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의 타자 - 실천 철학 논문집 나남신서 1367
악셀 호네트 지음, 문성훈 외 옮김 / 나남출판 / 2009년 2월
평점 :
품절


 

1. 내가 애초부터 가지고 있었던 생각은 인정을 위한 노력이 대부분 반복적인 모욕이나 무시와 같이 부정적 형태의 경험을 통해 등장한다는 점이다. 즉, 일상적으로 모호하게 남아 있던 규범적인 틀이 보다 정확하게 분석되고, 또한 분명하게 드러나면서 비로소 이러한 부정적 경험의 근저에 유보된 형태의 인정에 대한 요구가 함축적으로 놓여 있음이 입증된다는 것이다. (5, 6면)




2. 이런 점에서 나의 입장에 따르면 “무시” 현상은 제도화된 사회적 인정 유형으로부터 왜 주체들의 상호주관적 행위에 대한 요구가 등장하는가를 설명하게 될 포괄적 인정이론 체계의 핵심 열쇠이다. (6면)




3. 이 논문들은 실천철학의 세 가지 분야인 사회철학, 도덕철학, 그리고 정치철학 영역의 주도적이고 규범적인 범주들을 “인정” 개념으로 전환하는 것이 어느 정도나 가능할지를 더듬어 보려고 한다. (6면)




4. 나, 우리, 남자, 자국민, 이성애자가 중심인 한, 타자는 이 중심부 사람들과 위계적 관계를 갖는다. 타자는 진리에 대해 허위, 선에 대해 악, 합리성에 대해 비합리성, 정상에 대해 비정상, 우등에 대해 열등의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따라서 타자는 중심으로부터 배제되고 허위, 악, 비합리성, 비정상, 열등이란 이름하에 억압된다. (옮긴이의 글, 9면)




5. 이렇게 호네트가 정의의 타자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는 바로 정의의 원칙이 갖는 한계 때문이다. 정의의 원칙은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대우할 것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모든 개인은 인간이라는 동질성을 공유하는 보편적 존재로 간주할 뿐 각 개인이 서로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차이나 특수한 처지는 고려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런 한계를 전제한다면 이제 개인적 특수성을 보호하려는 윤리적 입장은 정의의 타자로 등장한다. (옮긴이의 글, 11면)




6. 즉 특정한 정체성이 보편적 인간성으로 고양된다면, 이와 다른 정체성의 소유자는 인간으로서의 동등한 지위를 상실한다는 것이다. (옮긴이의 글, 11면)




7. 호네트가 정의의 타자로 제시하는 것은 “배려”를 강조하는 윤리적 입장이다. 왜냐하면 이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특수한 사람들에 대한 비대칭적 의무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무차별적으로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대우하라는 정의의 원칙의 경계를 벗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옮긴이의 글, 11면)




8. 호네트가 이 책에서 보여주는 또 다른 문제의식이란 호네트 자신의 고유한 이론인 인정이론을 윤리학과 사회․정치철학 영역에 적용함으로써 “인정”(Anerkennung)을 일종의 새로운 행위 및 사회운영 원칙으로 발전시키는 데 있으며, 바로 우리는 이 인정원칙을 정의의 원칙과 배려의 원칙을 넘어 이 양자를 포섭할 수 있는 제3의 원칙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옮긴이의 글, 12면)




9. 이렇게 인정의 형태를 개인의 정체성 차원에 따라 차별화시킨다면, 인정의 원칙은 정의의 원칙과 배려의 원칙과 서로 구별되면서도 연결점을 갖는다. 왜냐하면 권리의 인정은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대우하라는 정의의 원칙에, 그리고 사랑은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알며 이들을 보살피라는 배려의 원칙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인정의 원칙은 정의의 원칙의 타자를 포용하면서 그 한계를 넘어설 수 있고, 역으로 배려의 원칙의 타자를 포용하면서도 그 한계를 넘어설 가능성을 갖는다. (옮긴이의 글, 13면)




10. 즉 여기서 중심이 되는 것은 소유질서, 형사처벌, 의료보장 등 시민사회의 재생산과 관련하여 국가의 개입이 제기하는 규범적 문제들이다. 이러한 개념규정은 사회철학의 과제를 상대적으로 분명하게 규정한다는 장점을 갖지만, 불가피하게 동반되는 단점은 사회철학의 정체성 상실이다. 즉 사회철학은 더 이상 독자적 대상영역이나 차별적 문제를 갖지 못한 채, 일종의 정치철학의 곁가지로 되고 만다. (24면)




11. 이러한 두 가지 발전 경향을 종합해 볼 때, 우리는 어렵지 않게 오늘날 사회철학이 불안정한 처지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독일어권에서 사회철학은 그 과제영역이 과도하게 확장됨에 따라 곤경에 빠진 학문이 되고 말 위험성이 있다면, 영미권에서는 그 반대로 과제영역이 제한됨에 따라 이미 정치철학의 하위분야가 됨으로써 더 이상 독자적 특징을 갖지 못한 것 같다는 것이다. 이러한 위험에 대응하기 위해 내가 제시하고자 하는 테제는, 사회철학이 무엇보다도 잘못된 발전과정 또는 장애, 즉 ‘사회적 병리현상’으로 규정될 수 있는 잘못된 사회적 발전과정을 규정하고 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24면)




12. 루소는 당시의 사회적 삶을 무언가 인간의 근원적 존재형태에서 벗어난 것으로 파악하려 함으로써 비록 개념적인 것이 아니라 내용적인 것이지만 ‘소외’라는 철학적 이념을 창조했다. 이를 통해 이제 사회적 삶의 형식을 더 이상 정치적-도덕적 정당성 측면에서만 탐구하지 않고, 사회적 삶의 형식이 인간의 자기실현이라는 목표에 부과한 구조적 제약에 대해서도 탐구할 수 있는 가능성이 형성되었다. (34면)




13. 마르크스는 ... 그가 경제적 삶에 주목하게 만들었던 역사적 경험에 따라 인간 주체를 오직 자기규정적 노동과정을 통해 자기실현에 도달하는 것으로 보았다. (39면)




