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우연이 아닙니다 - 삶의 관점을 바꾸는 22가지 시선
김경훈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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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우연이 아닙니다>는 퓰리처상 외 다수의 보도 사진상을 수상했으며 로이터 통신에서 근무 중인 김경훈 기자의 신작이다. 나는 그의 전작을 모두 읽었다. <사진을 읽어드립니다>로 사진의 역사를 돌아볼 수 있었고, <사진이 말하고 싶은 것들>에서는 사진 한 장 한 장을 예로 들어 전작에서 던졌던 화두에 대한 답을 찾아 주었다. 출판사에서는 이번 신간을 인문에세이라고 소개했다. 분명 사진을 소재로 한 책일 터인데 인문에세이라고 강조한건 이 책의 부제를 삶의 관점을 바꾸는 22가지 시선으로 놓은 이유와 연결되리라고 예상했다.


이번 책에는 전작보다 사진을 많이 싣지 않았다. 사진기자의 책이라서 유명짜한 사진들이 많을 거라고 예상하고 고른 독자라면 실망할 지도 모른다. 그런 책을 원한다면 <사진이 말하고 싶은 것들>을 추천한다. 이번 책에서는 사진에 대한 소개나 설명을 대부분 텍스트로 대신했다. 결정적 순간을 뷰파인더 안으로 끌어오는 그의 능력은 그 장면을 묘사하는 스토리텔링 력에서도 여실히 드러냈다. 사진 없이 사진을 보는듯한 착각을 하게했다. 어떤 사진 설명은 텍스트로 만족했지만 어떤 사진은 직접 찾아보았다. 구도와 배경의 숨은 이야기들은 실제 사진을 보며 읽었다.


들어가는 글에서 그는 지난 20년간 전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취재한 경험을 통해 바라본 것들을 담았다고 했다. 저자가 느낀 것을 독자가 똑같이 느낄 순 없겠지만 열린 마음으로 듣고, 각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서로 다른 부분에서 공감하며 자신만의 프레임을 만들어보라고 했다. 그는 강조해왔다. 사진 속에 이야기를 담아서 셔터를 눌러보라고. 같은 장면이라도 어떤 각도에서 찍느냐에 따라 다르게 보이듯 이야기를 담아서 찍으면 그것이 자신의 프레임이 되어 갈 것이다. 많이 찍어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런 책을 읽으며 생각하고 있는 프레임을 어떻게 만들어 나갈지 고민해보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다.


이 책에 실린 사진 중에 인상 깊은 사진 몇 점을 소개한다.

 

저자는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일본 사회의 장애인 복지 인프라 시설과 장애인을 보는 시선 등을 알리려는 취재 의도를 가지고 하체 장애를 지닌 휠체어 댄서 감바라 씨를 취재했다. 취재 첫날 저자는 자신의 의도가 그동안 미디어에서 보던 장애인에 대한 스테레오타입 이미지들과 섞여 만들어진 구상이었으며 감바라씨를 철저하게 사회적 약자로 그리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말았다. 감바라씨는 출근할 때 경사가 심한 에스컬레이터를 능숙하게 탄 뒤 바닥에 닿기 전에 번쩍 휠체어로 점프해 멋지게 착지했고, 퇴근 후 무용연습을 할 때 재미있는 농담으로 주변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모임의 중심이 되는 사람이었다. 어린 딸과 외출할 때는 휠체어에 탄 자신의 무릎에 딸을 앉히고 씽씽 달려 즐겁게 해주었으며 집안일도 앞장서서 하는 남편이었다. 그의 아내는 남편에게 장애가 있다는 것이 그다지 실감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다가 저자는 댄스 공연을 앞두고 대기실에서 무대의상을 입는 모습을 보다가 깜짝 놀랐다. 어린 시절부터 휠체어의 바퀴를 굴리고 두 팔로 몸을 지탱하며 생활하는 동안 자연스레 형성된 그의 상반신 근육은 이소룡의 뒷모습 같았다. 자신의 뒷모습 사진을 본 감바라씨는 아주 흡족해했다. 그동안 일본 미디어의 취재 대상이 된 감바라씨의 이런 모습을 찍은 기자는 한 명도 없었다.




