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 동반성장, 자본주의 정신
정운찬 지음 / 파람북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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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은 자본주의를 번영시키지만, 자본주의는 불평등을 야기한다. 참으로 거대한 아이러니다.

이번에 읽은 책 <한국경제, 동반성장, 자본주의 정신>은 우리 사회의 이 거대한 아이러니 중 한군데를 조명한 책이다. 우리가 보통 자본주의 혹은 불평등을 이야기 할 때, 진보 언론에서 주로 다루는 것은 노사 관계다. 하지만 과연 우리사회에서 불평등을 야기하고 있는 것은 과연 그것 뿐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노노 관계에서도 아이러니가 발생하고 있으며, 사사관계에서도 아이러니는 발생한다. 노노 관계에서 보면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차이. , 노동시장 양극화 문제가 가증 심할 것이고, 사사 관계에서의 문제는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기업간의 불공정 문제가 대표적일 것이다.

그동안 나는 신문에서 몇 차례 동반성장에 대한 이야기를 본 적이 있다. 하지만 대개 내가 읽었던 것들은 뭔가 집대성 돼 있기 보다는, 동반성장이라는 가치와 우리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특정 사례가 나오는 것들로, 상당히 거칠게 연결돼 있는 것들이었다. 물론,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적어도 한쪽으로 치우친 입장을 갖고 있었을 때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동반성장의 논리는 경제권력에 의해 공격을 받고 있으며, 중소기업과 같은 이해관계자가 아닌 일반 시민들의 입장에서도 충분히 공감하는 면은 많지 않았다. 시민들의 욕구는 대기업이나 공기업을 지향하고 있으며, 그곳이 독점하고 있는 것들을 합리화하는 논리를 자신의 것으로 체화하고 있기도 하다. 노노 갈등에서는 이러한 것들이 벌써 나타나고 있다. 때문에 노동자들에게는 인기가 없고, 재계와 같은 곳에서는 공격받고 있는 게 동반성장이 처한 상황이었다.

이 책 <한국경제, 동반성장, 자본주의 정신>은 꽤 얇은 책이다. 200페이지도 넘지 않는다. 또한, 엄청나게 학술적인 책 또한 아니다. 하지만 이 얇은 책은 우리사회에 동반성장이 왜 필요한지의 문제에 대해서, 다양한 측면으로 보여주고 있다. 기본적으로 이 책은 동반성장과 관련해 잘 정리된 책이다. 동반성장이 단순히 사람들의 정의감을 만족시켜주는 이론 혹은 가치를 넘어서, 우리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위해서 왜 필요한지, 저자인 정운찬 교수는 이야기 해주고 있다.

나아가 이 책의 백미중 하나는 3장이다. 바로 애덤스미스가 주창한 진정한 자본주의가 어떤 것인지 나온 부분이다. 이번 기회에 알게 됐는데,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은 모두가 알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쉬운 책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보통 학교 경제학 시간에 간단하게 <국부론> 내에 있는 몇가지 개념에 대해서 알고 있는데, 어쩌면 우리가 현재의 자본주의를 애덤 스미스가 추장한 것으로 넘겨짚는 것도 여기에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이 책에서 정운찬 교수는 <국부론><국부론>의 바탕이 되는 철학책 <도덕 감정론>의 텍스트를 분석하여, 애덤 스미스가 진정으로 바랐던 자본주의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애덤 스미스가 이야기한 보이지 않는 손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려준다. 그리고 이를 통해 자본주의에 대한 의도적 오독해 자신들에게 맞는 논리로 이용하고 있는 재계의 논리를 비판한다.

어찌 보면 이 책의 경제학을 다루는 층위 그리고 우리 경제를 분석하는 수준은 그렇게 높지 않다. 하지만 솔직히 저자의 스펙을 봤을 때, 이는 시민들의 눈높이에서 우리 경제의 문제를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저자가 의도적으로 쉽게 설명한 것 같다(그런 면에서 참 착한 책이기도 하다). 또한, 이 책의 곳곳에는 저자의 경험담이 실려져 있다. 동반성장위원회 위원장을 한 사람으로서 그가 해당 문제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으며, 보수정부 안에서 동반성장 문제에 대해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 그 내밀한 것까지 나는 알 수 있어 재미있게 읽었던 것 같다.

 

우리는 아직도...

어찌 보면 이 책은 안타까운 책이다. 이 책의 내용 자체가 아니라, 이 같은 텍스트가 나온다는 우리나라 현실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경제와 관련된 논의를 하는 층위가 이 책의 저자인 정운찬 선생이 총리를 하던 시절과 그렇게 변하지 않았다. 이 책에도 등장하고 있는 애덤스미스의 <국부론>에 대한 의도적 오독은 계속해서 진행중이다. 힘에 의해 애덤 스미스의 논리가 점령됐다고 봐도 될 것이다. 보다 높은 차원의 경제의 문제(가령, 칼 폴라니의 사상)에 대해,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도 논의되고 있지 않다. 그리고 이 같은 현상이 벌어지는 이유는, 이 책의 저자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자신들의 기득권을 놓지 않기 위해서가 아닐까. 더 높은 차원으로 공정하게 된다는 것이, 자신들에게 득이 될 게 없으니, 현재의 전선이라도 유지하려고 애쓰는 게 그들의 모습인 게다.

나는 이 책이 오랫동안 팔리기를 원치 않는다. 이 책은 슬픈 책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경제민주화를 외친 게 2012년이다. 하지만 10년이 다 돼가는 데, 그녀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던 구호가 얼마나 정책으로 만들어져 현장에서 시행되고 있는지 모르겠다. 10년이 다 돼가는 현재 내가 본 것들은, 동반성장을 하지 않았기에 나타나는 일련의 사회적 문제들이다. 1차 노동시장에 있는 노동자들은 코로나의 타격을 거의 받지 않는 반명, 2차 노동시장의 근로자들은 코로나 바이러스에 취약한 상태에서 거칠게 노동을 하고 있다. 노동자는 노동자와 연대하지 않으며, 기업은 기업과 연대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모두 이약을 사유화에 집중할 뿐이다. 만약 저자가 이 주제와 관련해 2권을 낸다면 비극적인 사례로 될 것들이 계속해서 쌓이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 나는 저자가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했다고 생각을 한다. 학자의 역할은 여기서 끝이다. 이제는 문제를 푸는 주체들이 할 일만 남았다. 동반성장을 하지 않는 것이 우리 사회 전반에 어떤 문제가 되는지, 다수에게 호소를 했다. 그렇다면 그 다수가 현재의 질서를 유지할지 아니면, 아니면 변화를 도모할지의 일만 남았다. 그러나 이 일이 잘 될 것 같지는 않다.

