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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의 발명
린 헌트 지음, 전진성 옮김 / 돌베개 / 200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1. 이 책에서 나는 권리 선언의 불도저 같은 효력 - 한 집단에 이어 다른 집단이 권리를 요구하고 획득하는 -을 재평가하면서, 왜 여성의 권리가 그처럼 골치 아픈 이슈가 되었는지, 왜 여성은 프랑스 백인 유산계층 여성보다 사회적 지위가 낮은 것으로 간주되던 유대인, 무산자, 노예들과 동시에 권리를 획득하지 못했는지를 설명하려 한다. (8면)
2. 허구적 매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를 현실로 받아들이기 전부터 새로운 문화적 대안을 제시한다. (9면)
3. 공감은 또한 18세기 말, 사법적 고문이 폐지되는 데 결정적 구실을 했다. 법률가들은 부당하게 기소된 피해자들의 고통을 다룬 가슴 아픈 이야기를 법정 제출용 적요서나 청원서에 자주 담았으나 고문 철폐는 또다른 무언가를 요구했다. 바로 고통을 이해하는 일에서의 근본적 변화이다. 계몽주의 개혁가들은 고통이 진실을 드러낼 수 없으며 개인의 고통은 범죄로 상처받은 사회를 치유하는 데 도움이 안된다고 확신했다. 고문을 통한 고통의 부과는 죄를 자백받기 위한 것이든, 공범의 이름을 실토하게 하기 위한 것이든 별 효력이 없었다. 왜냐하면 약한 자는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범죄를 자백하는 반면, 강한 자는 이를 견뎌낼 수 있기 때문이다. (10면)
4. 더욱 곤혹스러운 점은 18세기 말에 인권이 보편적 가치라고 확신에 차서 선언했던 당사자들이 그다지 보편적으로 사고하지 않았음이 드러난 것이다. 그들은 어린이, 광인, 수형자 또는 외국인들이 정치적 과정에 완전히 참여하기에는 무능력하고 무가치하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오늘의 우리와 별반 다를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한 무산자, 노예, 자유 신분의 흑인, 경우에 따라서는 종교적 소수자, 그리고 항상 어디서나 그렇듯이 여성을 배제했다. (23면)
5. 특히 놀라운 것은 노예 소유주읜 제퍼슨 같은 인물, 그리고 귀족이었던 라파예트 같은 인물이 자신들은 전 인류의 자명하고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위해 일한다고 말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23면)
6. 나는 자명성의 요구가 인권의 역사에서 핵심이라고 믿는다. 이 책은 어떻게 그러한 확신이 18세기에 생겨났는지 설명할 것이다. (25면)
7. 인권은 서로 맞물린 세 가지 특성을 요구한다. 그러니까 권리는 자연성(인간이 타고남), 평등성(모든 이에게 동일함), 보편성(모든 곳에 적용 가능함)이 있어야 한다. (25면)
8. 그러나 자연성, 평등성, 보편성마저도 충분치는 않다. 인권은 정치적 내용을 획득할 때 비로소 의미가 있다. 인권은 자연 상태에서가 아니라 사회에서 인간이 갖는 권리이다. 신의 권리나 동물의 권리에 반대되는 권리가 아니라 인간 서로서로에 대한 권리인 것이다. 따라서 인권은 세속의 정치세계에서 보장되며(비록 “성스럽다”고 표현되긴 하지만) 그것을 확보한 이들의 적극적 참여를 요구한다. (26면)
9. 1789년 이전에, 예를 들어 제퍼슨은 ‘자연권’natural rights에 관해 자주 말했다. 그가 ‘인간의 권리’rights of man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한 것은 1789년 이후였다. (27면)
10. 아프리카인들이 인권을 향유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제퍼슨은 집에 거느린 미국 흑인 노예들에 대해서는 어떠한 암시도 하지 않았다. 제퍼슨이 정의한 인권이란 아프리카인들이 -미국의 흑인은 더더욱- 자기 자신의 존엄성을 위해 행동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아니었다. (28면)
11. ‘인권’이라는 용어가 프랑스에서 1763년에 처음 등장했을 때 그 의미는 ‘자연권’에 가까웠던 것으로 보이나, ... (28면)
12. ‘인간의 권리’는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1762)에 등장한 후 프랑스에서 통용되었다. (29면)
