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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 이동, 식민, 이민의 세계사
다마키 도시아키 지음, 서수지 옮김 / 사람in / 2021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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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에 배운 국사는 물론 세계사는 주로 왕들의 이야기였다. 무슨 무슨 왕이 어떤 나라를 만들어서 어떤 정책을 펼쳤다는 내용을 배웠다. 또한 그러한 일들이 발생한 년도를 외우는 것도 중요했다. 전공자가 아니라면 일반적으로 고등학교를 졸업부터는 세계사와는 결별이다. 특별히 역사에 관심이 있거나 세계뉴스를 찾아보는 사람이 아니라면 정규교육 과정에서 배웠던 세계사 지식이 전부이고 시간이 지날수록 휘발되어 간다.
하지만 계속 새로운 것을 읽고 배우고자 한다면 읽을거리는 많다. 신간 <이주, 이동, 식민, 이민의 세계사>가 그런 책이다. ‘인간의 이동’에 초점을 맞춰 쓴 세계사 책으로 교토산업대 교수 ‘다마키 도시아키’가 저자이다. 근대 유럽경제사가 전공인 경제학교수인데 세계사 책을 썼다. 저자의 전공과 제목 안에 힌트가 있다. 다마키 교수는 인간의 이동이 낳은 다양한 경제적 효과에 주목했다. 여기에 세계사적 재미도 놓치지 않고 있다.
이런 세계사 책을 읽을 때 독자는 자신의 지식을 확인함과 동시에 새로운 지식을 입수한다는 만족감을 동시에 갖게 된다. 그 두 지식의 비율은 독자마다 상이할 것이다. 이 책은 그동안 우리가 배워온 세계사 공부 방식과는 다른 접근법을 택하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신선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머리말에서 밝힌 아래 내용을 보면 저자가 ‘세계사란 이민이 쌓아올린 집약체’라고 한 말의 의미를 따라갈 수 있을 것이다.
‘이동하는 사람들=이민’이라는 관점에서 세계사를 바라보면 인간이 어떻게 문명을 만들고 전파했는지, 그리고 세계가 어떻게 하나의 공동체로 이어졌는지 전체적인 구도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올 것이다. 또 그 과정에서 생긴 문제와 그 문제가 오늘날 과제로 남았다는 사실도 실감할 수 있다.
Ⅰ장에서는 인류의 이동과 문명에 대해 풀어내고, Ⅱ장은 이슬람 상인을 위시한 신항로 개척을 위주로 세계 교역에 대한 내용을 실었고, Ⅲ장에서는 이민이 유럽사에 끼친 영향을 경제와 난민의 관점으로 들여다본다. 연대기 순으로 쓰여진 세계사 책의 경우 보통은 순차적으로 읽어나간다. 세계사를 배울 때 방식 그대로인 셈이다. 이 책도 현생인류의 시작인 아프리카 대륙에서 출발하지만 꼭 순서대로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목차를 먼저 훑어본 후 관심 가는 것이 있다면 그것부터 읽어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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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장에서 ‘흑사병 유행의 원인은 몽골제국?’이라는 제목에 눈길이 가서 펼쳐보았다. 코로나19 때문에 흑사병이라는 단어가 눈에 딱 들어오기도 했지만 흑사병의 원인을 왜 몽골제국이라고 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럼 그 내용부터 확인해 보겠다.
p.71
흑사병은 현대의 그 어떤 전염병보다 빠른 속도로 유럽을 휩쓸었다. 흑사병 창궐의 원인으로는 다양한 가설이 제기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몽골제국의 교역 네트워크로 유럽과 중앙아시아가 밀접하게 이어지면서 병을 퍼뜨리는 속도가 빨라지고 규모가 커진 측면이 있다는 주장이 흥미롭다. 몽골제국이 ‘팍스 몽골리카’ 즉 몽골의 평화를 실현하지 않았더라면 유라시아 대륙의 교역 네트워크는 확장되지 않았을 것이며, 유럽까지 흑사병이 퍼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번 코로나19가 세계적으로 빠르게 퍼져나간 것과 유사한 설명이었다. 오늘날 인류가 세계 어디로든 이동이 자유롭기 때문에 코로나19 바이러스도 순식간에 전세계를 점령한 것이다.몽골제국이 유럽과 중앙아시아를 연결하지 않았더라면 흑사병이 그렇게 빠르게 전파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이다. 저자는 유목민이라는 ‘이민자’가 세계사를 움직였다고 강조하고 있다. Ⅰ장은 이것을 논증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현생인류인 호모사피엔스는 두 번에 거쳐 아프리카를 빠져나왔다. 정확한 이유는 규명되지 않았지만 저자는 이것 때문이 아니었을까 가정하고 있다.
