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래 평전 - 세상을 바꾼 아름다운 열정
안경환 지음 / 강 / 2006년 1월
평점 :
품절


1. ‘전태일 평전’을 써서 한 시대의 경전을 만들었지만 영래가 사랑한 것은 노동자가 아니라 인간 그 자체였다. 영래는 노동자도 인간이라는 생각을 가졌던, 평등과 박애적 사랑의 소유자였을 뿐이다. 그는 노동자를 동지로 삼아 정치적 세력을 양성하겠다는 생각을 갖지 않았다. 그는 전태일의 투쟁을 높이 평가했지만 그 투쟁을 발판으로 삼아 자신의 정치적 후원 세력을 만들 생각 역시 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결코 전태일을 예수와 같은 성인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 점이 장기표와 차이라면 차이다. 전태일을 예수로 여긴 장기표의 입장에서 본다면 조영래는 전태일의 복음을 전한 바오로일 수도 있다. (32, 33면)




2. “새는 알을 까고 나온다. 한 세계를 창조하려는 사람은 그에 앞서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데미안) (50면)




3. “민주주의의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 (토마스 제퍼슨) (68면)




4. “허명이 실명을 능가하는 사람은 단명한다.” (86면)




5. 조영래는 오로지 육법전서를 성전으로 삼다시피 하면서 지극히 추상적인 법리의 해석에 과대한 비중을 두는 법학 교육에 전혀 지적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교과 과정의 법학은 현실에서 일어나는 문제의 원인을 진단하는 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 사회 현상의 원인을 진단하거나 평가하려는 지적 노력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오로지 현상에 대한 도식적 판단만을 암기하다시피 하는 것이었다. 학생들의 모임에서 거론되는 주제는 대체로 법학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들이었다. (88, 89면)




6. 이들 ‘비 법학’ 담당 교수들은 법학의 기초가 되는 지적 소양을 배양하는 데 조력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일찍 법 규범의 세계에 갇혀 사고가 경직되는 위험을 다소나마 해소시켜주는 역할을 담당했다. (97면)




7. 제도의 운영을 위해 나라에 기여하겠다는 사명감을 품은 법학도라면 응당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의식과 안목을 키워야 하며, 적절한 시기에는 적절한 행동으로 소신을 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믿음이기도 했다. (98면)




8. 1953년에 제정된 근로기준법은 국제노동기구가 권고하는 기준을 옮겨 적은 버젓한 최저 기준을 규정하고 있었지만 ‘법 따로 현실 따로’의 괴리 현상을 너무 지나친 것이었다. (103면)




9. 이듬해인 1971년 5월, 대법원이 국가배상법의 일부 조항에 대해 위헌을 선언하자 정부는 사법부의 탄압에 나선다. ... 어쨌든 문제의 판결에서 위헌의 입장에 섰던 판사들이 줄줄이 법복을 벗게 되었다. (113, 114면)




10. 동아일보 논설위원을 겸하고 있던 황산덕 교수는 1962년 말, ‘국민투표는 능사가 아니다’라는 제목의 사설을 쓴다. ... 이 일로 인해 황산덕 교수는 ‘정치교수’로 낙인찍혔고 1964년 이례적으로 파면 처분을 받고 서울법대를 떠나게 된다. (144면)




11. 전국적으로 전개된 대학생들의 반대투쟁 중에 특히 제주대학교의 경우는 특기할 가치가 있다. 1965년 3월 당시 학생 총수가 600명 정도에 불과했던 제주대학교에서는 한일협정 반대투쟁은 계속되었다. ... (162면)




12. 가장 똑똑한 학생은 교수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던 곽교수는 영래에게 대학원에 진학하여 장차 교수가 될 것을 권유한다. ... (192, 193면)




13. 흔히 사회문제에 직접적인 관심을 가지는 법학도는 기질적으로 민법이라는 기본법 과목을 소홀히 하기 쉽다. 근대 자유주의와 사적 자치의 원칙을 대전제로 하는 민법의 기본 정신과 세부적 법리는 가능한 한 국가의 개입을 꺼린다. 공익, 형평, 배분적 정의 등의 이념을 근거로 하여 국가의 사적 거래에 개입하는 것을 선호하는 사람들에게는 민법이 지나치게 현상 유지를 기본 이념으로 삼는 방어적 무기로 보인다. 때문에 역동적인 사회에서 법을 통해 사회 변혁을 꿈꾸는 법학도들에게 민법이라는 과목은 매력을 주지 못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민법이야말로 모든 법 이론의 출발점이고 법학 수련의 기초이다. 예컨대 노동법도 노사간의 계약 문제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193면)