14. 마르크스는 이러한 사회적 발전과정이 개인에게 야기하는 결과들을 네 가지 형태의 소외로 집약한다. 즉 주체는 자신의 인간적 속성을 실현하는 데 방해받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고유한 개성과 자신의 노동의 산물, 그리고 자신과 관계맺는 다른 모든 인간들로부터 소외된다는 것이다. (40면)




15. 마르크스가 ‘물화’를 통해 이해하고 있는 사회적 발전과정이란 자본의 가치법칙 압력이 주체들로 하여금 현실에 대한 일종의 범주착오를 지속적으로 강제하는 현상이다. (41면)




16. 루소는 아무런 장애도 없는 자기관계를, 헤겔은 공동체에 살아있는 인륜성을, 그리고 마르크스는 노동을 통한 대상화를 각각 인간의 만족스런 자기실현의 전제로 보았다면, 니체에게 그것은 삶을 긍정하는 가치지평이 실행력있게 존재하는 것이다. (45면)




17. 즉 근대세계의 병리적 현상을 이론적으로 다루는 것은 더 이상 철학이나 혹은 철학의 비학문적 주변영역이 아니라, 이제 막 등장하기 시작한 사회학이었다. (47면)




18. 사회학의 과제는 퇴니스나 짐멜, 그리고 베버나 뒤르켐조차 의심하지 않았듯이 윤리적 위기를 실제적으로 극복하기 위해 그 기원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47면)




19. 사회학이 본질적으로 이와 구별될 수 있는 것은 임박한 위험의 성격을 밝히는 내용적 규정에 있다. 즉 현재의 윤리적 위기를 출현케 한 사회적 과정은 더 이상 원자화나 분열의 증대가 아니라, 도덕적 방향상실로 특징지어진다는 것이다. (48면)




20. 앞서 지적한 사회학자들은 베르그송의 영향을 받았던 뒤르켐을 제외한다면 모두 니체의 허무주의 진단으로부터 지속적 영향을 받았다. 즉 이들은 니체의 허무주의 진단으로부터 끌어낸 생각은 객관적 가치질서가 붕괴됨에 따라 주체들이 자신의 삶을 의미있게 만들기 위해 설정할 수 있는 목적 역시 붕괴하고 말았다는 점이다. (48면)




21. 짐멜이 인간관계의 물화를 이야기하고, 퇴니스가 사회적 공동체 유대의 해체에 주목하고, 베버가 세계의 탈주술화에 관심을 기울이고, 끝으로 뒤르켐이 유기적 연대 형태의 형성을 탐구할 때 여기서 문제가 된 사회화 과정은 새로운 경제질서의 정착이 사회적 생활세계의 도덕적 공동화를 초래하는 과정이었다. (49면)




22. 이제 역으로 사회학은 자신의 고유한 가치평가 척도에 대해 객관적 타당성을 요구할 수 있는 어떠한 정당한 가능성도 더 이상 가질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51면)




23. 막스 베버를 통한 루카치의 마르크스 해석이 보여주듯이 자본주의적 상품교환의 이익산출 압력은 모든 현상을 점차 경제적 사용대상으로 탈바꿈시키는 합리화과정을 진행시킨다. (58면)




24. 그녀(아렌트)의 테제에 따르면, 발전하는 산업화 조건 아래서 생산과 노동의 기술적 활동형태가 너무나 강하게 사회적 지배력을 행사하면서 공적 협의나 의사소통과 같이 자유를 신장하는 실천들이 완전히 배제될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67면)




25. ... 따라서 1950년대와 1960년대 사회철학에 가장 큰 자극제가 되었던 것이 ‘계몽의 변증법’이 아니라, 한나 아렌트의 이론이었다는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며, 당시에 철학적 시대해석에서 탁월성을 보였던 저자들 중 어느 누구도 아렌트의 저작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그것이 하버마스의 지배없는 토론 개념이든, 코르넬리우스 카스토리아디스의 혁명적 실천 이념이든, 아니면 찰스 테일러의 자유를 보장하는 공공성 표상이든 이 모든 것들은 항상 도구적 활동의 지배가 의사소통적 행위영역을 해체할 염려가 있다는 한나 아렌트의 시대진단을 비판적 분석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69면)




26. 즉 문화적으로 한 사회의 정상성 개념으로 인정될 수 있는 것은 사회구성원들에게 왜곡되지 않은 자기실현을 가능하게 하는 제반 요건들로 규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74면)




27. 즉 이러한 비판적 개념들은 간접적이나마 예외 없이 개인들에게 완전한 혹은 보다 나은, 간단히 말해서 성공적 삶을 가능하게 한다는 특징을 지닌 사회적 조건들을 지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자기실현의 가능조건에 적합한 사회적 정상성에 대한 윤리적 표상이 사회적 병리현상을 측정하는 척도가 된다. (75면)




28. 따라서 종합해서 말한다면 사회철학에서 사회적 병리현상에 대한 규정은 항상 개인의 자기실현에 도움이 되는 사회적 조건들과 관련해서 이루어진다. (77면)




29. 이미 한나 아렌트에 대한 고찰에서 밝혔듯이 그녀가 산업세계에 대한 자신의 비판의 토대로 삼았던 전제는 인간이 본래적으로 의사소통적 자유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79면)




30. 즉 ‘의사소통행위이론’에서는 사회이론 자체가 비판적 경계를 설정하는 능력을 갖게 되며, 이 경계를 넘어서 체제의 명령이 사회적 생활세계로 침투할 때 이는 사회적 병리현상으로 간주된다. (84면)




31. 하지만 맥락초월적 관점에서 사회적 삶의 발전과정을 병리적 현상으로 평가하려는 사회철학의 고전적 요구는 더 이상 가망이 없게 될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사회철학의 존속은 역사적 현재시기에 대한 개방적 형태를 취하면서, 약하고 형식적 의미의 인간학적 요구가 얼마나 성공적으로 정당화되느냐에 달려 있다. (86면)