“최대한 많은 지역에서 생활해야 종의 보존에 바람직하다!”
수 만년에 걸쳐 계속 이동한 호모사피엔스는 이민자의 원형이라 할 수 있고 그들이 정착하여 6대 문명을 건설했으며, 나아가 이들 문명이 발달•전파되기 위해서는 ‘이동하는 사람들’ 즉 이민의 존재가 필요했다. 이처럼 Ⅰ장은 이민자들에 의해 세워진 문명에 대한 내용, 그중에서도 유럽문명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 장을 읽다보니 내 세계사력이 이렇게 낮았나 싶어 흠칫했다. 안개 속에 갇힌 것처럼 어렴풋했다. 배운 지 몇 십 년이나 지난 것을 다 기억하고 있다면 그것 역시 말이 안 되는 것이라며 자위했다. 또 하나, 저자는 기존 세계사 교과서에서 다룬, 정설이라 여기는 것들에 도전하는 내용이나 새로운 가설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처음 접하는 내용일 수 있다. 나 포함 많은 독자들이 그러했을 거라 예상한다.
예컨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원정의 경우, 동서문화의 통합으로 헬레니즘 문명이 탄생했다고 배웠다. 그런데 저자는 현재 이 견해는 정설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49쪽) 고 했다. 또 중국을 위협했던 흉노족을 유럽에서는 훈족이라고 불렀다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아니란다. 동흉노가 훈족이 되었다는 설이 있는데 정확히 검증된 게 아니(63쪽) 라고도 했다.
역사도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운 사료나 유물이 발견되면 기존에 정설이라 했던 것들이 부정될 수 있다. 그러니 이런 세계사는 졸업 후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새롭게 가설을 세우고 연구하고 검증하는 것은 역사학자들의 몫이다. 하지만 그 결과물을 우리가 책으로 읽으면 그들의 노력과 성과를 손쉽게 공유할 수 있다.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의 저자는 직접 연구가 아니라 인용한 것이라서 그런지 위 문장 뒤에 설명을 더하지는 않았다. 아쉽기는 하지만 책의 분량 문제도 있었을 것이고, 내용의 응집력을 위해서 그 문장 뒤로 더 이상 뻗어나가지 못한 게 아닐까 싶다.
Ⅱ장에서는 세계에서 활약한 상인들의 이야기다. 이슬람 상인, 바이킹, 포르투갈인, 유대인까지. 활발한 교역이 세계의 변화를 일으킨 내용을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이 장에서 새롭게 알게 된 내용은 바이킹과 세파르딤, 두 가지다. 바이킹은 그저 해적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그들의 활약이 얼마나 컸는지를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다. 바이킹에 대해 최근에 발견된 것도 있는 모양이었다.
p.89~90
바이킹은 일반적으로 ‘약탈자’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현재 학계에서는 연구를 통해 바이킹이 단순한 약탈자가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 교역에 종사했던 집단임을 밝혀냈다. 원래 약탈과 교역은 구별하기가 어렵고 중세에는 두 행위의 구별이 불가능했다. 게다가 최근 바이킹이 건설한 도시 수눈의 유적이 스칸디나비아반도뿐 아니라 더 넓은 지역에서 발굴되며, 그들이 다양한 장소를 거점으로 교역에 종사했다는 사실도 확실히 밝혀졌다.
우리에게 각인된 바이킹의 이미지는 어디에서 온걸까? 저자는 19세기 후반에 활동한 벨기에 역사학자 ‘앙리 피렌’의 시각에서 출발했다고 말한다. 피렌이 살던 시대에는 단순한 약탈자 이미지였겠지만 오늘날에는 영국에서 러시아에 이르는 거대한 상업 네트워크를 보유한 상인으로 활약했다는 견해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피렌은 바이킹의 존재를 상업적으로 부정적으로 평가했지만 저자는 그 반대다. 장기적으로 바이킹의 활약이 유럽의 대외진출을 촉진했다고 보고 있다. 저자는 북유럽을 중심으로 이동하고 정착한 바이킹을 북유럽 상업 네트워크를 구축한 ‘이민자’라고 부른다.
