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의 힘 우리 시대의 고전 16
자크 데리다 지음, 진태원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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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해체와 정의의 가능성’이라는 제목에서 ‘와’라는 접속사는 동일한 범주에 속하지 않는 단어들과 개념들, 아마도 사물들을 결합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접속사는 -유비나 구분 또는 대립에 따라 작동하는 경우일지라도- 질서와 분류법, 위계 논리 등에 과감히 도전하고 있다. (11면)




2. 이 제목은 의혹의 형태를 띠는 질문을 제기한다. 곧 해체가 정의의 가능성을 보증하고 허락하고 허가하는가? 해체가 정의를, 또는 정의 및 정의의 가능성의 조건들에 대한 일관성 있는 담론을 가능하게 해주는가? 어떤 이들은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고, 반대편에 있는 이들은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12면)




3. 해체의 ‘고통’, 해체가 겪는 고통이나 또는 해체가 사람들에게 주는 고통은 아마도 법과 정의를 분명히 구분할 수 있게 해주는 규칙과 규범, 그리고 확실한 기준의 부재 때문에 생기는 것일지도 모른다. (12면)




4. 힘이 없이는 법도 없다는 것을 칸트는 매우 엄밀하게 환기시킨 적이 있다. 적용가능성이나 ‘강제성’은 법에 대하여 보충적으로 추가되거나 추가되지 않을 수 있는 외재적이거나 부차적인 가능성이 아니다. 그것은 법으로서의 정의 개념 자체에, 법이 되는 것으로서의 정의, 법으로서의 법 개념 자체에 본질적으로 함축되어 있는 힘이다. 여기서 나는 곧바로 어떤 정의의 가능성, 곧 단지 법을 초과하거나 그것과 모술될 뿐만 아니라 아마도 법과 무관하거나 또는 그것과 기묘한 관련을 맺고 있어서 법을 배제하면서도 법을 요구하는 어떤 정의, 심지어 어떤 법의 가능성을 유보해두자고 주장하고 싶다. (15, 16면)




5. 칸트는 ‘법론’의 ‘서론’에서 이를 환기시키고 있다. 분명 적용되지 않는 법들이 존재하지만, 그러나 적용 가능성 없이는 어떠한 법도 존재하지 않으며, 힘이 없이는 어떠한 법의 적용 가능성이나 ‘강제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16면)




6. 한편으로 정당한 것일 수 있거나 어쨌든 적법한 것으로 판단될 수 있는 힘과, 다른 한편으로 항상 부당한 것으로 간주되는 폭력 사이에는 어떠한 차이가 존재하는가? 정당한 힘 또는 비폭력적인 힘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16, 17면)




7. ...., 게발트(Gewalt)는 독일 사람들에게는 또한 적법한 권력과 권위, 공적인 힘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공정하게 취급하지 못하고 있다. Gesetzgebende Gewalt는 입법적 권력이며, geistliche Gewalt는 교회의 영적 권능이며, Staatsgewalt는 국가의 권위와 권력이다. 따라서 게발트는 폭력과 적법한 권력, 정당화된 권위 모두를 뜻한다. (17면)




8. 해체적 질문하기는 전적으로 법과 정의에 대한 질문하기, 법과 도덕, 정치의 토대들에 대한 질문하기이다. (21면)




9. ... 내가 보기에 이 작업들은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순수히 사변적이고 이론적이고 아카데믹한 담론에 머물러 있지 않으며, 스탠리 피시가 주장하는 것과는 반대로 단지 교육 과정만이 아니라 우리가 도시, 곧 폴리스라고 부르는 곳에, 그리고 좀더 일반적으로는 세계라고 부르는 곳에 효과적이고 책임 있는 방식으로 개입하고 사태를 변화시키려고 하며 성과를 얻어내려고 한다. (23면)




10. 산업적이고 고도 기술화된 사회에서 학문 제도의 공간은 이전보다 더욱더 단자적이거나 수도원식으로 폐쇄되어가고 있다(이전에는 결코 이렇지 않았다). 그리고 이는 특히 법대의 경우 더욱더 사실이다. (23면)




11. “정당한 것이 지속되는 것은 정당하며, 가장 강한 것이 지속되는 것(강제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26면)




12. 파스칼은 계속 말한다. “힘없는 정의는 무기력하다. 정의 없는 힘은 전제적이다. 힘없는 정의는 반격을 받는데, 왜냐하면 항상 사악한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정의 없는 힘은 비난을 받는다. 따라서 정의와 힘은 결합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정당한 것이 강해지거나 강한 것이 정당해져야 한다.” (27면)




13. “그리고 사람들이 정당한 것을 강한 것으로 만들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강한 것을 정당한 것으로 만들었다.” (27면)




14. 우리는, 법들이 정당하기 때문이 아니라 권위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것들에 복종한다. ‘신용credit'이라는 단어가 명제 전체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으며, 권위의 ’신비한‘ 성격에 대한 암시를 정당화하고 있다. 그것들의 유일한 토대는 사람들이 믿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이러한 믿음의 행위는 존재론적이거나 합리적인 토대가 아니다. 믿는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 (29면)




15. 정의와 힘을 ‘결합하고’, 힘을 일종의 정의의 본질적 술어로 만드는 파스칼의 단편은 관습주의적이거나 공리주의적인 상대주의를 넘어서고, 법을 사람들이 자주 ‘가면 쓴 권력’이락 부르는 것으로 간주하는 고대나 근대의 회의주의를 넘어서며, 라 퐁텐La Fontaine의 ‘늑대와 양’의 냉소적인 도덕 -이에 따르면 ‘가장 강한 자의 이성이 항상 가장 뛰어난 것이다“ (“힘이 법을 만든다”)-도 넘어서는 것처럼 보인다. (30면)




