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노동계급의 형성
구해근 지음, 신광영 옮김 / 창비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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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책이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과정을 주제로 하고 있고 이 책의 기술을 위해 내가 E.P. 톰슨의 연구에서 가장 큰 학문적 영감을 받았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톰슨의 저서는 산업화과정에서 공업노동자들의 등장과 그들이 독자적인 계급으로 형성되어가는 과정이 산업화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 대단히 중요하다는 점과 그 과정이 단지 자본주의 논리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의 역사적, 문화적 요소들에 의해서 복합적으로 형성된다는 점을 많은 학자들에게 일깨워주었다. (6면)




2. 계급형성에 관한 최근 이론들이 제시하듯이, 사회계급은 궁극적으로 노동자들의 구체적인 생활체험을 기초로 형성된다. 그러나 이러한 구체적인 생활체험은 단지 생산관계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작업장 내부와 외부에서 영향을 미치는 문화정치적 권력에 의해서 형성된다. (11면)




3. 그리고 계급은 사람들이 (계승되거나 혹은 공유된) 공통의 경험에 의해 서로간에는 이해의 동일성을 그리고 그들과 이해가 다른(또는 흔히 반대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배타적인 이해의 동일성을 느끼고 분명히 파악할 때 생겨난다. (19면)




4. 거대한 노동자투쟁이 폭발한 지 10년 후인 1997년 1월 한국의 노동자들은 그 전해 12월에 통과된 노동법에 반대하기 위해 대규모 총파업을 일으킴으로써 다시 한번 세계의 주목을 끌었다. 쟁점이 된 새 노동법은 고용주들에게 노동자를 해고하거나 임시직 노동자와 파업 대체노동자를 고용할 수 있는 권한을 강화해주는 한편 앞으로 몇 년 동안 단일사업장에서 복수노조 결성을 금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19면)




5. 이 책은 노동자들이 극도로 착취적이고 억압적인 생산체제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한 자주적 노조의 결성을 위해 어떻게 투쟁하였는가를 보여준다. 또한 그들이 어떻게 노동자로서 새로운 집단적 정체성과 공유된 이해에 기초한 연대감을 발전시켰는가를 기술한다. (23면)




6. 그러나 더 중요한 요인은, 노동자들이 공장 안의 일상에서 겪어야 했던 극도의 착취적이고 비인간적인 노동조건이었을 것이다. (25면)




7. 위계질서, 권위에 대한 존경, 협동, 근면, 가족주의를 강조하는 유교문화가 노동자들의 복종적인 태도와 경영자에 대한 협조를 촉진하고, 반면 노동자들간의 연대와 집단행동을 저지하는 역할을 하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26면)




8.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경제와 확대되는 취업시장에서 노동자들은 개인적으로 경제적인 성취를 추구하였고, 노동조합 가입에 대한 관심은 줄어들었다. (27면)




9. 최근, E.P.톰슨(E.P. Thompson)의 기념비적인 저작인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The Making of the English Working Class)에 영향을 받아서 19세기 유럽 계급형성에 관한 훌륭한 연구들이 많이 이루어졌다. 톰슨은 그의 책에서 구조적-환원주의적 혹은 결정론적 계급개념과 대조되는 역사주의적 혹은 구성주의적 관점을 확립했다. 19세기 영국 노동계급에 관한 노련한 연구에서, 그는 노동계급의 성향과 의식을 분명히 지닌 실체로서 영국 노동계급의 등장은 단순히 생산체제 내의 구조적 위치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계급이 “역사적 현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톰슨은 “나는 계급을 구조(structure)라고 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어떤 ‘범주’(category)로도 보지 않는다. 나는 계급을 인간관계에서 실제로 발생하는 (그리고 발생해온 것이 입증되는) 현상으로 본다”고 말하고 있다. (Thompson 1963, 9면) (29, 30면)




10. 톰슨의 역사주의적, 행위자 지향적 계급개념은 생산과정과 생산과정 밖에서 이루어지는 사람들의 “생생한 경험”에 영향을 미치는 문화와 사회제도의 역할을 강조한다. (30면)




11. 계급은 사회적, 문화적 형성(자주 제도적 형태를 갖게 되는)으로서, 추상적으로 혹은 고립되어 정의될 수 없고, 다른 계급과의 관계 속에서만 정의될 수 있는 것이다. (30면)