32. 내가 보기에는 어떤 사회상태에 대한 그런 판단을 통해 비판되고 있는 잘못된 발전을 총칭하는 개념으로 ‘병리(학)’이라는 용어가 적절한 것 같다. (99면)




33. 그러나 그들이 해방의 세계내적 가능성을 더 이상 믿으려 하지 않으려했다는 사정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아도르노와 관련해서는 ‘부정의 변증법’이, 그리고 호르크하이머와 관련해서는 그가 이후에 쇼펜하우어의 철학적 염세주의로 기울었던 사실이 바로 그 점을 보여주고 있다. (114, 115면)




34. 그 중 첫 번째 흐름은 아도르노가 그의 후기 저작들에서 시도했던 부정주의적 사회비판을 다시 한 번 더 급진화하려는 데서 성립한다고 할 수 있는데, 거기서는 사회 전체에서 사회적 핵심이 스스로 해체되고 있다는 것을 진단해 내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115면)




35. 물론 사정이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은 오늘날 비판이론의 전통을 지속시키고 있는 두 번째 이론 흐름을 보면 분명하게 드러난다. 왜냐하면 당연하게도 내가 여기서 염두에 두고 있는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이론은 행위의 해방적 영역에 대한 접근을 다시 가능하게 했다는 의미에서 부정주의적 사회이론에 대한 대안적 흐름이라고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116면)




36. 그 첫 단계는 마르크스의 생산 패러다임을 의사소통적 행위라는 패러다임으로 전환시키는 것인데, 이를 통해 사회적 노동이 아니라 사회적 상호작용 속에 사회적 진보의 조건들이 놓여 있음이 분명하게 된다. 이 출발점에서 의사소통적 행위의 합리성이 지닌 잠재력을 구성하고 있는 구체적인 규범적 전제들이 무엇인지를 해명하려는 화용론의 전개라는 두 번째 단계가 이어진다. 그 위에 마침내 세 번째 단계로서 의사소통적 행위의 합리화 과정을 사회적 조정매체들이 형성되는 역사적 지점까지 추적하는 사회이론의 기획이 세워진다. 잘 알려진 대로 하버마스는 자신의 사회이론을 오늘날 자기조절하는 체계의 권력이 의사소통에 기초한 생활세계의 유지를 위협할 정도로 성장하게 되었다는 시대진단적 테제로 귀결시킨다. (116, 117면)




37. 두 이론 흐름은 체계권력의 자립화가 오늘날 사회의 사회적 핵심을 해체하기에 이른다는 시대진단적 판단에서 만나고 있다. (117면)




38. 하버마스의 이론구상에서는 위협당하고 있는 인간의 잠재력이 바로 의사소통적으로 상호이해에 도달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점을 설득력있게 제시할 수 있는 언어이론이 자리잡고 있다. (117면)




39. 여기서는 일단 잠정적으로 사회적 상호작용의 규범적 잠재력을 지배로부터 자유로운 상호이해의 언어적 조건과 동일시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점만을 확인해 두자. 이러한 방향은 이미 도덕적 경험이 언어능력에 대한 제한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화 과정에서 획득한 정체성 주장이 훼손될 때 형성된다는 주장 속에 함축되어 있었다. (122면)




40. 어떤 도덕적 기대가 사회적 의사소통의 일상적 과정에 함축되어 있는지를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사회의 하층민들의 저항행위를 연구한 역사적이고 사회학적인 작업들을 천착해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122면)




41. 그와 같은 연구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해 보면 사회의 하층민들에게 저항행위의 동기로 작동하는 것은 적극적으로 정식화된 도덕원칙들에 대한 지향이 아니라 그들이 직관적으로 획득하는 정의감의 훼손에 대한 경험이라는 데 대한 상당한 일치된 확인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정의감의 규범적 핵심은 모든 연구에서 자신들이 지닌 존엄성, 영예 또는 불가침성에 대한 존중의 요구와 연관된 기대다. (123면)




42. 우리는 모든 의사소통적 행위의 규범적 전제가 사회적 인정의 획득에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곧 주체들은 자신들을 도덕적 인격체로 인정하고 또 자신들의 사회적 기여의 몫을 인정하는 상호적 기대의 지평 속에서 서로를 만난다는 것이다. (123면)




43. 곧 사람들은 자신들의 기대와는 달리 자신들이 정당하게 받을만하다고 여기는 인정을 거부당할 때는 언제나 그와 같은 도덕적 불의의 경험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나는 그와 같은 상황 속에서 인간주체들이 전형적으로 겪는 도덕적 경험을 사회적 무시의 감정이라고 규정하려 했다. (123면)




44. 이러한 반성을 통해 우리는 이미 의사소통 패러다임의 언어이론적 버전과는 달리 다른 대안적 버전의 윤곽이 처음으로 드러나는 지점에 이르게 되었다. 그 출발점은 우리가 사회적 상호작용의 규범적 전제들을 단지 지배로부터 자유로운 상호이해의 언어적 조건들에서만 찾으려 할 경우 그 전 범위를 파악할 수 없을 것이라는 반성이다. 그와는 달리 주체들이 의사소통적 관계를 받아들이면서 갖게 되는 규범적 기대와 연관시키는 것은 사회적 인정에 대한 가정이라는 점이 무엇보다도 먼저 고려되어야 한다. 의사소통 패러다임이 이러한 방식으로 언어이론적 틀을 넘어서서 확장되면 이제 상호작용의 도덕적 전제들에 대한 모든 훼손이 얼마나 직접적으로 참여자들의 도덕적 감정 속에 쌓이게 되는가도 확인할 수 있다. 사회적 인정의 경험은 인간이 정체성을 발전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필요한 조건이기 때문에, 그러한 인정의 거부, 곧 무시는 필연적으로 인격의 상실을 가져올 수도 있다는 위협의 느낌을 수반하게 마련이다. (124, 125면)




45.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와 같은 방식으로 언어이론적으로가 아니라 인정이론적으로 이해된 의사소통 패러다임은 또한 하버마스가 호르크하이머의 구상을 발전시키려 하면서 남겨둔 이론적 틈도 매울 수 있다. (124면)