"한 사람의 외양을 사진으로 찍는 것과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는 포트레이트 사진을찍는 것은 엄연히 다른 일이다."  

- 폴 카포니그로


무의식적으로 작용하는 스테레오타입으로 인해 그 사람이 가진 본래의 가치를 놓칠 수 있다는 뜻이다. 저자도 스테레오타입에 갇혀있었다면 자신이 가장 좋아한 그의 등을 사진에 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우사인 볼트의 저 사진을 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드론으로 찍은 거냐고 묻는다. 그러나 당시 드론은 너무 크고 항공전문가들이 사용하는 것이었다. 그럼 저 사진은 어떻게 찍은 것일까? 이른바 대형 건축물의 캣워크(Cat walk)라 부르는 공간에 들어가서 찍은 것이다. 천장을 촘촘히 연결한 간이 작업 복도는 주로 천정 조명을 점검, 보수하고 시설물을 관리하는 요원들이 주로 이용한다. 추락 위험 때문에 고양이가 좁은 공간을 걸을 때처럼 조심스럽게 한발한발 내디디며 걷게 된다고 해서 캣워크라 이름 붙여졌다. 저자는 캣워크에 올라갈 기자로 정해졌을 때 높은 곳에 올라가는 게 무서웠지만 새가 하늘에서 내려다보듯 지상을 찍을 수 있기에 용기를 냈다.


우사인 볼트는 200미터 결승 세계 신기록을 달성한 뒤 트랙 위에 벌렁 누웠다. 저자는 베이징 주경기장 천장의 좁은 통로에 등산용 자일로 몸을 묶고 저 장면을 찍었다. 무거운 카메라와 렌즈를 몸에 꽁꽁 고정시킨 뒤 경기의 흐름에 따라 캣워크를 이리저리 헤집고 다니는 중노동이었지만 육상 마지막 경기날까지 캣워크에 계속 오를 수밖에 없었다. 선수들의 결정적 순간을 잡기 위해 뷰파인더에 집중하면 수십미터 난간 위에 있다는 사실을 잊게 되었다. 수년 동안 갈고닦은 최고의 기량을 드러내는 선수들의 움직임을 보면서, 최고의 사진으로 그들의 영광을 포착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일본 유기견의 실태와 안락사 방식을 취재한 내용을 읽으며 우리나라의 모습과 너무나 유사해 깜짝 놀랐다. 귀엽다는 이유로 펫숍에서 산 개를 무책임하게 버리고 버려진 개들이 유기견 센터로 가게 되면 일주일 안에 주인을 못 찾을 경우 안락사 당한다. 단 안락사 방법은 우리와 달랐다. 우리나라는 주사로 처리하는데 일본은 가스실로 보낸다. 그 방식이 마치 아유슈비츠 같아서 소름이 끼쳤다



저자는 자신이 키웠던 진순이와 닮은 강아지가 가스실로 향하는 모습을 보며 안타까웠지만 집으로 데려올 수는 없었다. 그저 촬영을 멈추고 먼저 현장을 떠나야만 했다. 10여 년 전 취재했던 상황과 좀 달라졌을까? 일본 대부분의 지방정부는 일주일이었던 유기견 보호 기간을 폐지하거나 대폭 연장했고, 유기견 센터에서 입양하는 사례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고 한다.


저자는 우리 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를 계속 취재하고 사진으로 기록하겠다고 말한다.


