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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
한스 켈젠 지음, 김선복 옮김 / 책과사람들(법서출판사) / 2010년 2월
평점 :
1. 빌라도의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이어서 십자가의 보혈로부터 다른 질문, 아주 더 강력한 질문, 인류의 영원한 질문이 제기된다. 즉, “정의란 무엇인가?”가 바로 그것이다. 어떤 다른 질문도 이처럼 열정적으로 논의되지 않았고, 어떤 다른 질문을 위해서도 그렇게 많은 귀중한 피와 통렬한 눈물을 흘리지 않았으며, 어떤 다른 질문에 대해서도 가장 위대한 사상가들이 - 플라톤에서부터 칸트까지 - 그처럼 아주 골똘히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는 때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이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있다. 그것은 아마 인간은 결코 확실하게 대답할 수 없고, 오히려 좀 더 나은 질문을 모색할 수 있을 뿐이라는 체념적인 지혜가 필요한 그러한 질문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9면)
2. 그러면 인간의 어떤 이익들이 이러한 가치를 가지며 이 가치의 서열은 무엇인가? 이는 이익이 충돌하면 제기되는 질문이다. 그러한 이익충돌이 있는 곳에서만 정의는 문제가 된다. 이익이 충돌하지 않는 곳에서는 정의에 대한 욕구는 없다. 그러나 이익충돌은 한 이익이 다른 이익의 희생으로만 충족될 수 있거나, 아니면 같은 결과가 되지만 두 가치가 대립하면, 그리고 하나의 이익은 다른 이익이 등한시되는 정도에 따라서만 실현될 수 있고, 한 이익의 실현을 다른 이익의 실현에 우선시키고, 두 이익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하고 더 높은 가치인가, 결국 무엇이 최고의 가치인가를 결정하는 것이 불가피할 때 두 이익을 동시에 실현하는 것이 불가능하면 발생한다. 가치문제는 무엇보다도 가치충돌의 문제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는 합리적인 인식이라는 수단으로 해결될 수 없다. 여기서 제기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언제나 결국 감정적인 요소에 의해 정해지고 그래서 최고의 주관적인 성격을 갖는 판단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판단하는 주체에게만 타당하고 이러한 의미에서 상대적이다. (15면)
3. 서로 모순되는 견해에 기초하는 두 가치판단 중에서 어느 것이 옳은지를 합리적-학문적인 방법으로 결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그것은 우리의 오성이 아니라 우리의 감정, 우리의 의지이며 충돌을 해결하는 우리 의식의 감정적 요소이지, 이성적 요소가 아니다. (16면)
4. 다른 예: 탈출이 불가능한 집단 수용시설의 노예나 수용자에게 자살이 도덕적으로 허용되는가 하는 질문이 제기된다. 이러한 질문은 항상 재차 논의되었고 특히 고대의 윤리학에서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이에 대한 대답은 두 가치, 즉 생명과 자유 중 어느 것이 더 가치 있는지에 대한 결정에 달려 있다. 생명이 더 가치가 있다면 자살은 정당화되지 않는다. 그러나 자유가 더 가치가 있고 자유없는 생명은 가치가 없다면, 자살은 허용될 뿐만 아니라 또한 요청되기도 한다. 이는 생명과 자유의 가치서열의 문제이다. 이 질문에 대하여 주관적인 대답만이, 즉 판단하는 주체에게만 타당한 대답이 가능하다. 그것은 금속은 열을 가하면 팽창한다는 것과 같이 모든 사람들에게 타당한 확정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가치판단이 아니라 사실판단이다. (17면)
5. 자존심이 강한 사람은 개인적 자유를 택할 것이고, 반면 열등의식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사람은 경제적 안정을 택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개인적 자유가 경제적 안정보다 더 가치가 있는지, 그렇지 않으면 경제적 안정이 개인적 자유보다 더 가치가 있는지 하는 질문에 대하여 주관적 판단만이 가능하다. (18면)
6. 진정한 가치판단이 주관적이어서 매우 상이하고, 서로 상반되는 가치판단이 가능하다는 사실은 결코 모든 개인이 자기 자신의 가치체계를 갖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실 많은 개인들의 가치판단은 서로 일치한다. 적극적 가치체계는 고립된 개인의 자의적인 창조가 아니라 언제나 개인들이 각 집단 내에서 - 가정, 씨족, 부족, 카스트, 직업 - 그리고 특정한 경제적 조건 하에서 서로에게 미치는 상호영향의 결과이다. 각 가치체계, 특히 정의의 중심이념을 지닌 도덕질서는 사회적 현상이고 그리하여 이러한 현상이 생기는 사회의 본성에 따라 다르다. (21면)
7. 많은 개인들의 가치판단이 일치한다는 것은 결코 이 가치판단이 옳다는 것, 즉 객관적 의미에서 타당하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는다. (21면)
8. 도대체 무엇이 최고의 가치인가 하는 질문에 합리적으로 답변하는 것이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는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판단은 보통 객관적 가치 또는 - 같은 결과가 되지만 - 절대적으로 타당한 규범의 주장에 의해 설명된다. 자기행동의 정당성에 대한 깊은 욕구와 양심을 갖는 것은 인간의 특성이다. 합리화와 정당성에 대한 욕구는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 중에 하나일 것이다. (22, 23면)