46. 나는 인간의 성공적인 정체성 형성에 필요한 의사소통적 전제들과 관련된 내 반성의 일부에 대해서는, 청년 헤겔의 인정모델을 조지 미드의 이론에 기대어서 재구성했던 책에서 정당화하려 했다. (124면)




47. 그 관점의 중심에는 더 이상 체계와 생활세계 사이의 긴장이 아니라 인정의 조건들을 체계적으로 훼손하는 데 책임이 있는 사회적 원인이 서있어야 한다. 우리는 시대진단적 분석에서 그 주안점을 체계의 자립화로부터 사회적 인정관계의 왜곡과 훼손으로 옮겨야 한다. (125면)




48.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전통에서는 근대사회의 결정적 “장애”로서 도구적 이성이 다른 형태의 행위와 지식들을 지배하기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꼽는 경향이 형성되어 왔다. (126면)




49. 의사소통 패러다임이 더 이상 합리적 상호이해에 초점을 둔 기획으로서가 아니라 인정의 조건들에 초점을 둔 기획으로 이해되면, 비판적 시대진단도 더 이상 합리성 이론의 좁은 틀 안에 축소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제 사회적 삶의 “장애” 또는 잘못된 발전이라 할 수 있는 것을 재는 기준은 더 이상 지배로부터 자유로운 상호이해의 합리적 조건들이 아니라 인간의 정체성을 발전하기 위해 필요한 상호주관적 전제들 전체가 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전제들은 한 개인이 성장하면서 사회적 정체성을 획득하고 결국에는 한 사회의 평등하면서도 고유한 구성원으로 스스로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사회적 의사소통의 형식들 안에 있다. (127면)




50. 따라서 의사소통 패러다임이 더 이상 언어이론적으로가 아니라 인정이론적으로 이해되면, 시대진단의 중심에는 인정의 병리학이 자리하게 된다. (127면)




51. 이미 언급한 대로 나는 청년 헤겔에 의존해서 한 개인의 성공적 정체성을 형성시키는 데 필요한 의사소통적 전제들이라 할 수 있는 세 가지 형식의 사회적 인정을 구분한 바 있다. 곧 사랑이나 우정과 같은 사회적 친밀 관계에서의 정서적 관심, 한 사회의 도덕적으로 책임있는 구성원으로서의 법적 인정, 그리고 마지막으로 개별적 기여와 능력에 대한 사회적 가치평가가 바로 그 세 형식들이다. (128면)




52. 내가 지금까지 소개했던 모든 고찰은 비판이론은 인정투쟁의 다양한 노력들 속에서 자신의 규범적 주장들을 정당화시킬 수 있다는 테제로 정리할 수 있다. 주체들이 그들의 정체성과 관련된 요구들이 무시될 때 갖는 도덕적 경험들이야말로 사회적 의사소통 관계에 대한 비판이 사회적 현실 속에서 얼마간 그 근거를 갖고 있음을 보여 줄 수 있는 학문 이전의 층위다. (133면)




53. ... 이런 의미에서 비판이론은 더 이상 호르크하이머가 그랬던 것처럼 스스로를 단지 이미 진행 중인 해방의 과정을 지적으로 표현한 것에 불과한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 사회이론은 호르크하이머가 거대한 환상에 매혹되어 전혀 파악할 수 없었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자신의 노력을 집중해야 한다. 그 문제는 바로 당사자들, 곧 무시당한 사람들과 배제된 사람들이 자신들의 경험을 폭력적 저항문화 속에서 발산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그 경험을 민주적 공론장 안에서 올바르게 표현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도록 해주는 그와 같은 도덕문화를 어떻게 만들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134, 135면)




54. 마르크스주의의 이와 같은 혁명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다는 것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에 동기를 부여했던 결정적 경험이었다. (139면)




55. 아도르노는 이론이 혁명에 대한 신뢰를 상실했다는 사정을 철학적 미학을 통해 상쇄하려 했는데, 그는 그러한 미학이 예술작품들에서 도덕적 통찰에 대해 역사적 준거를 제공할 장소를 찾아낼 수 있으리라 믿었다. (140면)




56. 국가개입주의 때문에 노동자층의 규범적 잠재력이 말라버렸다. (141면)




57. 나는 배링턴 무어에 따라 그와 같은 하층민들의 인지적 밑바탕을 나타내기 위해 ‘불의의식’(Unrechtsbewusstsein)이라는 개념을 제안하고자 한다. 나는 이 ‘불의의식’이라는 개념을 통해 피억압집단들의 사회도덕은 결코 상황을 추상화한 도덕적 전체 질서에 대한 표상이나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체계적 구상을 포함하지 않고 그들이 정당한 것으로 믿는 도덕적 요구들이 침해되는 데 대한 매우 민감한 촉수를 드러낸다는 것을 부각시키고 싶다. (146면)




58. 아무도 그들이 사회도덕적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어떤 언어적이고 문화적인 코드를 가지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보아 사회 하층민들은 자신들의 도덕적 행위규범들을 문제제기가 가능하고 정합적으로 짜여진 체계로 만들어야 한다는 압력을 거의 받지 못한다. 이런 식의 반성을 통해 마이클 만은 많은 영향력을 끼친 논문에서 “단지 실질적으로 사회권력을 나누어 가지고 있는 사람들만이 정합적인 사회적 가치체계를 발전시킬 필요를 느낀다”고 결론을 내렸다. (147, 148면)




59. 그러나 그들은 정당화가 필요한 한 사회의 현상들을 원칙들을 이루어진 하나의 가치체계로 정초를 해야 할 내적이거나 외적인 강제를 받지는 않는다. 따라서 사회 하층민들에게는 자신들이 타당하다고 믿는 행위규범들을 모든 사회계층에 대해 타당한 가치전제들의 체계 안에 짜 맞추어야 한다는 압력이 매우 적다. (148면)




60. .. 한 사회질서의 가능한 가치원리들에 관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상투적인 규범적 기준들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경험적 연구들도 이와 같은 추측을 간접적으로 증명한다. (149면)




