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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와 연대 - 현대 세계와 헤겔의 사회.정치철학 ㅣ 인문정신의 탐구 4
나종석 지음 / 길(도서출판) / 2007년 7월
평점 :
1. 내가 보기에 현재 헤겔의 사회․정치철학은 세 가지 관점에서 진지한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다.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의 논쟁, 인정투쟁과 ‘차이’의 정치, 시민사회 이론 논쟁이 바로 그것이다. (8면)
2. 내가 주목한 세 가지 주제 중 하나는 서구 근대 사회에서 등장한 자유주의적 이념의 기초인 개인주의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다. 여기에서 나는 이기주의적 개인주의와 극단적 집단주의의 폐단을 극복할 수 있는 상호주관적 공동체 철학의 가능성을 헤겔의 인륜성 이론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했다. (9면)
3. 이 책을 관통하는 두 번째 주도적 관심은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형성된 사회적 불평등 문제에 대한 것이다. (9면)
4. 마지막으로 나는 헤겔의 사회․정치철학을 서술하는 과정에서 생태 위기와 연관된 주제들을 다루고자 했다. (10면)
5. 그러나 이 열정은 의미 있는 다양성과 개성의 분출을 허용하는 토대 위에서 사회적인 통합과 연대성을 구축하는데 실패한다. 근․현대 혁명의 역사가 보여주듯이 이 절대적 자유를 향한 열정은 쉽사리 일체의 차이와 개성을 경시할 뿐 아니라, 심지어 이를 파괴하는 전체주의적 사유와 강한 친화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11면)
6. 서구 근대의 위기에 대해서 헤겔의 사회․정치철학이 제시하는 해결책은 서로 대립하고 투쟁하는 양 극단을 화해시킬 수 있는 구체적인 통합과 연대적 원리에 대한 강조이다. (13면)
7. 첫째, 헤겔의 사회․정치철학에 대한 학문적인 이해를 가로막는 것은 그의 사변적인 형이상학적 토대이다. ... 그리고 체계에 대한 사전 인식 이외에도 헤겔 철학 전체 체계의 기초를 구성하는 절대적 이성의 원리와 그의 사유의 방법적 원리인 변증법에 대한 사전 이해가 필요하다. (20면)
8. 뢰비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에 완성된 그의 기념비적인 저서 ‘헤겔에서 니체로: 19세기 사유에서의 혁명적 단절’ 제1판 서문에서 헤겔의 정신 형이상학은 무의미한 것이 되어 버렸다고 선언한다. (21면)
9. 그(찰스 테일러)는 1975년에 나온 ‘헤겔(Hegel)'이라는 그의 방대한 저서에서 헤겔 정치철학의 현재적인 의의를 되살리는 작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그럼에도 테일러 역시 자연과 인간의 역사를 절대적인 이성의 자기실현의 필연적인 전개 과정의 단계들로 해석하려는 헤겔 철학의 형이상학적 기초는 이제 설득력이 없다고 단언한다. (22면)
10.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이 시대 비판의 표어가 되는 것은 헤겔 철학 이후의 다양한 철학의 흐름 속에서 거의 공통적인 현상이다. (22면)
11. “내가 무엇보다 혐오하는 것은 헤겔주의와 변증법이었다.” (질 들뢰즈) (23면)
12. 이러한 마르크스주의적인 전통에서 중요한 것은 헤겔의 시민사회와 국가의 관계를 뒤바꾸어 국가를 자본주의적 생산 사회의 반영으로서 폭로하는 것이었다. (25면)
13. 포퍼는 ‘열린 사회와 그 적들’에서 헤겔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마르크스와 더불어 전체주의의 사상적 선구자로 거명하면서 그의 이론을 비판한다. 포퍼는 우선 헤겔을 헤라클레이토스, 플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직접적인 계승자로 간주한다. ... “헤겔의 역사주의가 현대 전체주의 철학과 동일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35면)
14. 포퍼의 헤겔 비판의 방법론과 연관해서 눈길을 끄는 것은 그가 헤겔의 인간상을 폄하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이론을 비판하는 데 지나치게 감정적인 언어를 구사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의 비판은 사실상 엄밀한 학문적인 논증에 기반하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인 매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인상을 준다. 예를 들어 포퍼는 아르투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의 술어를 빌려서 “헤겔의 성공”을 “부정직의 시대의 시작”이자 지적, 도덕적 “무책임 시대의 시작”이라고 단언한다. (36, 37면)
15. “그는 소화할 수 없는 글을 쓰는 사람이다. ... 그의 글의 내용에 관해 말하자면, 독창성이 없기로 최상급이다.” (포퍼) (37면)