13. 인권이란 무엇이라고 단정 짓기 어렵다. 왜냐하면 개념 정의뿐 아니라 그 자체가 이성만큼이나 감성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명성의 요구는 궁극적으로 감성에 호소할 수밖에 없으며 개인의 내면을 움직여 확신을 갖게 한다. 더욱이 인권 침해로 공포를 느낄 때 비로소 인권이 문제가 된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32면)
14. 인권은 단지 문서화된 강령이 아니다. 그것은 타인의 행위를 판단하는 성향에 근거를 두고 있다. 즉 인민들이 어떠한 존재이며, 그들이 세상 속에서 어떻게 옳음과 그름을 아는가에 관한 일련의 확신들 말이다. (33면)
15. 그들 ‘평범한 개인들“ 뒤에는 오랜 투쟁의 역사가 놓여 있다. (34면)
16. 공감은 타인이 우리 자신과 다를 바 없이 느끼고 생각한다는 점, 우리의 내적인 감정들이 근본적으로 동질적임을 인정하는 것에 달려 있다. (35, 36면)
17. 공감은 찰나의 믿음, 타인이 자신과 같다는 상상이 필요한 만큼, 만들어졌다기보다는 상상되었다. (39면)
18. 새로운 독서(그리고 관람과 청취)는 새로운 개인적 경험(공감)을 창출했고 그것은 다시 새로운 사회적, 정치적 관념(인권)을 낳았다. (41면)
19. 나는 사회적, 정치적 변화 - 이 경우에는 인권 -가 많은 개인들이 유사한 경험을 하기 때문에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동일한 사회적 맥락에 놓여 있기 때문이 아니라, 각자가 상호작용을 통해 그리고 독서 및 감상과 더불어 실제로 새로운 사회적 맥락을 창출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41면)
20. “인권이란 시종들도 인간으로 보일 때에만 비로소 의미가 있는 것이다.” (46면)
21. 공감이 18세기의 발명품이 아님은 말할 필요도 없다. 공감 능력은 보편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뇌의 생물학적 원리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타인들의 주관성을 이해하고 그들의 내면적 경험이 자신의 경험과 같다고 상상할 수 있는 생물학적 능력에 의존한다. (47면)
22. 공감은 오직 사회적 상호작용을 통해서 발전한다. 따라서 상호작용의 형식은 나름의 방식대로 공감을 형상화한다. 18세기에 소설 독자들은 공감대를 형성하는 법을 배웠다. 책을 읽으며 전통적인 사회적 경계, 즉 귀족과 평민, 주인과 하인, 남성과 여성, 아마도 성인과 아동 간의 경계마저 넘어 공감했다. 그 결과 타인들 - 그들이 개인적으로는 모르던 사람들 -을 자신처럼, 마치 동일한 내면적 감성을 지닌 존재로 보게 되었다. 이러한 배움의 과정이 없었다면 ‘평등’은 깊은 의미를, 특히 정치적 성과를 전혀 얻지 못했을 것이다. (48면)
23. 사람은 사회적 경계를 넘어 동일시하는 능력을 어떠한 방식으로든 획득했을 것이다. 소설 읽기만이 유일한 방식은 아니었으나 소설 읽기는 특별히 시의적절했다. 그 이유는 부분적으로, 특정 소설 - 서한 소설 -의 전성시대가 인권의 탄생 시기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서한 소설이라는 장르는 1760년대와 1780년대에 성행했으며 상당히 의아하게도 1790년대에 종말을 고했다. (48면)
24. 소설이 상승세를 탄 이유가 무엇이든, 나는 그 심리학적 효과와 그것이 인권의 등장과 연관되는 방식에 관심이 있다. (49면)
25. “... 그것은 밤새 공상을 펼치게 하네. 책의 모든 장들이 마력을 갖고 있네그려. 열정과 의미라는 마력 말일세.” (54면)
26. 하지만 저자는 현재시제 그리고 일인칭으로 글을 씀으로써 이러한 효과를 얻습니다. 그로 인한 타격은 즉각 심장을 꿰뚫고 우리는 그가 그려낸 모든 비애를 느낍니다. 우리는 ‘클라리사’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녀와 함께 울지요. 그리고 그녀와 더불어 한 걸음 한 걸음 모든 고난을 겪어나간답니다. (59면)
27. 공감은 동일시에 근거를 둔다. (66면)
28. 그러니까 ‘내면의 감정’이라는 것을 갖게 된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인권을 위해 필요불가결한 것이었다. 디드로는 더욱이 소설이 무의식적 효과를 낳는다는 것을 인식한다. “사람은 스스로 인식하지 못한 충동에 의해 선함으로 이끌린다고 느낀다. 불의에 직면할 때, 당신은 자신에게조차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역겨움을 느낀다.” 소설은 명확한 도덕화를 통해서가 아니라 이야기에 참여하는 과정을 통해 효과를 낳는다. (67면)
29. 인권은 이 같은 감정들이 부려진 온상에서 자라났다. 인권은 오직 대중들이 타인들을 근본적으로 동등하게 생각하도록 배울 때에만 자랄 수 있었던 것이다. (69면)
