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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의 그리스 로마 신화
김헌 지음 / 을유문화사 / 2022년 3월
평점 :
이야기를 읽는 것의 의미
유럽 및 영미권 문학을 접할 때 난감한 순간을 맞이하는 경우가 많다. 기독교 성경, 그리스 로마 신화의 요소를 독자가 모두 이해하고 있으리라는 전제하에 설명 없이 비유로, 때로는 이야기의 핵심 요소로 활용하는데, 전혀 그에 대한 배경 지식이 없을 때 퍽 난감하다. 유년 시절 꾸준히 종교활동을 해왔던 덕분에 기독교적 요소는 큰 무리 없이 소화할 수 있었던 반면, 그리스 로마 신화와 관련한 요소는 오이디푸스, 판도라 등 그동안 많이 인용되었던 이야기 외에 신화에 자신이 없어 알아차리지 못하는 문학적 장치나 은유로 문학을 오롯이 향유하기에 부족함을 매번 느낄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는 시간 내어 그리스 로마 신화를 정복하겠노라 다짐하지만 방대한 분량과 복잡한 가계도를 들춰보다보면 겁먹고 주춤하게 됐다. 이와 같은 고민을 가진 독자에게 <김헌의 그리스 로마 신화>는 입문서로 탁월한 책이다.
저자는 20여년 가까이 대학에서 그리스·로마 신화 강의를 이어온 김헌 교수다. 신화는 신과 영웅들의 이야기이고, 너무나도 오래되었는데, 과연 현대를 살아가는 ‘내’가 이야기를 읽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저자는 다음과 같이 신화를 읽는 것의 의미를 설명하며 그리스 로마 신화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신화는 정보와 지혜의 보물창고이며, 철학 이전의 철학이었고, 철학 이후에도 또 다른 결을 가진 철학으로 존속해 왔습니다. ... 영웅이든 신이든 모두 인간의 본성을 비춰 주는 거울임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 우리 인간의 모습과 세상을 이해하고 삶을 살아갈 지혜를 얻기 위해 여러분과 함께 나눠 볼 수 있는 이야기들이 담겨 있습니다. (p. 10)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 정통한 저자가 매 이야기마다 내포하고 있는 의미를 풀어 설명한다는 점이다. 이는 독자가 방대한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길을 잃지 않게 도와준다. 아버지가 자식이 두려워 집어 삼키거나 가두고, 아들은 아버지를 내쫓는 등 텍스트 그래도 보면 경악할만한 이야기가 그리스 로마 신화에는 왕왕 등장한다. 아무런 배경지식이나 길잡이가 없었다면 황당한 이야기라 책을 그대로 덮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저자는 속에 담긴 메시지를 찾아내고, 의미를 친절하게 알려준다.
기존의 질서를 절대적인 것으로, 지고의 가치로 고집하는 대신,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는 젊은 세대를 독려하고 응원하는 교육이지요. ... 젊은 세대의 새로운 도전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가지고 독려하고 응원하는 자세 또한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 기존의 질서에 도전하는 자만이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말입니다.
p.53
또 다른 이 책의 장점은 에피소드마다 간결하고 짧게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가계도를 먼저 읊어대며 시작하지 않으며 신의 대표적인 에피소드를 등장시키는데 매 분량이 부담되지 않다는 점이다. 시간적 순서가 크게 중요하지 않아 그럼에도 전체 분량이 부담되는 독자에게는 목차를 살펴 흥미가 생기는 이야기부터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또한 지금 읽고 있는 서구권 문학의 배경지식이 필요할 때 옆에 책을 두고 살펴보며 읽어가는 방법도 추천해본다. 예를 들어 크리스타 볼프의 <메데이아, 또는 악녀를 위한 변명>은 이아손과 메데이아의 여정 이야기를 알고, 소설을 탐독한다면 이야기가 다르게 다가올 것이다.
간결하고 짧은 분량으로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지만 아무래도 방대한 내용을 다루다보니, 충분한 해석과 의미를 설명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시대가 변함에 따라 당시의 이야기가 가지고 있던 한계나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며 의미를 찾는 등 좀 더 설명해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드는 부분도 있다. 더불어 저자와 동의하지 않는 부분도 물론 있으며 다르게 해석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의문이 드는 지점도 더러 확인할 수 있었다.
대체로 젠더적 관점에서 이야기를 읽어갈 때 부족한 해석과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당시 그리스 로마 신화가 생성됐던 시대적 한계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저자가 서두에 언급했듯이 이야기를 현대에도 여전히 유효하기 위해 해석하고 의미를 찾는 방식을 달리한다면 더 풍성하고 흥미롭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다소 있었다. 예를 들어 뛰어난 미모로 인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우스의 술 시중을 들며 불멸의 존재가 된 가뉘메데스의 이야기에서 제우스의 성적지향을 단호하게 선그어 말하는 지점에서 다소 불편했다. 제우스가 어떤 성적지향을 확인하는 것은 가뉘메데스의 이야기를 읽는 데에 전혀 지장이 되지 않는데, 굳이 아니라고 짚는 부분에서 의아했다.
또한 당시 여성혐오적인 이야기를 재해석했다면 현대를 살아가는 독자에게 흥미롭게 다가갈 수 있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이 들기도 했다. 최초의 여성 판도라에 관한 이야기에서 호기심으로 상자(원래 텍스트에서는 항아리였다고 함. 번역의 오류였음을 저자가 짚어줌)를 연 것을 인류의 ‘재양’으로 해석하기 앞서서 판도라가 상자를 열 수밖에 없었던 계기나 배경을 강조했다면 새로운 관점의 해석이 가능했을 거라 여겨진다. 제우스가 인간세계에 재앙을 주기 위해 여성을 창조해 선물하는 걸 알아차린 프로메테우스가 동생에게 선물을 절대로 받지 말라며 신신당부를 하는 대목에 집중해본다면 현대적 요소와 연결 지어 새로운 관점으로 볼 가능성이 있다. 앞서 새로운 시대와 질서가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며 우라노스의 이야기를 긍정적으로 해석했듯이 최초의 여성의 호기심으로 인해 인간은 신의 보호 아래 수동적인 존재에서 탈피하고, 적극적인 주체로 나서는 계기가 되었다는 방향으로 재해석해볼 여지가 충분하지 않았을까. 게다가 발생한 현상을 없는 존재로 여기며 덮어버리기만 하는 것 문제해결보다는 문제를 더 키울 수 있다는 메시지도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 프로메테우스가 재앙의 씨앗을 선물로 활용할 방법 생각은 없이 무시하고 덮어버리겨는 계략은 요즘 현대사회에 채용시장에서 여성을 배제하는 ‘펜스룰’이 떠올랐다. 이를 연결지어 설명했다면,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이야기 메시지가 현대적으로 어떻게 해석되고 활용될 수 있는지 흥미롭게 읽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들이 남긴 이야기를 보며 우리는 우리의 삶과 세계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따져 묻습니다.(p.599)
이토록 오랜시간동안 이야기가 힘을 얻고 이어질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남긴 이야기를 각자의 시대마다 새롭게 해석하고 의미를 찾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저자의 해석에 의문을 품고, 독자마다 새로운 해석을 할 수 있는 것도 그리스 로마 신화가 지금까지 이어질 수 있는 이유가 아닐까. 신화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를 저마다 해석해보며 읽어가는 것도 하나의 재미요소가 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