16. 포퍼는 헤겔 철학의 “두 기둥”을 변증법적인 사유와 객관성의 동일성 철학(philosophy of identity)으로 규정하면서, 후자를 전자를 응용한 경우로 평가한다. 간단하게 말해 헤겔의 동일성 철학은 현존하는 “질서를 정당화하는 데 봉사”하며, “존재하는 것이 선한 것이라는 윤리적․법률적 실증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이 학설은 바로 ”힘이 곧 옳은 것“이라는 이론이기에, 헤겔 철학은 강자의 이익을 철학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이것이 포퍼가 헤겔 철학이 도덕적 실증주의라고 규정하는 논거이다. (39, 40면)
17. 사회계약론에서 계약의 주체인 인간은 우선 서로 독립적이고 고립되어 있고 합리적으로 행위하는 능력이 있는 존재로 설정된다. 헤겔은 이런 관점을 비판하면서 인간 존재의 사회성과 근대적 주체성의 형성에서 타자와 전통이 본질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40면)
18. 마르크스주의는 헤겔의 정신을 물질로 대치했으며 그로 인해 인류 역사 발전의 기본 동력을 경제적인 이해관계의 갈등과 투쟁으로 대치했다고 포퍼는 서술했다. (50면)
19. 다만 여기에서 예를 들고자 하는 것은 헤겔 사회․정치철학의 핵심 중의 하나인 국가 내에서의 다양성과 분화의 필연성에 대한 강조 그리고 헤겔 철학 체계의 원리를 담당하는 주체의 성격 규정이다. 헤겔이 국가의 중앙 집권적인 조직화에 반대하여 국가와 개인의 매개를 담당하는 중개 집단의 역할과 기능을 강조하는 것은, 그의 사회․정치철학이 전체주의의 사상적 선구라는 비난이 옳지 못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여러 사례들의 하나일 것이다. 달리 말하면 전체주의 국가는 근대에서 전면적으로 등장한 인간의 삶의 다양화와 분화를 거부하고 사회를 국가 권력과 전 사회적 통제를 통해 전면적으로 획일적인 것으로 만들려는 것을 목적으로 삼지만, 헤겔은 차이와 다양성과 분화가 없는 동일성의 원리를 죽은 것으로 치부했다. 그가 자신의 철학의 근본 전제인 절대적 주체성의 철학을 전개하면서 절대자의 근본적인 모습을 추상적인 동일성에서가 아니라 타자와의 연관 속에서의 구체적인 보편자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은 너무나 널리 알려져 있다. (52, 53면)
20. 물론 헤겔은 무차별적인 다양성과 변화를 찬성하지는 않는다. 그는 근대 사회의 분화와 다양성이 인간의 삶을 얼마나 깊게 분열시키고 소외시키고 파괴할 수 있는가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다. 대표적 예로서 근대 시민사회에서 빈부 격차의 확대로 인해 인륜적 삶이 상실될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함으로써 근대 산업사회 내지 자본주의적 시장사회의 내적인 분열을 처음으로 파악한 철학자였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렇지만 인간의 사회적․정치적 삶에서 다양성과 분화와 차이를 모두 제거하고 사회를 획일적으로 만드는 것은 인간의 삶을 절대적으로 파편화된 것으로 만드는 무조건적인 분절화 내지 분화의 환영 못지않게 위험하다. 이런 획일화는 결국 자유의 종말로 귀결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의 적절한 분화와 차이를 자유의 전제조건으로 이해하고 있다. (53면)
21. 20세기 후반기를 대표하는 정치철학자인 존 롤즈는 헤겔을 권위주의자가 아니라 자유주의자로 본다. 그에 의하면 헤겔은 “온건한 진보적인 개혁 성향의 자유주의자(a moderately progressive reform-minded liberal)”이다. 로버트 애링턴(Robert Arrington)은 “헤겔의 공동체주의는 어떤 독재 정부나 전체주의적 정부 또는 무비판적 전통의 찬미도 옹호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그리하여 그는 현대의 분석적인 영미 철학에서 그 어느 사조보다도 헤겔의 이론이 철저하게 무시되고 있는 상황을 유감스럽게 생각하며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한편으로 우리는 헤겔 윤리학의 범위에서 깊은 감명을 받아야만 한다. 헤겔의 이론은 계약의 이론에서 성적인 욕망, 배우자 사이의 사랑, 노동의 분화, 관료 정치, 형벌의 이론, 정체성의 추구, 구체적이고 소외되지 않는 자유, 그 밖에도 이전에는 철학적 반성의 대상이 되지 않았던 인간의 삶의 많은 요소들을 포괄하는 이론이다. ... 헤겔은 우리에게 수많은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로버트 L. 애링턴, 서양 윤리학사, 김성호 옮김, 서광사 2003, 490쪽) (62면)
22. 찰스 퍼스(Charles S. Peirce)는 헤겔의 찬미자는 아니었지만, 헤겔주의와 그의 프래그머티즘 사이의 기본적인 유사성을 인정하는 데 결코 인색하지 않았다. 미국 프래그머티즘의 또 다른 대표자인 존 듀이(John Dewey)는 헤겔에게 강한 영향을 받았을 뿐 아니라, 그의 핵심적인 철학적 통찰들은 헤겔의 지적 유산에 큰 빚을 지고 있다. (63면)
23. 주지하듯 헤겔의 사회․정치철학은 근대의 사회계약론과 개인주의에 대한 강한 비판을 포함하고 있다. 그의 이론철학이 고대의 형이상학과 근대의 주체 중심의 철학을 종합하려는 시도인 것처럼 헤겔 실천철학은 고전적인 실천철학과 근대 정치이론을 변증법적으로 종합하려는 시도이다. (66면)
24. ‘논리학’에서 헤겔이 대상으로 삼는 개념들의 발생과 운동 그리고 개념들 상호의 내적 연관성에 대한 해명 작업은 절대적 이념(die absolute Idee)에서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주지하듯이 이 절대적 이념은 주관성과 객관성의 통일이자 헤겔 학문 체계의 기본원리이다. ... 헤겔은 절대적인 이념을 “자기 자신을 사유하는 이념” (sich selbst denkende Idee)으로 이해한다. (70, 71면)
