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위 있는 사회 - 동녘신서 101
아비샤이 마갈릿 지음, 신성림 옮김 / 동녘 / 2008년 9월
평점 :
품절


 1. 20년쯤 전 시드니 모겐베서를 공항까지 배웅한 적이 있다. 라운지에서 그가 탈 비행기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 두 사람이 모두 깊은 감명을 받았던 존 롤스의 정의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떠나기 전에 모겐베서는 우리 사회의 시급한 문제는 정의로운 사회가 아니라 품위 있는 사회를 이루는 것이라고 주저없이 말했다. 지금까지도 나는 그가 무슨 의미로 그렇게 말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의 말은 나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이 책이 나온 것은 모겐베서의 말이 계기가 되었다. 사실 철학 연구를 시작하던 시기에 사회에 대한 나의 신념은 모겐베서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7면)




2. 품위 있는 사회의 이념 자체는 매우 흥미로웠지만 나는 수년 동안 거기에 살을 붙일 수 없었다. 하지만 점령지역에서의 봉기(인티파다)한 팔레스타인이나 무너진 공산권 국가에서의 이스라엘로 옮겨진 이민자들과 대화를 나눈 덕분에 차츰 사람들의 삶에서 명예와 모욕이 핵심적인 의미를 가지며, 따라서 정치적 사유에서 명예와 모욕의 개념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그렇게 해서 모욕하지 않는 사회라는 품위 있는 사회의 이념이 태어났다. (7, 8면)




3. 품위 있는 사회란 어떤 사회인가? 내가 제안하는 대답은 대략 다음과 같다. 품위 있는 사회는 제도가 사람들을 모욕하지 않는 사회다. 나는 품위 있는 사회와 문명화된 사회를 구분한다. 문명화된 사회가 구성원들이 서로 모욕하지 않는 사회라면, 품위 있는 사회는 제도가 사람들을 모욕하지 않는 사회다. (15면)




4. 문명화된 사회의 이념은 개인 간의 관계와 관련된 미시 윤리적인 개념인 반면, 품위 있는 사회의 이념은 전체 사회구조와 관련된 거시 윤리적 개념이다. (16면)




5. 그러나 가장 중요한 비교는 품위 있는 사회와 정의로운 사회의 비교다. 품위 있는 사회의 개념을 명확히 하려면 품위 있는 사회와 품위 없는 사회의 차이를 해명해야 할 뿐 아니라 경쟁적이든 보완적이든 다른 사회적 이념과 비교할 필요가 있다. (16면)




6. 1부에서는 모욕감을 느끼는 이유를 다룬다. 나는 두 가지 근본적인 주장에서 시작했다. 하나는 통치제도의 존재 자체가 모욕감을 느낄 이유라고 말하는 무정부주의자의 주장이다. 반면 스토아학파는 어떤 통치제도가 모욕감을 느낄 이유를 제공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런 극단적인 주장은 통치제도가 반드시 사람들을 모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할 수도 있다는 주장을 받아들임으로써 둘 다 제외했다. (16면)




7. 나는 품위 있는 사회의 이념이 반드시 권리의 개념과 연결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권리 개념이 없는 사회라도 품위 있는 사회에 적합한 명예와 모욕의 개념을 개발할 수 있다. 명예의 개념으로 적합한 것은 자기 존중의 개념으로, 자부심이나 사회적 명예와 대립된다. (16, 17면)




8. 2부는 인간을 존중해야 할 정당한 근거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다루고, 세 가지 유형의 정당화를 제시한다. 첫째는 적극적인 정당화로, 사람들이 존중받을 자격을 갖게 하는 인간의 공통된 특성에 의존한다. 둘째는 그런 특성이 존재할 가능성에 의문을 던지면서, 인간을 존중하는 일반적인 태도가 존중의 원천이라고 제안하는 회의적 정당화다. 마지막 소극적인 정당화는 사람들을 존중할 적극적이거나 회의적인 근거는 없지만 그들을 모욕하는 일을 피해야 할 정당성은 있다고 주장한다. (17면)