p.170


사진으로 기록된 현실은 때때로 거의 아물어가던 상처에 뿌려진 거친 소금 같습니다. 겉으론 괜찮아 보이지만, 그 안의 문제들을 들춰 마음을 쓰라리게 만들지요. 하지만 소금을 문질러 생기는 아픔이, 문제가 있는데도 모른 척 넘어가도록 달콤함으로 무마시키는 설탕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취재 현장에서 보고 느끼고 배운 것이 사진을 통해 전달되기를 소망합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가족의 이야기를 이전보다 자주 했다. 위 에피소드에서 강아지를 키우고 싶다고 하는 딸에게 책임감 있게 키울 수 있겠냐고 묻고, 사진을 찍겠다고 한 아들에게 선배로서 카메라 사용법을 알려주고, 어머님이 휴대폰으로 찍어 보낸 사진을 보고 무한 칭찬을 하기도 한다. 그는 어머님이 사진을 찍으러 다니면서 많이 걸어다니게 될 것이니 치매 예방 효과를 기대했는데 다른 좋은 효과도 있었다. 어머니의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그간 자신이 어머니에 대해 모르는 것이 참 많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애정 어린 칭찬을 받은 어머니는, 자신의 재능을 물려받아서 아들이 사진기자가 된 게 아니겠냐며 의기양양해하고 자랑스러워하셨다. 어머니의 산책 사진 프로젝트이후 부자간에 대화가 풍성해졌고 어머니의 마음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게 되었다.


p.194


사진은 우리를 어느 시절로 연결하고, 또 사진 속 인물들에게로 연결합니다.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는 순간 사진에 정지된 장면이 기록됩니다. 그리고 사진에는 그 순간의 이야기가 저장됩니다. 이야기는 때로 기나긴 촉수를 뻗어 사진을 보는 사람들을 서로 연결시켜 줍니다. 어머니의 사진이 저와 아버지, 우리 가족을 연결하는 것처럼요. 훗날 어머니의 사진을 온 가족이 보게 된다면, 그때마다 우리 가족은 더 단단하게 연결될 겁니다. 그래서 생각합니다. 사진이 있어서, 사진으로 남겨 공유하고 싶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곁에 있어서 다행이라고요.



사진 기자가 되고 싶거나 사진에 조예가 깊은 독자들은 저자의 책들을 통해 사진 찍는 법과 읽는 법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김경훈 기자의 전작 세 편을 모두 읽으며 사진에 대한 그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정지된 화면 속에 저장되는 이야기! 뷰파인더 속에 들어오는 대상에 애정을 가질 때 가능한 일이다. 그는 모든 대상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 같다. 그의 문체에서 느껴졌다. 세상을 바라보는 내 눈이 너무 삭막한 걸까. 나도 이야기가 있는 사진을 찍고 싶다며 말로는 떠들어대지만 결과물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위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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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기린 선생님 난 책읽기가 좋아
소연 지음, 이주희 그림 / 비룡소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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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이 하루 동안 가장 오랜 시간 만나는 어른은 부모 다음으로 담임 선생님이다.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어른이기에 아이들을 잘 이해하고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아이들 입장에서도 담임 선생님이 그렇다고 느낄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선생님이 동물이 되어 같이 신나게 놀아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자. 그 상상대로 이야기가 펼쳐지는 동화책이 비룡소에서 출간되었다.


10회 비룡소 문학상을 수상한 <갑자기 악어 아빠>는 동물로 변한 아빠 엄마와 마음껏 뛰어노는 이야기였다면 신간 <갑자기 기린 선생님>은 선생님들이 동물로 변해 학생들과 신나는 운동회를 벌인다. 두 작품 모두 소연 작가의 글과 이주희 작가의 그림이 환상적인 궁합을 자랑한다. 상상력 가득한 이야기에 생생한 등장인물들의 표정과 몸짓은 그야말로 찰떡이다. 이야기도 재미있지만 그림만 봐도 절로 웃음이 난다.


<갑자기 악어 아빠>에서 부모들이 동물로 변한다는 뉴스 속보 이후 자연스럽게 윤찬이와 윤이의 아빠가 악어로 변하듯 <갑자기 기린 선생님>도 선생님들이 동물로 변한다는 뉴스 속보로 시작한다. 작은 운동회 날 아침이었다. 윤찬이네 반 아이들은 교실에서 뛰거나 장난치면 경고 스티커를 날리는 무뚝뚝한 선생님보다 재미있게 잘 놀아주는 선생님이면 얼마나 좋을까 재잘거리며 기린 모양 응원포스터를 만들고 있었다. 그 때 갑자기 들어오신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경고 스티커를 날리려고 했다. 아이들이 안 돼요!” 라고 한 순간 선생님이 기린으로 변한다.