25. 리처드 로티(Richard Rorty)는 헤겔을 플라톤에서 칸트에 이르는 전통을 파괴하고 그것의 “종언”을 알리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창시자로 본다. 그래서 로티는 헤겔을 플라톤 그리고 칸트적인 전통과의 연결 속에서 바라보지 않고, “니체, 하이데거, 데리다로 이어지는 아이러니스트 철학의 전통을 시작”한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75면)
26. 마르크스주의자 이외에 카시러도 “헤겔주의는 논리적 혹은 형이상학적 사상의 분야가 아니라 정치사상의 분야에서 부활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헤겔 철학 체계의 “가장 공고한 보루”로 여겨진 “논리학과 형이상학”은 수많은 공격에 노출되어버리고 그의 정치사상 만이 부흥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카시러는 “현대의 모든 정치적 이데올로기는 헤겔의 법철학과 역사철학에서 처음으로 제창되고 옹호된 원리들의 힘의 지속성과 영속성을 우리에게 보여준다”고 강조한다. (75, 76면)
27. 헤겔이 법철학의 대상을 “법의 이념”, 달리 말하자면 “법의 개념과 그 실현”이라고 규정한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 헤겔은 ‘법철학’에서 인간의 법 및 정치질서 일반의 타당성의 기준이 무엇인가를 이론적으로 해명하려는 작업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가 보기에 참다운 정치철학은 자유의 개념과 그것의 현존 방식을 함께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유 개념의 구체적인 실현을 가능하게 하는 여러 가지 제도들에 관심을 갖는 것이 헤겔 정치철학의 특수성이기도 하다. (77면)
28. 그는 이런 구체적인 자유의 형태를 언급하면서 ‘우정과 사랑’이라는 감정에 주목한다. 사랑이나 우정 속에서 사람들은 사랑하는 대상을 결코 자신과 낯선 존재로 느끼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을 자신을 억압하는 존재로 느끼지 않고 그 사람과 함께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을 만끽하고 자신의 사랑이라는 감정을 실현하게 되는 것이다. ... 사랑이나 우정의 관계가 보여주듯이 이런 관계 속에서 관계 당사자들 사이에는 일방적인 이타성이나 이기성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81면)
29. 사적 소유가 존재해야만 하는가에 대한 물음에 관련해서 이를 부인하는 입장과 이를 긍정하는 입장이 존재한다. 일례로 플라톤은 수호자 계층과 전사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의 사적 소유를 부인하였다. 그가 보기에 사적 소유는 이기주의에 기반하는 것이고, 이기주의는 도덕적으로 비난받아야 할 사항이었다. 이와는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기주의 자체를 도덕적으로 비난해야 할 사항으로 보는 견해를 비판한다. 그에 의하면 비난을 받아야 하는 것은 이기심 자체가 아니라 지나친 이기심이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국가가 지나치게 개입하여 재산의 공유를 시도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하면서 플라톤의 공산주의적 공동 소유 이념을 비판한다. (85면)
30. 장 자크 루소는 인간 불평등의 기원을 사적 소유에서 구하고 모든 형태의 사적 소유에 철저하게 반대하는 사상과 운동에 커다란 영향과 영감을 제공하였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루소에 의하면 자기 땅에 울타리를 둘러치고 ‘여기는 내 땅’이라고 외치는 최초의 인간의 행위야말로 인류가 겪어야 했던 그 수많은 범죄와 전쟁, 참상과 공포의 출발점이나 다름없었다. 러시아의 위대한 문학자 레오 톨스토이 역시 “재물은 모든 악과 모든 고통의 뿌리”라고 말하면서 인간의 갈등과 분규의 원인을 “재물을 과다하게 가진 자들과 무산자들 사이‘에서 구한다. (85, 86면)
31. 신자유주의적 이념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복지국가에 대단히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며, 시장이 거의 혹은 전혀 구속받지 않고 작동할 때 가장 효율적으로 움직인다는 생각을 지지하고, 나아가 순수한 시장 논리에 방해가 되는 모든 정치적․사회적 구조들을 비판한다. 따라서 그들은 대체로 불평등에 무관심하거나 이것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태도를 보인다. (87면)
32. 서양에서 발생했으나 이제는 전 세계로 확산된 근대 세계의 원리들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생태학적 분야에서 그 한계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근대의 기획에 정신적인 토대를 부여했던 계몽주의와 이성에 대한 믿음은 이제 많은 사람들에게 타자 억압과 자연 파괴의 원리로서 폭로, 거부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성이 아니라 이성에 대한 비판이 현대 지적 담론의 주된 배경을 형성하는 것은 우연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체적인 이성 비판이 가능한지 그리고 이성과의 급진적인 단절이 어떤 긍정적인 의미를 지닐 수 있는지를 놓고 격렬한 토론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315, 316면)