12. 최근 연구들은 각 계층집단들이 자신들의 객관적 계급위치에 의해 미리 결정된 정치적 역할을 자동적으로 수행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 대신, 정치적 정체성과 소속은 정당과 국가의 역할에 의해 크게 좌우되는 정치적 과정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33면)




13. 그러므로 한국 노동계급 형성 연구에서 답해야 하는 중요한 질문은 어떻게 공장 노동자들이 공순이, 공돌이처럼 노동자를 경멸하는 문화적인 이미지와 국가가 강제한 산업전사라는 타의적 정체성을 극복하고 노동자로서 자신들의 집단적인 정체성을 발전시키게 되었느냐는 것이다. (36면)




14. 확실한 것은 1980년대에 한국 노동자들의 집단적 정체성(collective identity)과 계급의식에서 유의미한 변화가 나타났다는 점,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노동운동의 형태에서뿐만 아니라, 노동자들이 사용하는 언어와 참여하는 문화활동에서도 드러났다는 점이다. (37면)




15. 그들이 가장 절실하게 요구했던 것은 임금인상이나 작업환경의 개선보다도 인간적인 대우와 사회적 정의였다. (41면)




16. 중요한 사실은 이들 노조활동가들의 대부분이 의류, 섬유, 전자산업에서 일하는 여성노동자들로 구성되었고, 그들이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전반까지 현장 노동운동을 이끌었다는 점이다. 그 결과, 한국 노동운동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 가운데 하나는 경공업 여성노동자들이 보여준 특이한 역할이다. (42면)




17. 다른 동아시아 신흥공업국들과 비교해서 한국 노동운동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 가운데 하나는 노동자들의 민주노조운동과 학생, 지식인, 교회지도자, 재야정치인들이 주도한 민주화운동 간에 긴밀한 연계가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44면)




18. 여성노동자들은 거의 대부분 농촌 출신에, 나이가 어리고, 미혼에, 학력이 낮으며, 가족부양의 책임을 떠맡고 있는, 대단히 동질적인 집단을 구성하였다. (66면)




19. 1987년 이전 한국의 공장노동에서 가장 잔인했던 점은 공장노동이 노동자들의 몸을 급속히 망가뜨린다는 점이었다. 한국 공장의 노동환경은 노동력 재생산에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조차도 보장하지 못했다. (90면)




20. 1970년대와 1980년대 초 공장노동자들의 글을 보면, 노동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던 것이 해고이고, 고용주가 노동자들을 위협할 때 즐겨 쓰던 말도 해고였다. (94면)




21. 여기에서 우리는 한국 노동자들이 그렇게 열심히 일했던 진짜 요인은 강한 노동윤리나 일이나 회사에 대한 헌신이 아니라 깊이 새겨진 가족을 위한 자기희생의 윤리였음을 알 수 있다. (99면)




22. ‘인간적인 대접’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물론 이것은 기계나 동물이 아니라 인간처럼 대접받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인간처럼 대접받는 존재는 최소한의 휴식과 여가시간을 필요로 하는, 사람으로서 존중받는 존재를 의미한다. 이것은 또한 자유롭고 자율적인 인간으로서, 그리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최소한의 인간적 존엄을 인정받고 스스로를 존중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 대접받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한국 공장생활의 실상은 자유롭고 자긍심을 가진 인간 존재로서 대접받고자 하는 노동자들의 기본적인 요구를 무참하게 짓밟는 것이었다. (100면)




23. 노동자들에 대한 전제적 통제는 업무와 노동시간에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궁극적으로 노동자들에 대한 통제는 개인적 공간과 노동자의 몸에 대한 통제였다. 미셸 푸코 개념의 사회통제가 한국 공장체제에서 분명히 작동함을 볼 수 있다. 중소기업에서 일하든 대기업에서 일하든, 공장노동자들은 입는 옷에서부터 머리 모양, 개인적 관계 혹은 화장실 사용에 이르기까지 사적인 생활영역을 세세하게 통제당했다. (102면)




24. 1983년 울산 현대 공장에서 조사를 함께한 한국의 사회학자 배규한은 “내가 공장을 방문했을 때, 많은 것이 군대 복무기간의 내 경험을 연상시켰다”라고 말한다. (104면)




25. 개인들의 헌법적 권리에 대한 일상적인 무시, 비합리적인 요구와 힘든 규율의 강제, 상관의 명령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 끊임없는 언어적, 육체적 체벌 등은 한국 군조직의 뚜렷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대체로 이와 똑같은 모습들이 한국 기업에서 재현되었다. 상사의 명령에 질문이나 변명을 하지 말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라”는 것이 군대조직과 기업체를 움직이는 지배적인 조직규범이었다. (106면)




