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스 베버 - 세기의 전환기를 이끈 위대한 사상가
마리안네 베버 지음, 조기준 옮김 / 소이연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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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가 골드슈미트에게 제출한 방대한 분량의 학위청구논문인 '중세상사회사서설'은 법률사와 경제사의 경계에 속한다. 이 논문은 훌륭한 학문적 노작이었으므로 베버는 그 성과를 그의 최후의 사회학상 저술 속에까지 넣었다. (60면)

 

2. 이것이 계기가 되어 확대 전개된 저술이 바로 '로마제정시대의 농업사'였으며, 이것은 몸젠과 활발한 문필상의 논쟁으로 이어졌다. 베버는 이 업적으로 베를린에서 1892년 봄에 로마법, 독일법, 상법을 강의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그는 숨 돌릴 겨를도 없이 또 다시 사회정책협회로부터  위탁을 받은 '동엘베지방의 농업노동자에 대한 조사'를 맡았다. 법률학적 연구에 경제학적 연구도 덧붙여졌다. (61면)

 

3. 베버 자신은 '독일 동엘베 지방의 농업노동자의 상태'라는 가장 중요한 부분을 맡았다. 거의 900쪽에 달하는 국민경제학에 관한 처녀작은 최초의 법률학 강의와 나란히 일사천리로 진행돼 1년 만에 탈고했다. 이렇게 해서 그는 곧 자신의 전공 외의 학문에서 젊은 학자들의 신망을 두텁게 얻게 되었다. (73면)

 

4. "최근 엘베 지방 동부 사정에 대해서는 막스 베버 박사가 손으로 그린 모노그라피에 나와 있는데, 그 사상과 이해의 깊이로 인해 독자들이 놀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역작으로 인해 우리가 갖고 있는 전문지식이 이제는 과거에 속하는 것이 되고 말아서 우리는 연구를 다시 새로이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감명을 나에게 갖게 합니다." (G.F. 크나프) (73면)

 

5. 조사에 따르면 동부 지방의 인구 감소의 주요 원인은 대규모 농업경영으로 인해 오래된 공동경제적인 농업구조가 해체된데 있음이 분명했다. 지주들은 점차 많은 토지를 차지하고, 소작농의 권리와 현물 분배를 지양하고 임금을 주는 등 판매를 위한 경영을 하면서 가부장적인 지배계급에서 상업적인 기업가계급으로 변모하였다. 그럼으로써 예전처럼 자신의 밑에서 일하는 노동자와 이해를 같이하던 체제를 파기한 것이다. 그러자 이제는 토지 수확의 일부를 분배받을 수 없고 자기 토지를 갖는 독립농의 꿈을 바라볼 수 없게 된 소작농들이 부역을 그만둔다. 그런데 그것은 가장 나은 보수를 받는 사람들이 떠나는 것이어서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자유스러워지고자 하는 정신적 이유에서였다. (74, 75면)

 

6. 영주에게의 인격적 예속은 개개 노동자에 대한 영주의 인격적 책임이 소멸되면 유지될 수 없다. 값싸고 순종적인 노동력에 대한 지주귀족의 관심은 여기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폴란드인과 러시아인 수천 명이 이 나라로 불러 들어오게 되었다. (75면)

 

7. "우리는 법률의 쇠사슬이 아니라 심리적 연대감으로 소작농을 조국의 토지와 맺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들을 향토에 묶어 두기 위해 그들의 토지에 대한 갈망을 이용해야만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미래를 지키기 위해 한 세대를 토지에 꽁꽁 묶어두려 한다면 우리 스스로 그 책임을 져야 한다." (76면)

 

8. ... 이번에는 바덴 정부가 법률학과 국민경제학의 강의를 맡긴다는 큰 결정을 하였는데, 이것은 여러 가지 점에서 그에게 좋은 징조가 되었다. 1894년 가을에 베버는 프라이부르크로 이사했다. ... 프라이부르크에서 베버는 특히 철학자 하인리히 리케르트와 친교가 두터웠다. (87, 88면)

