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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의 도박 ㅣ 페이지터너스
아르투어 슈니츨러 지음, 남기철 옮김 / 빛소굴 / 2024년 1월
평점 :
일요일 아침, 밖에서 요란하게 이름을 불러댄다. 보초를 서고 있던 당번병의 부름이다. 일요일에는 깨우지 말라했건만. 누군가가 찾아왔다는 소리에 당번병에게 좀 짜증을 부리고 자리를 고쳐 앉는다. 옛 동료 보그너다. 보그너는 도박 빚으로 불명예 제대한 녀석이다. 요즘 뭐 하고 살고 있나 했더니만 어느 회사에서 경리로 일하고 있다고. 아픈 자식의 병원비 때문에 이따금 회사 금고에 손을 댔는데, 하필이면 내일 갑작스러운 회계 감사가 있어 금고에 빈 950굴덴을 빌리러 왔다고 한다. 그만한 돈이 없다고 거절하자 이 몰염치한 인간은 내 외삼촌을 들먹인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외삼촌은 용돈을 보내주시며 후원을 해주셨다. 그것도 2년 전쯤에 연락이 끊겼다. 젠장, 이런 거까지 내가 일일이 설명해 줄 필요는 없지. 지난번 군의관 투구트가 50굴덴 가지고 3천 굴덴을 딴 게 떠올랐다. 나는 장담은 못 하지만, 수중에 있는 돈으로 도박을 해보겠노라고. 50굴덴이 안 되는 1천 굴덴을 얻게 된다면 보그너에 주겠노라 말하니 보그너는 전혀 기대하지 않는 얼굴로 돌아갔다. 되면 좋고, 아니면 말고 싶은 심정으로 목표도 생겼으니, 가벼이 오늘은 카페쇼프에 들러 도박판에 껴볼까나.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소설 『한밤의 도박(Spiel im Morgengrauen)』의 이야기는 일요일 아침에 돈을 빌려달라는 옛 동료의 부탁에서 시작된다. 앞의 문단은 소설의 시작을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요약해 각색해 본 것이다. 이야기는 19세기 후반 오스트리아 어느 소위가 3일간 겪은 내용이다. 소설은 크게 돈을 잃은 카스다 소위의 이야기와 잃은 돈을 메꾸기 위한 노력으로 크게 나뉜다. 3인칭 서술이지만 카스다 소위의 내적묘사가 상세히 묘사되는 것이 특징이다. 슈니츨러의 소설은 인물의 내적묘사가 탁월하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카스다 소위는 풍족하진 못하더라도 군인으로 명예와 자긍심으로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회삿돈을 횡령했다는 사실보다 자제력을 잃고 도박 빚을 져 불명예 제대한 점을 더 크게 질타하는 것은 이를 잘 드러내는 지점이다. 하루 반나절 내로 빚을 갚지 못한다면 부대에 그 사실을 알리겠다는 으름장에 카스다 소위가 크게 좌절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주인공의 상황과 성정을 파악한 독자는 주인공의 내면을 몰입해 따라갈 수밖에 없다. 첫 장을 펼치는 순간 손에서 놓을 수 없이 단숨에 소설의 마지막 장을 향해 읽어 내려갈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소설은 계속해 ‘만약에’란 가정의 문장을 떠올리게 한다. 만약에 옛 동료가 찾아오지 않았다면, 만약에 적절한 순간에 도박판을 떴다면, 만약에, 만약에. 카스다 소위에 감정 이입된 독자는 카스다의 선택마다 안타까워하며 시간을 과거로 돌렸으면 하는 마음이 클 테다. 도박이라는 요소는 안타까움을 극대화한다. 작은 돈이 큰돈 단위로 바뀌면서 독자는 속으로 인제 그만 손을 털고 일어나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은 심정이다. 슈니츨러도 한때 도박 때문에 고생을 한 적이 있다고 하니, 탁월한 심적 묘사는 경험에서 나왔을지도 모르겠다.
주인공을 둘러싼 캐릭터의 특징도 이 소설의 매력을 더한다. 소설 속 인물들은 대체로 뻔뻔하거나 눈치가 없다. 카스다 소위는 흘리듯 말한 초대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일요일마다 환대받지 못하는 점심 식사 자리에 얼굴을 비춘다. 한 번도 아니고 매주라니. 눈치는 주지만 내쫓지 않는 집주인 캐스너씨가 새삼 대인배처럼 느껴질 지경이다. 친구가 본인 때문에 큰 빚을 졌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이번에야말로 외삼촌을 찾아가 자신의 빚까지 청산을 요청하는 옛 동료 보그너는 소설 끝까지 밉상이다. 외삼촌의 재혼 상대인 외숙모에게 빚 탕감을 부탁하고자 찾았을 때 외숙모의 태도 또한 흥미롭다. 제멋대로인 캐릭터들은 주인공의 급박한 상황에서 더 빛난다.
극적인 서사 진행과 손에 땀이 나는 내적묘사는 이 소설의 큰 매력이자 특징이다. 쉽게 풀어낸 번역도 한몫한다. 어떤 이가 독일어권 문학은 고루하고 재미가 없다고 했다면 그건 아직 아르투어 슈니츨러를 만나보지 못했기 때문일 테다. 소설 『한밤의 도박』은 3일간의 짧은 기간 동안 롤러코스터를 타며 오르락내리락 운명이 계속해서 바뀌는 소설이 궁금하다면 기꺼이 추천하는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