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눈은 모든 것을 덮는다
이한칸 지음 / 델피노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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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요소가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흰 눈은 모든 것을 덮는다. 어쩌면 눈은 소리마저 덮는 듯하다. 눈이 내리면, 특히 새벽 눈이 내릴 때면 주변의 소음은 자신들의 소리를 가만히 두고 눈의 적막함에 귀 기울이는 듯하다. 흰 눈으로 덮인 겨울은 다른 계절과는 확연히 다른 기운이 감돈다. 이 겨울 동안만이라도 '내가 하지 말았어야 했고, 지금도 후회하는 그 모든 죄를 내려놓아도 된다'고 속삭이듯 내린다. 과거의 후회는 덮이고 그 위로 결백한 눈이 보인다 - 008 page

표지에 나온 하얀 눈이 내리는 눈 덮인 흰 산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고요해지는 듯했다. 이번에는 어떤 이야기가 날 기다리고 있을까? '어린 날의 할머니에게 받은 사랑과 흰 눈을 향한 속죄의 기다림'이란 무엇일까? 과거 할머니와의 추억을 떠올리는 아련함일까? 잔잔한 감동을 기대하면서 책을 읽었다.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부분은_쥐불놀이라는 하는 장면, 막내 사촌 오빠와 노는 장면, 할머니와의 추억 등_ 놀라울 정도로 디테일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하지만 따뜻한 이야기와는 달리 읽는 내내 묘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그녀가 태어난 지 3개월도 안되었을 때 그녀의 엄마는 집을 나가 버린다. 모든 불행은 잘하는 것이라고는 남을 비아냥대는 것밖에 없는 그녀의 아버지로부터 비롯되었다. 어느 날 술에 취한 그녀의 아버지가 할머니를 때리고 밀치는 바람에 할머니는 넘어지면서 머리를 다치게 된다. 그 사건을 유일하게 목격한 그녀의 나이는 6살이었다. 무서운 마음에 자신이 본 것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죄책감을 느끼게 되며, 그일은 어른이 되어서도 그녀에게 큰 상처로 남게 된다. 결국 그 사건을 계기로 그녀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였던 할머니는 고모집으로 떠나게 된다. 이 후 그녀의 아버지는 어린 남자아이를 둔 새엄마와 재혼하게 되면서 그들의 삶은 더욱더 고달파진다.

추석에 할머니를 뵈러 고모네 집에 가게 되지만 재회의 기쁨도 잠시. 빚쟁이가 고모네 집까지 찾아와 그녀의 아버지에게 빚독촉을 하자 오히려 독설을 퍼붓곤, 오히려 큰아버지 탓을 하며 이내 친척들과도 완전히 인연을 끊어버린다. 이후 친척들과의 교류를 일체 허용하지 않았던 그녀의 아버지 때문에 옆 마을에 사는 이모할머니에게도 가지 못하고 완전히 고립된 상태에서 외롭게 자라게 된다. 어렸던 그녀는 그렇게 무기력하게 그녀를 보호해 주고 사랑해 주었던 모든 사람들을 잃게 된다. 그 후 그녀의 언니가 도시락을 싸주는 등 할머니의 빈자리를 대신해준다. 공부를 잘해서 명문대를 다녔던 언니는 그녀의 아버지의 빚을 갚기 위해 공장에서 들어가게 된다. 성인이 되자 할머니를 자유롭게 찾아갈 수 있게 되지만 할머니는 손녀들을 알아보지 못한다. 손녀가 옆에 있음에도 알아보지 못하고 6살 또래의 아이들에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할머니를 바라보던 주인공이 너무 불쌍하고 가엽게 느껴졌다. 또한 할머니께서 그 사건을 기억하고 있음을 주인공에게 말하는 장면을 보며, 그 당시 할머니의 마음은 어땠을지 그리고 그 말을 들은 그녀의 마음은 어땠을지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네가 나무 옆에 숨어 있고 애비가 나를 발로 차서 쓰러졌지. 내가 돈을 고모한테 다 보냈다고. 내 돈을 내가 쓰는데 화가 그렇게 나서는 나를 밀더니 발로 차서 허리가 두 동강이 났다. 아직도 혼자 일어나지를 못한다. 내 머리에 피가 철철 났는데, 그때 머리가 깨졌을 거다. 그래, 내 피도 닦아주고 했다면서?"

그날 밤 모든 것을알고 계셨던 할머니.-143 page

아버지는 계속 거짓말을 했다. 방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잡으려다 놓쳐서 뒤로 넘어지시는 걸 취해서 봤지만 확실하다고. 그리고 나도 계속 거짓말을 했다. 그 옆에서 한마디도 진실을 거들지 못하고. 나는 자고 있었고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그 거짓말로 나는 스스로 내 마음을 다치게끔 만들었다. 그것은 분명히 내가 살기 위해, 나 스스로 지켜내기 위한 거짓말이지만 결국엔 그 누구도 지킬 수 없었던 선택이었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145 page


그녀의 삶은 지옥과도 같았다. 할머니의 장례식에서조차 그녀는 아버지의 빚으로 인해 끔찍한 일을 겪게 되지만 이번에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혼자 삭이게 된다. 이후 그녀를 진심으로 아껴주던 남자친구 덴을 만나게 되지만 수많은 상처로 이미 너무 지쳐버린 그녀는 덴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별을 고하게 된다. 성인이 된 그녀가 코끼리산에서 심장 귀신과 뛰놀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장면은 따뜻했던 그녀의 어린 시절과 대조되어 더욱 슬프게 느껴졌다. <흰 눈은 모든 것을 덮는다>는 따뜻하지만 깊고 진한 슬픔을 느끼게 한 소설이었다.

하늘에는 음침하고 무서운 달이 떠있었다. 내가 봤던 달 중에 어둡고 축축하고 내가 잘못하기만을 바라고 있다가 툭하고 떨어져서 축축한 침을 흘리며 나를 사지로 몰아넣고 그 잘못 하나하나마다 온몸을 토막 내어 꿀꺽 삼킬 것 같은 달. 이제는 저 달을 올려다볼 수도 없을 것 같은 두려운 마음에 나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강물에 비친 환영처럼 일렁이는 검은 물결을 내려다봤다. 그 다음은 아주 자연스러웠다. 결말을 알고 있어도 시시하지 않은 이 밤은 저 달 때문이리라.-303 page

※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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