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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사랑 - 언젠가 너로 인해 울게 될 것을 알지만
정현주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20년 9월
평점 :
사람의 뇌는 고통을 가장 먼저 잊도록 구조화되어 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책을 읽으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슬픈 기억들조차도 아름답게 추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사랑으로 아픔을 겪은 사람들에게 '그래도 사랑하길 잘했다'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것 같았다. 과거 상상도 못한 방식의 이별을 경험하고, 마음 아파하고, 울다 지쳐 몸이 병들고, 지워지지 않을 큰 상처가 남았지만, 작가는 이것을 상처라 하지 않고 흉터라고 말한다. 사랑의 대가로 겪었던 아픔을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성숙해진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과 같은 이별의 아픔이 있는 사람들에게 <그래도 사랑>을 통해서 위로의 말을 건네고 있었다.
<그래도 사랑>은 만남부터 시작해서 헤어지고 다시 만나기까지의 독특한 흐름으로 진행되는 에세이였다. 남자의 관점과 여자의 관점들이 혼합되어 있어서 성별에 따른 사랑의 미묘한 차이를 알 수 있었다. 서로 좋아했지만 타이밍이 맞지 않아 연인이 되지 못하며 친구 사이로 굳어진 남녀의 이야기, 편의점에서 일하며 호감을 느낀 손님의 이야기, 도서관에서 우연히 빌린 책에 끼워진 편지를 읽으며 얼굴도 모르는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이야기, 연인과 가슴 아픈 이별을 하게 되는 이야기, 생각지도 못한 재회로 다시 연인으로 발전하는 등 다양한 형태의 사랑의 이야기들이 담겨있어서 읽다 보면 추억이 강제소환되기도 했다. 호감이 사랑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호감에서 맴돌다 사랑의 결실을 맺지 못하기도 하는 것을 보며 세상에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다양한 형태의 사랑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책 덕분에 평소 사랑이라고 정의한 것들의 영역이 확장되었다. 그러면서 사랑이라 생각하기도 전에 흘려버린 과거의 사람들을 떠올리기도 했고, 앞으로 다가올 다양한 형태의 만남-사랑-이별-아픔-재회를 상상해 보기도 했다. 시뮬레이션을 하듯 한 장면 한 장면 떠올리며 읽고나니 성숙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 못난 남자가 되어버렸구나. 자기 여자를 불안하게 하는 건 못난 남자나 하는 일이라던데. 내가 미안해. 중요한 일이 있었어. 깊이 생각을 해야 했고 말이야. 접시는 잊어. 더 예쁜 것으로 사줄께."
고답다고 여자는 말했다. 하지만 여자는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아마도 여자가 숨기고 있는 마음을 남자는 이해했던가 보다. 전화를 끊기 전 이런 말을 덧붙였다. "깨진 접시는 다시 붙일 수 없지만 살아 있는 것들은 달라. 상처가 났던 자리가 다시 붙으면 거기는 더 단단해지잖아. 그런 일은 없겠지만 어떤 일이 있어도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고, 나를 믿고 우리를 믿어." 그것은 출렁거리는 불안의 파도를 잠재우는 마법 같은 말이었다.
-136 page
각양각색의 사랑 이야기를 각 사연들과 영화 그리고 소설 등을 통해서 들려주었기 때문에 더 재밌었고, '사랑의 과정'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또한 20년 동안 라디오 작가로 활동하면서 그녀가 보고 듣고 경험한 다양한 형태의 사랑 이야기는 심리학 책 또는 소설책에서 얻을 수 있는 지식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특히 엘비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죽음의 다섯 단계'인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의 과정을 '이별의 과정'과 비교하는 부분은 인상 깊었다. 그럴 리가 없다고 부정하고, 왜 하필 나냐고 화를 내고, 내가 더 잘할 테니 기회를 달라고 애원하고, 희망이 없을 느끼고 절망하고, 그 후 죽음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모습이 이별을 경험하는 연인의 모습과 정말 많이 닮아있었다. 이별의 아픔이 죽음과 맞먹을 정도로 큰 고통일 수 있다는 걸 깨닫고 나니 수많은 이별을 잘 견디고 극복해 온 내 자신이 대견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사랑>을 다 읽고 나니, 누구보다 사랑에 대해 잘 알고 또 많이 썼다는 작가의 말이 더 이상 과장되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 책이 들려준 많은 사연들을 읽으면서 나를 비롯한 타인의 마음을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연예 상담을 해달라는 사람들의 요청이 마냥 불편하게 느껴지지는 않을 거 같았다. 만약 주변에 사랑과 이별로 인해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책을 권해주면 싶어졌다. 아름답고 운명 같은 사랑도 허무하게 끝이 나기도 하고,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연인이 되기도 한다는 걸 각양각색의 사연들을 통해 깨달으며 치유받고 힘을 얻을 수 있을 거 같았다. 누군가 과거의 상처로 인해 현재 찾아온 인연 앞에서 주춤거리고 있다면 이 책을 통해 이런 사랑도 저런 사랑도 결국엔 성숙한 사랑의 결실을 맺기 위한 과정이었음을 깨닫고 용기를 내어보면 좋을 거 같다.
경험과 시행착오가 필요할 거예요. 예를 들면 귀한 사람을 잃었다가 다시 찾는 것처럼 말이에요. 고맙게도 헤어져 있는 시간을 통해 더 큰 확신을 갖게 되었네요. 이 순간의 소중한 감정을 기억해두세요. 좋은 기준이 되고 중심이 되어 두 사람을 지켜줄 테니까. 저는 이 말이 좋습니다. '그들은 이제 자기 안의 아픔을 보지 않는다. 대신 상대의 눈빛을 본다.' 그 눈 안에서 어려운 날에도 다시 확신을 얻으면서, 서로 믿고, 자기 자신을 믿으며 함께 있길.
-상실의 시간을 통해 우리가 얻는 선물(그들에게 말 걸다)_337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