 

이 채의 주옥같은 문장들

[머리말]

나는 사회적으로 용인할 수 있는 격차와, 용인하면 안 되는 격차가 있다고 생각한다. 먼저 용인할 수 있는 격차는 기회 평등을 바탕으로 한다. 그러나 기회가 평등하지 않은 상황에서 발생하는 격차는 수용할 수 없다. 만약 기회가 평등하게 주어지지 못한다면 적극적으로 개선해나가야 한다.

또한 불공정한 상태를 방치하여 만들어진 격차, 혹은 부정행위로 만들어진 격차 역시 수용할 수 없다. 시장경제 체제에서 경쟁이 효과적으로 기능하도록 만들어진 규칙과 감시기구가 중요한 이유는 시장의 공정성과 투명성을 확보하여 구성원들에게 신뢰를 얻기 위함이다.

한편, 기회가 평등하게 주어지고 경쟁이 공정하게 이루어지더라도, 어쩔 수 없이 승자와 패자가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패한 구성원과 승리한 구성원 사이에 격차가 너무 벌어져 마침내 양극화가 고착되는 것도 용인해서는 안 된다. - 5pp

 

1. 한국 경제, 어떻게 해야 하나

[규제 완화가 능사는 아니다]

투자활성화 정책의 또 다른 모습은 규제 완화다. 기업은 체질적으로 규제를 좋아할 수 없다. 자유로운 기업 활동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경제위기 20년 이상 동안 정부가 투자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많은 규제를 완화했으나 아직도 기업들은 투자를 가로막고 있는 규제가 너무 많다고 입을 모은다. 불필요한 규제를 없애려는 노력이 아직 부족하다고 주장한다. 하나의 규제를 없애면 그보다 그 많은 규제가 새롭게 만들어져 투자 환경이 개선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끝없이 규제 완화를 요구하는 기업들의 주장을 자세히 따져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

첫째, 사회에 필수불가결한 규제들이 있다. 가장 단적인 예가 금융 규제와 환경 규제다. 먼저 금융기관의 건전성과 관련된 규제, 업무 영역에 관한 규제 등은 함부로 없애서는 안된다. 물론 이와 같은 규제들은 금융회사들에게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이런 규제들을 섣불리 완화했다가는 금융권 전체가 혼란에 빠질 수 있다. 2008년 미국에서 발생한 글로벌 금융위기는 규제를 지나치게 완화했기 때문에 발생한 비극임을 잊어선느 안 된다.

또한 기업들이 환경 규제 때문에 승인이 나지 않아서 공장을 원하는 시간에 짓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환경 관련 규제를 무작정 없애버릴 수 없다. 환경문제처럼 부정적인 파급 효과가 큰 사안에 대해서는 규제 완화만이 능사가 아니다.

둘째, 기업들의 공정한 경쟁을 보장하기 위해서 철폐할 수 없는 규제들이 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거래에서처럼 사업자 간 힘의 불균형으로 공정한 거래가 이루어지기 어려운 분야에서 관련 기업들이 상생 협력하도록 시책을 추진하고, 위반 기업에 대해서는 시정 조치를 하는 것이 그 예다. 또한 하도급거래의 원사업자와 수급사업자, 유통 분야의 대형 유통업체와 납품업체, 가맹점본주와 가맹사업자 등의 거래에서, 우월적 지위를 가진 사업자들이 그 지위를 남용하는 행위를 규제하는 것도 공정 경쟁을 보장하고 페어플레이를 유도하기 위해 불필요한 규제다. - 27pp

 

[대기업, 중소기업 간 양극화 해소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나]

중소기업은 어떤가. 최고급 기술은 아니지만 투자하고 싶은 곳은 많으나 자금도 부족하고 인력도 부족하며 무엇보다 수익률이 너무 낮다. IMF 경제위기 이후 가계로 흘러가지 않은 기업 소득은 주로 대기업 것이고, 중소기업의 수익률은 대기업의 3분의 1밖에 안된다. 그 주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대기업의 중소기업에 대한 불공정 행위, 특히 납품가 후려치기 때문이다.

따라서 투자할 여력은 없지만 투자하려는 의지가 있는 중소기업에게 대기업의 투자 여력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연결시킬 것인지, 즉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효율적인 자원 배분을 어떻게 이끌어낼 것인지에 대해 앞으로 정부의 정책 역량이 집중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한국 경제의 새로운 도약르 위한 마법의 열쇠가 대기업, 중소기업 간 동반성장에 있다는 주장의 논거다. - 36pp

 

[동반성장은 우리 사회의 -할 수 있는 성장전략이다]

동반이라는 앞부분에만 고정되어 있는 시선을 조금만 넚혀 보면 성장이라는 말이 함께 시야에 들어온다. 지금 우리 경제는 재벌 중심의 경제력 집중이 도를 넘다 보니 경제 전체가 역동성을 성실한 상황에 이르렀다. 기업 부문의 역동성이야말로 자본주의 성장의 핵심이다. 따라서 이러한 경제력 집중 문제를 서둘러 해결하지 못한다면, 한국 경제는 지속적 성장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동반성장은 말 그대로 낙수효과와 분수효과의 선순환을 통해 지금의 과도한 경제력 집중을 해결하고 성장의 과실을 부유층과 빈곤층,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함께 나눔으로써, 우리 사회가 -할 수 있는 균형 성장전략이다. - 52pp

 

2. 자본주의의 참모습

[이윤 극대화의 전제조건: 게임규칙의 준수]