61. 부정의는 진짜 정의의 매체다. (아도르노) (169면)




62. 따라서 오늘날 탈근대론의 윤리는 특수한 것, 이질적인 것을 도덕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이념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러한 윤리는, 분명하게 정리되지 않은 아도르노의 도덕이론에서와 마찬가지로, 비동일자(Nicht-Identischen)를 적절하게 다룰 수 있을 때에만 비로소 정의에 대한 사람들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170, 171면)




63. 리요타르는 이미 자신의 ‘탈근대적 지식’이라는 연구의 끝부분에서 도덕적 보편주의의 전통에서와는 달리 이질적인 것을 보호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정의개념을 암시한 적이 있다. (173면)




64. 하버마스는, 그가 칸트의 뒤를 잇는 도덕이론의 전통 전체와 공유하고 있는 하나의 전제로부터 담론윤리의 기본입장을 발전시킨다. 현대의 조건에서는 다양한 개인적 삶의 이상이 너무 서로 다른 만큼 윤리학은 도덕적-실천적 갈등과 관련하여 더 이상 특정한 가치관을 추천해서는 안 되고 단지 그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특별한 절차만을 규범적으로 제안할 수 있다는 것이다. (178면)




65. ... 왜냐하면 정언명령의 정식은, 마치 모든 주체가 도덕적 갈등에 직면하여 고립된 상태에 있으며 아무런 말도 통하지 않는 심연을 사이에 두고 다른 모든 당사자와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하버마스는 칼-오토 아펠(Karl-Otto Apel)과의 공동작업을 통해 칸트의 절차주의에 대한 제안을 발전시켜 인간의 언어적 상호주관성도 함께 고려할 수 있는 새로운 버전을 만들어 내었다. 그 버전에 따르면 저 개별적 주체가 자신의 행위가 요구되는 실천적 규범이 도덕적 타당성을 지니는 지를 검토할 때 도움을 주는 보편화가능성의 검토가, 모든 잠재적 당사자가 토론을 통해서만 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는 그러한 절차로 파악된다. 따라서 한 주체가 문제되고 있는 규범이 얼마나 보편타당성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지를 알게 되는 것은, 단지 그 주체가 그때그때 제시되는 논변들 때문만이 아니라 또한 동시에 모든 해당 당사자 덕분이기도 하다. (179면)




66. 그러나 그와 같은 불의를 탐색하는 데는 타인의 가능한 고통을 창조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예술가의 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로티는 미학적 감수성이야말로 도덕적 진보를 가능하게 하는 본래의 추진력이라고 본다. (187면)




67. 도덕적 담론이 어떤 태도와 행동양식을 전제해야만 하는가를 이해하는 문제와 관련하여서는 이상적 역할수용이라는 모델이 처음부터 기본적인 그림이 된다. 미드가 처음으로 제시한 이 발상은, 단지 주체들이 상호간에 다른 사람의 역할에 대해 역지사지할 수 있을 경우에만 그들은 의사소통을 통해 상호간의 이해에 이를 수 있다고 본다. (190, 191면)




68. 하버마스는 언제나 단호하게 인지주의적 견해를 견지했는데, 그는 정의주의적 해석은 불가피하게 정서에 기초한 특수주의의 위험을 피하기 어렵다고 본다. 만약 주체들이 상호간에 준비해야만 하는 것이 일차적으로 감정이입을 하고 타인의 처지를 정서적으로 헤아릴 수 있는 능력이라면, 그 경우 도덕적 담론은 당장 우연적인 정서적 결속에 의존하게 될 것이고 오직 타당한 근거들에만 바탕하는 협업적 진리추구라는 기능을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따라서 하버마스는 이상적 역할수용이라는 모델로부터 단지 상호 이해도달이라는 인지적 차원에 관련되는 그러한 특징들만을 자신의 담론윤리에 수용한다. (191면)




69. ... 왜냐하면 우리는 다른 인격의 “얼굴”을 대할 때, 우리가 그에게 직접적 도움을 주고 실존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힘이 되어주어야겠다는 의무를 느끼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204면)




70. 그런 한에서 레비나스에게는 상호주관적 만남이 구조적으로, 다른 인격의 특수성의 요구를 지속적 배려를 통해 충족시켜야 한다는 무한한 과제를 포함하고 있는 도덕적 책임의 경험과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이해관계를 좇는 행위의 자아중심주의를 극복하게 하는 그와 같은 무제한적 의무를 수용함으로써 비로소, 개별적 인간은 도덕적 인격으로 성숙한다. (205면)




71. 다시 말해 페미니즘 도덕이론이 형성되면서 캐롤 길리건(Carol Gilligan)의 연구에 기댄 다음과 같은 비판이 등장했던 것이다. 즉 칸트를 따르는 담론윤리적 접근법은 우리가 어떠한 상호간의 의무를 고려함이 없이 구체적 타자에 관심을 가지고 그 타자를 자발적으로 돕고 지지해야 한다는 그러한 도덕적 태도를 무시한다는 것이다. (210면)




72. 그러나 그 실천적 담론의 대칭성이라는 전제는 모든 특별한 조건들을 무시하고 그에 따라 배려라는 관점을 배후로 밀려나게 하도록 우리를 강제한다. (210면)




73. 그러나 공통의 삶의 형식에 대한 그와 같은 사회적 소속감은 사람들이 또한 부담과 고통과 과제를 어떤 공통의 것으로 경험할 때에만 비로소 생겨날 수 있다. 그리고 그와 같은 공통의 부담과 필요에 대한 경험은 다시금 단지 집단적 목표설정이라는 조건 위에서만 발전될 수 있기 때문에,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그와 같은 목표를 정의하는 일은 단지 사람들이 가치를 공유하고 있을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에, 사회적 소속감이 생겨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가치공동체라는 전제가 필요하다. 따라서 우리는 상호간에 대한 관심이라는 도덕원칙으로 이해되는 연대를, 하나의 사회공동체가 생겨날 때 어떤 식으로든 따라다니게 마련인 특수주의의 요소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데, 그것은 그 공동체의 성원들이 일정한, 윤리적으로 정의된 목표설정을 통해서 통합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따라서 또한 특수한 부담의 경험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213면)




