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6
헤르만 헤세 지음, 임홍배 옮김 / 민음사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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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군계일학처럼 외로운 존재였던 나르치스는 골드문트가 모든 면에서 자기와 상반된 존재인 듯하면서도 닮은 데가 있다는 것을 직관으로 알았다. 나르치스가 어두운 성격에 깡마른 체격이었다면 골드문트는 눈부시게 화사한 존재였다. 또 나르치스가 사변가요 분석가였다면 골드문트는 몽상가로서 어린아이처럼 순진한 영혼의 소유자로 보였다. 그렇지만 두 사람 사이의 그러한 대립적 측면보다는 공통점이 더 컸다. (31면)




2. 처음에는 사색가인 나르치스가 너무 힘들어했다. 그에겐 모든 것이 정신의 문제였으며, 심지어 사랑조차도 그러했다. 그는 정신적 사고를 거치지 않은 채 어떤 매력에 빠져든다는 것에 도무지 익숙치 않았다. 둘 사이의 우정에서 그는 주도적인 지성의 역할을 맡았으며, 오래도록 그런 상태로 고립되어 있었다. ... 그 반면 골드문트는 마치 놀이에 빠져들 듯이 이 새로운 생활에 자신을 내맡겼다. 그것을 잘 아는 나르치스는 책임감을 느끼며 이 숭고한 운명을 받아들였다. (47, 48면)




3. 모름지기 우리의 우정에는 네가 얼마나 완벽하게 나와는 다른 존재인가를 너한테 보여주는 것 말고는 다른 어떤 목표도 의미가 없어. (57면)




4. 그가 마음 속 깊이 좋아한 것은 학문이나 어학이나 논리가 아니었다. 그것들도 나름의 매력은 있었지만 그가 정작 좋아한 것은 미사 의식 때에 직접 보고 들을 수 있는 형상과 소리의 세계였다. (64면)




5. 바로 그거야. 핵심을 찌르는 말이야. 사실 너한테는 차이라는 것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지만, 나에게는 오직 차이만이 중요한 것 같아. 나는 본성상 학자이고 내 소명은 학문이야. 그런데 학문이라는 것은 네 말을 빌리자면 ‘차이를 찾아내겠다는 집념’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지. 학문의 본질을 이보다 더 훌륭하게 정의하기도 힘들거야. 나처럼 학문을 하는 사람한테는 다양성을 확인하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어. 학문이란 분류술이라고도 할 수 있지.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여타의 사람들과 구별되는 특징이 무엇인가를 찾아내면 곧 그 사람을 안다고 말하거든. (68면)




6. 요컨대 너 같은 학자들은 오만해. 우리 같은 사람들을 늘 우매하다고 여기거든. 온갖 학문을 끌어대지 않고도 얼마든지 현명할 수 있는데도 말이야. (69면)




7.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우리는 가까워질 수 없어. 마치 해와 달, 바다와 육지가 가까워질 수 없듯이 말이야. 이봐, 우리 두 사람은 해와 달, 바다와 육지처럼 떨어져 있는 거야. 우리의 목표는 상대방의 세계로 넘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인식하는 거야.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지켜보고 존중해야 한단 말이야. 그렇게 해서 서로가 대립하면서도 보완하는 관계가 성립되는 것이지. (70면)




8. 말했다시피 깨어 있는 상태에서는 내가 너보다 더 강해. 그런 면에서는 너보다 우월하고 너에게 도움을 줄 수 있어. 하지만 다른 모든 면에서는 네가 나보다 더 우월해. 아니, 스스로 네 자신을 발견하기만 한다면 나보다 우월해질 거야. (73면)




9. 너 같은 기질의 사람들, 그러니까 강렬하고도 섬세한 감성을 지녀서 영혼으로 느낄 수 있는 몽상가나 시인들, 혹은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우리 같은 정신적 인간보다는 거의 예외없이 더 우월한 존재라고 할 수 있지. 그런 사람들은 말하자면 모성의 풍요로움을 타고난 존재들이야. 그들의 삶은 충만해 있고, 사랑의 힘과 체험의 능력을 부여받은 존재들이지. 그 반면 우리 같은 정신적 인간들은 너 같은 사람들을 곧잘 이끌어가고 다스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충만된 삶을 전혀 모르고 메마른 삶을 살게 마련이야. 과일의 단물처럼 넘쳐흐르는 삶의 풍요로움, 사랑의 정원과 예술의 땅은 너희들의 것이지. 너희들의 고향이 대지라면 우리네의 고향은 이념이야. 너희들이 감각의 세계에 익사할 위험이 있다면 우리는 진공 상태의 대기에서 질식할 위험에 처해 있지. 너는 예술가고 나는 사상가야. 네가 어머니의 품에 잠들어 있다면 나는 황야에서 깨어 있는 셈이지. 나에겐 태양이 비치지만 너에겐 달과 별이 비치고, 네가 소녀를 그리워한다면 나는 소년을 그리워해.... (74면)




10. 내 생각에는 길가에 피어있는 꽃 한 송이나 기어다니는 작은 벌레 한 마리가 도서관을 가득 채운 모든 책들보다도 더 많은 것을 말하고 더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지 않을까 싶어. (101면)




11. 골드문트의 마음속에서는 그 무엇도 삶 자체만큼 생생한 현실성을 갖지 못했다. 그에게는 심장의 불안한 고동, 가슴아픈 그리움, 꿈속의 기쁨과 불안들이 곧 삶이었다. (114면)




12. 자연을 아는 것도 학문의 일부이니까. 고지식하게 문법만 따진다고 되는 게 아니거든. (116면)




