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 강의 - 개정판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이혜승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 강의>에서 러시아 문학에 대한 친절한 안내를 기대했다면 잘못된 선택이다. 이 책에서 독자는 19c 러시아 대표작가에 대한 혹독하고 살벌한 평가를 확인하게 될 것이며, 쉽게 지나쳤던 디테일한 부분에 대한 집요한 분석과 집중을 의도치않게 요구 받을 것이다. 무서운가? 전혀 그럴 필요는 없다. 일상이 너무 바빠 미쳐 읽어보지 못했던 소개된 책이 궁금해져 참을 수 없을 것이며, 과연 나보코프의 분석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어 예전에 읽었던 러시아 문학 작품을 다시 읽어보고 싶을 것이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당신은 이미 러시아 문학을 2~3권은 결제를 마쳤거나 도서관에서 대출을 완료한 상태가 될 것이니, 러시아 문학에 대해 알고 싶은 독자라면 혹은 읽어봤던 러시아 문학에 대해 좀 더 궁금해하고 있다면 적극 추천하는 바이다. 이래나 저래나 러시아 문학을 읽고 말테니깐.

 

나보코프는 미국 문학의 대표작가라 보통 칭해지는데, 그런 그는 사실은 러시아 출신작가이며, 어렸을 땐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유럽으로 피신했고, 이후엔 나치의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작가다. 그는 꾸준히 작품활동을 하면서 미국에서 정착해 대학교에서 문학 이론을 수업한 교수이기도 했다. <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 강의>에는 19C 러시아 문학에 대한 특성과 함께 6명의 작가에 대한 강의가 수록되어 있다. 소개되는 작가는 태어난 연도별로 구성되어 있다. 굳이 처음부터 읽어보지 않고, 궁금했던 작가 혹은 작품부터 읽어가도 무방할 듯하다.

 

앞서 말했듯이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어디서 절대로 들어볼 수 없을 만큼 거침없는 작가와 작품에 대한 나보코프만의 평가를 신랄하게 확인할 수 있다. 당시 미국에서 러시아 문학에 대한 비평가들의 평가에 단단히 불만이 있었던 것이 확실해보일 정도로 과감없고 거침없이 단언하듯 러시아 작가들을 비평한다. ‘도스토옙스키는 위대한 작가가 아니다.(p.196)’ 대작가 도스토옙스키를 두고 이런 평가를 할 수 있는 이가 몇 명이나 될까. 나보코프에게는 이를 뒷받침할 근거도 충분하다. 나보코프의 시선과 관점에서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새롭게 볼 수 있어서 이는 평가에 동의하나 하지 않느냐의 차원을 떠나 작품을 이해하는 폭이 넓어질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또한 나보코프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세세한 디테일을 발견해 분석해주어 작품을 새롭게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다. 안나카레니나를 시간순서, 등장인물, 구조 등등의 다양한 기준으로 작품을 세세하게 뜯어본다. 도스토옙스키 등장인물을 정신병의 종류로 분석해 흥미롭다.

 

가장 놀라운 점은 문학 강의 내용이 강의보다 마치 문학작품을 읽고 있는 듯한 표현을 마주하게 되는 지점이다. 수려한 묘사보다는 단조로운 일상의 장면을 무심하게 보여주는 안톤 체호프의 작품을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요란하지 않으면서도 정교한 유머가 그려 만들어 낸 잿빛 인생들 속에 녹아 있다.(p.461)’, 다소 빈틈이 보이는 <죽은 혼>의 주인공 치치코프를 설명할 때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 틈을 통해 속물 냄새가 진동하는 공간의 심연에서 웅크리고 있는 쭈그러진 바보, 벌레를 발견할 수 있다.(p.56)’ 문학 교수면 강의도 문학적으로 하는 것일까. 강의내용을 읽으면서 문학적인 표현을 보며 음미하는 재미까지 더한다.