법률을 지키는 것만이 다가 아니다. 프리드먼은 정확히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하나가, 그리고 단 하나가 있다. 그것은 기업이 게임의 규칙 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그 기업의 이익을 증가시키는 활동에 자원을 사용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공개되고 자유로운 경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게임의 규칙이란 무엇을 말하는 걸까? 프리드먼은 여기에 대해 그다지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지는 않다. 다만 법률보다 광범위한 개념임은 분명하다. 자본주의 시장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유무형의 규칙 정도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법률 조항처럼 명문화하기는 어렵더라도 경제활동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느낄 수 있는 규칙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어길 경우 법률에 저촉되어 구속되지는 않더라도, 시장 참여자들의 지탄을 받을 만한 일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처럼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시장경제 원리에는 법률과 게임의 규칙을 준수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있다. 규칙을 지키고 법률을 준수하며 최선을 다해 이윤을 극대화하라는 말에 틀린 점은 없다. 그런데 왜 우리나라에서는 자유주의자들이 강조한 게임의 법익 안에또는 법률을 준수하는등의 핵심 전제조건들은 무시되고 오로지 이윤 극대화라는 결과만 강조되었을까? - 65pp

 

[완전경쟁 시장에서는 참여자들이 서로 독립적이고 비슷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경제학의 완전경쟁도 대수의 법칙과 거의 똑같은 전제조건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즉 대수의 법칙의 전제조건처럼 완전경쟁 시장도 모든 참여자들이 서로 독립적이어서 한 사람의 선택이 다른 사람에게 의미 있는 영향을 주지 말아야 하며, 그 사람이 시장에 표출하는 수요나 공급의 규모가 서로 비슷비슷하게 작아야 한다는 조건을 전제한다. 만약 시장 참여자들의 크기가 서로 비슷하지 않거나 서로 독립적이지 않다면, 다시 말해 시장에 미치는 영향력이 서로 다른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들이 모여 있는 시장은 완전경쟁 시장이라고 할 수 없다.

국제정치 분야에서도 비슷한 생각을 만날 수 있다. 이른바 세력 균형이란 개념이 그러하다. 유럽 대륙에 존재하는 여러 나라들 가운데 어떤 나라도 군림하는 위치를 차지하지 못하도록, 모든 유럽 국가들이 비슷비슷하며 강하지 않은 상태로 쪼개져 있을 때,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유럽 전체의 후생이 극대화된다는 개념이다. 루이 14세 때의 리셜리외 추기경이 독일을 300여 개의 군소 왕국으로 나누어놓은 정책을 견지해나갔던 것은 세력 균형 이론의 대표적 성공사례다. 물론 이것은 프랑스와 독일을 염두에 두고 고안해낸 외교정책 방향이었지만, 적어도 독일 내부의 사정만 보면 서로 동등한 영향력을 간진 주제들이 독립적으로 경쟁할 대 하나의 질서를 이룰 수 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 74pp

 

[정부의 역할은 무엇인가?]

전제조건이 충족되지 못한 시장에서 아무런 제약 없이 경쟁이 일어나면 경제 전체와 후생이 극대화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소할 가능성이 있다. 공정한 경쟁 시장을 만들기 위해 정부가 적극 나서야 하는 이유다. 성장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경쟁은 공정한 경쟁이 아니다. 경쟁에서의 불공정성은 결국 규칙의 문제다. 함께 경쟁하려면 최소한 공정한 규칙이 주어져야 한다. 무조건 똑같은 출발선에 세워놓고 달리라는 것은 공정한 규칙이 아니다. 평소에 좋은 음식을 섭취하고 전문 코치에게 훈련을 받은 선수와 끼니를 겨우 때운 선수가 나란히 출발선에 섰다고 해서 공정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재벌 대기업들이 설사 게임의 규칙을 준수하고 모든 법률을 지켜가며 경쟁을 하고 있다고 해도 그 힘은 중소기업에 비해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막강하다. 그들의 영향력은 경제 영역을 넘어선지 오래다. 교육, 지역, 문화 등 재벌 대기업들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다. 사회 공동체의 미래를 위해서도 감시와 규제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정부는 중소기업이 중견기업으로 커가고 중견기업이 대기업으로 성장할 기회를 고르게 주고, 그 과정에서 공정성도 담보될 수 있도록 시장의 엄정한 감독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 헌법은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하라고 했다. 또한 기회 균등을 전제로 각자의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자고도 했다. 따라서 기회를 가로막는 장애요인에 있다면 제거해나가는 것이 헌법 정신에도 맞다. 이제 정부는 좋은 기업이 많이 나올 수 있도록 공평한 기회와 환경을 조성하는 데 힘써야 한다. 기업은 공평한 기회 속에서 치열한 경쟁을 통해 자라야 건강하고 올바르게 성장한다. 그렇게 성장한 기업이 좋은 기업이고, 좋은 기업이 많아야 그 나라의 경제가 발전한다. - 78pp

 

[1997년 말 외환위기의 경우]

심지어 IMF 외환위기라는 엄청난 고통을 겪는 와중에서도 위기 초래의 당사자였던 재벌에 대해 우리 국민들은 관대했다. 그동안 가려진 재벌들의 부실한 체질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위기의 근본 원인이 재벌 대기업들의 무리한 과잉투자였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우리 국민들의 세금으로 살려냈다. 시장의 논리를 적용한다면 많은 대기업 퇴출당해야 했다. 하지만 중소기업들이 줄줄이 도산하고 수많은 기업들이 길거리에 나앉는 비극을 겪으면서도 그들을 살리는 데 동의했다.

168조 원의 공적자금 투입 과정에서 정부와 금융기관에 대해 질책했을 뿐, 경제위기의 근본 원인이라 할 재벌의 과잉투자에 대한 질책은 별로 하지 않았다. 당시 일부 오피니언 리더들이 재벌 개혁을 위해 좀 더 강력하고 엄정한 책임 추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지만 실현되지 않았다. 이는 정부나 정치권이 재벌에 대해 관대했다는 데에 직접적인 이유가 있겠지만, 그 배경에는 그러한 주장이 일반 국민들로부터 그다지 호응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당시 우리 국민들은 재벌 가운데 일부 기업이 사라지는 것만으로 충분하고 그 이상의 질책은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2008,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 발생을 전후하여 일반 국민들의 재벌 대기업에 대한 호감도는 과거에 비해 확연하게 달라졌다. - 85pp

 

[천재 한 사람이 수만 명을 먹여 살렸는가?]