16. 어떤 행동이 단지 합법적일 뿐 아니라 정당하다고 말하는 것이 도대체 가능한가? (법적) 인격체는 단지 권리를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정의의 책임도 지니고 있는가? 그런 사람은 정당한가, 결정은 정당한가? 나는 내가 정당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도대체 가능한가? 나는 이런 확신은 오직 자기만족과 신비화의 모습으로만 가능할 뿐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38, 39면)




17. 타자에게 타자의 언어로 자신을 전달하는 것은 모든 가능한 정의의 조건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는 엄밀히 말하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39면)




18. 사실 라틴어 자체가 이미 하나의 폭력을 포함하고 있었다. 라틴어에서 불어로의 이동은 하나의 폭력에서 다른 폭력으로의 이행을 표시한 것뿐이다. (46면)




19. 우리의 가장 공통적인 공리는 정당하기 위해서 또는 부당하기 위해서는, 정의를 실행하기 위해서 또는 정의를 침해하기 위해서는 나는 자유로워야 하며, 나의 행동과 행위, 나의 사고와 나의 결정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49면)




20. 요컨대 어떤 결정이 정당하고 책임감 있기 위해서는 이러한 판단은 자신의 고유한 순간에 -만약 이런 것이 존재한다면- 규칙적이면서도 규칙이 없어야 하며, 법을 보존하면서도, 매 경우마다 법을 재발명하고 재정당화하기 위해, 적어도 그 법의 원칙에 대한 새롭고 자유로운 재긍정과 확증 속에서 이를 재발명할 수 있기 위해 법에 대해 충분히 파괴적이거나 판단 중지적이어야 한다. (50면)




21. 결정 불가능한 것은 계산 가능한 것과 규칙의 질서에 낯설고 이질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과 규칙을 고려하면서 불가능한 결정에 스스로를 맡겨야 하는 -우리는 이 해야 함(의무)으로부터 말해야 한다- 것의 경험이다. (52면)




22. “Zur Kritik der Gewalt"는 언어의 도착과 타락인 표상에 대한 비판일 뿐만 아니라, 형식적이고 의회적인 민주주의 정치체계인 대의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 ‘혁명주의적’ 논문은 1921년에 반의회주의적이고 반 ‘계몽주의’적인 대세 -나치즘은 1920년대와 30년대 초에 말하자면 이 조류의 표면 위에 부상하고, 심지어 ‘파도타기’를 하게 될 것이다-에 속하고 있었다. 벤야민이 찬양하고 서신을 교환했던 칼 슈미트는 이 논문을 칭찬했다. (66면)




23. 우선 두 가지 법적 폭력, 법과 관련된 두 가지 폭력 사이의 구분이 존재하는데, 법을 설립하고 정립하는 정초적 폭력(die rechtsetzende Gewalt, 법정립적 폭력)과, 보존적 폭력, 곧 법의 영속성과 적용 가능성을 유지하고 확증하고 보장하는 폭력(die rechtserhaltende Gewalt, 법보존적 폭력)의 구분이 그것이다. 편의상 폭력을 게발트의 역어로 사용하겠지만, 나는 앞서 이에 필요한 유의 사항들을 말해둔 바 있다. 게발트는 또한 합법적 권력의 우월성이나 주권성, 허가하거나 허가되는 권위, 곧 법의 힘을 의미할 수도 있다. (75면)




24. 그러나 두 전통은 동일한 독단적 전제, 곧 정당한 목적은 정당한 수단에 의해서만 획득될 수 있다는 전제를 공유한다. “자연법주의는 목적들의 정당화를 통해 수단들을 ‘정당화’하려 하고, 법실증주의는 수단들의 정당화를 통해 목적들의 정당성을 ‘보증’하려 한다.” 두 전통은 동일한 독단적 전제의 원을 돌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정당한 목적들과 정당화된 수단 사이에서 모순이 발생할 때, 그 이율배반에 대해서는 아무런 해결책도 존재하지 않는다. 법실증주의는 목적들의 무조건성에 대해 맹목적이며, 자연법주의는 수단들의 조건성에 대해 맹목적이다. (78면)




25. 내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결코 보수적이거나 반혁명적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벤야민의 명시적인 목표를 넘어서 나는 법정초적이거나 법정립적 폭력Rechtssetzende Gewalt 자체는 법보존적 폭력Rechtserhaltende Gewalt을 포함해야만 하며 결코 그것과 단될 수 없다는 해석을 제안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88면)




26. 전쟁의 의례 이후 치러지는 평화의 의례는 승리한 자가 새로운 법을 제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92면)




27. 다른 법을 정초하는 순간 그것은 현존하는 법을 인정하지 않는다. (93면)




28. 왜냐하면 오늘날 경찰은 더 이상 강제로 법을 적용하고 보존하는데 만족하지 않고, 법을 제정하고 명령을 공포하고 법적 상황이 사회의 안전을 보증하기에 불확실한 경우에는 언제든지 개입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오늘날은 거의 모든 시간에 걸쳐 개입한다. 경찰은 법의 힘이며, 법의 힘을 가지고 있다. 경찰은 수치스러운 것인데, 왜냐하면 경찰의 권위 안에서 “정초적 폭력과 보존적 권력의 분리가 제거되기(또는 지양되기)” 때문이다. 경찰 자체를 의미하는 이러한 제거/지양에 따라 경찰은 법이 자신에게 입법의 가능성을 허용할 만큼 비규정적일 때마다 법을 발명하고, 자신을 ‘법정립적인’ 것으로, 입법적인 것으로 만든다. 경찰은 법의 권리를 가로채고, 법을 침탈한다. (9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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