 

<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 강의>는 거침없는 표현으로 당황스러울 수 있으나, 이는 좋은 독자에 대한 나보코프의 확고한 기준이 있어서이다. 그는 의미부여를 하는 것에 경계한다. 문학작품에 의미부여를 지나치게 하면 문학을 즐기고 이야기에 몰입하는 데에 방해받을 수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가 말하는 좋은 독자란 이야기 속 디테일을 찾아내며 이야기를 즐길 줄 아는 이를 말하는 듯하다. <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 강의>는 나보코프가 원하는 좋은 독자가 되는데 좋은 길잡이가 되어 줄 좋은 교본이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김헌의 그리스 로마 신화
김헌 지음 / 을유문화사 / 2022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야기를 읽는 것의 의미

유럽 및 영미권 문학을 접할 때 난감한 순간을 맞이하는 경우가 많다. 기독교 성경, 그리스 로마 신화의 요소를 독자가 모두 이해하고 있으리라는 전제하에 설명 없이 비유로, 때로는 이야기의 핵심 요소로 활용하는데, 전혀 그에 대한 배경 지식이 없을 때 퍽 난감하다. 유년 시절 꾸준히 종교활동을 해왔던 덕분에 기독교적 요소는 큰 무리 없이 소화할 수 있었던 반면, 그리스 로마 신화와 관련한 요소는 오이디푸스, 판도라 등 그동안 많이 인용되었던 이야기 외에 신화에 자신이 없어 알아차리지 못하는 문학적 장치나 은유로 문학을 오롯이 향유하기에 부족함을 매번 느낄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는 시간 내어 그리스 로마 신화를 정복하겠노라 다짐하지만 방대한 분량과 복잡한 가계도를 들춰보다보면 겁먹고 주춤하게 됐다. 이와 같은 고민을 가진 독자에게 <김헌의 그리스 로마 신화>는 입문서로 탁월한 책이다.

 

저자는 20여년 가까이 대학에서 그리스·로마 신화 강의를 이어온 김헌 교수다. 신화는 신과 영웅들의 이야기이고, 너무나도 오래되었는데, 과연 현대를 살아가는 가 이야기를 읽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저자는 다음과 같이 신화를 읽는 것의 의미를 설명하며 그리스 로마 신화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신화는 정보와 지혜의 보물창고이며, 철학 이전의 철학이었고, 철학 이후에도 또 다른 결을 가진 철학으로 존속해 왔습니다. ... 영웅이든 신이든 모두 인간의 본성을 비춰 주는 거울임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 우리 인간의 모습과 세상을 이해하고 삶을 살아갈 지혜를 얻기 위해 여러분과 함께 나눠 볼 수 있는 이야기들이 담겨 있습니다. (p. 10)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 정통한 저자가 매 이야기마다 내포하고 있는 의미를 풀어 설명한다는 점이다. 이는 독자가 방대한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길을 잃지 않게 도와준다. 아버지가 자식이 두려워 집어 삼키거나 가두고, 아들은 아버지를 내쫓는 등 텍스트 그래도 보면 경악할만한 이야기가 그리스 로마 신화에는 왕왕 등장한다. 아무런 배경지식이나 길잡이가 없었다면 황당한 이야기라 책을 그대로 덮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저자는 속에 담긴 메시지를 찾아내고, 의미를 친절하게 알려준다.

 

기존의 질서를 절대적인 것으로, 지고의 가치로 고집하는 대신,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는 젊은 세대를 독려하고 응원하는 교육이지요. ... 젊은 세대의 새로운 도전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가지고 독려하고 응원하는 자세 또한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 기존의 질서에 도전하는 자만이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말입니다.

p.53

또 다른 이 책의 장점은 에피소드마다 간결하고 짧게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가계도를 먼저 읊어대며 시작하지 않으며 신의 대표적인 에피소드를 등장시키는데 매 분량이 부담되지 않다는 점이다. 시간적 순서가 크게 중요하지 않아 그럼에도 전체 분량이 부담되는 독자에게는 목차를 살펴 흥미가 생기는 이야기부터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또한 지금 읽고 있는 서구권 문학의 배경지식이 필요할 때 옆에 책을 두고 살펴보며 읽어가는 방법도 추천해본다. 예를 들어 크리스타 볼프의 <메데이아, 또는 악녀를 위한 변명>은 이아손과 메데이아의 여정 이야기를 알고, 소설을 탐독한다면 이야기가 다르게 다가올 것이다.

간결하고 짧은 분량으로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지만 아무래도 방대한 내용을 다루다보니, 충분한 해석과 의미를 설명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시대가 변함에 따라 당시의 이야기가 가지고 있던 한계나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며 의미를 찾는 등 좀 더 설명해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드는 부분도 있다. 더불어 저자와 동의하지 않는 부분도 물론 있으며 다르게 해석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의문이 드는 지점도 더러 확인할 수 있었다.