74. 특히 칸트적 전통은 그동안 다양한 그리고 강력한 반대들에 부딪혀 왔는데, 여기서 공통적으로 지적되었던 것은 일방적으로 보편주의적 정당화 방식만을 지향하는 칸트적 도덕이 인간행위의 복잡한 동기들의 구조를 잘 반영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우선 칸트적 전통은, 개별적 행위자들이 불편부당한 원리들을 무력하게 만드는 개인적 의도, 느낌, 혹은 애정과 같은 것에 기반하여 행위하는 데도 불구하고, 왜 굳이 그러한 보편주의적 도덕 개념들이 실천적으로 중요해야 하는지를 실질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 행위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굉장히 다양한 기대들, 의무들 그리고 욕망들과 대면해 있으며, 하나의 도덕원리를 일관적으로 적용하기보다 다양한 도덕적 관점들의 갈등적 통합을 더 자주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217, 218면)




75. 나는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첫 번째 단계에서 분명히 되어야 할 것은 도덕이 좋은 삶(Gutes Leben)의 전제들에 대한 윤리적 모색에서 어떤 위치를 점하고 있는가를 밝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도덕의) 저 목적론적 좋음의 개념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적 연관은 처음부터 보존된다. (219면)




76. 내 생각으로는, 이와 같은 도덕의 간접적 기능은 우리가 도덕적 입장과 규범 그리고 상호주관적 인정의 형식들 간의 긴밀한 연관을 직시할 때 분명해질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연관은 우리가 도덕적 의무들의 수용을 통해 우리의 정체성 형성의 상호주관적 조건들을 상호적으로 보장하나든 것을 분명하게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219면)




77. 문화다원주의(다문화주의)에 대한 토론과 여성운동의 이론화 과정에서 공통의 이념으로 대두된 것은 개인이나 사회적 집단들의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규범적 생각이었다(Taylor 1992). (221면)




78. 즉 칸트 이래로 도덕철학에서 상대적으로 분명한 윤곽을 갖고 있던 “존중” 개념과 달리 “인정” 개념은 일상언어에서도 그리고 철학에서도 그 의미가 확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222면)




79. 예를 들어 오늘날 여성주의 윤리를 근거지우는 맥락에서 인정개념은 엄마와 아이의 관계에서 그 경험적 본보기를 찾을 수 있는 애정 어린 관심과 배려의 형태를 표현하는 데 사용된다(Hirschmann 1989). 이와는 달리 담론윤리의 맥락에서 “인정”이 의미하는 것은 다른 모든 개인의 특수성과 동등성을 상호 존중하는 방식이다. 논쟁 참여자가 토론에 임하는 태도는 이에 대한 전형적인 예가 된다(Habermas 1993, 3장; Wingert 1993). 마지막으로 오늘날 공동체주의를 발전시키는 시도 안에서 인정 범주는 낯선 생활방식의 가치를 존중하는 형식을 규정하는 데 사용되며, 그런 만큼 인정은 사회적 연대의 지평 속에서 전형적으로 형성된다(Taylor 1992). (222면)




80. 이러한 다양한 사용방식 때문에 생기는 두 번째 문제는 그 각각의 의미에 따라 인정개념의 도덕적 내용이 달라지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의 도덕적 자율성에 대한 인정과 연관하여 보편적 권리와 의무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의미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언어의 사용방식은 배려 또는 가치부여와 같은 인정형식에는 적합하지 않다. 왜냐하면 여기서 우리는 우리와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만 특별한 방식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기 때문이다. (223면)




81. 초기 저작들에서 헤겔은 인정이 개인에게 어떠한 유형의 자기관계를 가져다주는가에 따라 세 가지 서로 다른 인정의 유형을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223면)




82. 그리고 마침내 피히테는 자신의 자연법의 토대 속에서 이러한 부정주의에 단호하게 맞서면서, 주체들이 서로에게 각자의 자율성을 사용할 것을 요구함과 동시에 서로를 자유로운 존재로 인정할 때에야 비로소 주체는 자유의식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Fichte 1791). (224면)




83. 어떻게 인정의 경험이 인륜성으로의 진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를 밝히려면, 자기의식의 상호주관적 획득과 전체 사회의 도덕적 발전 사이의 역동적 상호관계가 추가적으로 해명되어야 했다. (224, 225면)




84. 즉 인륜성으로의 진보는 점차 요구수준이 높아지는 세 단계의 인정유형에 따라 이루어지며, 이 유형들을 매개하는 것은 자기 정체성을 확인받기 위해 주체들이 감행하는 상호주관적 투쟁이라는 것이다. (225면)




85. 헤겔의 이러한 단초는 피히테를 훨씬 넘어서서 다음과 같은 테제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즉 일단 자기의식의 생성을 위한 상호주관적 조건이 밝혀진다면 이제 상호주관적 인정의 세 가지 형식이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피히테가 자연법에 대한 근거제시 과정에서 염두에 두었던 개인적 자유 영역의 상호인정 매커니즘은 실제로 주체의 권리의식 형성을 설명해 주기는 하지만 자유로운 개인의 긍정적 자기이해를 완전하게 설명하지는 못하고 있다. 따라서 헤겔은 칸트의 도덕적 존중이 함의의하는 권리의 인정 이외에도 두 가지 형식의 상호인정을 첨가한다. (225면)




86. 이 두 가지 인정형식에는 각각 특수한 단계의 개인적 자기관계가 상응한다. 그 중 하나는 사랑인데, 헤겔은 자신의 초기 저서에서 이를 휠더린의 통일철학적 의미로 이해하고 있다. 즉 사랑을 통해 주체들은 서로의 유일무이한 욕구본능을 상호 인정하게 되며, 이로써 주체들은 자신의 본능적 요구를 표현하는 과정에서 정서적 안정감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225면)