26. 이후 전투적인 노동운동이 폭발하는 발판을 제공한 것은 바로 공장에서 축적된 노동자들의 쓰디쓴 경험이었다. (109면)




27. 여러 의미에서 전태일의 희생은 한국 노동계급 형성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그것은 수백만명의 노동자들, 그들의 가슴 속에 저항과 반항의 정신을 심어주었고, 그때까지 집단적인 목표를 위해 노동자들을 고취하고 동원할 수 있는 성스러운 상징과 존경할 만한 전통이 없었던 한국의 노동계급에 강력한 상징을 제공했다. 이 사건은 또한 급속한 수출주도형 산업화과정이 만들어낸 노동문제가 산업영역에서 감추어진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긴장과 갈들을 불러일으키는 폭발적인 요소가 된다는 사실도 보여주었다. 한국에서 산업노동자들이 사회적 갈등과 사회변혁의 핵심세력으로서 역사의 장에 들어선 것이다. (112면)




28. 전태일을 저항하게 만든 끊임없는 노동착취와 엄청난 인간적 고통은 1970년대 제조업 무문의 노동집약적인 수출산업에서 계속 늘어나는 공장노동자들이 처한 지배적인 조건이었다. 그러나 고통받는 노동자들의 신음소리는 주류사회에 들리지 않았다. (113면)




29. 전태일의 분신자살은 사회에 큰 충격을 던져주었다. 특히 지식인사회가 수출주도형 산업화의 어두운 면과 경제기적이라는 허울 아래 고통받고 있는 수백만명의 노동자들의 문제에 대해서 눈을 뜨는 계기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그 사건은 학생들이 노동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정치투쟁을 확대하여 경제정의 문제를 포괄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한 최초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14면)




30. 그러나 조직적인 노동운동의 발전이 이루어지기에 1970년대는 아직 너무 이른 시기였다. 수출제조업 부문에 고용된 공장노동자수가 빠르게 증가했지만, 이들의 대부분은 시골에서 갓 올라온 신출내기 산업노동자들이었다. 그들은 새로운 노동환경에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었으며, 노동의 어려움을 어느정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착취와 학대가 극한 수준에 달했을 때, 노동자들의 누적된 고통과 분노가 격한 저항행위로 나타났고, 이 행위들은 자주 격렬하고 감정적이며 개인적인 행동으로 폭발했다. 전태일의 분신자살 이후 여러명의 다른 노동자들이 부당한 대우에 항의해서 자살을 기도했다. (114면)




31. 여성노동자들에 의해서 주도되었다는 점을 떠나서 노동운동의 초기 단계에서 가장 독특한 점은 노조활동가와 교회조직 간의 긴밀한 결합이었다. 거의 예외없이, 여성 노동운동가들은 진보적인 교회지도자들의 보호 아래 조직된 소그룹활동이나 노동자야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왔던 사람들이다. 여기에서 노동조합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고 노조를 조직하고 운영하는 방법에 대한 기본적인 교육을 받았다. (117면)




32. 목사들은 처음에는 산업노동자와 고용주들을 대상으로 기독교 복음을 전파하는데 관심이 있었지만, 공장을 경험하면서 개인적인 영적 접근은 공허한 것이라는 사실과 공장노동자들의 조건 개선을 위해서는 노동자들의 집단적인 투쟁이 필요하다는 사실에 눈을 떴다. (118면)




33. 노동문제에 대단히 동정적이지만 조직적으로 약한 지식인들과는 달리 교회조직은 국제적인 네트워크와 내부적인 조직구조 때문에 노동자들을 지원하기에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더욱이 기독교의 국제적 위치 때문에 교회조직들은 공산주의자로 몰아붙이는 국가의 이념공세로부터 지식인들이나 반체제인사들보다 비교적 더 안전했다. (122면)




34. 이 여성들은 교회가 후원하는 활동을 통해서 만난 사이였는데 주류 기독교인들의 보수적인 안이함을 뒤흔들기 위해 매주 교회에서 설교되는 평화, 사랑, 자유가 공장에서 어떻게 여지없이 짓밟히고 있는지를 보여주기로 결정하였다. 그들은 또한 노동자들의 투쟁에 조금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 언론매체에 분개하였다. (136면)