대체로 젠더적 관점에서 이야기를 읽어갈 때 부족한 해석과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당시 그리스 로마 신화가 생성됐던 시대적 한계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저자가 서두에 언급했듯이 이야기를 현대에도 여전히 유효하기 위해 해석하고 의미를 찾는 방식을 달리한다면 더 풍성하고 흥미롭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다소 있었다. 예를 들어 뛰어난 미모로 인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우스의 술 시중을 들며 불멸의 존재가 된 가뉘메데스의 이야기에서 제우스의 성적지향을 단호하게 선그어 말하는 지점에서 다소 불편했다. 제우스가 어떤 성적지향을 확인하는 것은 가뉘메데스의 이야기를 읽는 데에 전혀 지장이 되지 않는데, 굳이 아니라고 짚는 부분에서 의아했다.

또한 당시 여성혐오적인 이야기를 재해석했다면 현대를 살아가는 독자에게 흥미롭게 다가갈 수 있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이 들기도 했다. 최초의 여성 판도라에 관한 이야기에서 호기심으로 상자(원래 텍스트에서는 항아리였다고 함. 번역의 오류였음을 저자가 짚어줌)를 연 것을 인류의 재양으로 해석하기 앞서서 판도라가 상자를 열 수밖에 없었던 계기나 배경을 강조했다면 새로운 관점의 해석이 가능했을 거라 여겨진다. 제우스가 인간세계에 재앙을 주기 위해 여성을 창조해 선물하는 걸 알아차린 프로메테우스가 동생에게 선물을 절대로 받지 말라며 신신당부를 하는 대목에 집중해본다면 현대적 요소와 연결 지어 새로운 관점으로 볼 가능성이 있다. 앞서 새로운 시대와 질서가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며 우라노스의 이야기를 긍정적으로 해석했듯이 최초의 여성의 호기심으로 인해 인간은 신의 보호 아래 수동적인 존재에서 탈피하고, 적극적인 주체로 나서는 계기가 되었다는 방향으로 재해석해볼 여지가 충분하지 않았을까. 게다가 발생한 현상을 없는 존재로 여기며 덮어버리기만 하는 것 문제해결보다는 문제를 더 키울 수 있다는 메시지도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 프로메테우스가 재앙의 씨앗을 선물로 활용할 방법 생각은 없이 무시하고 덮어버리겨는 계략은 요즘 현대사회에 채용시장에서 여성을 배제하는 펜스룰이 떠올랐다. 이를 연결지어 설명했다면,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이야기 메시지가 현대적으로 어떻게 해석되고 활용될 수 있는지 흥미롭게 읽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들이 남긴 이야기를 보며 우리는 우리의 삶과 세계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따져 묻습니다.(p.599)

 

이토록 오랜시간동안 이야기가 힘을 얻고 이어질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남긴 이야기를 각자의 시대마다 새롭게 해석하고 의미를 찾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저자의 해석에 의문을 품고, 독자마다 새로운 해석을 할 수 있는 것도 그리스 로마 신화가 지금까지 이어질 수 있는 이유가 아닐까. 신화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를 저마다 해석해보며 읽어가는 것도 하나의 재미요소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펄프픽션
조예은 외 지음 / 고블 / 202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몹쓸 고질병이 있었다. 남들이 좋아하는 것은 일단 멀리하고, 베스트셀러라고 하면 선뜻 손이 가질 않고, 영화 평점이 지나치게 높으면 경계부터 하고 보는 아주 몹쓸병. ‘극단적인 콘텐츠 편식병’ 플랫폼이 활성화되고, 콘텐츠의 수가 폭발하는 요즘, 취향이 겹치는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더욱 마이너의 마이너를 향해 파고 또 파다 정말 나의 취향을 잊어버리게 되자 정신차리는 중이다. 도대체 언제부터 병이 시작된 걸까. 나는 왜 마이너에 집착하게 되었는가. 모두의 취향에 들기 위해서는 실험적인 선택보다는 안전한 쪽을 선택하다보니 엇비슷한 이야기가 반복되는 주류의 콘텐츠 보다는 나의 취향과 딱 떨어지는 실험적이고 과감한 시도를 하는 마이너 감성의 콘텐츠를 좋아한 것이다. 펄프픽션도 이와 비슷한 감성의 사람들이 쏟아낸 콘텐츠 덕분에 형성된 하나의 장르다.