기린으로 변한 선생님은 아이들과 놀아주었고 장난치다 다칠 것 같으면 스티커 대신 목으로 감싸주거나 혀로 다치지 않게 해주었다. 아이들은 선생님 목을 푹신한 미끄럼처럼 타고 꼬리를 장난감처럼 잡아당기며 신나한다. 그럼 다른 반 선생님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토끼, 코알라, 앵무새로 변했다. 아이들은 평소 선생님들의 태도와 반대로 행동하는 동물 선생님과 신나게 운동회를 했다




재미있는 표정이 살아있는 운동회 장면을 보면서 어린이 독자들은 같이 운동회를 즐기게 될 것이다. 평소 다른 반 선생님을 부러워한 아이들, 담임 선생님이 좀 무섭다고 생각하는 아이들에게 대리만족을 줄 수 있는 동화책이다. 또한 기린 선생님이 아이들이 뛰어노는 것에 경고를 주는 이유를 알면 선생님의 진심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어른들이 우리에게 잔소리 좀 안 했으면 좋겠다, 우리가 하는 일을 강제하지 말고 같이 놀면 좋겠다' 는 상상이 <갑자기 악어 아빠>에 이어 <갑자기 기린 선생님>에도 멋지게 펼쳐진다. 이 책들을 읽은 어린이 독자 중에 어른들도 우리랑 재밌게 놀고 싶은데 부끄러워서 먼저 말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라고 생각하는 눈치 빠른 독자가 있을 수도 있다. 아마 그런 독자라면 상상력을 쑤욱쑥 키워 더 재미있는 동화를 쓸거라고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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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어링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98
조규미 지음 / 자음과모음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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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힘든 게 뭐 있냐? 해주는 밥 먹고 공부만 하면 되는 걸!”

요즘도 자식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부모가 있는지 모르겠다. 나는 자주 들었다. 어른이 되면 신경 쓸 일, 걱정할 일이 수두룩하다. 학생일 때가 좋지, 뭐가 힘드냐, 공부만 하면 된다던 말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그저 입 꾹 닫을 수밖에 없었다. 요즘 말로 치자면 할많하않이었고, 꾸역꾸역 올라오는 반박을 목구멍으로 다시 밀어 넣어야 했다.


청소년에게 따라 붙는 단어인 성적, 친구, , 미래 등등은 불안과 두려움을 기본값으로 깔고 있다. 희망이란 놈은 공부 잘 하는 아이들에게만 있는 단어 같고 내게는 좀체 오지 않는다. 어른들이 살기 힘들다는 걸 아이들이 모르진 않는다. 그래도 어른이니까, 아이들에게 좀 친절할 순 없을까. 어른보단 사는 게 쉽지 않냐고, 징징거리지 말라고 퉁박주기 보다 공감어린 한마디를 해주는 게 그리도 어려울까. 어른들에게 대단히 거창한 걸 바란 게 아니었다.


예나 지금이나 어른들은 청소년을 이해하기 어렵다. 그런데 참 희한하다. 어른이 되면 기억이 홀랑 사라지는 건지, 자신도 청소년기를 거쳐 왔으면서, 그 때 듣고 싶었던 말을 해주기가 그렇게 힘든 건지... 결국 어른보다는 친구에게 위로를 받거나 스스로를 다독이는 법을 터득하게 된다. 조규미 작가의 소설 <페어링>의 등장인물인 청소년들도 그랬다.


그저 그런 열일곱살 고수민은 신학기 첫날부터 찬란한 흑역사를 썼다. 교실에서 무선이어폰을 분실했고 담임선생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종례시간에 들어온 선생님은 이어폰을 찾는다며 아이들을 하교시키지 않고 1시간이 넘도록 책가방과 사물함까지 탈탈 털었지만 이어폰은 나오지 않았다. 수민은 극혐 1로 등극했다. 반 친구들을 잠재적 도둑으로 만들어버린 수민은 극혐 타이틀을 쉬이 벗을 수 없었다. 반면 배치고사 전교1등으로 입학한 세진은 당연하게 반장이 되었다. 세진은 선망과 부러움의 대상이며 다른 차원에서 살게 될 아이들이라는 뜻으로 다차원이라 불리는 특별 그룹의 멤버다.


