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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의 시간 ㅣ 교유서가 다시, 소설
김이정 지음 / 교유서가 / 2024년 9월
평점 :
지형의 아버지는 지식인입니다.
제주도에서 말도 키우고,
서해에 와서는 새우양식장을 하지만,
도무지 이런 일에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아버지는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 동이 트기도 전에 운동을 나갑니다.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어머니 때문인 걸까요.
늘 책을 읽으며 공부하고,
가족들에게 다정하며,
이웃들에게 친절한 그는 정말 좋은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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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섭은
만주와 상해를 오가며 독립운동을 하는 셋째 숙부와
독립자금을 대어주는 가족들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 이념에 젖어들게 됩니다.
인간이란 너무나 완전한 존재라
고귀한 사회주의 이념을 실현한다면
누구나 평등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이념 갈등과 한국 전쟁으로 이섭은 가족을 잃습니다.
남한에서 이섭이 설 수 있는 자리는 어디에도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혹시 헤어진 가족들이 돌아올까봐
이섭은 그들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버텨 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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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얼마나 나약하고 모순된 존재이던가요.
이념 자체는 순수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고 실행하는 인간은
종국에는 타락하고야 말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념을 왜곡하고 혐오하며
수많은 피를 뿌리고야 마는 사악한 존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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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만이
이 세상을 파국으로 치닫지 않도록 하는 길이라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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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에 세상에 처음 나왔고
올해 교유서가에서 개정하여 다시 선보인 이 작품은
김이정 작가가 아버지의 미완성 자서전을 읽은 순간부터
마음의 빚으로 느끼고 있었던 아버지의 이야기를 쓴 것이라고 합니다.
일제시대, 광복, 이념갈등, 전쟁, 유신정권 등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배경으로 하기에
글이 무겁고 슬픔에도,
표현들이 또 너무나 아름다워서
애처롭고 쓸쓸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작가의 편지는,
오빠에게 가 닿았을까요.
p38
동이 트는 동쪽 하늘이 붉은 피를 언뜻언뜻 내비치며 산통을 시작하고 있었다.
p45
사지를 결박당한 듯 다리를 모은 채 부유물처럼 떠다니는 새우. 새우마저 자신을 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목을 조여왔다. 이섭은 새우의 형태가 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길고 뾰족한 부리를 앞세우고 긴 수염을 휘날리며 우아하게 유영하는 새우는 그러나 물속만 벗어나면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짧은 발들을 가지런히 모으고 몸을 구부려 옆으로 누워 있는 꼴은 언제나 투항의 자세처럼 보였다.
p68
수문 너머 바다의 드넓은 갯벌 위로 잘 익은 홍시 같은 붉은 해가 곧 떨어질 듯 위태롭게 걸려 있었다.
p88
장인과 이섭은 서로의 가슴에 박힌 대못을 차마 뽑아내지 못한 채 두꺼워져가는 녹을 못 본 척 외면하고 있었다. 이젠 녹이 너무 두꺼워 도저히 못을 뺄 수도 없었다.
p103
이섭은 무릎이 꺾인 채 길 위에 퍼질러앉았다. 지나온 길은 이미 오래전에 지워지고 눈앞의 길은 점점 아득해졌다.
p150
이섭은 그제야 본의 아니게 자신이 뺏은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당연히 자기 것이라고 여겼던 것들은 어쩌면 자신이 빼앗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p169
도망치는 영석의 발소리가 지형의 가슴 한가운데를 밟고 지나갔다. "왜 갑자기 첫사랑은 물어?" 엄마가 순간 손을 멈추고 지형을 빤히 쳐다보았다. 지형은 얼굴이 붉어졌다. 다급하게 도망치던 영석의 발소리가 가슴에 멍자국을 남긴 것 같았다.
p197
파월 장병들은 이미 월남에서 철수를 하고 있는데 지금까지 총을 들고 포탄에 살점이 튀는 밀림을 혼자 뛰어다니며 비명을 질렀을 남자의 생이 이제는 자유로워졌을까.
p215
그의 부드럽고 말끔한 손이 나쁘지 않았다. 적어도 그는 자기 자신 하나는 온전히 지켜낸 것 같았다. 타인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자신이나 가족에게 상처를 주는 일은 없이 살아왔을 것이다. 위선 없는 그의 생이 문득 부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