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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 인생론 ㅣ 범우고전선 14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지음, 최현 옮김 / 범우사 / 1991년 2월
평점 :
품절
1. 내가 제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은 거의 모든 형이상학이 우리에게 해악을 주는 것을 소극적으로 작용하는 양 설명하는 점이다. 사실은 이와 정반대이다. 즉, 우리에게 해롭고 악한 것만이 그대로 실감있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것만이 적극성을 띠고 우리에게 작용한다. (12면)
2. 삶의 괴로움에 더욱 박차를 가하는 것은 시간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얼른 지나가 버리는 시간에 쫓겨 좀처럼 숨을 돌릴 여유를 가질 수 없다. 시간은 형무관처럼 우리의 등뒤에서 회초리를 들고 서 있다. 그리고 시간은 권태라는 이름의 병에 걸린 사람들에게는 고통을 안겨 준다. (13, 14면)
3. 세상에 충만해 있는 고통은 세계가 전지전능한 신에 의해 창조된 완전한 것이라는 주장이 옳지 않음을 증명하고 있다. (18면)
4. 인간은 생애의 전반부는 행복에 대한 갈망으로 차 있지만, 후반부에 와서는 일종의 참혹한 공포에 사로잡히게 마련이다. 즉, 이 후반부에 접어들면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모든 행복이 망상의 산물에 불과하며, 괴로움만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현명한 사람들은 누구나 향락이 있기보다는 오히려 고통이 없기를 바라며, 다가오는 재해를 약간이라도 막아보려고 노력한다. (21면)
5. 인간의 생애란 제일 행복한 경우라고 해야 단지 견디기 쉬울 정도의 불행과 비교적 가벼운 고통 속에 사는 것뿐이며, 걸핏하면 거기에 권태라는 고통이 대치된다. 그리고 다음에 하는 일은 인간을 생식하며 판에 박힌 생활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26면)
6. 궁핍은 하류층의 끊임없는 채찍이며 권태는 상류층의 채찍이다. (27면)
7. 우리의 생활은 마치 시계추처럼 번뇌와 권태 사이를 왔다 갔다 하고 있다. (27면)
8. 우리는 욕구와 소망은 갈증의 경우처럼 느끼지만, 바라던 것을 실제로 손에 넣게 되면 그것의 매력은 갑자기 사라져 버린다. 마치 입안에 들어 있는 음식물은 삼키자마자 아무 맛도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과 같다. 인생의 3대 선인 건강과 청춘과 자유도 그것을 소유하고 있는 동안은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다가, 그것을 일단 잃은 후에야 비로소 느끼게 된다. 이 세 가지 것도 소극적인 선이기 때문이다. 행복한 나날을 보낼 때에도 그 행복을 별로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가 그것이 과거의 일이 되어 버리고, 대신 불행이 찾아오면 그제서야 그것을 상기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향략을 많이 누릴수록 거기에 대한 감각은 감퇴되어, 어떤 쾌락도 습관이 되면 아무것도 아니게 될 뿐더라 오히려 그 쾌락 때문에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 증대되는 것이다. 그리고 쾌락에 젖어 살던 모든 습관이 제거되면, 거기 남는 것은 괴로움뿐이다. 시간은 즐겁고 재미있게 보낼수록 빨리 지나가 버리고 슬픔에 빠져 있을수록 더디 가는 법이다. 적극적인 것은 환락이 아니라 고통이다. 고통이 생길 때에만 직접적인 실감을 느끼니 말이다. (29면)
9. 권태는 우리에게 시간을 의식하게 하고, 유흥은 우리에게서 시간관념을 제거한다. (29면)
10. 고귀한 생물일수록 더욱 불만을 느낀다. (35면)
11. 인간에게는 쾌락보다는 고통의 분량이 훨씬 많으며, 더구나 이것은 인간이 죽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몇 갑절 증대한다. 동물은 본능적으로 죽음을 피하려고 할 뿐, 죽음이 무엇인지 모르며, 따라서 마음속에 떠오르지도 않는다. 인간은 항상 죽음을 내다보고 있다. (39면)
