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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프픽션
조예은 외 지음 / 고블 / 2022년 1월
평점 :
몹쓸 고질병이 있었다. 남들이 좋아하는 것은 일단 멀리하고, 베스트셀러라고 하면 선뜻 손이 가질 않고, 영화 평점이 지나치게 높으면 경계부터 하고 보는 아주 몹쓸병. ‘극단적인 콘텐츠 편식병’ 플랫폼이 활성화되고, 콘텐츠의 수가 폭발하는 요즘, 취향이 겹치는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더욱 마이너의 마이너를 향해 파고 또 파다 정말 나의 취향을 잊어버리게 되자 정신차리는 중이다. 도대체 언제부터 병이 시작된 걸까. 나는 왜 마이너에 집착하게 되었는가. 모두의 취향에 들기 위해서는 실험적인 선택보다는 안전한 쪽을 선택하다보니 엇비슷한 이야기가 반복되는 주류의 콘텐츠 보다는 나의 취향과 딱 떨어지는 실험적이고 과감한 시도를 하는 마이너 감성의 콘텐츠를 좋아한 것이다. 펄프픽션도 이와 비슷한 감성의 사람들이 쏟아낸 콘텐츠 덕분에 형성된 하나의 장르다.
펄프픽션은 20세기 초 미국에서 저렴한 잡지 “펄프매거진”에 실린 소설을 뜻하는 이름이었다. 기성소설에 비해 질적으로 떨어지다보니, 비주류의 소설, 싸구려 소설이라 불렸고, 특히 장르소설이 이에 많이 속했다고 한다. 아무래도 상상력에 기대는 장르소설이다보니 실험적인 도전이 필요하지 않았을까싶다. 고블에서 이번에 펄프픽션이라는 제목의 앤솔리지를 선보였는데, 한국의 펄프픽션을 정의하고자 했다고. 과연 야심차다.
소설 <펄프픽션>은 지나치기 쉬운 사람들의 목소리에 집중한다. 다섯작가들이 각각 주목한 대상들은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놓치기 쉬운 숨은그림찾기 속 정답같다. 대학입시에 밤낮없이 공부만 하는 학생, 투명인간 취급당하는 청소노동자, 소외받는 노인들. 주변부에 위치한 이들을 전면에 세우며 풀어나가는 이야기가 저마다 독특한 장치와 소재로 흥미를 끈다. 시체를 유기하는 주인공에게 설문조사하는 쇳덩어리 외계인, 한국에서 열심히 노동하는 영국출신 외노자 뱀파이어. 장난스러워보여 책읽기가 살짝 망설여졌었는데, 탄탄한 구조와 이야기로 재미뿐만 아니라 감동도 주었다. 출판사의 기획의도는 보기좋게 성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