13. 신음하고 있는 여인의 찡그린 얼굴에 나타난 여러 갈래의 표정은 그가 사랑의 절정에 도달한 순간에 다른 여자들의 얼굴에서 보았던 그것과 거의 구별되지 않았던 것이다! ... 고통과 쾌락이 마치 자매지간처럼 서로 비슷할 수 있다는 깨달음이 놀라왔던 것이다. (205면)




14. 그런데 우리가 예술가로서 어떤 형상을 창조하거나 사상가로서 어떤 법칙을 탐구하고 생각을 정리할 때면 우리는 그 무엇인가를 거대한 죽음의 무도로부터 구해 내려고 애쓴다. 우리 자신보다도 더 오래 지속될 무엇인가를 세우기 위해 애쓰는 것이다. (245면)




15. 그런데 골드문트가 학자로서는 자질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그의 마음속에 잃어버린 어머니의 모습을 생생히 되살려낸 사람은 학자인 나르치스 바로 그였다. 그리하여 공부와 수도승 생활과 덕성을 쌓는 대신에 그의 본성에서 솟구치는 막강한 원초적 본능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성적 욕망과 여성에 대한 사랑, 독립심, 방랑벽이 그를 지배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제 골드문트는 명인이 만든 마리아 상을 보면서 자기 속에 숨어 있던 예술가 기질을 발견하였고, 새로운 길로 접어들어 다시 한 곳에 머무르게 되었다. (252면)




16. 예술은 결코 공짜로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라 대단히 많은 대가를 요구했고, 희생을 요구했다. 삼 년이 넘도로 골드문트는 사랑의 쾌락 말고 그가 알고 있는 최고의 것, 없어선 안 될 것을 예술에 바쳤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자유였다. (266면)




17. 어쩌면 평생을 예술에 바치는 것도 해볼 만한 일인지도 몰랐다. 그런 아름다움은 체험과 직관을 거쳐 사랑으로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마지막 순간까지도 확고한 장인적 정신으로 밀고 갈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자유를 포기하고, 위대한 체험들을 단념하고, 오직 단 한 번 그런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도 해볼 만한 일이 아닐까? 이것은 대단히 어려운 문제였다. (274면)




18.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골드문트는 인생의 의미가 새로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인생을 저 높은 곳에서 굽어보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지나온 인생이 커다란 세 단계로 분명히 보이는 것 같았다. 나르치스에 의존하고 또 그에게서 벗어났던 시절, 자유를 누리고 방황하던 시절, 그리고 다신 자신의 내면으로 돌아와 성숙과 수확이 시작되는 시절. (416면)




19. 사고는 형상을 통해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개념과 정의를 통해 이뤄지지. 형상이 작용하지 않는 바로 그곳에서부터 철학이 시작하지. (426면)




20. 그런데 천만다행으로 자네는 예술가가 되어 형상의 세계를 터득한 것이지. 사상가가 되었다면 불완전한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겠지만, 형상의 세계에서는 자네가 창조자요 주인이 될 수 있네. (426, 427면)




21. 골드문트, 내가 갑자기 예술에 정통한 사람이 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아니겠지. 예술에 정통한 사람은 내가 아니고 자네일세. 나는 자네의 예술에 대해 아무 말도 할 수 없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모두 자네한테는 우스꽝스러울 거야. 하지만 한 가지만 말해 보겠네. 첫눈에 이 복음의 사도가 다니엘 신부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지. 그리고 단지 그 분의 모습만이 아니라 그 분이 생전에 우리한테 보여주셨던 모든 것이 여기에 담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네. 기품과 자비와 소박함, 그 모든 것이 담겨 있네. (441, 442면)




22. ... 나는 그저 의례적으로 예술을 높게 평가하긴 했지만 실은 교만하게도 예술을 얕잡아보았었네. 그런데 인식에 도달하는 길이 얼마나 다양한지 이제야 알 것 같네. 또 정신의 길이 유일한 길은 아니면 어쩌면 최상의 길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네. 물론 내가 가야 할 길은 정신의 길이지. 나는 이 길을 계속 고수할 생각이네. 그런데 내가 보기에 자네는 나와는 상반되는 길을 통해, 그러니까 감각의 길을 통해 웬만한 사상가 못지않게 존재의 비밀을 깊이 파악하고 있네. 아니, 오히려 더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어. (445면)




23. 나를 부러워할 필요는 없어. 골드문트. 자네가 생각하는 그런 평화란 존재하지 않아. 물론 평화가 있긴 하지만, 우리의 마음속에 늘 깃들여서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 그런 평화란 존재하지 않는 법일세. 이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평화는 마음을 늦추지 않고 끊임없이 싸워서 얻어지는 평화, 나날이 새롭게 쟁취해야만 하는 그런 평화뿐일세. 그런데 자네는 내가 그렇게 싸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지. 공부할 때 싸우는 모습도, 기도실에서 싸우는 모습도 본 적이 없어. 자네가 나의 그런 모습을 보지 않은 것은 좋아. 자네는 그저 내가 자네보다 기분에 덜 좌우된다는 것만 보고서 평화롭다고 생각하는 거지. 하지만 그렇게 보이는 모습도 실은 싸움과 희생을 통해 얻어지는 걸세. 인생을 제대로 사는 사람이라면 다 마찬가지겠지. 자네의 경우도 그래. (446면)




24. 자네는 그토록 많은 여성들한테 귀찮을 정도로 사랑을 받지 않았나. 하지만 나는 다르다네. 내가 살아온 인생에는 사랑이 빈곤하고, 나의 인생에서 무엇보다 결여되어 있는 것이 사랑일세. (470면)




25. 그런데 나르치스, 자네는 나중에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작정인가? 자네한테는 어머니도 없잖아? 어머니가 없이는 사랑을 할 수 없는 법일세. 어머니가 안 계시면 죽을 수도 없어. (47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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