천재 한 사람이 만 명을 먹여 살린다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어떤 천재들은 내가 돈을 벌어야 일자리가 만들어지니 내가 하는 일에 간섭하지 말라고도 했다. 일반인들은 그 천재라는 사람들이 마음껏 일할 수 있는 활동 영역을 만들어줘야 나와 같은 사람들과 먹고살 수 있지 않겠나하는 막연한 기대를 하기도 했다. 소위 낙수효과를 기대하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 겨과를 놓고 보니 그 천재는 수만 명을 먹여 살렸던 게 아니라 제 식구들 배만 불린 경우가 많았다. 그들을 위해 많은 것을 양보했던 일반인들은 배신감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월가를 점령하라시위가 일어난 이유는 세금으로 구제받은 은행 임직원들이 위기 이전보다 보너스를 더 많이 챙겼다는 사실로 사람들이 분노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너스를 챙긴 사람들은 천재 소리를 듣던 이들이었다. 그런 천재들이 벌인 희대의 쇼는 평범한 사람들이 봤을 때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비상식이자 탐욕이었다. ‘천재 한 사람이 만 명을 먹여 살린다는 패러다임의 지배원리는 다름 아닌 탐욕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 92pp

 

3. 자본주의의 기본정신으로 돌아가자

[보이지 않는 손의 정체는 무엇인가]

애덤 스미스는 공정한 관찰자의 판단을 따르는 현명함이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역할을 하는 반면, 각자가 자기기만에 의해 공정한 관찰자의 판단을 무시하려는 연약함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사회를 번영으로 이끄는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는 보이지 않는 손이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연약함에서 오는 이기심이 방임되어서는 안 되고 현명함에 의해 제어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애덤 스미스에 의하면 인간 마음속의 연약함을 따라 세상의 평가를 중시하여 부와 지위를 좇는 이기심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사회 전체의 부를 증가시키고 많은 사람들 사이에 생활필수품의 분배를 가져온다. 한편 인간 마음속의 현명함은 공정한 관찰자의 판단에 따라 최저 수준 이상의 부를 갖는 것이 행복, 즉 마음의 평온에 큰 차이를 가져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정의를 추구한다. 그리고 생명, 신체, 재산, 명예 등을 침해하는 행위에 대한 처벌이 공정한 판단으로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 정의에 관한 엄밀하고 보편적인 사회적 규칙, 즉 법을 정해놓는다.

그런데 애덤 스미스는 사람들이 처음부터 사회질서 유지에 정의가 필수불가결하다고 생각해서 법을 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정의를 불러일으키는 분노를 본성적으로 싫어하기 때문에 법에 의해 그 분노를 제어하려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법을 지키는 것도 본성적으로 비난받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러한 동기에 의해 법을 정하고, 그것을 지킴으로써 평화롭고 안전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 본성인 이기심이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시장의 가격 매커니즘인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사회의 번영을 가져오듯이, 분노를 느끼고 싶지 않고 비난을 받고 싶지 않은 마음속 공정한 관찰자가 직접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법치주의라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사회질서를 가져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얼핏 보면 국가와 공권력이 수반된다는 점에서 법치주의는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 이변에는 법치주의가 분노를 통제하고 비난받는 삶 대신 평화로운 생활을 누리려고 하는 동기의 의도치 않은 발로라는 점에서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경쟁에서 마음속 현명함을 우선시하여 페어플레이 규칙을 따른다면, 이기심의 보이지 않는 손과 공정한 관찰자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사회 질서가 유지되고 사회는 번영한다. 반대로 사람들이 연약함을 우선시하여 페어플레이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사회질서는 어지러워지고 사회의 번영도 제대로 실현되지 않는다. 사회를 질서와 번영으로 이끄는 것은 현명함과 모순되지 않는 연약함을 추구하는 것. 다시 말해 정의감에 의해 제어된 야심과 경쟁이다. 즉 경쟁이 페어플레이 규칙에 따라 이루어지면, 국가는 두 가지 인간 본성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질서와 번영을 이룰 것이다.

오늘날 세계의 많은 나라가 민주주의를 채택하여 사람들이 자유를 누리며 살게 된 데에는 각 나라 정치인과 철학자, 사회운동가, 교육자, 오피니언 리더 들의 보이지 않는 고뇌와 희생, 지도력이 숨어 있다. 애덤 스미스에게 이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마음속 공정한 관찰자의 판단에 따르는 사람, 현명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오늘날 인류가 과거에 비해 정치, 경제, , 문화적으로 훨씬 다양하고 풍부한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된 것은 수많은 현자들의 보이지 않는 열정에 기인한다. 이런 의미에서 현자들의 보이지 않는 열정이야말로 애덤 스미스가 말한 보이지 않는 손의 정체다. 수많은 현자들의 열정 때문에 경제가 돌아가고, 사회후생이 비로소 극대화 될 수 있었다. 이런 열정은 돈만으로는 다 설명되지 못한다. 돈으로는 그런 ㅇㄹ정을 살 수도 만들어낼 수도 없다. - 139pp

 

[‘보이지 않는 손은 누구의 손인가?]

도덕법칙에 대해 애덤 스미스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도덕적 능력이 지시하는 대로 행동함으로써, 우리는 필연적으로 인류 행복 증진의 가장 효과적인 수단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신과 협력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고, 우리의 힘이 닿는 한도까지 신의 계획을 시행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언급은 스미스의 특정적인 주제인, 인간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그의 원래의 의도와 관련이 없던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는 견해를 설명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손에서의 손은 누구의 손인가? 그것은 신의 손이다. 신의 손에 따라 인간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가 의도하지 않았던 것을 이루게 되는데, 경제원론에서는 그것을 효용의 극대화, 이윤의 극대화라고 가르친다. 하지만 스미스가 말했던 것은 인류의 최대 행복이었다. 보이지 않는 손에 따라 자기도 모르게 이루는 되는 것은 인간을 최대한 행복하게 만들고자 하는 신의 계획이다.