 

9. "대학교수라는 직업이 내 자신이 얻으려고 노력하지도 요구하지도 않았던 성공에 도달했다고 해도 그와 같은 성공은 그다지 나의 마음을 만족시키지는 못합니다. 특히 내가 이 직업을 택했다는 것이 나에게 적합한 장소를 얻었다고 보느냐 하는 질문에 대답을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96면)

 

10. ... 하이델베르크 대학 철학부가 그를 학계의 거장인 크니스의 후임으로 초빙했던 것이다. (97면)

 

11. 베버는 바쁜 가운데서도 큰 불만이 없었다. 현재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학과에 정통해 있었고, 국민경제학의 이론과 실제, 농업정책, 그리고 노동자문제에 관한 대규모 강의를 치밀한 구성에 따라 완벽하게 틀을 짜놓은 것에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그의 강의는 항상 세심하게 짜여 있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말로써 그때끄때의 감흥으로 강의한다. 침리하게 형성된 개념의 토대는 풍부한 역사적 지식으로 다져져 있었고, 비범한 사고의 예리함은 비범한 조형의 힘에 의하여 보완된다. 이렇게 해서 그는 가장 추상적인 사례에 대해서도 풍부한 실례와 곧바로 헤아려 판단하는 서술로 이해하기 쉽게 강의를 이끌어간다. 이론국민경제학의 대강의를 위해서는 인쇄된 요강을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그는 이것을 확대해서 교과서로 꾸밀 생각이었다. (99면)

 

12. 베버는 마치 날개가 부러진 매와 같은 모습으로 서른아홉 번째 생일에 귀국했다. (106면)

 

13. 이로써 베버는 남자로서 한창 나이에 그의 왕국으로부터 추방되었다. 외적인 의미에서 그의 전도는 이제 없어지게 되었다. 비참한 전락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를 중대사로 보지는 않고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퇴직이라는 사실을 실상 비극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109면)

 

14. 야페는 하인리히 브라운의 '사회과학 아르히프'라는 학술잡지를 매수할 의도가 있었고, 좀바르트와 베버를 공동 편집자로 맞아들이려 하였다. (111, 112면)

 

15. 그는 대학교수 및 정치가로서의 활동적인 생활에서 벗어나 고요히 서재의 관상적인 생활에 몰입하게 된 것이다. (120면)

 

16. 다름이 아니라 그는 고요한 서재에 들어 앉아 세계사적인 것을 해보겠다는 욕망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든 중요한 세계사적 사건으로부터 될 수 있는 한 많은 것을 파악해내 조형하겠다는 충동이었다. (123면)

 

17. '지와 정념은 기교를 부리지 않고도 스스로가 드러난다' (파우스트) (125면)

 

18. 사회과학 영역에서는 방법론이 특히 격렬한 논란을 빚었다. 왜냐하면 그 대상인 인간행동은 자연의 여러 과정에 의존하고 있음이 분명하면서도 자연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의 경계에 위치해서 자연의 영역에 들어가든 자유의 영역에 들어가든 어느 것이나 타당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126면)

 

19. 베버는 이처럼 모든 역사에 적용되는 보편개념을 이상형Idealtypen - 이것은 이미 게오르크 옐리넥이 그의 '일반국가론'에서 훗날의 베버와 마찬가지의 의미로 사용한 용어이지만 -이라고 이름지었다. (131면)

 

20. "이상형은 현실 속에 있는 것을 서술하지는 않지만 서술에 생생한 표현수단을 주게 된다." "그것(이상형)은 가설은 아니지만 가설 설정에 방향을 제시한다. 그것은 역사적 현실이 아니며 역사적 현실이 그 가운데 짜 넣는 도식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한계 개념이며, 현실을 그것과 대비, 비교함으로써 현실을 구성하는 특정의 중요한 요소가 명백히 밝혀진다." (131, 132면)

 