87. 끝으로, 국가영역에서의 인륜성도 인정형태의 하나이다. 이를 통해 주체들은 사회질서의 재생산에 기여하는 자신들의 능력에 상호적으로 가치를 부여하게 된다. (225면)




88. 그러나 ‘법철학’에서 헤겔은 다시 초기의 세 가지 인정형식 구분을 반영하는 가족, 시민사회 그리고 국가의 구분을 시도한다. (226면)




89. 약 2백여 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날 도덕개념을 도입하기 위해 “인정” 개념을 사용할 때 대부분 그 출발점이 되는 것은 도덕적 손상(moralische Verletzung)에 대한 현상학적 분석이다. (227면)




90. 다시 말해서 도덕적 손상이 조건을 이루는 것은 단순한 육체적 고통 그 자체가 아니라 자신이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의식이다. (227면)




91. 주체가 자신과의 관계에서 상처받을 수 있는 이유는, 주체가 자신에 대한 긍정적 관계를 맺고 유지하기 위해서 타인의 동의나 긍정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호주관적 전제가 고려되지 않는다면 어떤 한 사람이 자신에 대해 갖고 있는 자기이해의 특수한 측면들이 특정 행위나 말 또는 상황에 의해 파괴될 때 왜 이 사람이 상처받게 되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 (228면)




92. 다시 말해 도덕적으로 부당한 것을 경험할 때 항상 해당 당사자는 심리적 충격을 받게 된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자신의 정체성의 조건이 되는 어떤 기대가 충족되지 못하고 좌절된 데 대해 실망을 느끼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도덕적 손상은 그것이 개인 행위능력의 본질적 전제를 파괴한다는 점에서 인격훼손 행위이다. (228면)




93. 도덕적 손상을 통해 훼손되고 파괴되는 자기관계의 방식이 보다 근본적이면 근본적일수록 그 도덕적 손상은 더 심각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229면)




94. 여기서 ‘자기관계’(Selbstbeziehung)란 한 개인이 자신의 능력과 권리와 관련해서 자기 자신에 대해 갖고 있는 의식 또는 감정을 말한다. (229면)




95. 지금까지 이야기된 것에 따르면, 가장 기본적인 도덕적 손상은 한 개인이 자신의 신체적 안녕에 대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확신을 빼앗아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식의 행위에 의해 파괴되는 것은, 모든 타인의 시점에서 자신의 필요가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는 신념이다. (230면)




96. 어떤 점에서 이미 헤겔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듯이, 인정의 도덕을 전개하기 위한 첫 번째 단계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의 삶의 형태가 갖는 상호주관성 때문에 도덕적 손상 가능성이 생긴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232면)




97. 다시 말해 도덕적 태도들을 통해 주체들의 불가침성을 보장하는 상호주관적 조건이 확보된다는 것은 곧 도덕적 태도들 역시 도덕적 무시 유형만큼이나 다양한 인정의 형식들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233면)




98. 즉 인간은 자신의 특정한 능력과 권리의 가치가 확인되고 인정받고 있음을 보게 될 때에만 손상되지 않은 자기관계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234면)




99. 이러한 연관으로부터 얻어지는 역설적 결론에 따르면, 도덕적 관점이란 상호주관적 관계의 방식에 따라 주체에게 각기 다른 도덕적 행위를 의무지우는 관점을 말한다. (235면)




100. 이와 같은 간단한 요약에서 이미 드러나기 시작하듯이 여기서 전개된 도덕이론의 결론에는 종래의 여타 이론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나타난다. 즉 세가지 인정양식은 비록 종합적으로 도덕적 관점을 구성하지만, 이들 사이에는 조화의 관계가 아니라 오히려 지속적 긴장관계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237면)




101. 즉 도덕적 관점은 비록 세 가지의 도덕적 태도를 포괄하지만, 어떤 상위의 관점에서 이들 사이의 우선순위를 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도덕의 전체 영역에는 긴장이 흐른다. 그리고 이 긴장은 오직 개별적 숙고를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 우리는 구체적 상황에서 우리의 사회적 관계 형태에 따라 다르게 요구되는 인정행위를 수행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갈등상황의 경우 우리는 다른 관점에서 어떤 관계가 우선시되어야 하는가를 결정해야 한다. (237면)




102. 이러한 통찰이 우리에게 인식시켜 주는 것은, 칸트적 사고 이외에 배려윤리의 전통과 공동체주의의 단초들도 인정도덕 속에서 정당하게 자신의 자리를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전통은 각각 세 가지 인정형식에 해당되는 도덕적 태도들을 구체화하고 있다. 이 세 가지 인정형식이 종합적으로 인간으로서 우리가 갖는 인격적 불가침성을 지켜주는 것이다. (238면)




103. 즉 존경과 달리 사랑의 연구에서는 가치부여를 받는 개인의 대체불가능성(Unvertretbarkeit)에 대한 신념이 추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273면)




104. 오늘날 이 주제를 다루는 모든 연구의 출발이 되는 통찰에 따르면,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우리에게 유일무이한 그리고 대체불가능한 가치를 갖는 존재로 인지한다. (274면)




105. 아마도 철학적으로 중요한 문제는 주체가 더 이상 투명하지도 그리고 권능있는 존재도 아니라는 사실로부터 어떤 결과들이 도출되어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292면)




106. 첫 번째 대답은 위에서 묘사한 두 가지 사상적 움직임 속에 놓여 있는 해체 경향을 급진화시키는 데 있다. (293면)




107. 두 번째 대답은 전통적 자율성 이념을 단호하게 유지하는 데에 있다. (293면)




108. 끝으로 세 번째 대답은 주체성을 재구성하는 데 있다. (293면)




109. 나는 이렇게 개인의 자율성 이념을 무의식과 언어라는 구속적 조건들에 적응시키는 입장이 취할 수 있는 가장 전망있는 길이 오늘날 주체를 상호주관성이론적으로 이해하려는 작업이라고 본다. (294면)




110. 오늘날 개인의 자율성 개념을 가능하게 하는 주체 관념은 상호주관주의 전통 속에 있다. (298면)