9. 결국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1부에서 3부까지는 모욕의 개념을 다루고 4부는 모욕이 제도적으로 발현된 것을 다룬다. 맺음말에서는 품위 있는 사회를 정의로운 사회와 비교한다. 정의로운 사회는 모두 품위 있는 사회여야 하지만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17면)




10. 나는 품위 있는 사회는 모욕하지 않는 사회라는 대략적인 설명으로 출발했다. 왜 품위 있는 사회의 성격을 구성원을 존중하는 사회라고 적극적으로 규정하지 않고, 모욕하지 않는 사회라고 소극적으로 규정하는가? 여기에는 각각 도덕적, 논리적, 인지적 이유에 해당하는 세 가지 근거가 있다. 도덕적 이유는 악을 근절하는 일의 무게와 선을 증진하는 일의 무게가 불균형을 이룬다는 확신에서 나온다. 고통을 주는 악을 제거하는 일이 즐거움을 주는 이익을 만드는 일보다 훨씬 더 시급하다. 모욕은 고통을 주는 악인 반면에 존중은 이익이다. 따라서 존중을 표하는 일보다 모욕을 제거하는 일을 우선해야 한다. (18면)




11. 우리는 다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의도적인 행동으로 존중을 표현할 수 있을 뿐이고, 그렇게 주어진 존중은 부산물에 불과하다. 반대로 어떤 사람의 얼굴에 침을 뱉는 일처럼 다른 행위의 부산물 아니면서 모욕을 주는 구체적인 행동이 존재한다. (19면)




12. 인지적 이유는 존중하는 행동보다 모욕하는 행동을 확인하기가 더 쉽다는 데 있다. 건강보다 질병을 확인하기가 더 쉬운 것과 같다. (19면)




13. 오웰은 확실히 품위 있는 사회의 이념을 구상하는 데 중요한 원천이었기에, 오웰이 사회주의자였다는 의미에서 품위 있는 사회는 오웰의 사회주의를 구현한다. (20면)




14. 품위 있는 사회는 구성원들이 자기가 모욕당했다고 간주할 만한 근거가 있는 조건에 맞서 싸우는 사회다. 따라서 한 사회의 제도가 그 영향권에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모욕당했다고 간주할 타당한 이유를 제공하지 않을 때, 그 사회는 품위 있는 사회가 된다. (24면)




15. 인지 영역에 회의론자들이 있다면 정치 영역에는 무정부주의자들이 있다. (26면)




16. 무정부주의자들에게 모욕은 강압적인 제도로 개인의 자율성을 억누른다는 의미다. 통치제도는 국민의 우선체계를 왜곡함으로써 그 제도의 영향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강압적인 힘을 행사한다. 이처럼 인간의 자율성을 표현하는 통로인 우선체계의 왜곡에서 모욕이 비롯된다. 강압이 모욕을 초래하는 셈이다. 사실 무정부주의자들의 주장은 훨씬 더 강하다. 이들은 강압의 가능성만으로도, 즉 사람들이 권력기관의 선의에 기대야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모욕적이라고 본다. (27면)




17. 이런 무정부주의적 입장의 배후에는, 제도가 있으면 언제나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존재한다고 하는 일종의 ‘과두제의 철칙’에 대한 신념이 있다. (28면)




18. 우리가 무정부주의와 결부시킨 모욕 개념은 개인의 자율성에 대한 침해다. 현재의 맥락에서 이것은 개인의 개성을 드러내는 우선체계를 왜곡할 위험이 있는 제도가 개입한다는 의미다. ... 개인의 진정한 이익을 대변한다고 자청하는 온정주의는 사람들을 미성숙한 존재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특히 모욕적이다. (30면)




19. 무정부주의적 견해는 모욕을 개인의 자율성 축소보다 훨씬 더 강한 의미인 개인의 주권에 대한 침해로 간주한다. ... 윌리엄 고드윈이 ‘적극적 제도’라고 부르던, 영속하는 사회 제도들은 개인의 주권을 구속하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모욕적이다. 오직 개인만이 주권을 소유할 자격이 있다. 이런 견해에 따르면 통치제도는 모두 모욕적이다. 여기에는 대의민주제까지 포함된다. (30, 31면)