신의 손은 어떻게 인간을 움직이는가? 인간이 지니고 있는 도덕적 능력을 통해서다. 도덕적 능력이 지시하는 대로 움직이는 것이 바로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덕법칙이 지시하는 대로 움직여야 사회적 후생이 최대화될 수 있다. 도덕법칙을 따르지 않고 정의법칙만 따른다면, 즉 처벌받지 않을 정도로 최소한의 법률만 지키는 식이라면 그 사회의 행복은 절대 극대화되지 못하는 것이다. - 140pp

 

[자유방임적 자유주의보다 동반성장이 애덤 스미스의 철학에 더 가깝다]

정부는 가급적 전면에 다서지 말아야 하며 일을 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좋다. 그래야 경제가 가장 효율적으로 발전할 수 있고, 모든 사람들의 후생이 극대화된다. 이것이 바로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의 가르침이대. 여기에서 벗어나는 생각은 자본주의의 원리를 모르는 무식하고 불순한 사상이다. 이것이 동반성정에 대한 그들의 비난이다.

그러나 동반성장이야말로 재벌 대기업이 좋아하는 신자유주의적 사상보다 훨씬 더 애덤 스미스의 본래 사상에 가깝다. 나아가 친재벌 이념가들이 말하는 자유방임적 완전경쟁 시장보다 우리 경제가 추구해야 할 자본주의의 참모습이 더 가깝다. 애덤 스미스는 그들이 믿는 것처럼 경쟁을 하도록 내버려 두기만 하면 사회 전체의 후생이 저절로 극대화된다는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인간이 이기심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유롭게 경쟁하도록 놔두면 보이지 않는 손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거라도 믿는다. 이런 생각은 인간이 이기심만을 추구하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오해를 낳게 한다. 이기심만 가득한 이익 추구는 탐욕이다. 물론 탐욕도 인간의 본성이다. 그러나 탐욕은 인간의 본성 중에 절제되어야 하는 부분이다. 자본주의와 시장이 탐욕까지 용납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착각이다. 자본주의는 탐욕과는 원래 아무 상관이 없다. 자본주의를 조금이라도 제대로 공부했다면, 자본주의는 정당한 이익 추구를 보호하려는 것이지 탐욕 추구까지 보호하기 위한 것은 아니라는 상식을 갖고 있을 것이다.

애덤 스미스는 이기적이기만 한 인간들이 모여 있는 사회가 제대로 굴러갈 것이라는 식으로 말하지 않았다. 이기적인 인간들이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둬도 보이지 않는 손이 저절로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낸다고 말하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하여 사회 전체의 후생이 극대화되려면 중요한 몇 가지 전제조건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런 전제조건들이 충족되는 경제는 굉장한 수준의 도덕성이 필요하다. 친재벌 성향의 이념가들이 만약 자신들이 추종하고 있는 애덤 스미스가 이런 생각을 했던 철학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틀림없이 경악을 금치 못할 것이다. 자신들이 해왔던 주장을 뒷받침하는 철학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자신들의 경솔함을 꾸짖고 있기 때문이다. - 143pp

 

4. 시대정신, 동반성장

[경제민주화와 동반성장]

기업은 노동자를 고용하여 재화 또는 서비스를 생산하고 이를 소비자 또는 다른 기업에게 내놓는다. 그러면 소비자 또는 다른 기업은 자기들의 필요에 따라 제품을 고르고 그에 대한 대가를 기업에게 지불한다. 이때 기업과 노동자는 그들이 제품을 구매하는 소비자나 다른 기업과의 교환을 전제로, 노동의 수요와 공급을 내용으로 하는 교환관계를 맺는다.

이와 같이 현대 경제의 생산과 소비 체제는 각 구성원들이 상호간에 크고 작은 다수의 교환관계를 맺고 있는 커다란 교환 체제인 것이다. 일단 교환 체제가 확립되면 각 개인은 독립적으로 존립할 수 없으며, 하나의 사회 구성원으로서만 의미를 갖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상호의존성상호관련성은 대부분의 생신이 우회적인 성격을 갖는 현대 경제에서는 더욱 강화된다. 특히 과학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여 생산의 우회도가 더욱 높아졌을 뿐만 아니라 생산물의 종류도 더욱 다양해졌다. 그 결과 생산자와 소비자, 생산 과정에 참여하는 노동자와 기업 및 한 기업과 다른 기업간의 교환 체제는 그물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다.