 펄프픽션은 20세기 초 미국에서 저렴한 잡지 “펄프매거진”에 실린 소설을 뜻하는 이름이었다. 기성소설에 비해 질적으로 떨어지다보니, 비주류의 소설, 싸구려 소설이라 불렸고, 특히 장르소설이 이에 많이 속했다고 한다. 아무래도 상상력에 기대는 장르소설이다보니 실험적인 도전이 필요하지 않았을까싶다. 고블에서 이번에 펄프픽션이라는 제목의 앤솔리지를 선보였는데, 한국의 펄프픽션을 정의하고자 했다고. 과연 야심차다.


 소설 <펄프픽션>은 지나치기 쉬운 사람들의 목소리에 집중한다. 다섯작가들이 각각 주목한 대상들은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놓치기 쉬운 숨은그림찾기 속 정답같다. 대학입시에 밤낮없이 공부만 하는 학생, 투명인간 취급당하는 청소노동자, 소외받는 노인들. 주변부에 위치한 이들을 전면에 세우며 풀어나가는 이야기가 저마다 독특한 장치와 소재로 흥미를 끈다. 시체를 유기하는 주인공에게 설문조사하는 쇳덩어리 외계인, 한국에서 열심히 노동하는 영국출신 외노자 뱀파이어. 장난스러워보여 책읽기가 살짝 망설여졌었는데, 탄탄한 구조와 이야기로 재미뿐만 아니라 감동도 주었다. 출판사의 기획의도는 보기좋게 성공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얼음 속의 엄마를 떠나보내다 고블 씬 북 시리즈
남유하 지음 / 고블 / 2021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초등학생 때 반에서 인기가 많은 친구가 있었다. 나도 몰래 좋아했었는데, 그날이 발렌타인 데이였다. 그때는 꼭 좋아하는 친구에게만 초콜릿을 준건 아니였고, 친했던 친구에게도 고루고루 여러 명에게 주고받았던 거 같다. 그 친구는 역시나 많은 초콜릿을 받았고, 수많은 초콜릿 중 나의 것도 있었다. 조금 있다가 그 친구는 나에게 예쁘게 포장된 사탕을 건네줬다. 2월은 학기 말이었고, 화이트 데이를 앞당겨서 나에게 준다고 말했다. 그 친구에게서 사탕은 건네받은 건 그날 나 혼자였다. 나는 너무 기분이 좋았다. 조그마하고 반짝이는 사탕이 가득찬 투명한 유리병은 나의 보물 1호가 되었다. 나는 사탕을 하나도 까먹지 않고, 서랍에 고이 간직했다. 얼마가지않아 사탕은 모두 녹아버렸고, 개미가 들끓어 내다 버릴 수밖에 없었다. 냉동실에 넣어둘걸 하며 울며 통을 비워냈던 기억이 난다.

 

소중한 것을 그모습 그대로 간직하고 싶은 적은 누구나 한번쯤 있지 않을까? 조그마한 눈사람을 냉동실에 넣었던 기억. 좋아하는 이에게 받은 물건을 닳지 않게 상자 깊숙이 넣어뒀던 일들. 소설<얼음 속의 엄마를 떠나보내다> 속 사람들은 죽인 이를 얼음 관에 60년간 보관해 집에 두는 풍습을 가지고 있다. 추억이 담긴 물건도 좀처럼 버리지 못해 낑낑대는 나에게 소설 속 풍습은 조금 부럽기도 했다. 소설 속 마을은 겨울이가고 겨울이 오는 매우 추운 마을이다. 이곳은 죽은 이를 얼음에 넣고, 집에 두면 영혼이 에니아르가 되어 가족과 마을을 지킨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어린 카야는 엄마를 잃고, 얼음 속에 있는 엄마를 보며 상실을 조금씩 극복하려했다. 그런데 누군가가 엄마의 관을 팔라고 설득한다. 그는 이 마을의 실세다. 마을의 절반이 그가 운영하는 공장에서 일을 하는 등 없어선 안되는 절대적인 권력자인 스미스씨다. 어마어마한 비용을 제시하자 아빠는 좋은 조건에 그만 혹해서 엄마의 관을 내어준다. 카야는 엄마가 너무 보고싶어 스미스씨의 저택으로 몰래 찾아가 멀찍이 있는 엄마를 보고 돌아오다 스미스씨와 마주하게 되고, 스미스씨는 친절을 베풀어 따뜻한 집에서 엄마를 볼 수 있도록 배려한다.