12. “용서는 모든 인간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우리는 인간의 모든 어리석음과 과오와 해악에 대하여 너그러워야 하며, 우리의 눈으로 보고 있는 이런 현상들은 실상 우리 자신이 지니고 있는 우매요, 죄과요, 또한 사악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 있는 이런 인간적인 결함은 우리가 공유하고 있으며, 우리가 현재 분개를 금치 못하는 타인의 악 역시 우리 자신 속에 깃들어 있다. 다만 그것이 현재 드러나지 않고 속에 깊숙이 숨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어떤 유인만 생기면 타인이 저지르는 죄악과 마찬가지로 외부에 드러나게 마련이다. (45면)
13. 사실상 시간은 공간과 함께 참된 모든 형이상학의 근거이며 ... (47면)
14. 이렇게 볼 때, 우리는 현재를 즐기고 그것을 생존의 목적으로 삼는 것이 가장 현명한 처세법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오직 현재만이 실재하며, 그밖의 모든 것은 다만 머릿속에 간직된 표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가장 못난 처세법이라고 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바로 다음 순간에 무가 되어 꿈과 같이 송두리째 없어지는 것이라면, 그것은 결코 진심으로 추구할 아무 가치도 없기 때문이다. (48면)
15. 유한한 존재란 이런 것이지만, 우리는 이와 대조적인 입장에서 무한한 존재를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외부로부터의 침해를 받지 않고 또 그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따라서 영원한 안주 속에 변치 않고 다양하거나 이채롭지도 않다. 그리고 그 소극적인 인식은 플라톤 철학의 토대가 되어 있다. 이런 존재에 이르는 길은 살려놓은 의지를 포기함으로써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다. (49, 50면)
16. 죽음이 반드시 찾아온다는 것은, 인간이 오직 하나의 현상이고, ‘물자체’가 아니라는 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만일 인간이 ‘물자체’라면 결코 사멸하는 일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53면)
17. 시간은 우리의 머리 속에 있는 하나의 틀이며 이것이 있기 때문에 사물과 우리 자신의 공허한 존재가 지속되며 실재라는 가면을 쓰고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54면)
18. 시간에 대한 인식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모든 사물이 허망하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54면)
19. 이런 사실을 두고 보더라도, 대체로 궁핍과 고뇌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얼마나 필요한가를 인식한 사람은 남들이 행복하기 때문에 부러워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가 불행하기 때문에 부러워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68면)
20. 현상의 세계에는 하나의 ‘살려는 의지’가 움직이고 있을 뿐이며 ... (71면)
21. 성욕이 개인의 의식에 분명한 윤곽을 드러내지 않고 희미하게 나타나면, 그것은 모든 현상 밖에 있는 살려는 의지 자체이다. ...애인에 대한 찬양은 아무리 이상적으로 이지적인 것으로 보이더라도 그 최종 목적은 어디까지나 오직 일정한 성격과 형태를 지닌 존재를 만들어 내려는 데 있다. 그 증거는, 연예가 결코 서로의 애정만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살을 섞는 중대한 일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78면)
22. 그 중에서도 여자의 마음을 가장 끄는 것은 굳은 의지와 과감한 용기, 그리고 정직하고 선량한 마음씨이다. (93면)
23. 인간이 결혼생활에서 원하는 것은 결코 재치있는 대화가 아니다. 그것은 자식을 낳는 일이며, 마음의 결합이지 두뇌의 결합은 아니다. (93면)
24. 성격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누구나 자기와 반대되는 성격을 가진 이성을 선택하려고 하며, 그 구애의 열의는 자기가 갖고 있는 성격의 강도에 비례한다. (97면)
25. 나로서는 부인을 진정으로 찬미한 것은 이보다는 존(프랑스 문학자)의 몇 마디 말에 잘나타나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에 부인이 없다면, 우리는 생애의 기초에 도움을 받을 수 없고, 중간에 즐거움을 누릴 수 없으며 종말에 가서 위로를 얻을 수 없게 될 것이다.” (115면)