다차원 멤버 네 명은 봉사활동과 프로젝트 활동은 물론 과외도 같이 받는다. 그런데 어느 날 세진이 수민에게 보육원 봉사활동에 같이 가자고 한다. 수민은 거부할 겨를도 없이 얼떨결에 동의하게 되었고, 프로젝트 활동도 같이 하게 된다. 다차원 멤버 중 1명이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어 세진이 수민을 끌어들인 것이다. 멤버로서 영입한 게 아니라 끌어들였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이유는 공부도 그렇고 그런 수민을 세진이 입맛대로 휘두르기 위함이었다. 보육원에 가서 수민은 적극 활동했으나 나머지 세 명은 얼굴만 삐죽 내비치고 일이 있다면서 먼저 가버렸다. 봉사는 수민이 혼자 했는데 멤버가 다 활동한 것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얼떨결에 다차원에서 활동하게 된 수민은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두지 못하고 끌려다니는 형국이 되고, 그 와중에 큰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한편 수민은 방송실에서 주인 없는 이어폰을 가져오게 되었는데 그 이어폰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아무리 청력이 남보다 뛰어난 수민이지만 어떻게 이어폰에서 목소리가 들릴까. 이상한 일이었지만 수민이 심리적으로 위축되고 고민스러울 때마다 이어폰의 목소리는 수민의 말을 들어준다. 고민에 대한 해답을 명쾌하게 제시해주는 건 아니지만 수민의 마음이 안정된다.


"방법이 있겠지, 잘 찾아봐."

"바보 같은 짓 한 거 아니야. 너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바보 같은 거지. 너무 걱정하지마. 분명 도와줄 사람이 있을 거야."

"네가 사람들 생각을 모두 아는 것은 아니잖아. 선입견 가지지 말고 생각해 봐. 있을 거야."


이 소설은 여느 고등학생들이 겪는 비슷비슷한 고민들에 더해 학교 방송반에 전해져오는 전설과 교내 시험문제 유출 비리, 그리고 말하는 이어폰이라는 판타지적 요소까지 넣었다. 말하는 이어폰은 수민의 고민을 들어주고, 세진과 수민이 가까워지는 기폭제이자 미스터리적인 역할은 물론 소설적 재미를 배가시켜 준다. 사건을 적극 해결하는 건 아니나 수민이 선택하고 행동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수민이 여러 사건에 휘말렸을 때 이야기를 들어준 존재가 바로 이어폰이었다. 수민의 행동을 자기 식대로 해석하고 남들에게 소설처럼 말하는 엄마에게 고민을 어떻게 이야기 할까. 그렇다고 절친이라 할 만한 친구도 없다. 그런 수민에게 이어폰은 선배였고 친구였다. 이 리뷰의 처음에 언급한 것처럼 십대에게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존재가 필요하다. 수민에게 이어폰이 그러했고, 수민은 세진에게 그런 존재가 되어주었다.


마지막에 세진이 문제가 급 해결되는 것 같아서 아쉬웠지만 이어폰을 세진에게 넘겨주게 되는 상황은 자연스러웠다. 수민의 고민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할 순 없다. 고민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만 말하는 이어폰이 이젠 세진에게 더 필요하다는 뜻이리라. 물론 등교 첫날 잃어버린 수민의 이어폰을 엉뚱한 곳에서 찾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소설은 중고등학생들이 공감하며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어떤 때보다 자신의 말을 들어 줄 누군가가 절실한 시기이니까.