경제사회를 하나의 커다란 교환 체제로 볼 때, 경제민주주의란 경제사회의 구성원 간에 이해가 상충될 때 각자가 별 손해 없이 다른 구성원 간에 이해가 상충될 때 각자가 별 손해 없이 다른 구성원과의 교환을 거부할 수 있는 장치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100만 원의 가치를 갖는 노동을 제공할 수 있는 노동자가 있다고 하자. 그 노동자가 100만 원 이하의 보수를 제공하는 고용주의 고용 제의를 손해 없이 거절하고 다른 고용주를 찾아 나설 수 있다면, 그 노동자가 속한 노동시장은 민주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경제사회 구성원들 사이에 형평이 이루어져, 한 구성원이 다른 구성원들을 압도하지 못하고 각자가 자기에게 불리하다고 생각하면 언제든지 자유롭게 교환을 거부할 수 있을 때, 경제민주주의가 정착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자면 노동자는 일을 안 해도 될 정도로 일상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생활수단이 있어야 하고, 노동시장에는 새로운 일거리가 충분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한국 노동시장의 민주주의는 아직 멀었다. - 157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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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 동반성장, 자본주의 정신
정운찬 지음 / 파람북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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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반성장과 관련해 그 논리를 전반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정말 좋은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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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메테우스의 금속 - 그린 뉴딜의 심장, 지정학 전쟁의 씨앗 / 희귀 금속은 어떻게 세계를 재편하는가
기욤 피트롱 지음, 양영란 옮김 / 갈라파고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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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귀금속을 둘러싼 패권 전쟁이라닌 너무 재미있어 보입니다. 희토류를 시작으로 원자재에 대한 문제가 하루 아침의 문제도 아니고, 이번 기회에 좋은 책을 통해 일거에 정리할 수 있는 책이 나온 게 아닐까 싶습니다. 곡 한번 사서 읽어야 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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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과 도넛 - 존경과 혐오의 공권력 미국경찰을 말하다
최성규 지음 / 동아시아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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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로 꼭 읽고 말겠다라고 생각하는 책 중에 하나가 있다. 바로 알렉시 드 토크빌이 쓴 <미국 민주주의> 1, 2권이다. 책의 분량도 문제거니와, 숙련된 정치철학자가 쓴 책이기에 학문적 수준이 충분히 도달하지 못한 상태에서 읽으면 18세기 프랑스인의 미국 기행문을 읽는 것으로 끝날 것 같아, 아직도 손을 데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뭐랄까. <총과 도넛>을 읽고 난 뒤부터는 왠지 모르게, (<미국 민주주의>를 한 번도 접하지 못했지만) 대략적으로 어떠한 방향으로 감을 잡고 <미국 민주주의>라는 텍스트를 읽어야 하는지 알게 된 것 같다고나 할까. <미국 민주주의>를 읽어보지도 않고 이런 이야기를 하기는 모하지만, 만약 토크빌이 21세기의 한국 경찰관이 돼, 미국의 경찰 제도를 탐구하는 일이 맡겨졌다면, 바로 이와 같은 책을 쓰지 않았을까 싶다. 그만큼 이 책 <총과 도넛>은 미국 사회에서 경찰이란 하나의 객체에 대한 관찰을 넘어, 미국이란 사회의 특징과 연관지어 경찰의 존재를 입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솔직히 책을 처음 받게 됐을 때는, “정부가 자치경찰제를 시행한다고 하니, 이 책을 읽으면 해당 제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나는 솔직히 그 닥 자치경찰제에 관심이 없다)”, 아니면 미국 영화를 볼 때 제법 이 영화에 나온 경찰에 대한 상식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정도의 생각을 하며 이 책을 펼쳤던 것 같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에서는 경찰을 중심으로 미국이란 사회의 다면적인 모습과, 미국이란 사회를 통해 경찰의 다면성을 알 수 있었다. 이 책을 쓴 저자 최성규 씨는 경찰만 본 것이 아니라, 경찰과 미국사회의 상호성을 치밀하게 파악하며 이 책을 썼다. 그래서 이 책은 단순히 미국 사회의 경찰에 대해서 호기심을 갖고 있는 사람만이 아니라, 공권력이 특정 사회정치적 지형에 의해 어떻게 작동하는지 궁금한 사람이 본다면 절대 후회하지 않을 책이다.

 

<총과 도넛> 본격 해부!

경찰을 사회학적으로 일반화 하면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처음에는 이 같은 생각 없이 책을 펼쳤던 것 같다. 그간 내 눈에 들어온 경찰은 미디어를 통해 고정된 이미지를 가진 존재였다. <공공의 적> 속 강철중, <베테랑> 속 경찰들, <청년경찰>에 나온 두 호구같은 남주나, 드라마 <라이브>의 지구대 사람들 등. 물론, 미국 경찰과 관련해서도 고정된 이미지가 있었다. <맨 인 블랙3>에서 윌 스미스가 좋은 차를 타자 이를 검문하는 뚱뚱한 백인 경찰들. <러시아워>에서 자유로움과 무질서함 사이를 오간 카터와 리. 그리고 뉴스를 통해 보도된 폭력적인 미국 경찰 등. 경찰을 이해하기 위해 여러 콘텐츠를 소비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많이 봤기에 이해의 폭이 좁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총과 도넛>을 읽고 과거 경찰 캐릭터에 대한 나의 생각을 되짚어 보니, 이것은 순 특정 방향으로 각색된 경찰의 이미지만 소비했던 것 같다. 이 책을 통해 민중의 지팡이와 민중을 패는 몽둥이 사이에 존재하는 다양한 스펙트럼의 경찰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뭐랄까. 치안 문제를 최전선에서 맡고 있는 공권력의 존재를 입체적으로 볼 수 있었다고 할까.

<총과 도넛>은 미국의 경찰을 해부한 글이다. 그러나 미국 경찰에 대해서만 알 수 있는 책이다. 책의 부분 부분에 우리 경찰과 미국경찰에 대한 적절하고 명확한 비교를 통해서, 경찰이란 제도가 얼마나 다르게 작동하고 있는지 설명을 해주고 있다. 또한, 나아가 이 책의 저자는 미국의 경찰의 몇 가지 측면만을 부각해서 보여주지 않았다. 가령,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대가 십중팔구는 조지 풀로이드 사건과 같이, 미국 경찰의 흑인에 대한 폭력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어느 특정 사건을 중심으로만 미국의 경찰을 보여주지 않는다. 앞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미국의 경찰제도 자체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하여 충분히 설명을 해주고, 마지막 장에서 미국의 총기문제와 연관지어 해당 문제에 대해서 왜 풀리지가 않는지를 설명한다. 미국 경찰제도의 역사적인 측면, 사회적인 측면, 그리고 경찰노조가 갖고 있는 힘 등과 같이 다각면으로 경찰을 이해할 수 있는 틀을 제공함으로서, 흑인에 대한 미국 경찰에 대한 폭력 문제 또한 다양한 측면을 통해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가령, 가장 재미있었던 부분 중 하나는, 흑인 경찰관을 흑인들은 배신자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미국사회에서 흑인들은 가난하며 마약과 갱단과도 얽혀있기 때문에, 흑인이 경찰이 된다고 해서 백인 경찰이 갖고 있는 편견과 그렇게 다르지 않은 행동을 한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었다(어떻게 보면 최근 우리나라에서 있었던 박원순 시장 사망사건에서, 민주당 여성의원들이 보여준 일과 대동소이한 일이 미국에서도 경찰이란 제도를 통해 나타나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을 했다. 자신이 몸담고 있었던 사회보다, 자신이 현재 속안 집단의 이해를 대변하고 있는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미국 흑인 경찰이 흑인 사회에서 배신자로 여겨지는 문제는 보다 복잡한 사정이 있는 것 같았다. 미국에서 흑인들이 사회에서 겪고 있는 빈곤의 구조적 문제와, 경찰로서 이들을 상대해야 하는 이중적인 문제가 있으니 말이다). 심지어 백인 경찰이 흑인을 차별적으로 편견없이 대하려 해도 지속되는 흑인들의 의심에서 어쩔 수 없이 포기할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조지 플로이드 사건이 있던 현장에서 백인 경찰만이 아니라 소수인종이라 할 수 있던 중국계 경찰관 투 타오또한 있었는데, 해당 사건이 일어난 것을 보면, 어지간하게 편견이 재생산될 수밖에 없는 강력한 구조적 문제가 있는 게 틀림없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정말 섬세하게 짜임새가 좋은 책이다. 미국경찰의 특수(Part 1)성에서 시작해, 미국경찰이 일 하는 법(Part 2), 미국경찰의 권한과 권리(Part 3) 그리고 거친 환경에 놓인 미국경찰(Part 4)까지. 앞 장에서 공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을 충분히 사람들에게 이해시키고 이후, 사람들이 가장 관심있어 하는 문제를 가장 뒤에 배치하는 것으로, 독자들이 백인 경찰의 반복된 흑인에 대한 일방적인 폭력으로만 봤던 사건을 다르게 볼 수 있는 여러 툴을 제공한다.

