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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몬 - 권여선 장편소설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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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는 <레몬>을 미스터리물로 읽을 것이고, 누군가는 해결되지 못한 어떤 사고를 상기할 것이고, 또 누군가는 뒷이야기를 상상하거나 빈 공간에 숨은 이야기를 집어넣어 새로운 소설로 만들지도 모를 일이다. 그만큼 이 소설은 다양하게 읽힐 여지가 충분하며 독자에 따라 감상도 다양할 것이 틀림없다.
소설 <레몬>은 제목이 주는 느낌을 배반하는 책이다. '레몬'은 그 색감 자체가 주는 청량감에 더하여 그것을 발화함과 동시에 침이 고이며 몸을 부르르 떨게 만드는 낱말이다. 검정 바탕에 밝은 노랑빛이 중앙에 떠있는 표지를 보며 침을 한번 꼴깍 삼킨 뒤 후르륵 읽어버렸다. 뒷통수 제대로 맞은 느낌이었다. 너무 급하게 읽었다 싶었고 띵한 머리를 진정시키려고 며칠간 덮어두었다. 다시 읽으면서는, 어떤 부분은 몇번을 읽고 또 읽었고 소리 내어보기도 했다.
아팠다!
명치 끝이 아려왔다!!
"당신의 삶이 평하기를"
바란다는 작가의 말이 눈물겨웠다...
나는 세월호 사건이 소재로 쓰인 문학작품을 읽지 않았다. 굳이 찾아 읽지 않았고 일부러 외면도 했다. 도저히 내 감정을 대면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고, 누군가에겐 형언못할 고통을 애도라는 말로 언어화한다는 것 자체가 모욕스런 행위가 되지 않을까하는 조심스러움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권여선이란 정보만 가지고 받아든 이 소설은 그 사건으로 자동링크되게 만들어두었다. 어찌할 도리없이 그 안타까운 죽음들을 대면하게 되었다. 이 세상 어떤 죽음이 슬프지 않으랴만 누가 죽였는지, 왜 죽어야만 했는지도 모른다면 그야말로 미칠 노릇일 것이다. 남은 가족들은 그 고통의 바다에서 헤어나오기 어려울 것이다.
소설 속에서는 고등학교 3학년 김해언이라는 소녀의 죽음을 둘러싸고 주위 인물 몇 명의 서술이 전개되는데 가해자는 여전히 오리무중이고 오히려 숨은 이야기들만 드러날 뿐이다. 사건 당시 경찰조사에서 드러나지 않은 것으로. 그러면서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생의 고통들이 수면위로 드러난다. 누구는 그 정도 어려움이야 늘상 겪는 일이라 덤덤하게 살아가고, 누구에게는 너무나 힘든 고통이라 죽을 것만 같은, 그런 것들 말이다.
열일곱살 6월까지도 나는 내가 이런 삶을 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는 이런 삶을 원한 적이 없다. 그런데 이렇게 살고 있으니, 이 삶에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지만, 내가 이 삶을 원한 적은 없지만 그러나, 선택한 적도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위 내용은 주 서술자라고 할 수 있는 해언의 동생 다언이, 언니가 죽었던 2002년을 회상하며하는 말이며 초반에 나온다. 처음 읽었을 땐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가 다시 앞뒤를 왔다갔다하며 읽어보니 많은 의미를 품은 말이다.
누구나 주체적으로 산다고들 하지만, 간혹 자신의 삶이 이건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닌것만 같다거나 어떤 불가항력적 존재에 의해 움직여지는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느껴질 때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은 기실, 자신이 선택한 것임에도 모른체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삶에 너무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오래전 학습된 것이 뼛속깊이 DNA로 새겨져 유전되는 것처럼 보인다.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났으므로 민족의 독립과 인류 공영에 힘써야만 할 것 같은... 하지만 왼쪽 겨드랑이에 목발을 끼고 오른손에 긴 스팀다리미를 쥐고 시트를 다림질하면서도, 아무 생각없이 무릎을 약간 벌려 세우고 앉아 있는 그 찰나의 순간순간들도 삶의 의미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작가는 살아있는 하루하루, 순간순간에 의미를 두자고 말한다. 왜? 살아있다는 것 자체로 이미 충분하니까.
다언은 언니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말을 할 수 있게 되기까지 17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작가는 열일곱에 언니를 잃은 다언이 그 두 배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게 만들어 두었다. 그만큼 고통스러움을 표현한 것이리라.
5년이 지나서야 바다에서 죽어간 이들의 고통과 그 가족들의 아픔을 진심으로 가늠해본다. 그 당시의 애도는 슬픔이란 단어로 화장한 것이었지 싶다. 하지만 <레몬>을 통해 그들의 죽음을 생각해 볼 기회를 가졌다. 이 소설에서 세월호를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았다. 여고생 해언의 죽음이 명확하게 해결되지 않은 채 끝난 것으로 비유하고 있다. 살아서 리뷰를 쓰는 이 순간과 그들의 죽음을 기억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될까? 그것은, 살아남은 자의 책무를 잊지 않는 것일 게다. 꽃같은 나이에 스러져간 생명들을 돋을새김하여 어여뻤던 생을 영원히 살아가게 할 양각화로 남기는 것이다.
덧, 이 책으로 느끼는 바는 모두들 다르겠으나 그들의 슬픔을 대면할 기회를 준 작가님에게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