35. YH무역 노동자투쟁 ... 신민당은 경제투쟁을 정치투쟁으로 비약시킬 수 있는 장소이므로 성공하든지 실패하든지 간에 사회전반에 커다란 파급효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결론지었다고 한다. (139면)




36.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 민주노조운동의 횃불을 든 것은 여성노동자들이었다. 1970년대 노조조직투쟁을 포함한 절대 다수의 노동쟁의는 섬유, 피복, 전자 그리고 수출산업에서 일하는 여성노동자들에 의해서 주도되었다. 민주노조운동이 남성노동자들에 의해서 주도되는 경우에도 여성노동자들은 투쟁의 주된 참여자들이었고, 남성노동자들보다 더 강력한 저항심, 결의, 연대감, 끈기를 보여주었다. (142면)




37. 그러므로 한국 여성노동자들의 적극적인 노동운동 참여는 수출산업 여성노동자들에 대한 통상적인 관념과 일치하지 않는다. 수출자유지역의 여성들에 관한 문헌들은 그들이 얼마만큼 국제적 자본에 의해서 초과 착취당하고 저임금과 불리한 시장조건, 그리고 성적 억압으로 고통받는가를 강조한다. 아시아 여성 공장노동자들에 대한 지배적인 이미지는 순종, 수동성, 일시적인 공장생활, 노조활동에 대한 무관심 등이다. (142면)




38. 나는 경공업 여성노동자들과 진보적인 교회조직 간에 형성된 긴밀한 연계에 그에 대한 대답이 있다고 믿는다. (145면)




39. 그녀(김지선) 역시 초기 투쟁단계에서 교회집단과 지식인들의 핵심적인 역할을 인정했다. “사회에서 아무도 우리에게 인간적 대접을 하지 않을 때, 그들은 진정한 애정을 가지고 우리들을 존귀한 인간으로 대우해주었어요. 그것은 우리에게 엄청난 것을 의미했어요. 우리를 진정으로 걱정하고 애정을 가지고 우리를 돕는 사람들에 대해서 깊은 신뢰와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됐고, 우리는 그분의 말대로 따르면 다 될 것 같은 느낌을 가졌습니다.” (146면)




40. 여성 공장 노동자들은 “가장 소외되고 억압받은 사람들이다.” (146면)




41.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교회활동에 참여하는 태도에 있어서 여성과 남성노동자들 간에 차이가 있었다는 점이다. 우선, 여성노동자들은 남성노동자들보다 교회에 다닐 가능성이 더 컸다. 게다가 여성노동자들은 교회지도자들이 이끄는 소집단활동에 남성노동자들보다 더 관심을 가졌다. 교회와 노동자들의 연계수단은 통상적인 예배 참석보다 소모임활동이었다. 왜 여성들이 소모임활동에 참여하는 일에 더 관심을 가졌을까? 우리는 몇가지 이유를 생각할 수 있다. 남성에 비해서 여성노동자들은 공장에서 더 큰 심리적, 정서적 어려움을 겪었고, 심리적으로 더 큰 정신적 위안을 필요로 했다. 그들은 공장노동자로서 훼손된 자아정체성을 보상받기 위하여 교육적, 문화적 경험에 대해 더 큰 욕구를 가졌다. 그리고 여성들은 남성들에 비해 다양한 여가활동에 참여할 자유가 없었다. (147면)




42. 더욱이, 1970년대와 1980년대 전반까지 운동권은 계급문제와 분리된 채 성문제를 강조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막았다. 그 두 쟁점은 서로 연관되어 있기보다는 분리된 것으로 그리고 잠재적으로는 경쟁적인 것으로 인식되었다. (149면)




43. ‘우선과제’의 잘못된 선정은 주요모순을 은폐시키고 부차적 모순을 전면 부각시키게 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149면)




44.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노동투쟁을 야기한 것은 외부의 선동이 아니라 한국 노동자들이 나날의 노동생활에서 경험하는 실존적 현실이었다. 극도로 열약한 노동조건, 형편없는 임금, 무엇보다도 경영자들에 의한 불공평하고 정의롭지 않은 대우, 간단히 말해서 ‘비인간적인 대우’가 의심할 여지없이 1970년대 노동투쟁의 실질적인 원인이었다. (150면)




45. 더욱이 육체노동자들에 대한 경영자들의 경멸적인 태도, 특히 여성노동자들에 대한 경멸적인 태도가 깊은 심리적 상처와 분노를 야기했고 노동투쟁의 폭발 요인을 제공하였다. (151면)




