸려 죽은 어른들은 미라처럼 가루로 변해 악취를 풍긴다고 한다.
실제로 테이프로 방문 틈을 다 막았음에도 안방에서부터 악취가 흘러 나오고 있다.

미래와 미아는 아궁이와 우물 등이 있어 전기없이도 생활할 수 있는 외할머니의 집으로 가기로 결정한다.
나가는 것을 망설이던 미아를 보고 미래는 말한다.
“괜찮을거야”
그건 자신들이 괜찮을거라 믿는 기도임과 동시에 미아를 괜찮게 하겠다는 다짐이었다.

어른들이 사라진 세계, 그 곳에서 아이들은 자신의 몫을 다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채 사회에 내던져졌다.
아이들은 순수하지만은 않았다. 보고 자란게 있어서였을까.
많은 물품을 구해온 팀에게는 더 많은 밥과 더 좋은 방이 주어졌고, 조장의 권력을 탐내는 이들이 생겨났고, 그 권력을 이용하는 조장 또한 존재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짓말을 하고, 그것을 폭력으로 대체하고, 날 해치기 전에 먼저 죽이겠다는 생각마저 생겨났다.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사회가 만들어졌다.

땅엔 수많은 싱크홀이 생기고, 이상한 식물들이 퍼져가고, 그에 따라 새로운 능력을 사용하는 신인류가 나타났다.
세대를 거듭할 수록 그들의 능력은 강해졌다.
자연은 그렇게 자신들에게 피해가 되지 않는 새로운 인류를 만들어 낸 것이다.

우리는 수도없이 말한다. 지구가 아프다고, 자연이 파괴된다고, 이제는 정말 되돌려야 한다고 말이다.
그런데 실제로 이 현상에 대한 심각성을 인지하는 이는 얼마나 될까.

<나의 미래에게>에서는 많은 과학자와 환경 운동가들은 이제 더 이상 미래와 희망은 없다고 자살해버린다.
모두가 포기해버린 상태, 지금 우리도 별반 다르지 않다.
어차피 내일은 올테니까, 지금 우리에게 큰 문제는 발생하지 않으니까 라며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있다. 인류가 멸망할 상황은 사실 우리 코 앞에 왔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나의 미래에게>는 자신의 언니인 미래에게 전하는 편지이자, 지켜주고자 하는 자신의 동생에게 전달해주는 기억이다.
책은 반말의 구어체 형태로 서술된다.
사실 이 편지의 주인공이 누구일까 에 대한 의문은 서론 이후부터는 완전히 지워졌다.
마치 나에게 이야기 해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너도 미래를 잃지 말라고.
생존을 위해 살지 말고 삶을 목표로 하라고.
생존의 끝에는 결국 죽음뿐이지만 삶은 수많은 시간들이 나열된 기쁨이자 슬픔이라고.

나의 미래에게, 그리고 우리들의 미래에게 말해주고 싶다.
바꾸기 위해 기억해야 하며, 기억하기 위해서는 써야 한다고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언제나 바꾸기 위해 걸어나가야 한다.
분명 그때 포기할 걸 싶은 순간들이 찾아오겠지만
그렇지 않은 순간들도 반드시 있을 것이다.
영조처럼 그저 한자리에 머물러 행복했던 기억을 곱씹고 싶을 때도 있겠지만,
우리의 목표는 생존이 아닌 삶이기에 우리의 시간을 가득 채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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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의 크기
이희영 지음 / 허블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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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지 못했던 행복에 대한 정의였습니다. 저의 안의 크기를 줄여주는 작품을 만나 기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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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의 크기
이희영 지음 / 허블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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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좋은 책을 읽고 나면 나는 항상 지인에게 내가 느낀 것들을 말해주고 싶어 안달이 난다.

<안의 크기>를 읽은 뒤 친구에게 물었다.

"행복의 반대말이 뭐라고 생각해?"

"행복의 반대말이면..불행 아니야?"

"그치, 나도 그렇게 생각했거든? 근데 행복의 반대말은 안행복이래.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대."


오랫동안 곰곰히 곱씹어 보았다.

안행복과 불행의 차이.

행복하지 않은것은 불행한 건가?

그냥 안행복한 상태인 것 아닌가?

불행이 행복의 반대말이라면 안불행한 것이 무조건적인 행복을 말하나?

사실 생각해보면 인생은 무작정 행복하지도 마냥 불행하지도 않은데 말이다.


새해를 맞아 서른 한 살이 된 설우. 