26. 바이런도 그 ‘사르다나팔루스’의 제1, 2막에 같은 의미의 말로 한결 감상적으로 아래와 같이 표현하고 있다. “인간의 생애는 여자의 가슴에서 시작한다. 당신이 세상에서 제일 처음으로 지껄인 말은, 여자의 입을 통해 가르침을 받았으며, 당신이 세상에서 제일 처음에 흘린 눈물은 여자가 손으로 닦아주었고, 당신에 세상에서 맨 나중에 숨결을 거두는 것은 한 여자의 곁에서이다. 사나이는 자기를 지배한 자가 임종 때에 옆에 앉아 있는 것을 꺼려, 가까이하려고 하지 않는다.” (115면)
27. 그들 남성을 여기까지 불러들이기 위해서는 다만 이성적인 사려를 촉구하는 것만으로는 안 되며, 역시 성욕이라는 본능으로 유인해야 하는 것이다. (117면)
28. 남자의 이성과 정신력이 성숙되는 것은 28세에 도달할 무렵이지만, 여자는 18세쯤이다. 그런데 이와 같이 조숙한 여성의 이성은 명색만 이성일 뿐 사실은 매우 열등한 것이다. 그러므로 여자는 한평생 어린애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언제나 눈앞의 것만 보고, 현재에만 집착하며, 사물의 외모와 실상을 곧잘 오인하여 중대한 일보다 사소한 일에 얽매인다. (117, 118면)
29. 여자들에게는 모든 지위의 차이가 남자보다 훨씬 유동적이고, 한결 빨리 변하며 - 우리가 수십가지 우열이라는 저울에 얹혀 있지만 그녀들은 오직 한 가지 점, 즉 어떤 남자의 사랑을 받고 있느냐 하는 차이밖에 없다. - 또 한가지는 여자들은 거의가 가사에 종사하여 남성들의 경우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피차에 비슷한 처지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들에게는 신분의 차이를 더욱 내세우려는 경향이 있다. (122면)
30. 대체로 말하면, 아동이 인생에 대한 지식을 습득할 경우에 중요한 것은, 원전에서 직접 배우게 하며, 결코 사본에서 배우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육자는 그들에게 책을 읽히기를 서두르지 말고, 순서에 따라 차츰 사물과 인간의 관계를 알게 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들에게 사물을 올바로 이해하는 버릇을 붙이게 하는 일이다. 그들이 언제나 개념을 세계에서 직접 끄집어내고, 현실에 의거하여 개념을 파악하도록 지도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관념을 그밖의 다른 방편, 즉 책의 이론이나 소설, 남의 이야기 등에서 빌어다가 그것을 고정된 것으로 현실에 적용하면 공허한 생각으로 가득찬 머리는 눈 앞의 현실을 잘못 이해하거나, 자신의 망상에 따라 현실을 개조해 보려고 헛되이 노력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오는 그릇된 이론으로 말미암아 실천에서 미궁에 빠지게 된다. (136, 137면)
31. 모든 욕망은 필요와 결핍과 빈고에서 생긴다. 그리하여 우리가 그 욕망을 충족시키면, 그것을 가라앉힐 수 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한 가지 욕망이 채워진 반면에 충족을 느끼지 못하는 욕망이 얼마나 많은가! 게다가 욕망은 오래 계속되고 욕구는 무한히 전개되는 반면에, 향락을 누리는 기간은 짧고 그 분양이 적다. (150면)
32. 덕은 천재와 마찬가지로 가르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며, 우리가 덕에 대해 생각하더라도 실제 덕을 실천에 옮기게 되는 것이 아니다. 예술의 기법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단지 도구로서의 역할밖에 하지 못한다. 도덕적인 주장이나 윤리학의 덕스러운 인간과 고결한 인간 또는 성스러운 인간을 만들 수 있으리라고 믿는 것은, 마치 미학이 시인이나, 조각가, 화가, 음악가를 낳는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어리석인 일이다. (172면)
33. 양심의 1/5은 타인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하며, 1/5은 종교적인 거리낌에서, 1/5은 선입관에서 오는 공포, 1/5은 허영에서 생기는 꺼림칙함, 1/5은 관습상의 불안에서 비롯된다. (176면)
34. 추상적인 원칙이나 이성은 도덕의 첫째 가는 본원이다. 기초가 되어 있지 않지만, 도덕으로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즉, 원칙이나 이성은 모든 도덕의 원천에서 흘러나온 것을 모아둔 저수지이다. (176면)
35. 우리는 구원에 있어서 불행과 궁핍이 얼마나 필요한가를 안다면 남의 행복을 부러워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불행을 부러워해야 할 것이다. (184면)