20. 개인의 주권이란 자신과 관련된 모든 문제에서 완전한 권한을 갖고 행동할 최고의 권리를 의미한다. 무정부주의자들은 다른 개인의 주권을 결코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일종의 위해 원칙으로 개인의 권한을 제한한다. 그렇지만 이들은 주권이 오직 개인에게만 속하며 그런 권한을 침해하는 제도는 모두 개인을 모욕하는 것이라는 생각만큼은 확고하다. 권위주의적인 제도, 특정한 목적에 대한 직접적인 동의를 기반으로 하지 않는 제도들은 개인의 주권을 탈취하거나 적어도 그것을 축소하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모욕적이라는 것이다. (31, 32면)




21. ... 따라서 회의적 무정부주의의 도전이 힘을 얻으려면 영속하는 통치제도를 갖지 않으면서도 안정된 사회상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 무정부주의자들에게 유일하게 요구할 수 있는 것은 통치제도 없는 사회가 어떻게 가능한지 보여달라는 것이다. (32, 33면)




22. 무정부주의의 주요 유형은 공동체 무정부주의와 막스 슈티르너가 ‘이기주의자들의 연합’이라고 표현한 무정부주의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이 두 유형은 영속하는 통치제도가 없는 품위 있는 사회라는 과제에 서로 다른 대응을 보인다. (33면)




23. 공동체 무정부주의자들은 제도 없는 사회가 가능할 수 있지만 이는 오직 플라톤이 ‘세련된 사회’라고 부른 것을 버리고 대신 ‘건강한 사회’(국가, 372-373)를 취할 때만 가능하다고 주장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제도 없는 사회는 기본적인 관계의 틀 안에서, 작고 친밀한 사회를 이루는 자발적인 공동체에서 가능하다. 그런 사회는 규모와 노동 분업, 직업의 전문화 등의 이점을 누리는 현대 선진사회의 생활수준을 보장할 수는 없지만, 영속하는 통치제도가 수반하는 모욕으로부터 개인을 보호하는 품위 있는 사회가 될 수 있다. (33면)




24. 인간의 존엄성으로 간주되는 품위 있는 생활을 위한 조건은 사회와 역사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 개념이다. 제도 없는 공동체에서 ‘건강한 사회’를 위해 경제적 이점을 포기하는 행위가 선진사회에서 불명예스러울 정도로 생활수준을 낮추는 일로 인식될 수 있다. (34면)




25. 이기주의적 무정부주의자들은 거리 조명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방어 병력이나 법제의 문제도 시장이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 간단히 말해서, 그들은 아무런 정치적 틀이 없는, 따라서 어떠한 모욕적인 제도도 없는 순수 시장사회가 존재할 수 있다고 믿는다. (34면)




26. 통치제도가 없는 시장사회가 품위 있는 사회라는 생각에 대해서는, 시장사회를 구성하는 경제조직, 특히 독점기업과 카르텔이 사실상 통치제도라는 점에서 반박할 수 있다. 독점기업의 강제력은 정치제도의 권력보다 결코 약하지 않다. 그러니 시장사회에 사람들을 모욕하는 권력을 가진 제도가 없다는 생각은 환상에 불과하다. (35면)




27. 시장사회가 품위 있는 사회라는 생각 자체가 빗나간 점이 있다. 민주주의 사회의 정치제도는 시장사회가 초래하는 모욕으로부터 사회 구성원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사실로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필요한 비용을 지불할 수 없는 ‘주권을 가진 소비자들’을 빈곤, 무주택, 착취, 열악한 노동조건, 교육과 공공의료 서비스의 부재로부터 지켜줄 보호정책도 포함된다. 선진사회에서 시장사회는 해결책이라기보다 문젯거리다. (35면)




28. 무정부주의적 견해와 반대 극단에 있는 것은 어떤 사회도 모욕감을 느낄 타당한 이유를 제공할 수 없다고 보는 ‘스토아학파’의 견해다. 외적인 이유는 모욕감을 느낄 타당한 이유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36면)




29. 스토아학파의 주요 용어 중에서 자율성과 유사한 것이 ‘자족성’이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스스로 충족할 수 있음을 뜻하는 자족성이 역량의 개념이라면 자율성은 역량뿐 아니라 기회도 요구한다. 다시 말해서 자족성은 그 만족을 위해 주변 환경 속의 구체적인 조건을 요구하지 않는다. (36면)