33. 특히 인간적인 욕망에 대한 헤겔의 철학적 분석이 지니는 의미에 주목할 것이다. 뒤에서 보는 것처럼 헤겔은 동물적 욕구와 다르게 인간적 욕망이 사회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을 철저하게 인식하고 있다. 달리 말해 인간적인 욕망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으로 본질적으로 다른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며, 이런 타자와의 인정관계 속에서 비로소 인간은 동물적 차원을 넘어서 진정한 의미의 인간다움이 발휘된다는 것이다. (319면)
34. 자기 이익 추구의 전면화와 상호의존성의 체계 사이의 연결은 이미 근대 경제학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던 것이다. 일례로 스미스는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질서의 원리가 보편적인 이기주의라고 표현한다. “우리가 매일 식사를 마련할 수 있는 것은 정육점 주인과 양조장 주인, 그리고 빵집 주인의 자비심 때문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한 그들의 계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의 자비심에 호소하지 않고 그들의 이기심에 호소하며, 그들에게 우리의 필요를 말하지 않고 그들에게 유리함을 말한다.” 그러나 시장경제 질서에서 주관적인 이기심의 추구는 “모든 다른 사람들의 욕구 충족에 기여”한다. 상호의존성의 체계로 이해되는 근대 자본주의의 시장사회는 그 구성원들의 이기심에 의존하고 있지만 엄청난 효율성을 갖고 있다. (330, 331면)
35. 근대 시민사회의 구성원인 사적 개인들은 이익을 증진하기 위해서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 편입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들은 이 관계 속에서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시민사회의 법칙이 요구하는 것들을 스스로 충족하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시장에서 요구하는 것을 충분하게 충족할 수 없는 사람은 사적인 개인으로서 자신의 욕구를 충족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없다는 점에서, 근대 시민사회에서 낙오자가 될 수 밖에 없다. (335면)
36. “마찬가지로 특수해진 욕구와 그것을 만족하는 수단이 분화되고 다양화된다.” (340면)
37. 인간의 욕구의 대상은 이제 한갓 자연적 욕구의 충족이 아니다. 이제 인간은 욕구의 방식에 대한 사람들의 평판이나 생각 역시 충족하고자 애쓴다. ...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의 욕구를 충족하고자 하면서 서로 경쟁적으로 노력한다. 이제 주택의 욕구의 만족은 자신의 자연적인 욕구, 즉 잠자리를 해결하려는 욕구의 충족에 그치지 않는다. 욕구 충족의 방식은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능력을 인정받고 확인하는 수단으로 전환된다. (341면)
38. 헤겔은 인정투쟁을 인류 역사 형성의 동력으로 이해한다. 그가 보기에 인류의 역사에서 인간의 자기의식 및 자유의식은 여러 인간들 사이의 투쟁 과정에서 형성된다. 그래서 그는 인간을 본질적으로 인정을 추구하는 존재로 본다. 달리 말하면 인정의 추구는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원천이다. 따라서 인간은 본질적으로 타자의 인정을 바라는 사회적 존재이다. (342면)
39. “인간 자체는 인정(행위)로서의 운동이며, 이러한 운동을 통해서 바로 인간은 자연상태를 극복한다. 즉 인간은 인정(행위)이다.” (343면)
40. 헤겔에 의하면 인간은 자기의식 또는 자기의식적 존재이다. ... 인간이 자기의식인 한에서, 그는 자신이 존엄하고 고귀한 존재임을 자각한다. (343면)
41. 헤겔은 인정투쟁과 자유의식의 발생 사이의 공속성을 강조한다. 헤겔은 인정의 과정을 투쟁으로 이해하고, 이 인정투쟁의 과정을 통해서 비로소 자유의식이 전개되고, 이 인정투쟁의 과정을 통해 인류는 궁극적으로 인간이 보편적으로 자유로운 존재임을 자각하게 된다고 본다. 요약해 보자면 인정투쟁은 인간의 형성사이면서 동시에 인간적인 존재, 즉 정치적 공동체의 형성사이기도 하다. 인간의 인간됨의 과정은 물론 정치적 관계의 형성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 처음의 인정투쟁의 결과는 주인과 노예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주인과 노예 혹은 지배와 예속의 관계를 거쳐 인간은 점차 모든 인간들이 다 평등하고 자유로운 존재임을 터득하게 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인간은 모든 다른 타자들에 의해서 가치있는 존엄한 존재임을 인정받으며, 그 역시 다른 모든 타자들이 자기의식적 존재임을 승인한다. 인류의 역사는 보편적인 인정이 구체적으로 실현될 때 종결점에 이르는 것이다. (345면)