솔직히 이야기해서 경찰이 책을 썼다고 해서, 약간 아 뭔가생각을 하기도 했다. 검사도 아니고. 전에 읽었던 오후의 책처럼 가볍게 미국 경찰과 관련된 넓고 얕은 이야기를 해 줄 책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간단하게 대중의 호기심을 풀어주는 정도의 책이라 생각했다. 책의 제목과 표지도 새련되고 어그로 끌지 좋은 것이니 충분히 그렇게 생각을 했다. 영화 속에 나오는 혹은 미국 드라마 속에서 나오는 경찰의 모습을 통해 우리나라의 경찰과 어떻게 다른지 기계적으로 비교를 하는, 그런 재미없고 자기개발서 같은 책 말이다. 하지만 이 책은 앞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꾀 좋은 책이다. 저자 자체가 관찰자로서 토크빌과 같은 좋은 눈을 갖고 있고, 무엇보다 짜임새 있게 글이 짜여져 있으며, 내용에 있어서도 충분한 깊이와 전체성을 겸비하고 있다. 좋은 독서였다.

 

나아가?!

 

이상의 말은 책의 내용과는 상관이 없다. 책을 통해 본 현실에 대한 비난이다. 책의 내용과는 그리 관련 없다.

이 책은 정말 잘 써진 책이다. 그리고 자치 경찰제라는 것이 얼마나 한 사회의 독특한 기반 위에서 작동되고 있는지, 이 책은 잘 설명하고 있다. (그럼 지금부터 딴소리를 한번 해보겠다) 솔직히 이 책을 읽고 있는 내내, 나는 정부가 준비하고 있는 자치경찰제라는 것에 대해서 회의감을 갖기 시작했다. 불안했다고 하면 더 맞을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현 정부에서 추진하고 있는 자치경찰제는 정말 우리사회에 꼭 필요한 조치이고 중요한 것이기에 추진하고 있는 게 아니다. 그보다 검찰개혁이라는 것을 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에 불가한 게 자치경찰제다. 검경수사권 조정에 의해서 수사권을 받게 된 경찰의 힘이 강해졌을 때 생길 수 있는 문제를 풀기 위한 대안이, 경찰조직을 분리한 정부의 조치이며 그 안중 하나가 자치경찰제라고 나는 알고 있다.

그런데 솔직히 그런 방향의 자치경찰제라는 게 과연 잘 작동할지 의문이 들었다. 검찰개혁의 대의명분에는 동의하지만, 권력과 그 권력이 형성되게 된 사회와의 상호성은 배제한 채 기계적 설계를 통해 제도를 만들고 있다는 생각을 들었다. 우리나라가 국가경찰을 하고 있는 것은 어떻게 보면 광복 이후부터 뿌리 깊은 사회적 맥락에서 이어져온 것이다. 취약국가 상태로 태어난 대한민국에서 치안유지를 위해 불가피하게 힘이 강해진 게 우리의 경찰이고, 그 힘은 점진적으로 작아졌다. 그런데 현 정부 들어서 갑작스레 검찰에 이어 경찰까지 개혁이라니. 경찰 자체는 현재인 국가경찰제도 아래에서 개선하면 될 것을, 왜 이것을 찢어 놓는지 나는 이해를 할 수 없다.

이 책 <총과 도넛>을 보면 자치경찰제를 운영하고 있는 미국의 경찰제도가 얼마나 미국이란 특수성에 의해 운영됐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애초에 미국이란 국가가 세워진 환경, 그리고 그 안에서 시민들과의 유기적 합의에 의해 만들고 정착된 것이 자치경찰제다. 기본적으로 시민사회의 이해와 합의에 의해 탄생한 게 미국의 자치경찰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검찰개혁 하겠다고 만들어진 게 자치경찰제다. 시민들의 이해가 바탕이 아닌, 권력의 이해에 의해 기하학적 사회 설계주의에 탄생하고 있는 게 현재의 자치경찰제라는 말이다. 과연 이것이 잘 돌아갈까? 괜히 사람들이 문재앙, 문재앙하는 것이 아님을, 뜻밖의 독서를 통해서 다시 한 번 알게 됐다. 이건 뭐 또 새로운 ‘K-경찰의 탄생인가, 아니면 ‘K캅스의 탄생인가. 정말 답안나오는 정부다. 아주 그냥 앞에 있는 게 된장인지 똥인지 꼭 먹어봐야 하는 정부다. 공직자에 대한 검증이나, 인사 하나 제대로 못하는 정부가, 시민사회와의 상호성에 의해 섬세하게 돌아가는 자치경찰제를 과연 실현할 수 없을까. 솔직히 이 정부의 또 하나의 무리수가 아닐까 싶다.