다니던 회사에서 권고 사직을 당한다.

그리고 그 날 저녁 애인인 S에게 이별 통보를 받는다.

원하지 않던 새해 계획표가 촤르르 펼쳐지는 느낌이다.

사직과 이별은 설우 계획에 없었는데 말이다.


갑자기 늘어난 시간 덕(?)에 설우는 티비에 나온 잔치 국수 맛집에 찾아가 보기로 결심한다.

지하철을 타고 또 다시 버스를 타 몇 분을 걸어가서 도착한 흑호 시장. 

잔치 국수 집에 들어가 국수 한 그릇을 시킨다.

여기, 엄청난 맛집이다.

설우는 흑호동이 마음에 든다.


설우에게는 작고 파란, 동그란 빛의 형태인 친구 "조"가 있다. 

설우는 조의 정제를 알고 있다.

엄마의 뱃속에 있던 시절, 자신의 옆에 꼭 붙어있던 아이,  태어났다면 설 과 우 라는 이름을 각각 가지고 살았을 쌍둥이 자매.


베니싱 트윈.

엄마의 자궁에 있던 쌍둥이 아기 중 한 명이 자연스레 엄마의 몸으로 흡수되어 사라지는 것.

설우는 그 사실을 엄마의 일기장을 몰래 훔쳐보고 알게 되었다.

설우는 그때부터 매 해 이런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조가 나 대신 태어났다면 어떤 삶을 살았을까? 왜 조 말고 내가 태어났을까' 


조가 늘 설우의 곁에 있었기에 설우는 언제나 죽음을 인식하고 있었다. 삶과 죽음은 항상 붙어 있는거라고. 

그래서 설우는 미지근한 삶을 살아왔다. 

안선택하고 안욕망하는 삶을. 

욕망과 행복은 죽음 앞에서는 모두 무의미한 것이니까.


<안의 크기>에서 '안'은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 중에서 '안행복'의 안은 '아니다' 라는 부정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상실과 고통으로 안행복한 순간이 찾아오면 안의 크기는 늘어나고 만다. 바람 넣은 풍선이 부풀듯이.

그 크기를 행복한 순간으로 줄여 나가는 것.

안의 크기를 줄이는 것. 

행복한 순간들은 매일 있다. 짧고 빠르게 스쳐 지나갈 뿐이다. 그리고 그 순간들은 언제나 우리의 안행복을 줄여주고 있을 것이다.


'안'은 아주 작아질 수도 매우 커질 수도 있지만 아예 사라지지는 않는다.

완벽하게 행복한 사람은 없고 무참히 불행하기만 한 사람은 없듯이.

안이 너무 커져 나를 덮쳐오기 전에, 잠식되어 버리기 전에 짧고 행복한 순간들을 이어 붙여 크기를 줄여 나가는 것. 그렇게 섬세한 일련의 과정들을 거쳐 나가는 것이 삶이 아닐까 생각한다.


설우가 만난 흑호동 사람들은 설우의 안은 물론 나의 안도 줄여 주었다.

각자의 슬픔과 비밀들을 안고 살아가고,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잘 사는것은 과연 무엇일까 고민하곤 하지만

직접 만든 필통을 나누어주고, 함께 술 한 잔 걸치며 속마음을 털어 놓고, 실수는 있더라도 화내지 않고 같이 맛있는 것을 먹는 것.

어두움이 있기에 더욱 빛나는 찬란한 행복의 순간들을 그들은 켜켜히 쌓아가고 있었다.


푸릇푸릇한 잎사귀가 돋아 나올 때쯤, 설우와 이름 모를 서점 주인은 다시 만날 수 있겠지.

별 뜻 없는 농담을 주고 받고, 서로의 옷자락을 여며 주며 맛있는 샌드위치와 잔치 국수를 먹는 날이 올 거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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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스트 : 환영의 집
유재영 지음 / 반타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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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산가옥이라는 단어가 주는 특유의 느낌이 있다. 축축하고 어두운, 어떤 시선이 따라 붙는 듯한 느낌.

<호스트-환영의 집>은 제목 그대로 적산가옥에 남아 새로운 이들을 반기는 호스트 역할의 존재가 등장한다. 이 집에 온 것을 <환영>한다고, 당신이 보는 <환영>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자고로 '집'이란 그 어디보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곳이다.

그런 소중한 집에서 정체불명의 소리가 나고,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인다고 상상해보라. 읽는 동안 누군나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아 소름이 끼쳤다.