9. 다시 말하면 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최고의 목적이라는 가정 하에서만 정당한 국가형태이다. 개인의 자유 대신에 경제적 안정이 최고의 목적으로 가정되고 민주주의 국가형태 하에서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이 증명될 수 있다면 더 이상 민주주의가 아니라 다른 국가형태가 정당한 것으로 간주된다. 다른 목적은 다른 수단을 요구한다. 민주주의는 절대적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정당한 국가형태로서 정당화될 수 있다. (25면)
10. 절대적 정당성에 대한 욕구는 모든 이성적인 숙고보다 더 강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인간은 이러한 정당성, 즉 절대적 정의를 찾기 위하여 종교와 형이상학 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그러나 이것은 정의가 현실세계로부터 다른, 초월적 세계로 이전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의는 중요한 특성이 되며 정의의 실현은 그것의 본질에 의하면 특성과 기능이 인간에 의해 인식될 수 없는 초인간적인 권위, 즉 신의 중요한 기능이 된다. 인간은 신의 존재, 즉 절대적 정의의 존재를 믿어야 하지만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그것을 개념적으로 정의할 수 없다. (27면)
11. ... 그리하여 고대로부터 오늘날까지 제시된 수많은 정의이론이 두 개의 기본유형으로 압축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형이상학적-종교적인 것 및 이성적인 것 또는 올바르게 말하자면 외관상 이성적인 것이 그것이다. (27면)
12. 형이상학적 유형의 고전적 주창자는 플라톤이다. 정의는 전체철학의 핵심적 문제이다. 플라톤은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그의 유명한 이데아론을 고안하였다. ...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무엇이 선한가 또는 무엇이 선한 것인가?”라는 질문과 일치한다. (28면)
13. 그리스의 일곱 현인 중 한 사람은 정의란 각자에게 그의 것을 주는 것이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 이러한 문구는 많은 탁월한 사상가들, 특히 법철학자들에 의하여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이것이 완전히 공허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쉽다. 왜냐하면 도대체 각자가 그의 것으로 간주해도 좋은 것은 무엇인지 하는 결정적인 질문에 여전히 대답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각자에게 그의 것”을 이라는 원칙은 이 질문이 이미 이전에 결정될 수 있다는 가정 하에만 적용될 수 있다. (32면)
14. 그러면 무엇이 고려되어야 할 차이이고 무엇이 고려되어서는 안 되는 차이인가? 그것이 결정적인 문제이고, 이 문제에 평등원칙은 대답하지 않고 있다. (34면)
15. 법철학의 형이상학적 유형과 이성적 유형은 17, 18세기에 지배적이었고, 19세기에 거의 완전히 포기되었다가 오늘날 다시 영향력을 얻고 있는 자연법학파에 의해 주장된다. 자연법이론은 자연, 보편적으로 자연 또는 이성이 부여된 존재인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시작하는 인간관계의 완전하고 정당한 규정이 있다고 주장한다. (46면)
16. 인간인식의 역사가 우리에게 그 무엇을 가르칠 수 있다면 이성적인 방법으로 절대적으로 타당한 정당한 행위규범을 발견하려는, 즉 그러나 또한 상반된 행위를 정당한 것으로 간주하는 가능성을 배제하려는 시도는 헛된 것이다. 과거의 정신적 경험으로부터 그 무엇을 배울 수 있다면, 인간의 이성은 상대적 가치만을 파악할 수 있는 것, 즉 어떤 것을 정당하다고 선언하는 판단은 결코 상반된 가치판단의 가능성을 배제하라는 요구로 내려질 수 없다는 것이다. 절대적 정의는 비이성적인 이상이다. 이성적인 인식의 관점으로부터 오직 인간의 이익과 그래서 이익충돌만이 있을 뿐이다. (49면)
17. 상대주의적 가치이론의 기초가 되거나 이로부터 도출될 수 있는 도덕원칙은 관용의 원칙이고, 타인의 종교적 또는 정치적 견해에 설령 동의하지 않을지라도, 특히 그것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호의적으로 이해하고 그래서 그들의 평화적인 발언을 제지하지 말라는 요청이다. 상대주의적 세계관으로부터 절대적 관용권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은 자명하다. (50면)
18. 관용은 사상의 자유를 의미한다. 최고의 도덕적 이상은 이를 지지하였던 사람들의 비관용에 의해 현저히 손상되었다. (50면)
19. 모든 무질서의 기원은 관용이 아니라 비관용이다. (51면)
20. 민주주의는 그 내부의 성질에 따라 자유를 의미하고, 자유는 관용을 의미하므로 다른 국가형태는 민주주의만큼 그렇게 학문에 호의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학문은 자유로울 때만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학문은 외적으로 자유로울 때, 즉 정치적인 영향으로부터 독립적인 때뿐만 아니라, 또한 내부에서도 자유롭고 논거와 반대논거의 대결에서 완전한 자유가 지배할 때도 자유롭다. 학설은 학문의 이름으로 억압될 수 없다: 왜냐하면 학문의 정신은 관용이기 때문이다. (52면)
21. 그리고 사실 정의가 무엇인지, 절대적 정의, 이러한 인간의 아름다운 끔을 알지 못하고도 말할 수 없다. 나는 상대적 정의로 만족하여만 하고 내게 있어 정의가 무엇인지만을 말할 수 있다. 학문은 나의 직업이고 그래서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므로 학문, 그리고 학문과 함께 진리와 정직이 번창할 수 있도록 보호하는 그 정의를 말한다. 그것은 자유의 정의, 평화의 정의, 민주주의의 정의, 관용의 정의다. (5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