30. 나는 ‘공감’empathy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왜냐하면 20세기에 들어와서야 영어에 편입된 단어이기는 하지만 공감이라는 말이 타인들과 동일시하려는 능동적 의지를 더 잘 나타내기 때문이다. ‘동정’은 지금은 대개 연민pity을 뜻한다. 은혜를 베푸는 태도를 암시하는 동정은 진정한 평등의 감정과는 양립하기 어렵다. (77면)
31. ... 그(볼베르)가 전개한 논지의 골자는 불관용은 인간적 권리일 수 없다는 것이다. (86면)
32. 베카리아의 소책자는 모든 민족의 형법체제를 주목하도록 만들었다. 갑작스레 유명세를 타게 된 이 이탈리아인은 고문과 잔혹한 형벌만이 아니라 - 당시로서는 괄목한 만한 진전으로 - 사형제 자체를 거부했다. 베카리아는 지배자의 절대권력, 종교적 독선, 그리고 귀족의 특권에 반대하여 민주주의적인 정의의 기준을 세웠다. (93면)
33. 그는 법을 종교보다는 루소주의적 기반 위에 세우고 싶어 했다. 법이란 “자유 상태에서의 사람들 사이의 관습이어야 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하지만 그는 처벌의 완화를 주장하기는 했지만 - 처벌은 “가능한 한 최소화해야”하며 “범죄에 걸맞아야” 한다 - 그것을 공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게는 공개와 노출이야말로 법의 투명성을 보증하는 것이었다. (109, 110면)
34. “형법은 ... 여전히 불완전하고, 모든 민족이 불필요하게 잔인한 환경에 놓여 있으므로 그것을 이성의 기준에 맞추어 제한하려는 시도는 전 인류에게 흥미로운 일임에 틀림없다.” (116, 117면)
35. 18세기에는 두 가지 권리의 언어가 통용되었다. 특수론적 형태(특정한 인민이나 민족적 전통에 고유한 권리들)와 보편적인 형태(인간 일반의 권리)가 그것이다. 미국인들은 이중 하나를 사용하거나 상황에 따라 양자를 결합해서 사용했다. 일례로, 1760년대 인지조례 위기에 미국의 팸블릿 집필자들은 대영제국의 식민주의자로서 권리를 강조했다. 이에 반해 1776년의 ‘독립 선언문’은 모든 사람의 보편적 권리를 분명히 부각시켰다. 미국인들은 그후 1787년의 헌법과 1791년 ‘권리장점’에 자신들 고유의 특수론적인 전통을 입안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프랑스인들은 거의 즉시 보편론적 형태를 받아들였다. (133면)
36. 일찍이 1625년 네델란드의 칼뱅주의 법률가 후고 그로티우스는 한 나라 또는 하나의 법률 전통이 아니라 모든 인류에게 적용할 수 있는 권리의 관념을 제시했다. 그는 ‘자연권’을 생래적이거나 신의 의지와는 분리되어 사고할 수 있는 것으로 정의했다. ... 그의 독일인 지지자인 사무엘 푸펜드르프는 하이델베르그대학의 자연법, 강좌 초대 교수였는데, 1678년 출판한 ‘자연법론의 일반사’ 강의에서 그로티우스의 성과를 부각시켰다. 푸펜도르프는 그로티우스를 어떤 부분에서는 비판하기도 했으나, 권리 사상의 보편론적 흐름의 원조로서 그로티우스의 명성을 굳히는 데 일조했다. (134면)
37. 특히 로크는 영국인의 관점에 영향을 미쳤으나 미국의 정치사상을 형성하는 데 더욱더 기여했다. 홉스의 영향은 로크보다는 덜했는데, 이는 그가 자연권이 절대적 권위에 종속되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홉스는 절대적 권위가 - 그렇지 않았으면 도래했을 -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방지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로티우스가 자연권을 삶, 신체, 자유, 그리고 명예(특히 노예제를 문제 삼은 듯한)와 동등한 자리에 놓은 반면, 로크는 자연권을 “삶, 자유 그리고 영지”로 정의했다. 그는 재산 - 영지Estate-을 강조한 나머지 노예제에는 도전하지 않았다. 그는 정당한 전쟁에서 사로잡힌 포로들을 활용한다는 이유로 노예제를 정당화했다. (135, 136면)
38. 홉스와 로크의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18세기 전반의 자연권에 관한 영국, 미국의 논의는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닌, 자유민으로 태어난 영국 남성의 권리라는 특수한 역사적 근거에 초점을 맞추었다. ... 이 고명한 법률가의 주장에 따르면, 비록 권리가 한때는 보편적이었으나 오로지 우월한 영국인들만이 그것을 보존해올 수 있었다. (136면)
39. “권리 이념, 그리고 더욱이 자연법 이념은 인간의 본성과 분명히 관계가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의 본성 그 자체에서, 인간의 정체constitution와 조건에서 이러한 학문의 원리를 추론해야 한다.” (137면)