 

나는 소설을 카야의 성장이야기로 읽었다. 카야에게 엄마와의 이별은 첫 시련이었을 것이다. 얼음 속 엄마라도 보고싶어, 아빠의 약속을 저버리고 카야는 미지의 공간이 스미스씨의 저택을 찾아간다. 카야는 이후에 맞닥뜨리는 시련과 공포 속에서 선택을 하는데, 이 과정에서 나는 카야의 성장으로 읽은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여러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소설은 복잡하지 않은 플롯과 소재로 스토리를 이어가지만 그럼에도 힘이 느껴지는 것은 카야의 선택에서 느껴지는 감동이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것을 떠나보낼 줄 아는 것. 실체는 사라졌지만 추억과 기억, 따스했던 감정 등을 간직하며 이별할 줄 아는 태도. 이것이야말로 성장에 있어서 필요한 깨달음이 아닐까. 카야의 이야기를 따라 가다보면 내가 소중히 여겼던 것이 떠오르며 그것에 나는 어떤 마음자세를 가지고 있는가 떠올리게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상 끝 아파트에서 유령을 만나는 법 고블 씬 북 시리즈
정지윤 지음 / 고블 / 2021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갑작스러운 이별 앞에 남은 자는 무엇이 필요할까. 상실 앞에 사람들은 다양한 선택을 한다. 슬픔으로 무기력해지기도 하고, 체념하거나, 분노에 휩싸여 복수를 꿈꾸기도 한다. 소설<세상 끝 아파트에서 유령을 만나는 법>은 가까운 미래의 세계에서 느닷없고, 의문스러운 이별 앞에 남은 자들이 모여 작당모의하는 이야기다.

 

소설은 텐서칩이라 불리는 감응형 생체칩이 상용화된 세상을 전제로 한다. 이것이 무슨 말이냐 하면, 인체에 칩을 삽입하면, 현실 위에 증강현실이 펼쳐진다. 스마트폰을 들여다 보지 않아도 눈앞에 나타나는 가상의 표시로 길안내를 받을 수 있으며, 거리를 걷으면 개인별 맞춤형 광고판이나 노랫소리가 별도의 장치가 없이도 들리고, 보이는 것이 가능한 세상을 가정한다. 아무래도 몸에 삽입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기 마련이라 거부 운동을 펼치는 세력도 등장한다. 이들은 생체칩 상용화에 반대운동을 펼쳐 생체칩 활용이 불가능한 기술보호구역을 지정하는 조건으로 상용화를 받아들인다. 소설의 주요한 무대가 되는 베니스 힐 아파트는 전국에 몇 개 남지 않은 기술보호구역중 한 곳이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수학 과외 선생님의 제안에서 시작한다. 베니스 힐 아파트에 사는 고등학생 요한은 절친한 친구 J를 잃고 방황을 한다. 성적이 바닥을 치자 수학 과외를 시작하게 된다. 그런데, (요한은 과외 선생님을 쌤이라 부른다.)이 좀 특이하다. 요한의 주변 어른들과 사뭇 다르다. 계속 들쑤신다. 친구 J의 죽음은 의심스러운 부분이 많았지만, 경찰에선 별다른 수사 의지도 없기에 사고사로 마무리되었다. 과외 쌤은 자신이 도와줄테니, 죽음의 내막을 가설을 세워가며 파헤쳐보자고 요한의 마음을 흔든다. 요한은 쌤의 제안에 승낙한다. 소설은 증강현실이 상용화된 세상에서 과외쌤과 고등학생, 그리고 과외 쌤의 검정개 재즈(개가 말을 함. 검색능력도 좋음)와 함께 친구J의 죽음의 내막을 파헤친다.

 

소설이 요한의 시점에서 진행된다. 요한은 꽤나 과외쌤과 재즈에게 마음을 쓴다. 조잘대는 재즈와 낯간지러운걸 잘 참지 못하는 요한, 다소 미스터리한 과외쌤 이들의 관계가 꽤나 귀여워 흐믓해진다. 나름의 역할분담으로 팀워크를 선보이며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과정이 속도감있게 전개되어 정신없이 따라가다보면 결말에 도달한다. 과연 그들은 어떤 답을 얻어냈을지...

 

있을 법한 소재를 활용해 몰입도 높은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것이 가장 돋보였다. 머리말부터 마지막 작가의 말까지 완벽한 소설. 정지윤 작가는 독립출판 <악당은 모두 토요일에 죽는다>로 알게 된 작가다. 단편 때도 흥미로운 소제로 탄탄한 이야기를 구성했었는데, 이번 작품도 만족스러웠다. 스릴러 장르로 앞으로 무척 기대되는 작가 중 한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