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여름 - 류현재 장편소설
류현재 지음 / 마음서재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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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미스터리 스릴러라 했고, 처음부터 자극적인 사건으로 시작하는 것에 혹했다. 여름휴가용 소설로 딱일 것 같았다.

주인공 정해심 검사는 성추행범에게 가차없다. 그 어떤 변명도 피해자가 입은 고통에는 비할바가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런 정해심 검사의 아버지가 성폭행을 저질렀다는 전화를 받는다. 믿을 수가 없다. 아버지는 치매환자. 피해 여성은 파킨슨병 환자이기 때문이다. 기막혔다. 병원으로 달려가 현장에서 뜯어말렸다는 요양보호사의 증언을 들으니 안 믿을 수가 없었다. 이 와중에 피해자의 아들 하영석이 합의금으로 1억을 요구했다고 한다. 이렇게나 빠르게? 세상에 알려지기전에 사건을 수습하려는 원장이 합의를 종용한다.

이렇게 서두부터 이야기 속으로 훅 빨려들게 만들었다. 성범죄 전담 검사의 아버지가 성폭행 현행범이라니 얼마나 아이러니컬한 상황인가. 정해심 검사는 이 상황을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 책장을 빠르게 넘길 수밖에 없었다. 추리하기 좋아하는 독자라면 자신이 검사가 되어 사건해결의 단서가 될 만한 것들이 뭐가 있는지 눈 크게 뜨고 찾아볼 것이다. 70이 넘은 치매환자가 과연 그게 가능했을지, 실제로 벌어진 게 맞는지에 초점을 맞춘 독자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이 소설은 임팩트 있게 시작하여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고 직접 추리해 나가도록 실마리를 여러 갈래로 던져둔다.

독자가 어떤 갈래를 잡아당기느냐에 따라 작가의 떡밥을 덥석 무는 붕어가 되어버릴 수도, 작가가 쳐놓은 그물에 걸리지 않고 유유히 빠져나올 수도 있다. 어떤 독자는 자신이 놓친 부분을 확인하며 이마를 칠 것이고, 또 다른 독자는 자신의 추리에 흡족해 할 것이다. 이런 것이 추리 스릴러 소설을 읽는 맛이다.

정해심 검사는 아버지의 행동을 믿을 수가 없어서 CCTV를 돌려보며 확인한다. 일을 저질렀다는 상황 전후와 며칠 전까지 돌려보니 강제로 그런 짓을 저지른 것처럼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그 여성이 아버지에게 다가와 친근한 행동을 하는 것 같았다. 더 놀라운 사실은 피해여성의 이름이 자신과 같은 해심이라는 것, 아버지와 그 여성의 고향이 같은 남해라는 사실도 확인했다. 그녀는 이 사건의 이면에 뭔가가 더 있음을 감지한다.

그리고 이야기는 시공간이 다른 곳으로 독자를 훌쩍 데려간다. 일제로부터 해방되던 격동의 시기, 푸르른 남해 바다로. 그곳이 고향인 정해심의 아버지 정만선과 하영석의 어머니 고해심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읽으며 살짝 실망했다. 나는 피비린내 나는 뭔가 과격한 일들이 벌어질거라 예상했었다. 앞서 말한대로 스릴러 소설의 묘미를 만끽하고 싶었다. 그런데 읽을수록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었다. 이 소설은 러브스토리였다.

단순하지는 않다. 순애보, 삼각관계, 질투, 애증까지 사랑이라면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경우가 다 들어있다. 성추행 사건을 다루고 있는 현재의 정해심 검사의 상황과 성폭행 가해자로 몰린 아버지 정만선의 어린 시절이 교차로 서술되는데 독자가 어디에 포인트를 맞추느냐에 따라 소설적 재미를 느끼는 지점은 다를 것이다. 성추행 당했다고 주장하는 여성 피해자의 진술을 100퍼센트 신뢰했던 정검사는 아버지의 상황을 겪으며 그 사건을 다시 들여다보게 된다. 사실과 증거를 토대로 법에 맞게 구형한다고 장담했던 정검사는, 그간 자신이 확신했던 것에 균열이 생기자 당황스럽다. 작가는 정검사를 딜레마에 빠지게 해놓고 독자들에게 묻는다. 과연 공정한 잣대는 존재하는지를!