30. 외적인 생활조건은 대개 우리의 통제력 아래에 놓여 있지 않지만, 영혼의 자율성으로 간주되는 자족성은 노예 신분처럼 가장 극단적인 외부 환경 속에서도 획득할 수 있다. ... 그렇다면 모욕은 인간의 자족성에 대한 침해이며, 이것은 오직 그가 자족적으로 생각하지 않을 때만 발생한다. (36면)




31. 스토아학파의 아파티아는 감정의 부재가 아니라 오직 이성적으로 정당한 감정만 용인하는 상태를 말한다. 사람들이 자신의 자족성을 잃는 것은 주변 환경의 영향을 받아 세상에 있는 사물들의 진정한 가치에 대해 잘못된 견해를 채택하기 때문이다. (37면)




32. 자부심과 달리 자존감은 인간이 오직 자신이 인간이라는 인식에 근거해서 자기 자신에게 부여하는 명예다. 그러면 왜 그것이 타인의 평가에 영향을 미치는가? 더구나 자존감은 용어 자체에서도 드러나듯이 자신의 자아에 의존하는 존경이다. 우리는 자존감을 얻기 위해 칭찬이나 인정 같은 형태의 외부 승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따라서 어떤 사회도, 그리고 사회의 다른 어떤 구성원도 모욕감을 느낄 타당한 이유가 될 수 없다. (38면)




33. 여기에서 니체의 입장을 바탕으로 스토아학파의 주장을 약간 비판하고 넘어가자. “노예의 도덕은 처음부터 ‘외부’에 있는 것, ‘다른’ 것, ‘자신이 아닌’ 것을 부정한다”는 니체의 지적처럼, 자존감을 획득하려면 다른 사람의 인정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것은 자기승인에 내재된 숭고한 자유에 기반을 둔다기보다 타자에 대한 분노에 기반을 둔다. 이 말을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는 데 ‘외부’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노예의 자족성이 사실상 주변 환경에 복수하고자 하는 분노에 찬 노예들의 방어기제라는 의미다. (38면)




34. 모욕을 가하는 주인이 자신의 내면세계 ‘바깥’에 있다고 선언하는 것만으로 사회적 지위가 열등한 사람들(‘노예’)이 모욕에서 벗어나는 일은 심리적으로 불가능하다. 노예의 내면세계 안에 이미 주인이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노예 도덕’은 이처럼 원한을 품은 내면화의 결과다. 노예 도덕의 최종 도착점은 모욕을 겸손함을 키워주는 시련으로 보는 기독교적 시각이다. 모욕을 성인을 키우기 위한 수단으로 삼은 기독교의 입장은 방법만 달리 했을 뿐 스토아학파의 입장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이 역시 니체의 견해로 볼 때 전적으로 잘못된 계승이다. (39면)




35. 실제로 니체는 스토아학파와 기독교 사상이 모욕을 평가하는 방식이 서로 다르다고 믿는다. 자유롭게 사고하는 스토아학파의 현자는 자신이 자유로우며 주인이 자기를 모욕할 수 없다고 진정으로 깨달을 수 있지만, 니체가 볼 때 기독교인은 진정으로 그런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 그 까닭은 기독교인이 원한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이 자기 뺨을 때리며 모욕하는 사람을 ‘사랑할’ 수는 있겠지만, 동시에 그의 마음속에는 가해자가 지옥으로 가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 지옥은 모욕당한 기독교인의 분노에 찬 복수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40면)




36. 이제 우리는 스펙트럼 양 끝에서 들려오는 세이렌들의 유혹적인 노랫소리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 배의 돛대에 몸을 묶은 채로 무정부주의자 스킬라와 스토아학파라는 카리브디스 사이를 헤치고 나가야 한다. (40면)




37. ... 이런 명백한 분위기는 비트겐슈타인이 ‘하나의 그림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라고 부른 상황과 동일하다. 하나의 그림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란 단순히 우리가 그 모델 이외에 다른 대안을 상상할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하나의 모델에 불과한 것을 실재로 인식하는 경우를 이른다. 그린 그림의 지배력을 느슷하게 하려면 대안이 있어야 한다. (42면)