규호는 어느 날 변호사에게 전화를 받는다.

최근에 돌아가신 규호의 큰아버지가 규호 앞으로 청림의 집 한 채와, 현금 2억원을 남겼다는 것이다.

그리고 큰아버지가 남긴 편지에는 단 여섯 글자만이 적혀 있었다.

'그 집을 지켜라.'

영원히 묻어두길 바랬던 기억이 스멀스멀 피어 올랐다. 

규호는 어린 시절 그 집에서 벌어진 끔찍한 사건이 떠올랐지만 지금 집을 팔고 현금을 보태면 빚을 갚을 수 있다. 실비의 병원비까지 해결할 수 있는 이 기회를 놓칠 순 없다.


가족들과 청림으로 이사를 간 수현, 드넓고 공기 좋은 이런 환경이라면 딸 실비도 금방 나을 수 있을 것만 같다.

새로운 환경에서 규호와의 관계도 점차 나아지지 않을까 기대한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가족이 아닌 다른 무언가의 기척이 느껴진다. 자꾸만 이상한 소리도 들리기 시작한다.

수상하다 여기던 중 실비와 실리가 편지 봉투를 하나 발견한다.

일본어로 써진 편지의 수신자는 이 적산가옥에 살았던 오카다 나오라는 여성이다.

편지에는 죽음과 삶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한 기이하고 잔인한 실험에 대한 이야기가 써져 있다.

그리고 오카다 나오는 이 실험을 실제로 행한 것 같다.

과연 이 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나오는 엄마가 죽기 전 한 말들을 종이에 옮겨 적는다. 엄마는 떠나기 전 경성에 가보고 싶다 말한다. 자신의 고향인 경성으로.


그렇게 의사가 된 나오는 교토를 떠나 경성에서 근무하다가 청림으로 근무지를 옮긴다.

나오는 우연히 청림 방직공장 사장 다카히로라는 남자를 치료해주게 된다.

청림호 근처, 2층 집 목조 주택을 짓고 있던 다카히로는 집이 완성되자 나오를 그 집에 데리고 가 청혼을 한다.

다카히로가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나오는 이 집이 마치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녀는 결혼을 승낙한다.

하지만 모든 비극의 이 집으로부터 시작된다. 아니, 꼭 비극 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나오가 살던 1940년대, 규호의 어린시절 사건이 벌어진 1995년. 그리고 현재인 2025년의 이야기가 각자 서술 되면서 적산가옥에 묻혀진 비밀이 서서히 드러난다.

이 세가지 시간은 얽히고 설켜 하나로 맞물린다.


나오와 수현은 각자 죽은 명숙과 실비를 살리기 위해 모든 것을 내던졌다. 나오가 되살린 명숙은 그렇게 그 적산가옥의 호스트가 되어 수현의 가족을 환영해주었고 그 시간들은 돌고 돌아 실비를 살리게 되었다.


그런데 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실비와 명숙은 정말 살아 있는 것인가.

규호는 수현을 살인자라 비난한다. "당신이 죽였어." 

하지만 수현은 말한다.  "그리고 내가 살렸지." 

과연 어떤게 맞고 어떤게 틀린 것인지 나는 도무지 알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나오의 엄마인 금자에서부터 시작된 모성애는 나오와 명숙을 건너 수현과 실비에게도 전해진 게 아닐까 싶다.


마지막에 삽입된 사진의 적산가옥 앞에 서 있는 두 사람의 환영은 나를 또 한번 소름 끼치게 만들었다. 진정한 환영의 집이었다.


<힐 하우스의 유령>의 가족과 집이라는 소재와 <프랑켄슈타인>의 새롭게 만들어진 생명체, 그리고 적산가옥이 만나 새로운 K-호러가 펼쳐졌다.

이 특이하고도 놀라운 조합은 읽는 동안 높은 몰입감을 선사했고 색다른 호러를 맛보게 해주었다.

추운 겨울날 이불 속에서 오싹한 호러를 원한다면 <호스트>를 읽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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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식기
아사이 료 지음, 민경욱 옮김 / 리드비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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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이 료의 <생식기>는 이곳 저곳에서 추천이 많아 언젠가 한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딱 그 뿐이었다.

제목이 왜 <생식기>인지 깊게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생식기가 화자로 등장하는 걸 본 순간 난 충격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생식기가 화자라고...생식기의 입장에서 바라본 인간에 대한 내용이라고...누가 감히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새로운 시각과는 별개로 내가 이 이야기에 온전히 빠져들 수 있을지 걱정됐다.