42. 호네트에 의하면 헤겔은 인정투쟁을 인간의 정체성 요구를 인정받기 위한 투쟁으로 해석하여 “인간들 사이의 사회적 갈등의 원인을 도덕적 요구에 대한 훼손 경험에서 찾는 사상적 움직임”을 개척한 사람이다. (356면)
43. 헤겔은 계급이라는 용어로 시장사회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소외되고 빈곤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지칭함으로써 근대적 노동계급의 출현에 주목하고 있다. (358면)
44. 헤겔은 빈곤 문제를 완화하기 위한 방법으로 우선 부유한 사람들에게 직접 부담시키는 방법, 즉 과세를 통한 부의 재분배 방법과 병원, 재단, 수도원 등 공적 제도들을 통한 방법을 제시한다. ... 그러나 이런 방법은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는 궁극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고 본다. 이런 방법은 시민사회의 기본 원리, 즉 모든 사람은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삶을 영위해야만 한다는 원칙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요즈음 말로 하면 사회보장제도 덕분에 자신의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에게 생길 의존성 혹은 ‘도덕적 해이’ 등을 염려했을지도 모른다. (364면)
45. 빈민들을 운명에 내맡기는 방법 이외에 시민사회의 내적 모순을 풀 수 있는 방법에 대한 해결의 서술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식민지 개발의 필연성에 대한 통찰일 것이다. 즉 시민사회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부와 빈곤의 양극화는 그 시민사회를 식민지 개척으로 몰아세운다는 것이다. (365면)
46. 경제적 자유주의, 보다 상세하면 설명하자면 오로지 주어진 목적(그것이 도덕적으로 정당한 것인지에 대한 물음을 배제한 채)을 가장 효율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수단을 발견하고자 하는 도구적 합리성만을 갖추고 자신의 이기심을 최대한으로 충족하기 위해 행동하는 개별적 행위자를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이자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 요소라고 생각하는 개인주의를 요구하는 자본주의적 시장경제 체제가 어떤 점에서 한계를 갖고 있는가를 고민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370면)
47. 우리가 진지하게 검토해보아야 할 문제는 자유 지상주의적(libertarian) 혹은 신자유주의적 개인주의가 인간에 대한 총체적인 진실을 드러내주고 있는가, 시장경제 사회를 옹호하는 것이 자유주의의 본령인가, 자본주의적 시장질서와 그것의 사상적 표현인 경제적 자유주의 및 도구적 합리성이 인간의 삶의 전 영역을 지배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하는 것이다. (371면)
48. 자유의 이념은 그것을 실질적으로 보장해줄 정치적․사회적 조건들이 담보되지 않으면 공허하고 추상적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 헤겔의 입장이다. 자연법적 이념이 헌법의 원리로 실정화됨에 따라 이제 국가는 강제력에 의거해서 자연법적 이념의 훼손에 대항할 수 있게 되었다. 헤겔은 자연법적인 이념의 역사적 실현이라는 관점에서 자연법과 실정법 사이를 대립과 모순의 관계로 설정하는 입장을 비판한다. (375면)
49. 헤겔은 독일의 병폐의 하나로 간주되는 법전에 대한 절대적 완전성을 요구하는 태도를 거부한다. 이런 태도가 불충분한 이유는 그것이 법이란 구체적인 인간의 삶의 조건들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서 그 모든 상황에 대해서 세세하게 법으로 규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도외시하기 때문이다. 헤겔의 실정법 이론에서 중요한 것은 특정한 법적 규범들이 갖고 있는 역사적 맥락에 대한 강조이다. 헤겔은 실정법을 다루면서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들을 함께 고려한다. ... 슈네델바하는 헤겔의 사법이론을 “근대적인 법사회학의 전사(Vorgeschichte)"로 이해한다. (384, 385면)
50. 형벌의 사회적 성격이 부각되면 어떤 특정한 범죄 행위를 바라보는 입장이 사회의 상태에 따라서 변화될 수 있다. (385면)
51. “그러므로 자백이 요구되는 경우에 고문은 필연적인 결과이다.” (Ilting) (388면)
52. 헤겔은 재판을 다루는 곳에서 배심원 제도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389면)
53. 헤겔에 의하면 일반 시민들에게 알리지 않고 법적 용어를 시민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외래어로 구성하는 태도야말로 소송 지식을 번잡하게 하여 결국은 모든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어야 할 법률을 일부 특권 계층의 “영리 추구와 지배 도구로 변질”시키게 된다. ... 헤겔은 배심원 제도의 정당성을 논하는 과정에서 다시 전문적인 법률가들의 엘리트주의와 특권의식을 비판한다. “재판관만이 범죄 사실을 확정해야만 한다고 가정할 어떠한 이유도 존재하지 않는다.” (391면)