 

 


**위 리뷰는 네이버카페 컬처블룸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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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의 소멸 - 우리는 오늘 어떤 세계에 살고 있나 한병철 라이브러리
한병철 지음, 전대호 옮김 / 김영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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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이 넘쳐나는 시대다. 오래오래 사용하고 고이고이 간직하는 건 물자 부족시대의 미덕이었다. 오늘날은 자본주의의 작동 원리에 발맞춰 끊임없이 소비하는 게 미덕이다. 아이들은 교실 바닥에 떨어진 연필이나 지우개를 줍지 않고, 어른들은 2년 마다 새 스마트폰을 구입한다. 애정을 가지고 소중하게 아끼는 물건이 있는가? 선뜻 떠오르는 것이 없을 것이다. 그만큼 물건 귀한 줄 모르고 사는 세상이 되었다.


철학자 한병철의 신간 제목 <사물의 소멸>을 보고 이렇게 예상했다. ‘사물이 너무 넘쳐나서 아낄 줄 모르니 그 가치가 소멸되었다는 뜻일까?’ 책을 읽어보니 역시, 철학자는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디지털화한 세상에서 넘쳐나는 정보들이 사물을 소멸에 이르게 한다는 뜻으로 사용했다. 부제가 우리는 오늘 어떤 세계에 살고 있나이다. 지금 살고 있는 세계에 아무런 비판 의식없이 갈수록 편리한 사회가 얼마나 좋으냐며 누리자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편, 코로나 이후 더 온라인 세상에 갇혀 살게 되었다고 자조하는 이들도 있다. 저자가 짚어내는 오늘날 우리 삶의 모습에 독자들은 공감하고 성찰하게 될 것이다. 길지 않은 분량이지만 생경한 철학자의 인용이 제법 있고, 단문이나 아포리즘적 성격의 문장들이 있어 읽기 쉽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마지막에 실린 두 건의 인터뷰는 저자의 주장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p.41


오늘날 우리는 어디에서나 스마트폰을 꺼내 들고 우리의 지각을 그 장치에 위임한다. 우리는 그 화면을 통해 실재를 지각한다. 그 디지털 창은 실재를 정보로 희석하고, 우리는 그 정보를 등록한다.

사물은 우리를 감시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사물을 신뢰한다. 반면에 스마트폰은 정보기계일 뿐 아니라, 끊임없이 사용자를 감시하는 매우 효과적인 정보원이다. 스마트폰 내부의 알고리즘들에 귀의한 사람이 스마트폰에 의해 추적당한다고 느끼는 것은 정당하다. 스마트폰은 우리를 조종하고 프로그래밍한다. 우리가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스마트폰이 우리를 사용한다. 참된 행위자는 스마트폰이다. 우리는 이 디지털정보원에게 내맡겨지고, 스마트폰의 표면 너머에서 다양한 행위자들이 우리를 조종한다.


내가 자유롭게 내 의지대로 접속하고, 정보를 읽고, 물건을 소비한다고 생각하며 산다. 그러나 아니라는 것이다. 스마트폰 안에서 행해지는 이 행위의 주인이 과연 나인가? 아니다. 신자유주의 체제 안에서 우리는 자신을 실현한다고 믿으면서 스스로를 착취하고 있다. 자발적로 말이다. 스마트폰 속 세상이 실재인 양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스마트폰에 저장해놓은 정보를 다시 보지 않고, 보시하듯 좋아요를 누르며 SNS를 떠다니지만 실제로 만나는 친구는 없고, 끊임없이 소통하지만 공동체에 속하지는 못한다.


책을 읽다보니 사물을 소유해야 한다는 주장인 것 같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물 과잉 세상에서 무분별한 소비를 지양하자고, 지구를 위해 자꾸 사고 버리는 행동은 그만하자는 주장에, 나는 동의한다. 스쳐지나가고 손에 잡히지 않는 반사물인 정보보다 사물의 가치를 강조하는 내용은 더욱 헷갈리게 만들었다. ‘주크박스에 관한 여담에 나오는 아래 내용을 읽으며 어느 정도 오해는 풀었다.


p.139~140


디지털화의 물결에 휩쓸려 우리는 모든 물질 의식을 상실했다. 세계의 재낭만화는 세계의 재물질화를 전제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지구를 이토록 야만적으로 착취하는 것은, 우리가 물질을 죽은 것으로 단정하고 땅을 자원으로 격하하기 때문이다. '지속 가능성'만으로는 우리가 지구를 대하는 태도를 근본적으로 고치기에 충분하지 않다. 땅과 물질에 대한 전혀 다른 이해가 필요하다. 미국 철학자 제인 베넷은 저서 생동하는 물질 Vibrant Matter>에서 다음과 같은 견해를 출발점으로 삼는다. "죽어 있거나 철저히 도구화된 물질의 이미지가 인간의 오만과 지구를 파괴하는 우리의 정복환상 및 소비환상을 키운다." 물질을 다루는 새로운 존재론, 물질을 생동하는 놈으로 경험하는 존재론이 생태학에 선행해야 한다.



