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세계
막스 피카르트 지음, 최승자 옮김 / 까치 / 2001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1. 고백을 해야 할까?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를 처음 읽게 되었을 때 내가 당황했다는 것을. 책을 펼치기만 하면 그 어디에서나 우리는 피카르트가 침묵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을. 그것도 극히 강렬하게 그러나 경외심을 가지고 말하고 있는 것을. 나는 처음에는 그가 이야기하는 침묵이 그 무엇의 단순한 결핍이 아니라 능동적인 그 무엇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카르트의 '침묵의 세계'는 그가 이 책을 착상했을 때 그의 영혼 속에서 울렸던 것과 꼭 같은, 아니 거의 같은 현을 지금 이 시간 내 영혼 속에서 울리고 있다. (가브리엘 마르셀, 7면)

 

2. 침묵이란 그저 인간이 말하기를 그만둠으로써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침묵은 단순한 말의 포기 그 이상의 것이며, 단순히 자기 마음에 들면 스스로 옮아갈 수 있는 어떤 상태 그 이상의 것이다. 말이 그치는 곳에서 침묵은 시작한다. 그러나 말이 그치기 때문에 침묵이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그때 비로소 분명해진다는 것뿐이다. (15면)

 

3. 침묵은 결코 수동적인 것이 아니며 단순하게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며, 침묵은 능동적인 것이고 독자적인 완전한 세계이다. 침묵은 그야말로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 때문에 위대하다. (17면)

 

4. 침묵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인간은 침묵에 의해서 관찰당한다. 인간이 침묵을 관찰한다기보다는 침묵이 인간을 관찰한다. 인간은 침묵을 시험하지 않지만, 침묵은 인간을 시험한다. (17면)

 

5. 다른 큰 현상들 모두가 효용의 세계에 병합되었다. ... 그리하여 그것들은 단지 이 효용의 세계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한에서만 인식될 뿐이다. 그것들은 더 이상 독자적인 존재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침묵은 효용의 세계 외부에 위치한다. 침묵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고 침묵으로부터는 진정한 의미에서 아무 것도 생기지 않는다. 침묵은 비생산적이다. 그때문에 가치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용한 모든 것들보다는 침묵에서 더 많은 도움과 치유력이 나온다. (19면)

 

6. 모든 것이 또다시 처음부터 시작될 수 있고, 모든 것이 다시 새로 창조될 수 있다. 어느 순간에나 인간은 침묵을 통해서 시원적인 것의 곁에 있을 수 있다. 침묵과 결합하면 인간은 침묵의 원초성뿐만 아니라 모든 것의 원초성에 참여하게 된다. (22면)

 

7. 따라서 말은 본질적으로 침묵과 연관되어 있다.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할 때에야 비로소 그는 말이 이제는 침묵이 아니라 인간에 속해 있다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그것을 그는 다른 사람이라는 대자를 통해서 체험한다. 대자를 통해서 처음으로 말은 이제는 침묵이 아니라 완전히 인간에게 속하게 된다. 그러나 두 사람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자리에는 언제나 제삼자가 있다. 즉 침묵이 귀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말들이 대화를 나누고 두 사람의 좁은 공간 속에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말들이 먼곳으로부터, 침묵이 귀기울이고 있는 그곳으로부터 온다는 것이 그 대화를 폭넓게 만들어주며,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말은 더 한층 충만하게 된다. (24면)

 

8. 침묵은 말이 없어도 존재할 수 있지만, 말은 침묵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말에게 침묵이라는 배경이 없다면, 말은 아무런 깊이도 가지지 못한다. 그렇기는 하지만 침묵이 언어보다 우월한 것은 아니다. (28면)

 

9. 침묵으로부터 말이 나온다는 것, 그것에 의하여 침묵은 비로소 완성된다. 침묵은 말을 통해서 비로소 그 의미와 진정한 가치를 얻게 된다. (28면)

 

10. 말은 침묵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말을 통해서만 진리가 그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침묵 속에도 역시 진리가 있기는 하지만, 그 속에 진리가 있다는 것은 침묵의 경우에는 말의 경우만큼 특징적인 것이 되지 못한다. (31면)

 

11. 그러나 진리에서 본질적인 점은 진리는 어떤 개별자처럼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한 체계 속에 연관되어 있다는 점이다. (32면)

 

12. 미는 또한 침묵 속에도 있다. ... 미는 침묵을 느슨하고 유동적인 것으로 만든다. (34면)

 

13. "인간은 자신의 생애에서 오직 한 번 죽는다. 그리고 죽음의 체험이 없기 때문에 죽음에 실패한다. 죽음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이미 죽음에 임했던 경험 많은 사람들의 지침에 따라서 죽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이러한 죽음의 체험은 금욕이 준다." (플로렌스키)

 

14. 말은 다시 침묵 속으로 가라앉는다. 말은 망각될 수 있다. 말에 망각이 있는 것 역시 말이 지나치게 강하게 존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인 것 같다. 말의 침묵에 대한 우월권이 그 때문에 완화되는 것이다. (42, 43면)

 

15. 인간이 침묵하고 있다는 것은 주관적으로가 아니라 현상학적으로, 저 언어의 창조행위가 임박했을 때의 상태 속에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한 인간이 침묵하고 있을 때, 그는 최초로 언어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의 모습으로 눈 앞에 서 있는 것이다. (47면)

 