54. 모래알처럼 흩어진 원자적인 개인들의 군집으로는 근대적인 자유의 이념을 결코 실현할 수 없다는 것이 헤겔의 고유한 통찰의 하나이다. 국가는 “가족과 시민사회가 국가 속에서 전개되는 한에서만” 진실로 “살아 움직인다. 이런 맥락에서 헤겔은 인간의 자유를 보장하고 실현하는 보편적인 제도 및 질서인 헌법을 "매개의 체계”(System der Vermittlung)로 간주하는 것이다. (395면)
55. 시장경제 질서는 작동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문제점들을 양산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은 부자와 빈자의 극단적인 분열이다. 헤겔이 지적하듯이 “빈곤의 발생은 일반적으로 시민사회의 결과이며, 빈곤은 전체적으로 볼 때 시민사회에서 필연적으로 생긴다.” rsm대 시장경제 질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서 일부 사람들은 항상 낙오되고 도태되어 극심한 빈곤 상황에 처한다. 그 결과 그들은 실업과 빈곤 속에서 타인의 소유와 인격적 권리의 훼손, 즉 범죄의 유혹을 받게 된다. (395면)
56. 헤겔은 1817-18년에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겨울학기에 행한 강의에서 모든 사람은 “생존의 권리”(das Recht des Lebens)가 있다고 말하면서 이 권리를 ‘소극적인 권리’가 아니라 ‘적극적인 권리’라고 규정한다. 그뿐 아니라 헤겔은 실업자가 사회에 대하여 “노동의 권리”를 요구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헤겔은 “노동과 생계”의 권리를 “완전한 사회적 참여의 기본적인 필요조건들에 대한 적극적인 권리”로서 이해하고 있다고 마이클 하이몬이 논평하는 것은 적절하다. (399면)
57. 헤겔은 자연적인 재능이나 능력의 불평등과 사회 경제적 계급의 서로 다음에 기인하는 불평등한 관계가 시장경제의 특유한 논리와 결부되어 특정한 개인들을 빈곤한 상태로 몰아가는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이러한 불평등은 우연적인 요소에 기인한 것이므로, 인간의 사회적 생활에서 이것들을 방치한다는 것은 비이성적이다. 인간을 불평등과 빈곤 상태로 몰고 가는 우연적인 요소들을 방치한다는 것은 이성의 자율성 이념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헤겔은 가족의 위치와 역할을 떠맡는 “보편적 힘”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보편적인 힘이 조합이다. (401면)
58. 헤겔이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근대 산업 사회에서 공통의 직업을 갖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발적으로 구성되는 직업단체들이다. 이런 점에서 헤겔의 직업단체는 현대의 노동조합과 매우 유사하지만, 사용자와 고용주를 모두 포함한다는 점에서 노조와는 구별되는 독특한 조직 형태이다. (402면)
59. 헤겔은 직업단체의 활동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직업단체가 담당하는 활동 전반을 “제2의 가족”의 역할에 비유한다. 즉 직업단체는 그 구성원들에게 가족이 담당하는 역할을 수행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404면)
60. 첫째로 직업단체는 시장사회의 파괴적 성격을 보완하는 역할을 한다. (405면)
61. 헤겔은 “각자가 단지 자기를 배려하고 공통적인 것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을 “원자론의 원리(das Prinzip der Atomistik)라고 부른다. 이 원자론의 원리는 극복되어야 한다. 시민사회에서 등장하는 다양한 직업단체는 이 사적인 개인에게 자신의 특수한 이익의 지평을 넘어서 동료들과 협력하는 관계를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다. (406, 407면)
62. 둘째로 직업단체는 사회적 인정의 기초로서의 기능을 담당한다. (407면)
63. 직업단체에서 시민들은 단순히 인간으로서 보편적인 인격적 존재라는 의미에서 인정을 받는 데 그치지 않고 그가 갖고 있는 특수한 능력의 발현을 통해서 인정받기 때문이다. 이런 인정의 방식을 호네트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사회적 가치 부여를 통한 인정”으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호네트에 의하면 “사회적 가치 부여를 통해 인정하는 것은 인간의 개인적 차이를 특징짓는 특수한 속성들이다.” 호네트가 지적하듯이 권리의 보편적인 인정과 구별되는 사회적 가치 부여를 통한 인정의 방식은 헤겔이 인륜성 개념을 통해서 전개하고자 한 것이다. 이 인정의 방식에서 중요한 것은 개개인이 갖는 자신의 독특한 능력을 인정받음으로써 스스로를 가치 있는 존재로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사회적 가치 부여를 통한 인정은 개별적인 존재가 자신을 개성있는 존재로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호네트는 이런 인정의 형태를 사랑과 권리를 통한 인정과 구별되는 “사회적 연대성”의 인정 형식이라고 부르는데, 놀랍게도 헤겔 역시 직업단체에서의 인정의 독특함을 서술하는 과정에서 “연대적”(soliarisch)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409면)