38. 모욕행위를 금하는 사회 규정을 위반하는 사람들이 해당 피해자에게 다른 사람들에게 보다 특별히 더 많은 죄를 저지르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죄는 다른 누군가의 권리를 침해해서가 아니라 사회의 금지 규정을 위반한 데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설적이게도, 의무에 기반을 둔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모욕하는 행동을 할 수는 있지만 어느 누구도 모욕당할 수 없다. (43면)




39. 분명히 해두고 싶은 점은, 의무나 목적, 권리 같은 하나의 핵심 개념만으로 특정 사회의 도덕체계를 기술한다고 해서 반드시 그 사회에 다른 개념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47면)




40. ... 이와 달리 인권이 인간의 존엄성을 구현하는 이익이라고 정당화한다면, 인권은 그 자체로 좋은 것이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인권은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주는 것이며, 권리의 도덕이라는 맥락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확인시켜주는 ‘표지’이다. (53면)




41. 인권이 아니면서 시민권에 속하는 권리 중에 투표권이 있다. (스위스에서 아주 최근까지 그랬듯이) 여성에게 투표권을 주지 않는 일은 품위 있는 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따라서 사람들의 인권을 존중하는 것이 품위 있는 사회가 될 충분조건이라고 볼 수는 없다. 사회가 인권을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시민들을 모욕하는 일이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이다. (53면)




42. 품위 있는 사회의 토대가 되는 명예는 사회적 명예가 아니다. 한 사회가 품위 있는 사회가 될 자격을 잃게 만드는 모욕은 사회적 명예의 훼손을 의미하지 않는다. 만일 모든 사람이 똑같은 양으로 누릴 자격이 있는 명예의 개념을 품위 있는 사회의 토대로 삼고자 한다면, 우리는 사회적 명예에서 인간의 존엄성으로 옮겨가야 한다. (56면)




43. 존엄성의 개념을 이해하려면 사회적 명예의 의미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사회적 명예는 품위 있는 사회를 논의할 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개념이다. 인간의 존엄성 개념이 역사적으로 사회적 명예에 대한 생각에서 발전되었기 때문이다. ‘존엄성(dignity)’이라는 말은 사회적 명예를 의미하는 라틴어 디그니타스(dignitas)에서 유래한다. 이와 유사하게, 인간 존엄성의 훼손을 의미하는 모욕 개념은 사회적 모욕 개념에서 나왔다. (56면)




44. 결국 품위 있는 사회와 관련이 있는 명예 개념은 인간의 존엄성을 의미한다. 이것은 사람들이 가져야 하는 의식이며 그것을 침해받을 때 자신이 모욕당했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된다. 그러나 여기서 모욕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자존감의 손상인가, 자부심의 축소인가, 혹은 일관성의 축소인가, 아니면 그저 인간 존엄성에 대한 훼손인가? (57면)




45. 먼저 검토해야 할 한 쌍의 개념은 자존감과 자부심이다. ... 이 둘을 구분하는 일이 중요한 이유는 존중이 사람들을 평등하게 대할 근거를 구성하는 반면 평가는 사람들의 등급을 매길 근거가 된다는 데 있다. 많은 돋덕이론이 오직 인간이라는 근거만으로도 사람들을 존중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들이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높이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도덕이론은 없다. (57면)




46. 아첨꾼은 자존감을 대가로 다른 이익, 자기 자부심에 기여할 수 있는 이익을 얻기 위해 자기 자신을 모욕한다. (58면)




47. 일관성이 있는 사람은 타락시킬 수 없다. 모욕적인 사회는 일관성 있는 사람들을 공격해서 그들이 비열하게 타협하도록 강요한다. (61면)




48. 우리는 적극적, 회의적, 소극적 정당화, 세 가지 유형의 정당화를 검토할 것이다. 적극적 정당화는 모든 인간이 가진 특성, 바로 그 덕분에 모든 사람이 기본적으로 존중받을 가치를 갖는 그런 특성을 찾아내려고 한다. 회의적 정당화는 인간을 존중하는 태도에 선행해서 이를 정당화하는 특성 찾기를 포기한다. 그 대신 존중의 태도가 출발점이 되며, 인간이라는 사실이 존중을 불러일으키는 특성이 되는 것은 바로 이런 태도 자체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소극적 정당화는 인간에게 존중받을 가치를 부여하는 특성 찾기를 포기하고, 왜 인간을 모욕하는 것이 나쁜지 묻는 질문에 집중한다. (69면)




