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너는 다시 외로워질 것이다
공지영 지음 / 해냄 / 2023년 12월
평점 :
공지영 작가가 오랜만에 신작 에세이를 냈다.
20대부터 읽어온 그의 책들을 떠올려보니, 이번 에세이는 주위를 물리치고 고요한 혼자로 시작하고 있었다. 작가는 고요하기 위해 혼자 섬진강이 보이는 하동에 내려가 정착한다. 혼자가 되자 은신처에 숨어 있는 듯 안온했고, 글도 쓰고 싶지 않았다고. 동백이라는 이름의 강아지를 키우며 '남에게 나 자신을 내어주는 일은 결코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고 깨닫는다. 그는 자신이 믿어 의심치 않았던 신념에 대해 통렬한 성찰을 하게 된다.
'나는 내가 원하는 것만을 믿었다.
가난하고 불쌍하고 궁색해진 이들은 착하다고 근거 없이 믿어버렸고, 그리스도나 정의 혹은 진보라는 걸 말하는 이들은 정직할 거라고 철썩같이 신뢰해 버렸다. 그리고 그들에 휘둘렸다.
아마도 나는 나 자신의 망상을 사랑했었다.' P.75
작가는 나이가 들수록 너그러워지고 침착해지는게 자연스럽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한다. 내가 틀렸다는 걸 인정하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아프지만 그래야 성숙해지는 거라고한다. 이러한 그의 자기 인정은 예루살렘 성지 순례에서 깨달음으로, 삶의 고통으로부터 회복하는 길을 만나게 한다.
풀 한포기 나지 않는 암만의 광야에서, 사해의 안개에서 그가 만난 미지근한 바람은 속삭였다.
'너는 다시 외로워질 것이다. 너는 또다시 소수의 편에 서게 될 것이다'
그의 이스라엘 순례 여행기는, 오래전 종교를 탈피해 성지순례 같은 단어는 떠올려 보지도 않은 내게 새롭게 다가왔다. 곳곳의 검문소마다 젊은 이스라엘 군인들의 경멸에 찬 표정 묘사부터 시작해, 검문이 시작되면 화장품 통까지 휘저어진다는 얘기는 충격적이기도 했다.
작가는 예루살렘의 성지를 돌며 그리스도의 삶을 되새긴다. 작가가 지닌 종교적, 역사적 소양의 깊이가 무교인 나로서는 가늠할 수 없는 크레바스처럼 느껴진다.
그는 여행하며 자신의 편견을 고백하기도 한다. 갓산 카나파니의 소설 [하이파에 돌아와서]를 두 번이나 언급하며, '나쁜 유대인 놈들, 불쌍한 팔레스타인 사람들' 이라고. 소설 속 아버지는 자신의 두 아들들이 각각 이스라엘군과 팔레스타인군으로 총부리를 겨누게 된 현실을 만나며 이렇게 말한다. "잘못을 잘못으로 갚는다고 그게 옳은 것은 아니다" 과연 누가 더 나쁠까. 누가 누구를 단죄하고 용서할 수 있을까.
골고다의 언덕에서 묵묵히 예수의 뒤를 따르던 성모 마리아의 발자취를 보며 작가는 깨닫는다. 자녀들을 위한 기도 역시 집착의 다른 포장이요, 교만이었다고. 행복과 안녕을 기원하는 마음이 집착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은 어지간한 수행이 선행되지 않으면 할 수 없을 것이다.
삶은 존재를 쪼개는 듯한 고통 끝에서야 바뀐다.
작가가 전하는 프란치스코의 삶도 내게 메모를 남겼다. 그는 부유하게 자랐지만 전쟁에서 포로로 잡혀 1년동안 감옥 생활을 한 후 삶이 바뀐다.
"고통은 성자가 아니라도 온다. 상처도 온다. 가난도 오고 멸시와 따돌림도 온다. 그때 비로소 인간은 선택하는 것이다. 성자가 될 것인지, 희생된 비참한 늙은이가 될 것인지" P.193
빅터프랭클 역시 수용소에서 이 깨달음에 직면했다. 수용소의 고통앞에서 성자와 돼지 두 부류로 나뉘는 인간을 보며. 그것은 환경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 선택하는 것이었다.
'약간 깨달은 것 가지고는 삶은 바뀌지 않는다. 대개는 약간 더 괴로워질 뿐이다. 삶은 존재를 쪼개는 듯한 고통 끝에서야 바뀐다. 결국 이렇게, 이러다 죽는구나 하는 고통 말이다. 변화는 그렇게나 어렵다.
그로므로 고통이 오면 우리는 이 고통이 내게 원하는 바를 묻고, 반드시 변할 준비를 해야 한다.' p.189
또한 작가는 고통은 유혹이라고 말한다. 마음이 고통스러워지는 것은 종국에 누군가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원망하고 미워하게 되는 일이다.
'알지 않은가. 고통 중에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을 잃어버리는지 말이다. 우리는 이웃에 대한 연민을 잃어버리고, 우리는 타인에 대한 공감을 잃어버리며, 우리는 낯선 이에 대한 친절을 잃어버린다. 고통이 벼슬이라도 되듯이 군다. 우리가 고통 속에서 얼마나 교만할 수 있는지.' P.244
고통에 겨워 자기중심적으로 사고하게 되면 삶은 망가진다. 판단은 하늘에 맡기고 나는 선택해야 한다. 성장할 것인지 망가질 것인지. 예수도 막달라 마리아를 단죄하지 않았다며, 공지영 작가는 지금도 한 달에 한 번 구치소에 가서 사형수들을 만난다고 한다. 이런 성찰은 나의 내면 어디까지 내려가야 만날 수 있을까. 그 깊이가 아득하다.
공지영 작가의 이번 에세이 <너는 다시 외로워질 것이다>는 무교인 내게도 깊은 울림과 위로를 주었다. 물론 나는 예루살렘에 성지 순례하러 갈 일은 없을 듯 하다. 그러나 작가가 순례길을 걸으며 자신을 마주하고, 고통에 대한 사유와 깨달은 시간들은 나를 오래도록 책에 붙들어 두었다.
어쩌면 스스로 외로워진다는 것, 어떤 고통이나 상실은 무한한 자유를 뜻하는 게 아닐까.
마음에서 놓아주는 것. 사랑을 소유함으로 굳히지 않는것. 작가는 순례를 마치고 한꺼풀 가벼워지고 자유로워졌을 것이다. 나는 마음이 소란해 질 때마다 이 책을 펴보게 될 것 같다. 약간 깨달은 것 가지고는 삶이 바뀌지 않겠지만 적어도 '용맹정진'할 용기는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힘겹고 아파서 더 이상 들어 올릴 수 없는 오른 발을 들어 왼발 앞에 놓고,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왼발을 들어 오른발 앞에 놓는 것. 그 한 발, 한 발, 그게 용맹정진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