<아트리뷰>와의 인터뷰에서 저자는 현재에, 순간에 초점을 맞추는 디지털 시대는 시간의 향기를 몰아낸다. 실재의 정보화는 공간 및 시간의 상실로 이어진다.”라고 했다. 나는 이 말로 사물의 소멸을 이해할 수 있었다. 개인이 애장하는 사물에는 시간의 더께가 쌓여있다. 물건을 소장하기보다 스쳐지나가는 정보로만 취급하는 시대에 시간의 향기를 품은 사물이란 있을 리 없고 그것을 두는 공간 역시 없는 것이다. 저자가 어느날 우연히 만나 손에 넣은 주크박스로 쌓은 히스토리를 읽으며 또, ‘역시 철학자 답구나!’ 했다.


범인인 나는 소비에 동반하는 죄책감을 느끼며 산다. 여전히 너무 많은 책을 그러모으고, 몇 년 만에 다시 출근하게 되면서 또 옷을 사들이고 있다. 매일 인스타그램의 서평단 모집 피드에 자동인형처럼 반응한다. 마치 마약중독자처럼... 최신간의 흐름을 알고 있어야 한다는 자발적 의무감은 신청서를 쓰게 만든다. <사물의 소멸>을 읽다가 내가 아끼는 물건이 뭐가 있는지 둘러보았다. 내 왼쪽 옆에 고양이 루키가 엎드려 있고 책상 위와 오른쪽 벽은 온통 책이다. 내 소유물 중 가장 많은 게 책인데 시간의 향기가 든 것이 있나 생각해봤다. 책은 사용한다기보다 한 번 읽고 덮어두니 마음에 들 수는 있어도 히스토리를 쌓아갈 순 없다. 게다가 나는 신간 위주로 읽으니 더 하다. 책 외에도 너무 많은 물건을 소유하고 있다. 그 중에 애정하는 물건이 있나 생각해 봤지만 선뜻 떠오르는 것이 없다. 내가 가진 사물들도 소멸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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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락모락 - 우리들은 자라서
차홍 지음, 키미앤일이 그림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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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나와 함께 한 것이면서일정 시간이 지나면 나를 떠나는 것인데 그것이 그리도 나를 애틋하게 여길 수가 있을까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내 모습을 알고 있고내 맘을 나보다 더 잘 알 때가 있는 그 존재를 그동안 무심하게 떠나보냈다.


24.

너는 지금 시간이 없나봐파인애플 꼭지처럼 머리를 질끈 묶어버렸어엄마는 아침도 거르고 급하게 나가는 너에게 면접을 잘 보고 오라고 했지세상에그런데 너는 소리를 지르네.

머리 때문에 다 망했어!”

정말 그렇게 생각하니?


47.

요즘 넌 세상을 다 알고 있는 사람처럼 이야기를 하네.

인간관계를세상살이를 다 알고 있는 사람처럼 말야너무 다 알면 살아가는 게 재미없지 않을까그런데 정작 너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네너는 요즘 너를 잘 알지도 보살피지도 못하는 것 같아.

세상 걱정보다 네 걱정을 먼저 하는 건 어떨까?



저자가 누군지 모르고 받은 책 <모락모락>의 화자는 머리카락이다머리카락이 제 주인에게 말한다머리카락과 나는 별개인가우리는 아침에 일어나면 거울을 본다등교혹은 출근하기 전 거울을 보며 얼굴만 살피는 게 아니라 머리도 같이 본다외모에서 가장 신경 쓰는 게 헤어스타일일 것이다그것의 기본인 머리카락이 자신에게 조근조근 말한다머리카락이 나를 이렇게 바라보다니어떻게 이런 발상을 할 수 있을까그저 놀라웠다.