46. 교회조직들은 1970년대 노동계급운동의 발전에 몇가지 뚜렷한 기여를 하였다. 무엇보다도 진보적인 교회들은 노동자들이 모여서 그들의 문제와 관점을 공유할 수 있는 피난처와 사회적 공간을 제공했다. 1970년대에는 노동자들이 서로 자유롭게 만나서 공통의 문제를 논의할 수 있는 다른 장소가 없었다. 둘째, 교회조직들은 노동자들이 간헐적이고 개인적인 시위가 아니라 자주노조 결성에 노력을 기울이도록 도왔다. (151, 152면)




47. 그러나 여기서 다시 한번 우리는 투쟁의 실제 주체가 누구였는가에 대해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교회조직이 아니라 여성노동자들이었다. 그들의 놀랄 만한 연대활동을 가능케 한 것은 잔인한 노동조건과 그들의 노동경험 그리고 공통의 사회적 배경에 바탕을 둔 강한 유대감이었다. 교회지도자와 지식인들의 역할은 구조적으로 결정된 잠재성을 현실로 전환하는 촉매제 역할이었다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152면)




48. 오글이 “1980년대 중반 남성노동자들이 스스로 행동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10년 이상 정의를 위해서 투쟁해온 여성들의 어깨 위에 자신들이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한 말은 절대적으로 옳다. (152면)




49. 노동투쟁에 대한 교회지도자들의 온건한 접근에 대해 노동운동가들이 점차 실망하면서 노동운동에 대한 교회의 영향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157면)




50. 그에 비해 1970년대 노동문제에 개입했던 학생들은 주로 비인간적인 조건으로 고통받는 노동자들에 대한 인도주의적 관심에서 출발했고, 그리하여 그들의 지향은 교회지도자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158면)




51. 청계피복노조는 1980년 군사정권에 의해서 가장 가혹한 탄압을 받았고, 조합원들은 이러한 탄압에 저항하여 가장 치열하게 투쟁했다. 군사정권은 먼저 이소선을 체포하고 - 이소선은 전태일의 어머니로서 청계지역 노동자들은 그를 모든 노동자들의 어머니라고 불렀다 - 1980년 봄 노동쟁의에 개입했다는 이유로 1년 징역형을 구형했다. (164면)




52. 세계사가 반복해서 보여주듯이, 계급투쟁은 장기적으로 볼 때 승리에서뿐만 아니라 실패로부터도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낸다. 비록 구로연대파업이 노동자들의 일방적인 패배로 끝난 것처럼 보일지라도, 이런 집단적인 경험은 노동자들의 정치의식을 제고하고 기업간 노동자들의 상호연대를 촉진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투쟁의 목표나 조직적인 형태면에서 정치투쟁이었으며, 이 점에서도 구로연대투쟁은 그 이전의 모든 투쟁들보다 노동자들의 정치의식에 더 큰 영향을 미쳤다. (173면)




53. 한 노동자는 분노에 차서 ‘우리를 눈 뜨게 한 것은 선동도 배후조종도 아닌 바로 우리가 처한 비참한 현실일 뿐이다. 그것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었다’고 주장했다. (175면)




54. 노동자들이 스스로 말하듯이, 그들이 겪은 비참한 생활조건과 사회적 천대가 그들을 분노하고 동요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구로지역 노동자들이 노조를 방어하기 위해 치열하게 싸운 것은 자주노조만이 자신들의 처지를 개선시킬 수 있는 유일한 희망임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이외에 환경적인 요인들 역시 기업간 연대투쟁을 가능케 한 중요한 요인이었다. 대단히 제한된 산업구역 내의 생산노동자들의 집중, 상당히 동질적인 노동력의 인구학적, 사회적 성격, 그리고 공단 내에서의 잦은 이직 등은 이 지역의 노동자집단 사이에서 사회적 연계와 커뮤니케이션을 촉진하는 역할을 했다. (176면)




55. 한국 노동운동에서 가장 특이한 점 가운데 하나는 노동운동과 민주화를 위한 정치투쟁 간에 긴밀한 연계가 발전했다는 것이다. (184면)