16. "언어란 나의 깊은 확신에 의하면, 직접적으로 인간 내부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이 어떤 단 하나의 말을 단순히 물질적 자극으로서가 아니라, 명확하게 발음된 하나의 개념을 표현하는 소리로서 이해할 수 있기 위해서는  언어는 완전하게 그리고 연관을 가지고 인간 내부에 자리잡고 있어야 한다." (훔볼트) (55면)

 

17. 고대의 언어는 방사형으로 세워져 있다. 언제나 한 중심으로부터 시작하여 - 그 중심은 침묵이다 - 다시 그 중시믕로 되돌아간다. ... "현대의 저술들 속의 사상은 똑바로 앞으로 걸어가는 사람의 움직임에서 생기는 것처럼 보인다. 그와는 달리 고대의 저술들 속의 사상은 날면서 원을 그리며 앞으로 나아가는 한 새의 움직임으로부터 생기는 것처럼 보인다." (쥬베르) (57면)

 

18. 예전의 언어에는 소심함과 강력함이 혼합되어 있다. (57면)

 

19. 고대의 언어에서 말은 다만 침묵의 중간일 뿐이었다. 모든 말들은 그 가장자리가 침묵에 둘러싸여 있다. ... 말은 침묵이 자신에게 주는 한계에 의해서 형상화되고 그 형태를 얻는다. (59면)

 

20. "위대한 문체 속에서는 침묵이 대개 중요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타키루스의 문체 속에는 침묵이 지배적이다. ..." (에르네스트 헬로) (59면)

 

21. 그러한 인간은 안정(Ruhe) 속에서 경직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안정은 이때에는 침묵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64면)

 

22. 인간은 오직 과장되는 것만이 뚜렷하게 지각하는 까닭에 과장하는 것이다. 눈에 뛰지 않게 존재하는 현상들은 오늘날에는 아무런 가치도 없으며, 그것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과장으로 인해서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다. (74면)

 

23. 사물들의 존재성, 존재적인 것은 침묵에 의해서 강화된다. 발전성은 침묵의 세계와는 멀다. 발전성은 침묵에 대항하지 못하고 침묵에 대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77면)

 

24. "처음 약 10세기 동안 역사는 지극히 억제된 속도로 천천히 흐르는 듯했지만, 그 이후부터 역사의 속도는 눈에 띄게 빨라진다. 그 이후부터 역사는 분명히 우리가 한결같이 가속적이라고 부르고 싶을 만한 보폭을 취한다." (자크 피카르, 속도의 단계에 대하여) (82면)

 

25. 태초적 인간들이 역사라는 것에 집착하지 않은 것은 아마도 그 때문일 것이다. 즉 태초에는 침묵이 훨씬 더 강력한 모습으로 인간 앞에 서 있었고, 모든 사건들은 침묵에서 나와서 다시 침묵으로 되돌아갔던 것이다. 사건의 역사란 전혀 존재하지 않았고, 오직 침묵만이 존재했다. (82, 83면)

 

26. "인간들 사이에서 폭력과 증오와 범죄가 행해져서는 안된다는 가르침을 더 이상 믿지 않았던 까닭에, 그것을 전쟁이라는 사실을 통해서 인간에게 실증해보였던 것이다." (피카르트, 우리 속의 히틀러) (88면)

 

27. 사랑하는 사람들의 말은 침묵을 증가시킨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말 가운데서는 침묵이 커져간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말은 다만 침묵이 귀로 들릴 수 있도록 이바지할 뿐이다. 말함으로써 침묵을 증가시키는 것, 그것은 오직 사랑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다른 현상들은 모두가 침묵으로 먹고살며 침묵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얻는다. 그런데 사랑만은 침묵에게 무엇인가를 주는 것이다. (94면)

 

28. "인간의 외면(인간의 형상)이 그다지 화려하지 않은 것은 실은 그 내부를 위해서 비상하게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괴테) (108면)

 

29. 봄은 겨울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봄은 침묵으로부터 온다. 또한 침묵으로부터 겨울이 그리고 여름과 가을이 온다. (111면)

 

30. 사물들의 의미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침묵의 뜻에 대해서 공통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127면)

 

31. 시는 침묵으로부터 나오며 또한 침묵을 동경한다. (143면)

 

32. 독백은 실은 침묵과의 대화이다. (144면)

 

33. "참으로 주목할 만한 점은 사람들이 별로 기대하지 않는 한 사람이 때로는 자신이 놀랄 만큼 지혜로우며 분별력이 있다고 여기는 다른 한 사람에게 어떤 교훈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175면)

 

34. 아무도 말하는 사람에게 귀기울이지 않는다. 귀기울이는 것은 인간 속에 침묵이 존재할 때에만 가능하고, 귀기울이는 것과 침묵하는 것은 서로 하나를 이루고 있다. (177면)

 

35. 라디오에는 더 이상의 침묵도, 말도 없다. ... 라디오가 침묵의 모든 영역을 점령했다. ... (198면)

 

36. 건강했을 적에는 그 자신이 결코 이루지 못했던 것, 즉 침묵으로부터 말이 나오는 것을 비상한 일로서 체험하는 일을 이제는 마침내 병을 통해서 이룰 수 있게 되었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218면)

 

37. 인간은 침묵을 잃어버렸다는 것조차도 결코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이전에 침묵이 있었던 곳도 이제는 사물들이 빼곡이 차 있어서 빈 자리가 없다. 예전에는 침묵이 한 사물 위에 놓여 있었지만, 이제는 한 사물이 다른 한 사물 위에 놓여 있다. 예전에는 사상은 침묵에 덮혀 있었는데, 이제는 수천 가지 연상들이 그 사상에 밀려들어 그것을 파묻혀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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