49. 적극적 정당화는 창조와 계시를 믿는 종교에서 찾을 수 있다. 왜 인간이 존중받을 자격이 있는지 묻는 질문에 그들은 인간이 신의 이미지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예컨대, 모든 인간이 존중받을 자격을 갖는 이유는 신에게서 반사된 영광 덕분이라는 것이다. (70면)




50. ... 그러나 반사된 영광의 개념이 신의 영광이 반사되었다는 의미로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종종 우리는 우리가 성취한 것이 아닌, ‘인간’의 성취에서 긍지를 얻는다. ... 인간이란 단어를 종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것은, 여러 개인의 이런 업적이 분배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인류 전체의 업적으로 간주됨을 보여준다. (70, 71면)




51. 우리가 직면한 문제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왜 반사된 영광을 인류 전체가 아니라 더 좁은 범위로 제한하면 안 되는가? 둘째, 왜 반사된 영광을 더 넓은 범위로 확장해서 벼룩처럼 우리보다 훨씬 더 뛰어난 성취를 거둘 수 있는 다른 생명체를 포함하면 안 되는가? (72면)




52. 우리가 명예를 인정해야 한다고 느끼는 동물은 우리 문화 속에서 훌륭한 인간적 상징이 된 동물이다. 자유나 정복의 상징인 독수리를 잡아 우리에 가둠으로써 날아다니는 능력을 제약하는 일은 그런 본질에 대한 침해이며 이는 앵무새를 새장에 가두는 것과 의미가 다르다. (74면)




53. 인간적 존중을 정당화하는 문제에 대한 종교적 대답이 택한 수단은 반사된 영광이다. 이 개념은 신 대 인간, 우월한 사람 대 나머지 인류, 그리고 결국에는 인간 대 ‘인간에 가까운’ 동물에까지, 자신의 명예를 그 동료들에게 부여해줄 것으로 기대되는 존재가 누구냐에 따라서 다양한 형태를 취하며 이따금씩 기이한 형태를 보이기도 한다. (74면)




54. 모든 인간을 존중하라는 요구를 정당화하는 특성이 되려면 다음 조건을 만족시켜야 한다.

1. 모든 인간을 평등하게 존중해야 하므로 등급을 매길 수 있는 특성이 아니어야 한다.

2. 그 특성은 악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혐오나 경멸의 이유가 될 수 있는 특성이 아니어야 한다.

3. 인간을 존중하는 일과 도덕적으로 관련이 있는 특성이어야 한다.

4. 존중을 인본주의적으로 정당화하는 특성이어야 한다. 즉 신적인 존재에 호소하지 않고 인간적 용어만으로 정당화될 수 있어야 한다. (74, 75면)




55. 칸트는 인간을 존중하는 법을 가르쳐준 루소에게 감사한다고 했다. 이것은 동물학자가 흥미로운 동물의 한 종에 관심을 갖게 해준 다른 동물학자에게 보이는 감사와 다르다. 루소는 단지 인간이라는 이유 만으로 내재적 가치를 지닌 인간의 특성들에 칸트가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 실제로 칸트는 인간의 특징을 인간에게 가치를 부여하는 구성요소들로 나누었다.

1. 목적을 결정하는 존재, 즉 사물에 가치를 부여하는 존재다.

2. 자기입법 능력이 있는 존재다.

3. 자신을 완벽하게 만들 능력, 즉 점점 더 완벽해질 능력을 가진다.

4. 도덕적 주체가 될 수 있다.

5. 합리적이다.