64. 셋째로 직업단체는 정치적 기능을 담당한다. 직업단체는 의회에 대의원을 파견하는 기회를 갖는다. 직업단체는 시민사회가 타락하고 해체하는 경향을 막아주는 방파제일 뿐 아니라, 시장과 국가와 구별되는 중간 영역을 창출하여 국가 권력의 관료제화와 중앙 집권적인 권력의 등장을 어렵게 만든다. (409면)
65. 이들 영역에서 개인들의 복지, 헤겔이 용어로 표현하자면 “특수한 복지”가 개인들의 정당한 “권리로서 다루어지고 실현되어야 할” 주제로 논의되기 때문이다. (410면)
66. 예어만이 지적하는 것처럼 헤겔에게서 영향을 받은 수많은 사람들이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공산주의에 대한 “가장 이성적인 대안”인 근대적인 사회국가이론을 발전시키는 데 크게 공헌한 사람은 로렌츠 폰 슈타인이었다. (411면)
67. 법의 원칙을 규정할 때 인간의 행복을 철저하게 배제하는 이유는 칸트의 보편주의적 윤리학의 성격에 기인한다. 법의 개념이 행복과 전혀 관계가 없는 이유는, 행복과 관련해서는 일반적으로 타당한 원칙이 있을 수 없다고 칸트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414면)
68. 시민사회의 자율성을 보장하면서도 인간의 자유를 가능하게 할 여러 가지 전제조건들을 자신의 인륜성 이론에 통합하는 헤겔의 정치이론은 극단적인 시장경제 자유주의와 중앙 집권적인 통제경제의 양극단을 피할 수 있는 관점을 제시한다. (417면)
69. 하이예크는 자유주의를 시장경제의 자율적 조절 능력에 대한 낙관적 믿음으로 이해한다. (421면)
70. 하버마스에 의하면 사회복지국가가 유럽에서 성공적으로 관철된 후에 “날로 팽창하는 국가관료제가 자신의 수혜자(Klienten)의 개인적 자기결정을 제약하고 있음을 인식하지 못하는 ”둔감성“을 보여주었다. ... 사회복지국가의 법이론이 사적 자율성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을 드러내지 못했다면, 자유주의적 법이론은 사회 문제에 대한 무관심으로 인해 ‘사회적 맹목성’이라는 정반대의 약점에 노출되어 있다. (423면)
71.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근대에서 광범위한 빈곤은 사회적 긴장과 갈등으로 표출되는데, 헤겔은 그 표출을 이해할 때 단순한 경제적 이해관계의 틀을 넘어서 갈등의 근원 속에 도덕적 동기가 존재함을 강조한다. 빈곤에 빠진 사람은 자신의 노동을 통해서 자립적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상황에 직면하여 커다란 절망감과 자존감의 상실을 겪는다. 이 자존감의 상실은 근대 사회가 자립과 책임의 원리를 인격의 기본적 원리로 상정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더 뼈저리게 다가온다. 물론 근대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은 그들이 보편적으로 갖고 있다고 믿는 평등한 인격체로서의 권리가 훼손당했다는 감정만을 갖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이런 추상적인 권리가 침해당하고 있다는 사실뿐 아니라, 그들이 사회에서 가치 있는 존재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좌절하는 것이다. 헤겔이 지적하듯이 자선사업 단체의 도움이나 사회 및 국가의 물질적 도움이 가난한 사람들의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것은 그런 조치들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삶 자체가 바로 시민사회의 기본 원칙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타인이나 사회의 도움에 의존하고 있는 사람들은 한편으로 “시민사회를 구성하는 개인들의 자립심과 명예의 감정”을 손상당하고 있음을 느낀다. 다른 한편으로 타인이나 사회에 의존해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빈곤한 사람들은 수치심과 명예까지도 잃을 정도로 정신적, 육체적으로 타락할 위험에 놓이게 된다. (431면)
72. 이처럼 헤겔은 근대 사회의 빈곤 문제를 언급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의 자존감 및 명예심의 상실을 가장 결정적인 문제로 포착한다. 사회에 대한 내적인 분노와 저항의 근원에는 이런 도덕적 인정 욕구의 좌절이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헤겔은 날카롭게 분석하고 있다. (431면)
73. 호네트는 헤겔의 “인정투쟁”을 “인간의 사회적 생활 현실 내부에서 발전과 진보를 가능하게 하는 도덕적 힘”으로 이해한다. 그는 헤겔의 인정투쟁 이론을 적절하게 현대화하여 “비판적 사회이론의 길잡이”로 삼으려고 시도한다. 그에 의하면 헤겔은 마키아벨리나 홉스와는 달리 주인과 노예의 투쟁을 자기 정체성 요구를 인정받기 위한 투쟁으로 해석함으로써 “인간들 사이의 사회적 갈등의 원인을 도덕적 요구가 훼손당한 경험에서 찾는 사상적 움직임의 선구” 역할을 담당했다. (432면)
74.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헤겔은 사회적 갈등과 투쟁의 배경에는 인간의 도덕적 감정의 훼손에 대한 경험이 깔려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433면)