세파르팀? 유대인이란다. 유대인이면 다 유대인이지 유대인도 종류가 있단 말인가? 그렇단다. 혹시 나만 몰랐나?
저자는 ‘설탕혁명’을 설명하면서 세파르딤이라는 유대인을 불러온다. 17세기 카리브해 네덜란드령 식민지에는, 네덜란드인 플랜테이션 농장주와 그들이 소유한 노예가 속속 도착해 사탕수수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이 네덜란드인이 ‘네덜란드인’이 아니라 ‘세파르딤’이라는 주장이 학계에서 제기됐다. 세파르딤은 15세기 말에 이베리아 반도에서 추방된 유대인으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과 로테르담에 피난처를 마련해 이베리아반도의 고국과 외국 식민지 사이의 무역에 크게 이바지했다고 알려져 있다.
신세계는 설탕을 대량 생산하며 ‘설탕 왕국’으로 거듭났다. 세파르딤이 이베리아반도에서 건너와 정착하며 신세계는 ‘설탕 혁명’의 무대가 되었다. 사탕수수 재배 방법을 신세계 각지에 전파한 이들은 세파르딤이었고, 실제로 재배에 종사한 이들은 흑인 노예였다. 저자는 이 둘 중 하나만 빠졌어도 설탕 생산량이 늘어나 유럽이 풍요로워지는 역사는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유럽인들이 흑인을 아메리카 대륙으로 데려가 사탕수수를 재배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유럽인이 세파르딤이라는 유대인인줄은 몰랐다. 이 책에서는 유대인의 종류까지는 설명하고 있지 않아서 검색해보니 나무위키에서 자세히 나와있었다. 다섯 분파나 있다니! 그들의 역사까지도 자세히 읽어보았다. 이렇게 책에서 알게 된 내용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궁금해질 때 즐겁다.
Ⅲ장의 제목은 ‘이민’이 유럽의 번영을 가져왔을까?인데 미국번영과 전쟁 및 난민 문제에 더 집중하고 있다. 이민으로 만들어진 국가, 미국으로 이주해온 유럽 사람들의 이야기와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제반 상황을 재미있게 읽었다. 가장 마지막 내용이 “세계사에서 바라본 유럽 이민 문제”이다. 앞 장에서 다룬 유럽인들의 신세계 진출은 제국주의가 되어 결국 전쟁의 빌미를 제공했으며 각 민족들간의 내전을 일으키게 했다.
우리나라는 가장 최근에 겪은 전쟁이 70년전이다. 전후에 태어나서 전쟁없이 산 세대도 이미 노인이 될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그만큼 현재를 사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꽤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고 있다. 그러나 남북이 분단된 상태로 거의 섬나라처럼 살다보니 우리는 난민을 만난 적도 없었고 그들을 수용해야 하는 문제를 맞닥뜨려본 적도 없었다. 그러니 실제 본적도 없는 난민에 대한 잘못된 정보만 접하게 되었다. 반대로 유럽은 난민문제가 심각하다. 제국주의 시대의 유산으로 아직 내전중인 국가들이 있고, 자신의 고향을 버리고 남의 나라에 몸을 의탁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몰린 사람들도 많다.
“세계사에서 바라본 유럽 이민 문제”에서 자세하지 다루지는 않지만 난민의 역사적 상황을 접할 수 있게 해준다. 이민의 역사를 궁금해 이 책을 펼친 사람이 있다면 어쩌면 마지막 장에서 길게 머물지도 모른다. 다른 내용들은 아주 오래된 지나간 일이지만 난민 문제는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또한 멀리 있는 사람들이지만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문제와 고통을 안다는 것이 세계인으로서 도리가 아닐까. 독일인들처럼 적극 난민을 수용하겠다고 까지는 못하지만,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없지만 그들의 역사에 대해 알려고 노력하는 것으로 합리화 해본다.
저자는 맺음말에서 호모사피엔스라는 종 자체에 ‘이민’이라는 선택지가 내장되어 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인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갔지만 지면 관계상 인류 역사 전체를 골고루 다룰 수는 없었다고도 했다. 단, 인류가 어떻게 이동하고 그 이동이 어떠한 의미를 역사에 부여하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설명했다고 밝혔다. 저자의 노력 덕분에 인류의 역사를 이민사적 관점으로 재미있게 읽었다.
**위 리뷰는 네이버카페 리뷰어스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