21. 이상형은 그런 까닭에 유개념과는 다른 인식수단이지 인식목표는 아니다. 그러면서도 '영구히 전진하는 문화의 흐름'은 영원히 청년기를 벗지 못한 역사학에 항상 새로운 설문을 제공함으로써 반복해서 새로운 이상형이 만들어지고, 기존의 이상형은 항상 새로이 정정되어야만 한다. (132면)

 

22. 그러나 이런 종류의 이상형을 들고 나오는 것은 단순히 존재하는 것만이 아니라 당위가 되는 것, 즉 서술자의 입장에서 불변의 가치를 갖는다고 보이는 것까지가 그들 이상형 속에 끌어들여지기 때문에 아주 난처해진다. 그런데 어떤 개념을 실제로 적용함에 있어서 이와 같이 학문 외의 요소가 함께 작용하면 개념은 인식으로써의 가치를 잃는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어느 정도까지 이론적 가치관계와 실천적 가치판단이 섞여들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이상형은 논리적인 보조수단이 될 수 없고, 구체적인 여러 현상의 학문 외의 의미가 그것과 대비해서 결정되는 이상이 되고 만다. (132, 133면)

 

23. "학문적 논증이 가치의 영역에서는 어느 사람에게나 결정을 강제하는 것은 아니다." (142면)

 

24. "그런 까닭에 가치상호의 관계는 궁극적으로는 어떤 경우에도 항상 양자택일이 아니라 악마와 신 사이의 그것과 같은 절대로 타협이 없는 사투인 것이다." (144면)

 

25. 논문 전체(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는 '사회과학 아르히프'에 발표되었다. 베버는 공동편집자로서 무엇보다도 먼저 이 잡지에 쉴 새 없이 원고를 공급해야 하는 의무를 절감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는 이 일에 항상 쫓기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처럼 별로 거추장스럽지 않는 발표의 방식이 그에게는 오히려 좋은 기회라 생각되었을 것이다. (149면)

 

26. 1905년에 최초의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을 때 그의 정치적 관심은 다시 격렬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급속히 러시아어를 마스터해서 러시아신문을 매일 읽고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았다. (151면)

 

27. "이념이 아니라 (물질적 및 관념적인) 이해가 직접 인간의 행동을 지배한다. 하지만 이념에 의하여 창출된 세계상은 아주 흔히 전철기로써 이해의 역학이 행동을 추진시켜 가는 궤도를 결정하는 것이다." (157면)

 

28. 합리화과정은 여러 가지 궤도를 밟아 나아가 그 고유법칙성은 경제, 국가, 법률, 학문, 예술 등 일체의 문화형상을 포함한다. (158면)

 

29. 그가 생각하는 대학이라는 것은 교회나 종파, 혹은 국가를 유지하는 기관이 아니라 정신적 자유와 투쟁의 장소가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177면)

 

30. 1919년 가을에 사회학회는 제1회 회의를 프랑크푸르트에서 가졌다. 이 회의에는 고타인, 지멜, 좀바르트, 퇴니스, 트뢸치, 폰 슈트체 게바니츠, 칸트로비츠, 미헬스 등 여러 사람이 참석하였다. 쟁쟁한 사람들의 회합이었다. 사회학은 아직 전문과학이 되지는 못했고, 인식의 대상을 전제로 하였으므로 모든 학문과 접촉하고 있었다. 인간관계의 사회학, 기술과 문화, 학문과 법, 법학과 사회학, 인종과 사회 등이 회의 의제로 오른 것을 보더라도 그 성격을 알 수 있다. (189면)

 

31. 퇴직한 베버는 우선 종교사회학 책 저술에 몰두했다. 복무하는 동안 마지막 수개월 간에도 그는 이 저술을 위하여 어떻게 하든지 매일 한 시간씩 할애하여 집필하였었다. (203면)

 

32. 그들은 내성적인 경외감을 가지고 그를 보았고 사자처럼 위풍당당한데가 있다고 생각했다. ... 베버는 제자들에 둘러싸여 제2의 청춘을 맞이한 것처럼 보였다. (24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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