56. 사람들은 공장노동자들이 산업화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노동자들을 매우 경멸하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노동자들은 낮고, 하찮고, 존경받을 수 없는 지위의 사람들로 간주되었고, 이런 사회적 태도는 일상언어와 대중매체에서 표현하는 공장노동자들의 이미지에서 자주 드러났다. 1960년대와 1970년대 그리고 1980년대까지도, 이런 태도를 가장 분명하게 도출하면서 노동자들에게 큰 심리적 고통을 가져다 준 ‘공순이와 공돌이’라는 말이 널리 통용되었다. (189면)




57. 공장노동자들에 대한 부정적인 사회적 이미지는 노동자 자신들에 의해서도 내면화되는 경향이 있었다. “처음 공장에 들어갔을 때는 ‘노동자’란 말의 의미도 몰랐는데, 다니다 보니까 내가 사회에서 흔히 말하는 천한 노동자란 것을 깨닫게 됐어요.” (190면)




58. 다른 사회에서도 노동자들은 초기 산업화과정에서 중간계층 사람들로부터 무시를 당한 것이 사실이다. 다른 나라에서도 초기 프롤레타리아트의 사회적 이미지는 거의 예외없이 더럽고 거칠며 지위가 낮은 노동자들이었다. 그것은 부분적으로 노동자들의 작업내용과 작업환경 때문이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이유는 산업화 초기세대 공장노동자들의 행동양식이 중간계층의 기준에 미치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191면)




59. 한국 노동자들이 사회에서 천대받았던 주된 이유는 전통적인 유교적 신분질서의 유산과 육체노동을 통해서 버는 그들의 낮은 소득 때문이었다. (192면)




60. 엄격히 말해서, 공장노동자들이 사회적으로 경시받은 주된 원인은 전통적인 봉건적 신분질서라기보다는 유교적 신분체계의 핵심요소이자 사회변화에도 불구하고 신분의 가장 핵심적인 잣대로 남아있는 교육의 상징성이었다. 물론 교육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계층구분의 주된 기준이 된다. 그러나 큰 정치적 혼란과 심한 운명의 부침을 겪어온 한국사회에서 교육은 더 확실하고 신뢰할 만한 신분상승의 수단이 되었다. 더욱이 한국의 정치경제 풍토에서 교육은 부나 정치권력보다 더 큰 도덕적 위엄을 지녔다. (193면)




61. 노동자들은 분명히 세계를 불평등하고 불공평한 것으로 보았지만, 그들의 일기와 수기에서 그려진 불평등은 부자와 빈자 사이의 불평등이라기보다는, 교육받은 사람과 교육받지 못한 사람 간의 불평등이었다. 자본가와 노동자 간의 불평등에 대한 인식은 더욱 적었다. 한 노동자는 “교육받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간에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는 것” 같고(한윤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항상 교육받지 못한 사람을 경멸스런 눈초리로 내려다보고 있다고 말한다. (196면)




62. 젊은 여성노동자들은 성차별과 육체노동에 대한 문화적 폄하로 이중적 억압을 받았다. (197면)




63. 한 노동자는 “내가 이런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는 생활을 하는 것은 못 배웠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였죠.” ...  (199면)




64. 대단히 흥미롭게도 여성노동자들은 야간학교 교사들의 지도로 차츰 불평등구조에 대한 예리한 인식을 갖게 됐고, 따라서 학구열이 높은 여성노동자들의 강한 이탈성향이 ‘목소리내기(voice)'라는 긍정적인 성향으로 바뀌게 되었다. (200면)




65. 이것은 적대적인 생산관계에 근거한 계급의 근본적이며 구조적인 현실을 평가절하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구체적인 일상 속에서 상징적, 도덕적 억압이 가진 중요성을 인식하는 것이 노동자들의 정체성 형성유형과 계급의식 발달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이다. 간단히 말해, 상징적 억압에 대한 한국 노동자들의 뿌리깊은 분노가 집단적인 행동과 계급의식을 형성시키는 중요한 촉매 역할을 담당했다. (201면)




66. 한은 분명 계급언어가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 불평등의 구조적 성격에 관한 이해나 자본에 적대적인 노동자들의 공통된 계급이해에 대한 인식을 내포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한은 불의에 대한 인식과 저항정신을 높이는 도덕언어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한은 정신적 저항의 언어이다. 왜냐하면 주어진 상황을 자연스러운 것 혹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없는 것으로 여길 때 한의 감정은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한에 대한 인식의 밑바닥에는 평등주의와 역사적 정통성이 없는 위계적 사회질서에 대한 저항이 자리잡고 있다. 한이라는 언어는 억압받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과, 동일한 경험으로 고통받는 사람들 사이의 강한 연대감을 촉진한다. 비록 계급언어는 아니지만 한은 그것이 품고 있는 사회정의에 대한 예민한 정서를 통해 계급인식과 계급감정을 고양할 수 있다. (202면)