출판사에서는 저자의 이름을 맞혀보라고 했다책을 읽으며 헤어디자이너일 거라는 예상은 했고 분명 유명인일 것 같았으나 전혀 알 수가 없었다며칠 전 공개된 저자의 이름은 차홍이었다찾아보니 업계에선 꽤 유명한 사람이다헤어스타일러로서 그는 아예 모르지만 이 책을 읽고 나는 그의 스타일에 반했다사람의 일생을 머리카락의 관점으로 그려내다니 대단하다


1인칭 같은 2인칭 시점이다정감있게 조근조근 말하는 그 목소리는 내면이 내는 것 같기도 하고한 발자국 옆에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친구 같기도 하다애정을 담뿍 담고서 말이다이 책의 머리카락이 하는 말을 읽어내려 가다보니 인생의 중요한 순간이 떠올라 뭉클했다내 아이의 모습이 생각나 맘이 몽글몽글해졌고미래 어느 시점의 내 모습일 것 같은 장면은 친정엄마의 얼굴이 오버랩 되었다.


14.

너도 꼭 그렇잖아신기하지나무도 너도 어느 순간 쑥 자라버린다는 게 말야그리고 그건 정말 이상한 일이지너는 그대로인데 몸만 어른이 되려고 한다니 말이야.


49.

옷을 살 때는 먼저 가족의 옷을 구입하고 장을 볼 때도 가족이 좋아하는 재료를 먼저 고르고 있지그리고 언제부터인가 너의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들이 없어진 것 같아.

너는 바빠서 잘 모르지만가끔 무언가를 잃어버린 표정을 짓고 있어.


72.

요즘 너를 관찰하면 신기한 게 참 많아.

친구들과 함께 노래를 배우러 다니는데 이별에 복수에 외로움과 슬픔이 가득한 가사를 정말 즐겁고 행복하게 합창해그리고 건강에 좋다며 손을 크게 앞뒤로 휘저으며 뒤로 걸어다니기도 하지나는 도통 모르겠고 무섭기도 하지만네가 활기차게 지내는 건 정말 좋은 일이야.


 

나는 예전에 자려고 누웠는데 잠이 오지 않을 때 지나온 시간을 역순으로 되짚어 주요 사건을 정리해보곤 했다어느 순간부터 잠이 왈칵 쏟아질 때까지 책상에 앉아 있다 보니 인생 톺아보기는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다그런데 이 책을 다 읽고 나도 내 인생의 어느 순간들을 기억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작년 이맘 때 뭘 했는지 기억이 잘 나질 않는데아니 당장 오늘 낮에 먹은 점심 메뉴도 가물가물한데 과연 가능할까...


가만 생각해보면 충격적 사건이 없는 이상 기억이라고 부를 만한 것들은 대부분 사진에 의존하고 있다초등학교 입학 전 기억은 거의 없는데도 일곱 살 무렵 아버지께서 하시던 중국집 앞에서 찍은 흑백사진을 보고 있으면 고소한 기름 냄새가 코끝을 스친다그 때 중국집에서 왜 찹쌀 도넛을 팔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기름이 가득한 큰 솥이 기억난다동글동글한 도넛 반죽을 솥에 집어넣으면 잠시 가라앉았다가 이내 버글버글 떠올랐다갈색 빛을 띤 노릇한 도넛은 이른바 겉바속촉이었다.



이 책의 그림 저자처럼 그림을 잘 그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그림 대신 오랜 사진첩을 열어보아야겠다내 인생 숫자는 아마 7부터 시작될 것 같다부모님의 기억에서 1부터 6까지 다 얻어내긴 어려울 것 같지만 뭐 어떠랴나는 머리카락 시점 대신, “다 큰 내가 그 때의 나에게 한 마디!” 정도로 하면 될 것 같다사진 속 내게 애틋함을 담아서~




**위 리뷰는 문학동네 사전서평단 자격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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