36. 자살자의 대부분은 역시 삶을 원하며, 단지 자기에게 주어진 조건에 절망하고 있을 뿐이다. (185면)
37. 낙천주의는 인생은 하나의 이상적인 것으로 보고, 인생의 목적은 인간의 행복을 누리는 데 있다고 가르친다. 그리하여 모든 인간은 자신의 행복과 환락에 대하여 가장 적합한 청구권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며,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것을 손에 넣지 못하며 자기는 고약한 운명의 농간으로 말미암아 삶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참된 인생관에 의하면, 인간의 생존은 노고와 궁핍, 불행, 고뇌, 그리고 마침내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그 진상이며 바라문교나 불교, 또 진정한 기독교는 다 이렇게 보고 있는 것이다. (192면)
38. 인도인의 윤리에는 바라문경과 시편과 처세도와 격언 속에 여러 가지 형태로 주장되어 있는데, 특히 강조하는 것은 ‘나’를 버리고 이웃을 사랑할 것,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물을 사랑할 것, 자비를 위해서는 피땀을 흘려 얻은 하루하루의 소득까지도 내던질 것, 자기를 괴롭히는 자에게 끊임없는 온정과 인내를 베풀 것, 남이 자기를 아무리 해치더라도 호의와 사랑으로 대할 것, 남의 모든 부정을 기꺼이 용서할 것, 일체의 육식을 금할 것, 그리고 참된 거룩한 경지에 도달하려는 자는 순결한 동정을 지켜 모든 향락을 멀리할 것, 모든 재물을 천시할 것, 집과 모든 소유물을 버릴 것, 깊은 고독에 잠겨 정관과 회오와 의지를 소멸하기 위해 꾸준한 소행으로 밤과 낮을 보내고 마침내 굶어 악어의 밥이 되거나 혹은 히말라야 산정에서 몸을 던지고 혹은 성행을 마친 자로서 자기 자신을 땅속에 생매장하거나 또는 군중들의 환호와 무기의 춤과 찬가 속에 지나가는 거대한 꽃상여에 치여 죽은 것 등이다. (192, 193면)
39. 인간의 속을 들여다보면 결국 야수요 맹수다. 우리는 문명에 젖은 인간에 대해서만 알고 있지만, 그들도 기회만 있으면 야수성을 발휘하는 것을 보면 새삼 소름이 끼친다. 국법의 사슬이 풀려 무정부 상태가 돌발하면 인간이 무엇인가를 잘 드러낼 것이다. (201면)
40. 직업이란 하나의 가명에 불과하며, 거의 모든 직업에 돈벌이꾼들이 숨어 있다. 그들은 누구나 자기가 제일 잘난 듯이 보이려고, 어떤 자는 변호사가 되어 정의와 권리의 가면을 쓰고, 어떤 사람은 성직자가 되어 종교의 가면을 쓰고 있다. 그리고 자선이니 뭐니 하는 가면 아래 숨겨 둔 남모를 의도는 여러 가지이지만, 심지어 철학이라는 가면 아래에도 으레 두셋은 숨겨져 있다. 다만 여성용 가면만은 얼마되지 않아 그 대부분은 정조를 지키고 선량하고 얌전하고 상냥하다. (206면)
41. 의사의 눈에는 어디나 병자가 우글거리며, 법관의 눈에는 곳곳이 악의 투성이요, 신학자의 눈에는 언제나 죄가 득실거리게 마련이다. (206면)
42. 개는 주인이 귀여워하면 주인을 우습게 아는데, 인간에게도 이런 경향이 있다. (208면)
43. 허영심과 자만심의 다른 점은 후자가 남보다 우월하다는 확신에 대하여, 전자는 이런 확신을 남들에게 일으키려는 욕구이다. 거기에는 이렇게 해서 스스로 자기를 우월자로 자부하고 싶어하는 은밀한 기대도 섞여 있다. (209면)
44. 허영심은 인간을 수다스럽게 만들고 자만심은 침묵하게 만든다. 그러나 허영심이 강한 사람은 다음과 같은 이치를 잘 분별해야 한다. 즉 그가 바라는 남들의 존중은 수다보다 계속적인 침묵에 의해 더 많이 얻을 수 있으며, 자기가 설사 큰소리를 칠 수 있는 경우라 하더라도 입을 다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210면)
45. 그리고 자만의 최대의 적이요, 최대의 장애인 허영은 먼저 남의 찬양을 토대로 하여 자기가 높은 평가를 얻으려는 반면에 자만은 그 평가가 확정된 것이라고 간주하고 있다. 자만을 비난하고 공격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들은 아마도 자기자신 속에 자부할 만한 것을 아무것ㅅ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210면)
46. 나의 저작은 정직과 공명을 이마에 써 붙이고 쓴 것이므로, 칸트 이후 유명해진 궤변가 세 사람의 저작과는 전혀 다르다. 나의 입장은 언제나 사려, 즉 이성에 따르고 정직한 말로일관되어 있으며, 지적 지관이니 절대사유니 하는 허풍이나 사기와 같은 인스프레이션의 입장에 서 있지 않다. 나는 언제나 그러한 정신으로 탐구했으나, 한편으로는 거짓과 사악이 널리 퍼지고 허풍(피히테와 쉘링)이나 사기(헤겔)이 크게 존경받는 것을 보고 현대인의 갈채를 단념했다. (해설, 23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