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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 선생님이 다시 찾은 우리 문화 유산 이야기 ㅣ 샘터 솔방울 인물
한상남 지음, 김동성 그림, 최완수 감수 / 샘터사 / 2005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1. 간송(전형필)은 이렇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우리 문화재를 수집 보호하기만 한다면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증명하고 문예 부흥의 근거를 마련해 둘 수 있으니, 일시 국권을 상실하고 강압으로 문화 전통이 단절된다 하더라도 크게 걱정할 것이 없다.’ (7면)
2. 청화백자철사진사국화문병(국보 294호)! ... 손에 땀을 쥐게 했던 이 날의 사건은 실로 역사에 기억될 우리 문화재 수호의 현장이기도 했습니다. (31면)
3. 그 무렵 형필에게는 또 하나의 남다른 취미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짬짬이 서점을 돌아다니며 마음에 드는 책을 사 모으는 일이었습니다. 형필은 새로 선보이는 책에도 관심을 가졌지만, 옛 선비들의 손때가 묻은 책에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간혹 내용이 흥미로운 것도 아닐지라도 책의 모양이 색다른 것도 사곤 했습니다. ... 이렇게 해서 휘문고보 시절에 그의 서재에는 이미 꽤 많은 값진 책이 꽂히게 되었습니다. (37, 38면)
4. “인간과 짐승을 가장 두드러지게 구분해 주는 것이 바로 문화라는 것이야. ...” (48면)
5. 그의 뒤에 당대 최고의 감식안을 지닌 위창(오세창)이 있다는 것은 든든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었습니다. (53면)
6. 사실 골동품이란 정해진 값이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대단한 물건이 헐값에 거래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특히 물건의 주인이 그 값어치를 잘 모를 때에는 좋은 물건이 길에서 줍듯이 들어오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61면)
7. 간송이 한남서림을 통해서 찾아낸 문화 유물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습니다. 추사 김정희,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오원 장승업 등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작가들의 수많은 작품들은 물론,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뛰어난 자기들을 수집해 들였던 것입니다. 1936년, 간송은 조선시대 풍속화의 대가인 혜원 신윤복의 화첩, ‘혜원전신첩(국보 135호)’을 찾아냈습니다. 신윤복의 생생한 풍속도 30폭이 담긴 화첩이었습니다. (63면)
8. 그도 그럴 것이 간송은 나라를 빼앗긴 설움을 안은 채, 오로지 민족의 문화유산 수집에 온 힘을 쏟고 있는 터였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문화재를 지키는 일은 다른 사람들처럼 단순히 호사스러운 취미나 개인적인 만족감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항일투쟁이었습니다. (72면)
9. 하마터면 일본인 수장가의 손에 넘어갈 뻔한 이 매병은 훗날 고려청자의 최고품이라는 찬사 속에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이라는 이름으로 국보 제68호로 지정되었습니다. (77면)
10. 간송은 물건 하나하나를 확인하면서 북받치는 감격에 몸을 떨었습니다. 그 중에는 개스비의 손으로 넘어갔다는 말을 듣고 안타까워하며 탄식했던 청자정병과 백자 향로도 있었습니다. 이들이 훗날 국보로 지정된 청자상감유죽연로원앙문정병(국보 66호)과 백자박산향로(보물 238호)입니다. 그 외에도 청자기린뉴개향로(국보 65호)며 청자압형수적(국보 74호) 등 간송의 눈을 번쩍 띄게 만든 물건이 여러 점 있었습니다. (90면)
11. 미술관의 이름은 ‘보화각’이라고 지었습니다. 1936년 여름, 우리 나라 최초의 사립 미술관인 보화각의 상량식을 치렀습니다. (100면)
12. 이렇게 해서 한 일본인의 야욕 때문에 바다를 건너갔던 경천사십층석탑은 다행히 다시 고국에 돌아왔습니다. (106면)
13. 이순황이 답답하다는 듯 재촉했습니다. “훈민정음 원본이 나타났답니다.” 순간, 간송은 숨이 멈는 듯한 느낌에 천천히 깊은 숨을 내쉬었습니다. (116면)
14. 스무 살 남짓한 나이에 우리 나라 고미술품에 뛰어난 안목과 애정을 지닌 위창 오세창과의 운명적인 만남을 계기로, 일찍이 우리 문화유산의 지킴이가 될 뜻을 세웠던 간송 전형필! 간송은 아마도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께 맡기겠습니다.” (15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