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리뷰에는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책의 표지에서 품어져 나오는 분위기는 매우 강렬했다. 마치 책의 내용을 암시하는 듯, 왼쪽에는 사랑을 의미하는 하트, 오른쪽에는 죽음을 상징하는 해골, 그리고(and) 강렬한 빨간색 배경에서 느껴지는 광기까지 책의 제목과 너무 잘 어울렸다.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는 원래 '모든 색으로 된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출판하려 했지만 작가의 고집으로 인해 지금의 제목이 붙여졌다고 한다. 통상적인 어법까지 무시하고 구두점 또한 제거함으로써 사랑-광기-죽음의 세 영역이 동등한 가치를 지니고 있음 강조하고 싶어했기 때문이었다. 이점에 대해서는 작가의 선택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모든 색으로 된 이야기'라는 말로는 이책의 강렬함을 표현하기에는 한없이 부족한거 같다.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에는 수많은 '죽음'이 등장한다. '저자 오라시오 키로가는 왜 이렇게 '죽음'에 집착하는 걸까?'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질문이었다. 이 질문의 답은 335p-343p에서 수록된 '오라시오 키로가 연보'를 읽고 난 후에야 알 수 있었다. 한사람의 인생에서 어떻게 이렇게나 다양한 죽음을 마주할 수 있었는지 신기할 정도로, 그의 삶에서 '죽음'이란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었다. 처음 읽었을 때는 다소 모호했던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의 각 이야기들이 명확해지는 동시에 새롭게 느껴졌다.
맨 처음 등장하는 「사랑의 계절」은 작가가 젊은 시절에 경험한 사랑 이야기를 반영한 소설이었다. 봄-여름-가을-겨울 계절이 바뀜에 따라 네벨과 리디아의 사랑이 외부적인 요인으로 인해 변화를 맞이하게 되는 이야기였다. 네벨은 봄에 열린 사육제에서 처음 리디아를 보게 되고 첫눈에 반하게 된다. 리디아 역시 네벨을 사랑하게 되며, 순수한 사랑을 키워나가는 듯했지만, 그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부모님들의 세속적인 이해관계에 의해 결국 여름에 이별을 맞이하게 된다. 시간이 흘러 네벨은 새로운 연인을 아내로 맞이하고, 그 나름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러던 어느날 가을 우연히 리디아의 어머니를 마주치게 되고, 리디아와 재회하게 되지만 이내 코카인에 중독된 리디아의 어머니의 모습과 독단적인 행동에 환멸을 느끼게 된다. 결국 그해 겨울 네벨과 리비아의 사랑의 비극은 막을 내린다. 이 이야기는 네벨의 감정선이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이 이별을 겪고, 이후 재회했을 때 네벨이 느꼈을 오묘한 감정이 내 마음까지 울적하게 했다. 「사랑의 계절」 외에도 「엘 솔리타리오」 「이졸데의 죽음」 「뇌막염 환자와 그녀를 따라다니는 그림자」에서도 사랑을 다루었지만 이들의 공통점은 '불가능한' 사랑이라는 점있었다. 「이졸데의 죽음」에서는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의 행복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에스테반의 모습을 통해 지나간 사랑을 '반복'과 '악순환'의 고통을 표현했다. 또한 「엘 솔리타리오」에서 카심이 마리아의 물질적 욕망을 영원히 충족시켜주기 위해 선택했던 방법은 낭만적인 사랑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에서 거의 유일하게 사랑의 결실을 맺은 「뇌막염 환자와 그녀를 따라다니는 그림자」 역시 그 과정은 광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뇌막염을 앓던 마리아 엘비라의 "착란 증세"로 시작된 사랑은 광기에 가까운 것이었다. 처음에는 자신의 의사와는 별개로 그녀의 옆을 지켜보았던 두란은 서서히 그녀에게 애정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그녀의 사랑이 두란을 향한 온전한 사랑이 아닌 착란 증세에서 비롯됨을 알고 있기에 그는 괴로워한다. 그러던 어느날 마리아 엘비라에게서 '병이 다 나아서 더 이상 착란 증세가 나타나지 않아도 지금처럼 절 사랑하실 건가요?'라는 말을 듣게 된다. 오로지 망상에 사로잡힐 때만 두란을 찾던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며 기뻐하게 되지만, 불행히도 그녀의 병이 다 낳자 두란을 향한 광기적인 사랑 또한 사라지고 만다. 두란은 자신의 감정과 현실 사이에서 혼란을 느끼며 괴로워하고 되고 이별을 결심하게 된다. '착란 증세'에서 비롯된 사랑의 영향 때문이었을까? 마리아 엘비아는 두란을 붙잡게 되고 그렇게 그들의 사랑은 결심을 맺게 된다. 그들의 이야기는 사랑과 광기 이 둘을 모두 담고 있어서 읽는 내내 긴장하며 읽는 재미가 있었다.