정만선과 고해심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춘 독자라면 그들의 사랑을 부러워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랬다. 나는 사실 많이 놀랐다. 아니 내 편견에 놀랐다는 말이 더 적절하겠다. 정만선과 고해심, 그 둘 사이에 낀 여성 하덕자와 박문희의 애증어린 행동에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하덕자와 박문희의 과거 행적이 드러나면서 숨겨졌던 정만선과 고해심의 사랑 역시 수면 위로 올라온다. 그 둘의 사랑은 마치 빙산과도 같았다. 겉으로 조그만 덩어리처럼 보였지만 수면 아래에는 거대한 산이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둘의 사랑은 그랬다.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래서 각자 다른 이와 결혼했지만, 사실은 절대 잊을 수 없는 사랑이었다. 몇십년이 지나도, 아니 죽을 때까지!

사랑을 믿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들의 사랑이 너무 놀라웠다. 또한 그 옛날 둘의 사랑이 이토록 애절하고 아름답게 그려진 것에 놀랐다. 몇 십년이 지나도 서로를 잊지 못하는 두 사람의 사랑을 믿기 어려웠다. 치매에 걸려도 파킨슨 병에 걸려도 서로를 알아보고 같이 있고 싶어하다니... 어릴 적 둘이 만났던 비밀 장소를 기억해낸 둘의 행동이 남의 눈엔 범죄로 보일 수밖에 없는 상황을 연출해놓고, 꽃같이 아름답던 어린 시절을 잠깐 서술하고선 그 사이 간극은 독자의 상상에 맡기는 작가의 실력에도 놀랐다.

시대적 상황과 부모 세대의 업보 때문에 내놓고 사랑하지 못했던 둘의 사랑은 정만선의 시로 표현된다. 꿈틀거리는 바다의 생명력 속에 해심을 향한 만선의 사랑이 육감적으로 표현된 시는 짧지만 격정적으로 서술된 둘의 어린 시절 사랑과 닮아있었다. 그 시에 반했던 기자 박문희는 정만선의 사랑을 평생 갈구했으나 결코 얻지 못했다. 둘의 사랑을 시기했던 덕자 역시 만선의 사랑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다. 만선을 향한 덕자와 문희의 애증은 안타까웠다.

늙은 사람들에게도 젊은 시절은 있었고 사랑도 하고 살아왔을 터인데, 나는 그것을 부정했다. 또 죽을 때까지 평생 못 잊을 사랑 같은 건 없다고 생각했다. <네번째 여름>을 읽으며 내 편견을 확인했다. 어느 시대나 어디서나 그런 사람들이 있다. 죽을 만큼 사랑을 하고 질투하고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하는 사람들! '현실에 이런 사랑이 있을까? 소설이니까 이렇게 극적이겠지'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작가의 말’을 읽으며 고개 끄덕였다.

이 이야기는 바다가 들려준 이야기였다.

난 여름, 큰 바람이 지나가고 죽은 사람 하나가 떠밀려왔다. 놀란 사람은 나처럼 도시에서 내려온 지 얼마 안 된 외지인들 뿐이었다. 하지만 바다와 함께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일, 생명을 품고 있는 줄만 알았던 바다는, 동시에 죽음도 품고 있었다.

바다가 얼굴색을 바꾸고, 구름과 안개 베일을 두르면 그 누구의 접근도 허락하지 않는 바다만의 시간이 시작된다. 그사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사람은 알 수 없다. 그저 시간이 지나 바다가 밀어낸 죽음의 형상으로 그 모습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네번째 여름> 작가의 말

여름에 어울릴 간담서늘한 스릴러 소설일거라 기대했는데 뜨거운 사랑이야기였다. 류현재 작가의 책은 이번에 처음 읽었는데 방송작가 출신이라 그런지 영화한편 보는 것처럼 흡입력 있었다. 이 소설은 영화화해도 좋을것 같다. 정만선 역할에 남주혁 얼굴이 번뜩 떠올랐다. 훔... 이제 어린 고해심과 하덕자 박문희를 캐스팅하러 가야겠다~~

 

**위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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