67. 1079년대, 산업노동자들의 자아정체성이 발달함에 따라, 노동자라는 오래된 단어에는 정부와 고용주들이 선호하는 근로자라는 단어와는 반대로 좀 더 계급적인 의미가 실리기 시작했다. 1980년대의 저명한 노동운동가인 노회찬은 1980년대 초 노동자들이 스스로를 근로자 대신 노동자라고 표현하는 것은 일정 수준의 계급의식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공순이나 공돌이라는 말이 점차 사라졌다. 그러나 이런 경멸적인 말은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에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정체성을 주장하는 노동자들의 의식적인 노력으로 서서히 사라지게 되었다. (209면)




68. 민중은 정치적으로 억압받는 사람,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 그리고 경제성장의 혜택에서 배제된 사람들을 모두 포함했다. (211면)




69. 민중운동은 정치운동인 동시에 문화운동이었다. ... 당대의 한국사회를 다룬 소설들은 하층계급이 겪는 사회적 불의를 드러내고자 했고, 역사소설들은 억압받는 계층의 고통과 투쟁을 극화하면서 새로운 역사적 의미를 이끌어내려고 했다. 민중운동에서 야기된 가장 흥미로운 점 중 하나는 탈춤, 풍물, 마당극, 마당굿 등 서민들이 향유하는 토속적인 문화형태를 재발견하고 재창조한 것이었다. (213면)




70. 요컨대 민중적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에 의해서 수용되고 재창조된 서민들의 일상적 전통문화는 민주화와 사회정의를 위한 투쟁에 알맞은 핵심적인 문화적 요소, 즉 공동체 정신, 민주적 참여, 사회적 불의에 대한 비판적 인식, 그리고 사회변화를 향한 집단적 투쟁을 위한 활기찬 정신을 포함하고 있었다. (214면)




71. 박노해의 존재는 안또니오 그람시의 용어인 “유기적 지식인”의 등장을 의미했다. (218면)




72. 한 노동자는 “풍물을 치면서 자주 느끼는 것은 ‘함께’라는 단체의식이다”라고 보고한다. (218면)




73. 노동계급의 정체성 발달은 노동계급 형성에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221면)




74. 따라서 노동자 정체성은 노동자들의 이탈성향을 목소리내기(voice) 성향으로 변화시키는데 결정적이다. 즉, 노동자 정체성은 계급의식을 발달시키는 데 필수적인 요소이다. (222면)




75. 여러 면에서 1987년 노동자대투쟁은 오랫동안 누적된 노동자들의 한이 폭발하고 분출되는 계기였다. 다른 말로 그것은 오랫동안 억눌린 불만과 분노가 충동적이고 감정적이며 격렬한 방식으로 발산된 노동자들의 거대한 한풀이였던 것이다. (231면)




76. 왜냐하면 계급정체성은 단지 같은 위치를 차지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소속된 집단에 대한 어느정도의 긍정적 인식을 바탕으로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의 이 새로운 권력감은 계급정체성을 촉진시켰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노동자대투쟁의 경험은 오랫동안 노동자들을 지배해온 패배주의와 현실 도피를 극복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251면)




77. 1987년 노동계급 투쟁에서 일단 남성노동자들이 중심을 차지하자, 여성노동자들은 급속히 주변으로 밀려났다. (260면)




78. 실제로 87년 대투쟁 이후 여성 노동자 중심의 민주 노조 운동이 ‘주류’ 담론에 포함된 적은 거의 없다. (김현미) (261면)




79. 한국 노동자들이 권리에 대한 인식과 집단적 정체성(collective identity)을 획득하고, 연대와 자주노조 건설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 것은 일찍이 용기있는 많은 노동자들의 외롭고 피나는 투쟁을 통해서였다. (265면)




80. 노동자들은 구체적인 물질적 목표의 달성보다는 인간적 존엄과 사회적 존경을 회복하는 데 더 관심이 있었고, 노동조합이 자신들의 긍지와 인간적 존엄을 보장해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노조 건설을 위해 투쟁했다. (266면)




81. 이제 노동자들은 멸시받는 하층계급 성원이 아니라 훌륭한 사회구성원으로 그리고 한국 사회 변혁의 주체로 그들 자신을 새로운 눈으로 보기 시작했다. (267면)