75. 후쿠야마에 의하면 헤겔은 인간을 타인을 통해서 자기 자신의 가치와 자긍심을 인정받으려는 속성을 갖고 있는 존재로 바라보고 있으며 이런 인정에 대한 욕구를 바로 인류 역사 전체를 움직여가는 힘으로 이해했다. (433면)
76. 우리는 실제로 극단적인 시장경제 만능주의와 중앙 집권적인 계획경제 모델과는 구별되는 대안의 한 예를 독일의 사회적인 시장경제 이론에서 찾을 수 있다. (434면)
77. 주지하다시피 사회적 시장경제 이론의 이념적 기초를 제공했던 것은 발터 오이겐이 주도적으로 발전시킨 질서 자유주의이다. (435면)
78.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유럽의 사회복지국가가 안고 있는 문제점 중의 하나는 사람들을 복지 시스템에 의존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437면)
79.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최소한의 생계 및 건강 유지를 위한 물질적인 혜택과 더불어 사회 구성원들이 스스로 의미 있는 삶을 실현하는데 필요한 조건들을 형성하는 작업이다. 이런 시각은 내가 보기에 헤겔의 관점에 더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437면)
80. 헤겔은 정치적 삶과 사적인 삶,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양분론적 관점에서 벗어나 있다. (440면)
81. 헤겔에게서 인륜적 이념의 최고 형태는 주지하다시피 바로 국가이다. (440면)
82. 회슬레와 더불어 호네트 역시 헤겔의 인륜성 개념이 규범적인 정치철학을 함축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는 ‘인정투쟁’에서 헤겔의 인정투쟁의 이념을 기초로 하여 인륜성의 새로운 기획을 발전시키려고 노력한다. 이때 그는 이러한 기획은 “인륜성의 형식적인 기획”(ein formales Konzept der Sittlichkeit)이라고 명명한다. ... 이러한 인륜성의 개념과 함께 호네트는 “인간의 도덕적인 자율뿐 아니라 인간의 자기실현의 조건 전반”을 문제삼는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행복한 삶의 실현이라는 보편적인 목적에 도움이 되는 “보호장치들”이다. 이러한 문맥에서 호네트는 형식적인 인륜성 개념을 특정한 공동체의 습속을 이루는 “실체적인 가치 체계의 표현”으로서가 아니라, “자기실현을 의사소통적 방식으로 가능하게 한다는 보편적인 관점에서 모든 특수한 삶의 형태들의 다양성과 규범적으로 대조를 이루는 인륜성의 구조적인 요소들”로 이해한다. 결국 형식적인 인륜성의 개념은 인간 개개인의 자기실현의 필연적인 조건으로서 파악되는 “상호주관적인 조건들의 총체”(das Insgesamt an intersubjektiven Bedingungen)로 정의된다. (561, 562면)
83. 호네트는 이러한 형식적인 인륜성의 개념으로, 칸트적인 내용이 없는 형식주의적인 윤리학과 특정한 사회에서 관철되는 선에 대한 표상이나 가치 체계를 절대화하는 경향을 보이는 공동체주의적인 윤리학의 일면성을 극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호네트는 인간의 자기실현을 가능하게 해주며,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 데 필수 불가결한 구조 내지 전제들로서 사랑, 법 그리고 연대성의 세가지 인정의 형태들을 구체적으로 열거한다. (562면)
84. 헤겔은 말한다. “세계가 어떻게 존재해야만 하는가에 대한 가르침에 한마디를 하기 위하여 철학은 어쨌든 항상 너무 늦게 온다." 철학은 항상 너무 늦게 오기 때문에 이제 철학은 한 시대가 일정한 종말에 이르게 되었을 때, 시대가 이미 성숙한 단계에 이르렀을 때에야 비로소 그 시대의 기본적인 원리를 개념적으로 파악하여 이를 명료화하는 과제를 떠안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법철학’ 서문의 끝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철학이 자신의 회색에 회색을 겹쳐 그릴 때, 이미 생의 모습은 늙어버리고 난 후이며, 회색을 회색으로 덧칠함으로써 생의 모습은 젊어지지 않으며, 오로지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이 짙어지면 비로소 날기 시작한다.“ (563, 564면)
85. 미네르바의 올빼미에 대한 헤겔의 주장은 역설적이지만 비판적 기능이 존재한다고 아비네리(Avineri)는 주장한다. 헤겔의 주장대로 철학이 미네르바의 올빼미라면, 철학은 곧 한 시대가 성숙해서 이미 종말에 이르렀다는 것을 말해주는 작업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564면)
86. 현재는 전 지구적 세계화의 진전에 조응하는 새로운 윤리와 새로운 사회, 정치철학의 모색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상황이다. (626면)
87. 국민국가의 다수성이라는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전 지구적 차원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효율적이면서도 민주적인 방식으로 작동하는 세계시민사회를 형성할 수 있는 토대들을 구축하는 것이 보다 더 시급한 과제이다. 이런 고민의 과정에서 보편주의의 추구와 다양성 혹은 차이의 긍정은 서로 양립불가능하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62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