6. 자연의 인과관계를 초월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75면)




56. 칸트가 열거한 특징은 사람들이 서로 다른 수준으로 소유하고 있다. 인간이 자기입법자로서 갖는 도덕적 역량은 사람마다 다르다. 칸트의 목록에 있는 특징들은 서열을 나누는 것이어서 칸트가 정당화하고자 하는 것, 즉 단지 인간이라는 이유로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존중하는 일을 정당화하지 못한다. (75, 76면)




57. 그러나 이 특징들이 서열을 나눌 수 있다는 사실보다 더 근심스러운 문제는 그것이 악용될 수 있다는 데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칸트가 제시한 특징들을 소유하면서도, 예를 들어 도덕적인 삶을 영위할 능력이 있으면서도 명백하게 비도덕적인 삶을 산다면, 왜 그 사람을 존중해야 한단 말인가? 그 사람이 도덕적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을 저버렸다는 사실은 그를 존중할 이유가 되기보다는 오히려 자기에게 주어진 과업을 모독한 자라고 그를 경멸하고 모욕할 이유가 되어야 한다. 이런 견해에 따르면 도덕적이 될 능력이 있는 범죄자들은 존중받을 가치가 없다. 그들이 자신의 인간성을 모독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이 존중받을 근거가 되어줄 바로 그 본성을 더럽힌 셈이다. (76면)




58. 하지만 칸트가 나열한 특성에 입각해서 인간에 대한 존중을 정당화하는 사람은, 칸트의 특성들은 등급을 매길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존중하는 일을 정당화하지 못한다는 비판에 맞서는 분명한 방어선이 있다고 여긴다. 설령 어떤 특성이 등급을 매길 수 있다 해도 사람들 안에 그런 특성이 존재하기 위한 기반은 있기 때문에 모든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을 보장하는 최소한의 한계가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기반을 넘어서는 것은 개인의 특수성으로, 그 정도와 강도에 따라 사회적으로 평가할 토대가 된다. 최소한의 한계는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누릴 자격이 있는 기본적인 존중을 보장하지만, 그 이상의 것은 평등하게 주어지지 않으며 이는 정당한 일이다. (77면)




59. 반대로 내재적 가치는 소중한 것은 교환할 수 없다는 생각에 기반하고 있다. ... 칸트의 핵심 주장은 모든 사람이 내재적 가치를 갖는다는 것이다. 교체의 관점에서 사람을 판단하는 상황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렇게 하는 것을 허용할 수 없는 맥락이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칸트에 따르면 인간에 대한 존중을 정당화하는 특성은 인간에게 사용가치도 교환가치도 아닌 내재적 가치를 부여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특성이기도 해야 한다는 조건을 만족시켜야 한다. (80면)




60. 다양하게 알려진 공리주의 이론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 공리주의적 견해에 따르면 내재적 가치라는 개념에는 도덕적 함축이 없으며, 단지 어떤 것이 우리에게 아주 중요해서 교체할 수 없다고 말하기 위한 수사학적 도구에 불과하다. (80면)




61. 능력 특성은 원하는 목적을 달성할 잠재력이라면, 성취 특성은 인간의 능력이 사용된 결과다. ... 인간에 대한 존중을 정당화하는 특성으로 내가 제안하고 싶은 것은 어떤 역량에 바탕을 둔다. 그것은 주어진 순간에 자기 삶을 재평가하고 그 이후 자기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역량이다. ... 자신을 변화시킬 능력이 사람마다 현저한 차이를 보이긴 하지만, 바뀔 수 있는 가능성만으로 인간은 존중받을 자격이 있다. (82면)




62. 근원적 자유를 통해 인간에 대한 존중을 정당화하는 입장의 문제는 인간이 정말로 근원적인 의미에서 자유로운지 질문할 때 분명하게 드러난다. B. F. 스키너는 존엄성 개념이 자유 개념과 결부되어 있다고 정확하게 지적했다. 하지만 그는 존엄성 개념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자유의 개념을 옹호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자유와 자유의 부재는 은밀한 강화와 공공연한 강화라는 차이밖에 없다. 은밀한 강화의 경우 외부 관찰자들이 자극과 반응의 관계를 확인하기가 더욱 어렵긴 하지만, 둘 다 강화를 통해 인간의 반응을 조종한다는 점은 동일하다. 자극에 의한 조종에서 해방되었다는 의미의 존엄성이란 스키너가 볼 때 환상에 불과하다. (8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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