40. 1774-76년의 사건은 저항하는 식민지들에서 권리에 관한 특수론적 사고와 보편론적 사고를 잠정 융합시켰다. 대영제국에 대한 반응으로, 식민지인들은 대영제국 신민으로서의 기존 권리를 인용하는 동시에, 평등한 인간으로서 자신들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보장해 줄 정부를 구성할 보편적 권리를 주장한 것이다. (138면)
41. 장기적으로 더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오로지 실정법만이 중요하다고 본 제레미 벤담의 시각이었다. 공리주의의 아버지로 명성을 떨치기 오래전인 1775년에 벤덤은 블랙스톤의 ‘영국법 주해’를 비평했는데, 거기서 자연법 개념을 거부하는 논지를 폈다. “어디에도 ‘계율’ 같은 것은 없다. 소위 자연법의 요청을 받은 듯한 행위들을 하도록 ‘명령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누군가 무엇인가 안다면 그에게 그것들을 만들도록 하라. 계율들을 만들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발견하는’ 과업을 이성의 도움으로 수행해야 할 필요는 없다. (142면)
42. 벤덤은 자연법이 원래 주어진 것이어서 이성으로 이를 발견할 수 있다는 생각에 반대했다. 그래서 자연법 전통과 이에 결부된 자연권을 본질적으로 거부했다. 유용성의 원리(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그가 베카리아에게서 빌려온 생각)는 옳은 것과 그릇된 것을 가리는 최상의 기준으로 작동했다. 이성에 기초한 판단이 아닌 사실에 기초한 계산만이 법의 토대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입장을 고려한다면, 그가 나중에 프랑스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을 거부한 일은 그리 놀라울 것도 없다. 프랑스에서의 선언 각 조항을 논평한 소책자에서 그는 자연권의 존재를 완전히 부정했다. “자연권이란 그저 난센스일 뿐이다. 자연적이고 소멸될 수 없는 권리란 수사학적 난센스, 호언장담식 난센스인 것이다.” (142, 143면)
43. 1760년대 초 ‘인간의 권리’에 대한 광범위한 관심이 촉발된 후, 정작 루소 자신은 환멸감에 빠져들었다. 1769년 1월에 쓴,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다룬 장문의 서신에서 루소는 “인간성이라는 이 아름다운 단어”의 과용에 대해 투덜거렸다. (144면)
44. ... 그중 가장 지배적인 것은 ‘인간의 권리’였다. 권리의 언어는 이제 고조되는 위기감 속에서 급속히 확산되었다. (146면)
45. 제퍼슨이 모든 사람이 권리들을 “창조주에 의해 부여받았다”고 단언할 필요성을 느낀 반면, 프랑스인들은 권리들을 자연, 이성, 사회라는 전적으로 세속적인 원천에서 도출해냈다. 논쟁이 지속되는 동안 마티유 드 몽모랑시는 “사회에서 인간의 권리들은 영원하다” 그리고 “그것들을 인정하기 위해 어떠한 재가도 필요 없다”고 주장했다. 유럽에서 구질서에 대한 도전이 이보다 더 솔직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151면)
46. 선언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사실상 몇몇 문제들 - 예컨대 무산자나 종교적 소수자의 권리 -을 더 첨예하게 만들었고, 이전에는 정치적 지위를 전혀 갖지 못했던 노예나 여성을 둘러싼 새로운 문제를 낳았다. (152면)
47.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은 하룻밤 사이에 모든 이의 언어를 바꿔놓았다. (152면)
48. ... 페인의 ‘인간의 권리’가 훨씬 더 직접적이고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는 부분적으로 그가 영국 왕실을 포함한 모든 세습왕정에 반대할 기회를 잡았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은 출간된 그 해에 여러 영어 판본이 나왔다. 그 결과 권리와 관련된 용어의 사용은 1789년 이후 급증했다. 이는 ‘권리’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영어책 제목의 수에서 잘 드러난다. 그것은 1790년대에는, 1780년대(95개)나 18세기의 이전 10년들과 비교할 때 4배(418개)나 증가했다. 유사한 경향을 네델란드에서는 찾을 수 있는데, ‘인간의 권리rechten van den mensch라는 용어는 1791년 페인의 저작을 번역하면서 처음 사용되었고, 1790년대에 많이 사용되었다. '인간의 권리’Rechten des Menschen는 곧 독일어권에서도 많이 쓰였다. (154면)