생식기인 '나'가 하는 이야기는 놀라웠다. 제 3자의 입장에서 바라본 인간의 행동, 심리, 감정 변화 등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연필을 손에서 놓지 못한 독서 시간이었다.


화자인 '나'는 아주 오래 전부터 수 많은 종의 생식기 역할을 수행해 왔다. 현재 '나'가 생식기로 활동하고 있는 개체의 이름은 다쓰야 쇼세이. 32살의 평범한 직장인으로 '나'가 맡은 두 번째 인간 개체, 수컷 인간으로는 처음이다.

쇼세이는 흔히 말하는 공동체 감각이 없는 개체이다. 쉽게 말해 공동체를 위해 개체가 노력한다 거나, 타인을 도와주려는 행위는 일절 하지 않는 다는 말이다.

쇼세이는 어릴 적부터 자신은 무언가 다르다는 것을 느껴왔다. 바로 동성애 개체라는 것이다.

일본 사회에서, 특히 1989년 생인 쇼세이가 학창 시절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것을 밝히는 것은 공동체로부터, 즉 가정과 학교로부터 방출될 가능성과 연결되는 행동이었다.

그랬기에 쇼세이는 이 비밀을 홀로 간직한 채 이성애 개체와 똑같은 행동을 하는 의태 과정을 거친다.


쇼세이라는 개체가 생성된 지 18년 후, 쇼세이는 자신의 생성지가 아닌 다른 서식지로 옮기게 된다. 대학에 진학한 것이다.

자신의 힘으로 경제 활동을 할 수 있게 된 쇼세이는 이제 더 이상 자신을 다른 이성애 개체와 동일 시 할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닫는다. 쇼세이는 그렇게 [온전함]을 느끼게 된다.


이 책에서 쇼세이를 제외한 대부분의 인간 개체들은 공동체 감각을 지니고 있다.

공동체에 공헌하려는 마음이 공동체와 개인의 관계를 생성하는데 가장 중요하며, 이 관계는 개인의 행복감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즉 공동체의 확대, 발전, 성장이 이루어질 수록 개인 또한 행복하다는 것인데,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언제든 성장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더 좋은 집으로, 더 좋은 직장으로, 더 좋은 인간으로.

끝이 없는 레이스, 영원히 반복될 것만 같은 이 경쟁 속에서 인간들은 다른 누군가가 탈출하지 않도록 감시하고 있다.

아니면 탈출한 누군가를 보고 자신 역시 멈추길 바라고 있는 것일지도.


또한 이 책에서 크게 다루는 것이 동성애이다.

책에 등장하는 한 국회의원은 동성애는 잘못된 것이며, 공동체를 위한 생산성이 전혀 없는 인간이라 비난한다. 심지어 동성애는 제발 숨어 살길 바란다고 까지 말한다.

그리고 쇼세이가 가족에서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것을 밝히지 못한 이유는 아버지가 이 국회의원과 같이 일하고 있다는 사실이 가장 클 것이다.


동성애가 생산성이 없다는 말, 즉 아이를 생산해내지 못한다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모든 종은 자신의 종족을 유지하려 애쓰며 그것은 가계도를 끊임없이 늘리는 행동으로 직결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식을 생산하지 못하는 동성애는 잘못된 것이며, 동성혼, 커밍 아웃 등과 같은 행동들은 언제나 이성애의 오케이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성애는 동성애의 오케이를 받지도 않으면서, 멋대로 공동체의 주축으로 행세하며 이것 저것을 요구하고 있다.

사과 한마디 없이.


동성애, 자연 파괴, 성장을 강요하는 사회 속에서 나는 이 시대의 문제점 모두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 역시 항상 [다음]을 생각하고 움직이지 않았나. 

[다음]이 없을 때 불안 해하지 않았었나 하고 말이다.

이 모든 행동들엔 그럴 의도가 없었다고 해도, 결국엔 내가 속한 공동체(가정, 회사, 지역, 사회)의 성장을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인간은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개체가 아니다. 그저 생각하고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또 다른 동물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인간일지라도 차별하고 배척하며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제멋대로 자연 위에 자신들의 잣대를 올려놓고, 자연계를 착취하고 섭렵하려 한 뒤 이제 와서 자연을 되살리 자며 악다구니를 쓴다.

생식기가 바라본 인간이란 참 나약하고 어리석으며 한없이 작은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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