14. 당시 조영래가 준비했던 석사논문의 제목은 ‘노동계약의 효력에 관한 연구’였다. ... 10년 만에 다시 석사논문을 준비한다. 이번에는 ‘공해 소송에 있어서의 인과관계 입증에 관한 연구’라는 제목이었다. ... 이 환경법의 단계에서는 종래에 자유재로 인정되어온 대기, 물, 일광 등에 대하여 개인의 환경권을 인정함으로써 전통적인 사법 원리에 일대 수정을 기도하게 된다. (196, 197면)




15. 이렇게 논문의 도입부를 제시한 그는 일본, 미국, 독일의 이론과 판례를 검토한 후 한국 법원의 “다분히 보수적인 자세”를 비판하면서 입법적 해결을 통해 공해 소송에서 인과관계의 입증 부담을 감경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전통적인 민법 이론에 수정을 가할 것을 제시하는 것으로 논문을 마감한다. (197면)




16. 모든 법학도의 가슴속에는 ‘사회 정의’라는 가치가 자리잡고 있었지만 그 정의가 현실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이들은 큰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이다. (218면)




17. 이따금씩 익명으로 노동자의 투쟁을 촉구하는 시를 쓰고 전태일 정신의 확대 계승에 깊은 감명을 쏟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못 배우고 힘없는 노동자도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누려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법적 상식과 인간으로서의 양심의 명령에 따랐던 것뿐이다. (219면)




18. 카프카는 일기장에 “인간에 대한 무관심”을 배양하는, 법학의 성취도를 가늠하는 시험에 대한 냉소를 숨기지 않았다. 그러나 조영래는 카프카와 달랐다. 그는 사법시험 준비에 필요한 것은 하루 두 갑의 담배와 세상일에 대한 일시적인 무관심이라고 요약한 적이 있다. (222면)




19. 극도로 경직된 사회 분위기 속에서 5월 20일 10시, 대법원은 김재규 등 다섯 사람의 사형을 확정한다. ... 판결에 참가한 14명의 대법관 중 6명이 소수 의견을 집필했다. 다수 의견의 집필자 유태홍은 이듬해 대법원장이 된다. 반면에 소수 의견을 집필한 판사들은 각오한 대로 고초를 겪는다. 소수 의견의 대표자 격인 양병호는 보안사로 끌려가 고초를 당하고, 그를 포함한 다섯 사람은 8월 9일 법복을 벗는다. 나머지 한 사람도 이듬해 재임용에서 탈락한다. (274면)




20. 일견 허황하리만치 거대하고 추상적인 이성에 찬 ‘운동권’ 영래의 머릿속에는 언제나 구체성이 단단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284면)




21. 친절은 법률가 조영래의 업무수칙 제1조였다. (284면)




22. 가인 김병로, 긍인 허헌, 그리고 애산 이인 등 후세 법조인들에 의해 흔히 ‘3인 변호사’로 지칭되는 이들은 활동 당시에는 ‘무료변호사’, ‘항일변호사’, ‘사상변호사’로 불렸다. (288면)




23. ... 그러나 변호사협회라는 단체의 차원에서 인권변론을 전개한 사람은 이병린 변호사가 최초였다. ... 이돈명, 조준희, 홍성우, 황인철 등 이른바 ‘4인방’ 인권변호사는 전국을 무대로 인권변론의 전선을 구축한다. (289면)




24. “client들이 변호사를 불러서 일을 시키는 관행 ... 정말 정신을 번쩍 나게 한다.” (301면)




25. 조영래의 변론을 일러 ‘창조적 변론’이라고 평가들을 한다. 그는 소송에 임하면서 종래에 관행적으로 답습하던 변론 방법에 더하여 언제나 새로운 변론 방법을 개발하는 데 정력을 쏟았다. 헌법 조항뿐만 아니라 실체법과 소송법 전체를 망라하는 법조문을 샅샅이 뒤졌다. (360면)




26. 조영래가 새로이 눈을 돌린 영역은 국제적 차원에서의 인권운동이었다. ... “요컨대 오늘날의 세계에서 인권 문제는 더 이상 어느 한 나라의 문제가 아니다.” (390면)




27. “이제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은 법적 투쟁의 양상을 띤다. ... 법률가는 법정에서 진실을 말하고, 그 진실을 기초로 여론에 호소함으로써 인권 침해에 대한 사회적 구제책을 강구할 수 있다.” (391면)




28. 박원순은 특히 세밀한 부분에서 정교한 법리를 발견해내는 조영래의 능력에 특별한 경의를 표했다. 김근태 고문사건에서 신체에 대한 증거보전 신청, 한겨레신문사 압수수색 영장에 대한 항고의 제기, 민사소송의 소송구제 제도의 활용, 형사소송에서의 석명권의 발동 등. 이 모든 ‘창조적 변론’의 예는 문제의 제기와 해결을 동시에 유념하는 통합적 포섭력에서 산출된 것이다. (401면)




29. 역사는 이상주의자의 좌절 속에서 발전한다고 한다. (45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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