49. 브뤼네를 비롯한 어느 누구도 여성 권리의 문제에는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 (175면)
50. 그러나 여성의 권리는 미국혁명이나 프랑스혁명에 이르는 수년 동안 지속된 토론의 초점은 아니었다. ... 이는 여성이 박해받는 소수가 아니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우리의 기준에 의해, 그들은 성 때문에 박해받았거나 소수가 아니었고, 개신교도나 유대인처럼 자신의 정체성을 변화시키도록 그들을 고무하려 애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93면)
51. 권리에 대한 로빈슨의 염려(권리에 대한 이 같은 강박적 집착은 ‘삶의 가장 해로운 독’이었다)는 대륙의 반혁명적 왕당파들이 발사한 공격 미사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 선언은 사람들로 하여금 의무를 소홀히 하고 오로지 자신의 개인적 욕구만을 생각하도록 부추겼다. 게다가 그러한 격정을 막을 수 없기 때문에 프랑스를 무정부 상태, 테러, 그리고 사회적 분열로 몰아갔다. (206면)
52. 인간의 권리를 옹호하는 주장은 인간성이 문화와 계급을 넘어 동질적이라는 가정에 근거했다. ... 남성이 여성에 대해, 백인이 흑인에 대해, 또는 기독교인이 유대인에 대해 우월성을 주장하려면 차이들의 토대가 더욱 굳건해야 했다. 간단히 말해 권리가 보편적이거나 평등하지 않고 자연적이지도 않다고 주장하려면 그럴 만한 근거를 제시해야 했다. 그 결과 19세기는 차이에 대한 생물학적 설명이 폭발적인 힘을 보여준 시기였다. (215면)
53. 존 스튜어트 밀은 영향력있는 논저 ‘여성의 종속’(1869)에서 바로 이러한 생물학적 차이를 의문시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는 남성과 여성을 현재의 사회적 역할에서 볼 뿐이므로, 그들의 본성에 차이가 있는지는 알 도리가 없다. (217면)
54.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헌법적 차원의 개인의 권리라는 개념의 한계를 깨닫고 이에 반대하는 가운데 형성되었다. (226면)
55. 이들 초기 사회주의자 상당수는 ‘인간의 권리’를 불신했다. 1820-30년대 프랑스의 선도적 사회주의자 샤를 푸리에는 헌법, 그리고 양도할 수 없는 권리에 대한 논의가 기만적이라고 설명했다. 가난한 사람이 “일할 자유도 없고” 고용을 청원할 당국도 없다면 “시민의 소멸될 수 없는 권리”가 과연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227면)
56. ‘도덕 감정론’에서 애덤 스미스는 수억 명의 사람을 사망에 이르게 한 중국에서의 지진 소식을 들은 “유럽의 한 인도주의자”의 반응을 가정한다. 스미스의 예상에 따르면, 그 사람은 올바른 것을 죄다 말하고 나서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자기 일을 계속할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만약 다음 날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잃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면 밤새 뒤척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대가로 수억 명의 중국인을 기꺼이 희생시키려 할 것인가? 아니, 그러지는 않을 거라고 스미스는 주장한다. 그러나 과연 무엇이 한 인격체를 이러한 흥정에 저항하도록 만드는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이익에 배치되는 행동을 하도록 만드는 “그것은 인간성이라는 연성 권력이 아니다”라고 스미스는 주장한다. 그것은 더 강한 힘, 즉 양심의 힘이다. “그것은 이성, 원리, 가슴속의 거주자, 내면의 인간, 위대한 재판관 그리고 우리 행위의 조정자이다.” (241면)
57. 권리의 폭포수는 그것이 어디로 흘러야 하는지를 두고 항상 큰 갈등을 겪게 마련이지만 쉼 없이 계속 흘러간다. 여성의 선거권 대 태아의 생존권, 안락사의 권리 대 절대적 생존권, 장애인의 권리, 동성애자의 권리, 아동의 권리, 동물의 권리 등에 관한 논쟁은 끝나지 않았고 앞으로도 끝나지 않을 것이다. (244면)
58. “이제 시간이 되었습니다. 전 세계를 걸쳐 아주 잘 알려진 노골적 억압을 법이 더 이상은 용인할 수 없는 때가.” (24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