「목 잘린 닭」은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에서 가장 기대되었던 이야기였고, 가장 비극적인 결말을 담고 있는 이야기였다.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젊은 부부의 사랑의 결실로 얻게 된 아이들이 일정 시간이 지나면 모두 백치가 된다. 처음 아이의 상태가 심각함을 알고 병원을 찾게된 부부는 병의 원인이 부계의 유전에 의한 병일 수 있다는 말을 듣게 된다. 또한 모친의 폐에 문제가 있으니 정밀검사를 받아보라는 말을 듣게 된다. 처음에는 자신의 슬픔보다 상대방의 아픔을 걱정했던 그들은 계속되는 비극 앞에서 결국 서로를 탓하게 되고 비난하게 된다. 불행의 연속일 거만 같던 부부에게서 다섯 번째 아이(베르티타)가 태어나게 되는데, 다행히도 다른 아이들과 달리 정상적으로 성장하게 된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베르티타의 등장으로 백치가 된 네 명의 아이들은 부부의 관심에서 완전히 소외되어 버리며 하녀에게서조차 냉대를 받게 된다. 그러던 어느날 항상 벤치 앉아 벽돌담을 바라보며 멍때리거나 히죽되던 네 명의 백치들이 부엌으로 향하더니 하녀가 닭의 목을 자르고 조금씩 피를 뽑아내는 모습을 넋 놓고 보게 된다. 이 장면에서 나는 앞으로 일어날 비극적인 결말을 예측할 수 있었다. 외출에서 돌아온 베르티타가 벽돌담에 올라가는 모습을 바라보던 네 명의 백치들의 표정을 묘사하는 부분은 긴장감을 더욱 고조시켰다. 이내 비극적인 결말에 이르는 과정은 참혹했고, '몸에서 서서히 생명의 기운을 빼냈다'는 표현은 섬뜩했다.
『초점 없이 멍하던 아이들의 시선에서 활기가 살아났다. 아이들의 눈동자에서 강력한 빛이 뿜어 나왔다. 여동생의 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아이들의 얼굴이 오랜만에 먹이를 찾은 짐승처럼 탐욕스럽게 실룩이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천천히 담 쪽으로 다가갔다 …바로 그때 누군가가 한쪽 다리를 잡아채는 느낌이 들었다. 아래에서 자기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여덟 개의 눈동자를 보자 베르티타는 덜컥 겁이 났다. (중간생략) 아이들 중 하나가 베르티타의 목을 누르더니, 닭털이라도 되는 양 머리채를 움켜잡았다. 그러는 사이, 다른 아이들은 베르티타의 다리 한쪽을 잡고 부엌으로 질질 끌고 갔다. 그날 아침에 잡은 닭의 피가 여전히 고여 있는 부엌에서 아이들은 베르티타를 꽉 붙잡은 채, 몸에서 서서히 생명의 기운을 빼냈다』
마치 하녀가 닭을 잡는 장면과 아이들의 모습이 교차되는 것 같았다. 이 이야기는 비극으로 시작해서 더 큰 비극으로 마무리된다는 점에서 광기와 죽음을 가장 잘 표현한 작품인 거 같다. 이야기를 다 읽고 난후에는 네 명의 아이들이 하루 종일 바라보았던 '벽돌담' 그리고 그 '벽돌담'을 넘으려다 비극을 맞이한 벨르티타를 떠올리며 '벽돌담'의 의미가 무엇이었을지도 생각해보게 되었다. 이처럼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는 비극적일수록 더 기억에 남고 내용을 곱씹을 수 있는 작품이 많았다. 「깃털 베개」에서는 결혼에 대한 환상 속에서 현실 불가능한 사랑을 꿈꾼 아내가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결말을 통해, 내가 생각하는 결혼이란 무엇인지 떠올려보게 되었고, 가끔씩은 베개를 점검하게 되었다.
남아메리카 밀림에서 벌목과 원목 가공 작업을 하는 계약직 노동자 멘수들의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멘수들」 또한 사랑-광기-죽음을 잘 표현한 작품이었다. 한 달 단위로 돈을 받고 일하는 멘수인 카예타노 마이다나와 에스테반 포델레이는 계약금으로 받은 돈을 술과 여자에 흥청망청 쓰게 된다. 방탕한 생활 속에서 카네는 한 여자를 만나게 되고 함께 하게 되지만 이내 배신을 당하게 된다. 고된 노동과 관리자의 횡포 그리고 여자의 배신으로 인해 카넬은 상류X포구에서 도망칠 결심을 한다. 말라리아에 걸린 포델레이 역시 치료를 위해 카넬과 함께 그곳을 탈출하게 된지만 그 과정에서 병이 악화되어 사망하게 된다.
『가을 장맛비가 죽어가는 사람 위로 밤 내내 소리 없이 내렸다. 새벽녁, 포델레이는 빗물 무덤에 누운 채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추위와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점점 죽어가고 있던 카예는 실렉스호에 의해 발견 되면서 구조된다. 그러나 배가 상류X포구를 향하는 것을 알게 된 카예는 선장에게 자신을 그곳에 내려주지말라고 애원하게 되고 그 모습을 안타깝게 여긴 선장은 그를 상류X포구가 아닌 포사다스로 데려다준다.
『그러나 포사다스에 내린 지 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카예는 다시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그 돈으로 흥청망청 술을 마셨다. 결국 거나하게 취한 그는 비틀거리며 향수를 사러 가게로 향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카예가 어리석은 선택함으로써 고단한 멘수로서의 삶을 되풀이하게 될 것을 암시하며 이야기가 마무리된다. 「멘수들」을 통해 사람이 얼마나 자신의 삶속에서 어리석음은 선택을 반복하는지 알게 되었고, 나 자신의 삶에 대해서도 뒤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후반부에는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 3판부터 작가가 작품의 전체적인 통일성을 고려해서 삭제한 세 작품이 실려 있었다.「음울한 눈동자」는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을, 「내 손으로 만든 지옥」와 「광견병에 걸린 개」는 광기와 죽음을 잘 표현한 작품이었다. 세 작품 모두 재밌었고, 읽고 난 후에도 이야기들이 계속해서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나에게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는 죽음이 생각보다 가까운 존재라는 걸 깨닫게 해주었고, 그렇기 때문에 모든 순간을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야겠다는 교훈을 준 의미 있는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