111. 이 두 이론이 보여주는 입장은 우선적으로, 언어와 무의식 같이 통제될 수 없는 힘을 어떤 한계로서가 아니라 개인적 자율성을 획득하게 되는 가능조건으로 이해하게 한다. (298면)




112. 미드에서 의문의 여지가 없는 사실은, 개별적 주체가 상호작용 참여자로서 자기 자신과 자신의 행동을 조망할 수 있게 하는 상징적 타인의 상이한 관점으로 자신의 위치를 바꿈으로써 자아정체성에 대한 의식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점이다. (299면)




113. 따라서 의사소통적 행위를 통해 엄격하게 보편적 원칙에 자신을 정향시키는 사람이 도덕적으로 자율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서적 관심과 감각을 통해 개별적인 구체적 상황에 이러한 원칙을 책임감있게 적용할 줄 아는 사람이 도덕적으로 자율적이다. (305면)




114. 그러나 이 세계정치적 변화를 조악한 홉스주의가 상정하는 인간학적 의미에서 자연상태의 뒤늦은 복귀의 결과로 해석하지 않고, 칸트적 역사철학의 가설적 의미에서 인간적 자유를 확립해 가는 힘겨운 과정 속의 한 발걸음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316면)




115. 오늘날 인권은 일반적으로 인간주체들이 인간의 “존엄성”이나 존중의 필수불가결한 조건에 상응하는 삶을 서로 보장하기 위하여 서로간에 인정해야 하는 요구들로 이해할 수 있다. 이때 주된 관점은 모든 사람이 똑같이 인간적 실존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 사회적 공동생활에 대한 최소한의 도덕적 필요조건에 속한다는 점이다. (327면)




116. 그러나 서로 다른 접근법에도 불구하고 요즘에 와서는 적어도 자유주의적 자유권, 또 정치적 참여에 대한 권리, 마지막으로 이른바 사회적 권리가 그러한 권리에 속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이제 어떤 유형의 인권을 생각하고 있는가에 따라 이에 상응하는 의무이행의 일차적 담당자도 달라진다. 이 모든 권리는 그것의 상호주의적 성격 때문에 다른 모든 인간을 상대로 성립하며 따라서 그에 상응하여 개인적 의무를 야기한다고 할 수 있다. (327, 328면)




117. 공화주의가 거기서 시민적 참여에 대한 고대적 전범을 지향하면서 시민들이 공통의 관심사에 대한 상호주관적 협의를 자신들의 삶의 본질적 목적으로 세우는 것을 강조하는 데 비해, 절차주의는 민주적 의지형성의 과정을 활성화시키기 위해서는 시민들의 덕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정당화된 절차만을 필요로 한다고 고집한다. 따라서 공화주의가 민주적 공론장을 자주관리적 정치공동체의 매개로 자리매김하는 데 비해, 절차주의는 공론장을 사회가 정치적 문제들을 정당한 방식으로 합리적으로 해결하려고 시도할 때 도움을 주는 절차로 이해한다. (341면)




118. 정치적 공화주의가 처음부터 법적 규범들을 정치적 공동체가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사회적 수단으로 이해하려는 일정한 경향을 가질 수 밖에 없는데 반해, 절차주의적 신념에 따르면 기본권은 민주적 공론장과 정치행정 사이의 원활한 공동작업을 보장하는 장치로 이해될 수 있다. (342면)




119. 공화주의나 민주적 절차주의에서와는 달리 듀이는 확대된 민주주의 원리들을 정초하려는 자신의 시도에서 의사소통적 협의라는 모델이 아니라 사회적 협동이라는 모델을 지향하고 있다. (344면)




120. 듀이는 민주주의를 공동체적 협동의 반성적 형식으로 이해하고자 했기 때문에, 오늘날 민주주의이론에서 서로 대립적인 입장으로 나뉘어서 고찰되는 합리적 숙고라는 요소와 민주적 공동체라는 요소를 자신의 모델 안에 통합시켜낼 수 있었다는 것이 나의 핵심 주장이다. (344면)




121. 듀이는, 비록 그도 물론 아렌트나 하버마스처럼 개인주의적 자유이해를 비판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의사소통적 대화가 아니라 어떤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개별적인 힘을 협동적으로 투입하는 것을 모든 의사소통적 자유의 전형적인 발현으로 본다. 듀이는, 여기서는 일단 토크빌 보다는 마르크스의 전통을 따르면서, 그와 같은 자발적 협동이라는 이념에서 출발해서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이해에 대한 대안을 발전시키려고 한다. (348면)




122. 오늘날 자유주의자들과 공동체주의자들 간의 논쟁을 계속 연구해온 사람이라면 양 진영의 대표적 이론가들이 다음의 주요 논점에서 일치하는 것 같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즉 양 진영의 대표자들은 모두 포괄적 가치의 공유나 우리가 사회적 가치공동체, 혹은 좀 부드럽게 말해 문화적 삶의 양식이라고 부르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민주사회는 제대로 기능할 수 없다고 본다. 이러한 공통점을 토대로 할 때 양 진영은 이미 다음의 두 번째 논점에서도 어느 정도 함께 갈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인다. 즉 양 진영이 모두 민주사회의 문화적 성립조건을 중시하는 한, 그들이 추구하는 공동체개념은 자의적인 것이어서는 안 되며 반드시 규범적 특징을 가져야 gksemss 것이다. 오직 그러한 형식의 사회적 공동체 만이 상호주관적이며 연대적인 결합을 위한 토대를 마련할 수 있으며, 공동체의 원리를 문화적, 윤리적으로 구현하고 있는 자유민주사회의 규범적 조건에 합치될 수 있다. (397면)




123. 이를 하나의 공식에 의해 표현해 보면, 자유주의자들의 견지에서 볼 때 사회적 결합, 공동체화가 필요한 것은 그것이 민주사회를 위한 문화적 조건이기 때문이며, 반대로 공동체주의자의 견지에서 공동체화가 필요한 것은 그것이 개인의 자기실현을 위한 문화적 조건이기 때문이다. (398, 39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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