82. 향상된 경제조건과 개선된 공장 내의 노사관계가 산업노동자들의 집단적 정체성과 의식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268면)




83. 보수적인 성격에 더해 악화되는 경제로 언론은 자본의 관점을 적극적으로 대변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272면)




84. 정당들은 중간계층의 지지 상실을 두려워해 노동세력과 동맹 맺기를 꺼려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야당들도 여당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278, 279면)




85. 노동시장 개혁의 구조적 동력은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충격과 약화되는 한국경제의 위치로부터 나왔다 1997년 한국 총파업의 결과는 세계경제체제의 강압적 요구와 그것의 헤게모니적 이데올로기인 신자유주의에 의해 이미 결정되었다고 볼 수 있다. (282면)




86. 이렇게 국제통화기금 체제하에서 구조조정의 성공 여부는 대체로 노동자들이 산업불안정이나 사회불안을 야기하지 않고 희생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것에 달려 있었다. (284면)




87. 다른 신흥공업국들의 경험과는 달리 한국의 노동운동은 게이 싸이드먼이 말하는 “사회운동노조주의(social movement unionism)"를 발전시키지 못했다. (286면)




88. 내가 강조하려는 것은 한국 노동자들은 공장 특유의 문제들에 몰두하였고, 지역사회의 소비 관련 문제들에 관심이 적었거나 관심을 돌릴 여유가 없었다는 점이다. 싸이드먼이 그리는 브라질과 남아프리카공화국노동자들의 경우와 달리, 아마도 한국의 노동자들에게는 지역과 공장이 곧 “동전의 양면”이라는 것이 그렇게 분명하지 않았을 것이다. (288면)




89. 다양한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요인들은 한국 노동운동을 사회운동노조주의 대신에 경제노조주의로 형성했다. (288면)




90. 1987년 노동자대투쟁은 사회의 힘있는 사람들이 노동자들을 대하고 바라보던 방식에 대한 한국 노동자들의 뿌리깊은 적개심과 분노의 폭발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경제적 이익이 아니라 인간적 존엄성과 존중을 요구하는 투쟁이었다. (294면)




91. ... 낙인찍는 정체성에 대한 대항정체성 ... (294면)




92. 민주화의 또다른 중요한 결과는 노동계급투쟁과 사회, 정치운동의 점진적인 분리였다. 군사정권의 종말과 함께 이 두 운동은 과거 둘을 묶고 있던 공동의 적을 상실했다. 변화된 정치환경에서 민주주의 운동은 노동문제로부터 눈을 돌려 좀더 광범위한 사회문제인 분배, 환경, 성적 불평등, 시민적 도덕성의 문제 등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중간계층 지식인 들이 주도하는 ‘새로운 사회운동’은 의식적으로 노동운동조직과 급진적인 민중운동에 거리를 두었다. 많은 지식인 노동운동가들이 노동운동을 떠나 새로운 사회운동에 가담하거나 기존의 정당정치에 포섭되었다. 동시에 노동운동의 주류는 사회, 정치운동에 거리를 두면서 더욱 실리적, 경제지향적으로 되었다. (302, 303면)




93. 한국 자본가들은 외부적으로는 수출시장에서 증대되는 경쟁에, 국내적으로는 강력해진 노조에 직면해서 노동시장 유연성을 높이고 현장에서 노동권력을 통제하기 위해 다양한 전략을 채택하였다. 이 새로운 기업전략들은 노동계급을 분열시키는 중대한 효과를 지녔다. 이전에 동질적이었던 노동계급은 점차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 중심부 노동자와 주변부 노동자, 보호받는 노동자와 보호받지 못하는 노동자로 내부 분화하게 되었다. (303면)




94. 10여년간의 조사와 연구를 통해 완성된 이 책은 한국 노동운동에 관한 역사적 연구이지만 단순한 서술적인 노동사 연구가 아니라 영국 역사학자인 E.P.톰슨이 제기한 계급형성론의 관점에서 한국 노동운동을 분석하고 있다. 계급형성론은 계급을 생산관계 내에서 동일한 위치를 차지하는 사람들이라고 보는 경제적 관점과는 달리 공통의 생활경험, 전통, 언어, 가치체계를 공유하는 계급이라는 관점에서 다른 집단과의 관계를 통해 자신들의 행위와 의식을 정의하는 사람들이라고 본다. (30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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