 

이 책의 주옥같은 말들

 

[세 개의 축]

서부계척시대에 보안관은 유일한 법집행기관으로서 당시에는 도시가 발달하지 않아 시경찰이 없거나 미미했고 주경찰도 제 모습을 갖추기 전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모여 도시나 타운, 빌리지를 만들면서 각각의 자치정부를 구리게 되었고, 각각의 자치정부는 관할지역을 법으로 인정받아 치안기능을 하는 경찰서를 갖추게 되었다. 보안관은 관할지역을 각각의 자치정부에 내주고 남은 자투리만 직접 관찰하면서 직할하는 구역은 줄어들었다.

주경찰, 보안관, 시경찰은 상호보완적인 관계이고, 사람들은 자기가 사는 동네의 경제력이나 치안수요에 따라 치안을 맡길 곳을 정한다. 일리노이주의 경우 남부는 그야말로 옥수수밭과 콩밭이 펼쳐진 농경지대이고 여기에 있는 카운터들은 면적은 넓지만 인구가 적어 보안관도 서부개척시대처럼 부보안관을 따로 두지 않고 혼자서 자리를 지키는 정돌만 일을 하고 있는 데도 있다. 이런 카운티에 있는 도시나 타운, 빌리지는 치안수요도 많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의 경찰서를 설치할 이유도 없으며, 그렇다고 혼자 근무하는 보안관에게 부탁할 수 없어 주경찰이 맡아서 한다.

주경찰이 지역의 치안을 맡는 비율은 주별로 성향에 따라 차이가 있는데, 예를 들어 펜실베니아주의 경우 2500개의 자치단체가 있고 이 중 절반이 넘는 1300개 자치단체의 치안을 주경찰이 관할하고 있다. 보안관 또한 소재한 카운티에 있는 시경찰을 관리 감독하지 않으며 이들의 요청이 있거나 필요하다고 판단될 때 지원할 뿐이다. 카운티 내의 특정 도시에서 부정부패나 재정부족 등의 이유로 경찰서가 해산하면 다시 생기기 전까지는 그 지역을 맡아 치안을 유지하기도 한다. 어떤 경우에는 시정부가 예산부족 또는 별도로 경찰서를 운영하는 게 비효율적이라고 판단해 경찰서를 아예 설치하지 않고 보안관과 계약을 맺어 치안을 위탁하기도 한다. 단 서로 간 계약조건이 맞아야 하고 최종적으로 카운티정부의 인가를 받아야 한다. 조건이 맞지 않거나 인가를 받지 못하면 해당 자치단체는 별 수 없이 주경찰에 치안을 맡길 수밖에 없다.

보안간과 달리 주경찰은 자치단체가 스스로 치안을 담당할 수 없을 때 별도의 비용 없이 이를 맡도록 되어 있다. 하지만 아무래도 고속도로순찰이나 주 전체 대상으로 하는 광역범죄를 수사하는 것 외에 생활치안과 관련한 정문성은 없기 때문에, 지역치안을 제대로 하기에는 어려운 면이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도시는 주경찰에 맡기는 것을 임시방편으로 생각하고 최대한 다른 방법을 찾으려고 한다. 작은 도시들이 연합해 하나의 통합 경찰서가 만들어지는 것이 이 때문이다.

결과론적으로 주의 관할지역 내 법집행을 하는 세 개의 축은 주경찰, 보안관, 시경찰이며 지역 사정에 따라 셋 중 한 곳이 발달하면 그곳에서 법집행을 주도한다. 세 기관 중 어디에 맡길지는 주별로 특생이 있다. 일리노이주의 경우 시카고 같은 대도시는 시경찰이, 일리노이주 남부 농경지역인 카운티나 시의 규모가 크지 않아 주경찰이, 북부는 보안관이 주도한다. 몬태나주나 와이오밍주, 노스다코타주, 사우스다코나주처럼 영토는 넓고 인구는 적은 주들은 정부가 강하지 않아 서부개척시대처럼 카운티의 보안관에 법집행을 맡기는 전통이 강하다. 인구가 적다 보니 시카고 같은 대도시도 없거니와 한국의 농촌마을 정도에 불과한 빌리지들은 보안관이 알아서 치안을 해결해주기도 한다. - 68 ~ 70pp

 

[국가경찰이 없는 나라]

국가경찰이 일사불란한 조직체계를 통해 효율성과 신속성을 무기로 내세운다면 자치경찰은 현장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스스로 고민하고 이를 서로 공유하면서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고 대비한다. 국가경찰도 지역주민이 경찰활동을 수행하는 주민밀착형 치안활동인 커뮤니티폴리싱을 통해 시민에게 다가가려 하지만, 지역공동체에 녹아드는 정도는 지역주민이 정책결정에 참여하고 세금으로 살림을 꾸리는 자치경찰과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대장이 확실한 경찰이 국가경찰이라면, 대장이 없어도 서로 모이고 뭉쳐서 스스로 선도해가는 경찰이 자치경찰이다. 미국은 국가경찰 없이 자치경찰만으로 치안을 유지하고 있어, 자치경찰에 어느 정도의 역할과 권한을 줘야 할지 고민하는 나라들에게 많은 참고가 되고 있다. - 73pp

 

[경찰관 한 명만 있는 경찰서]

미국경찰의 두드러진 특징은 작은 경찰서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이다. 10인 이하 경찰서가 전체의 75%이고 5인 이하 혹은 1인 경찰서도 아주 많다. 한국이 참여정부시절 준비한 자치경찰제안에서 기초자지단체에 자치경찰을 설립하려 했는데, 반대 측의 주요 논거는 기조자치단체는 규모가 작고 이에 따라 자치경찰도 작아지기 때문에 규모의 경제 측면에서 손해라는 것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한국의 자치경찰보다 더 작은 인원으로 별도의 경찰서가 만드는 미국이 이해가 안 가지만, 이들은 인구가 조금이라도 모이면 빌리지나 타운을 만들고 싶어 하고 여기에 그들의 경찰서를 설치하고 싶어 한다. 프랑스 정치학자 알렉시스 드 토크빌은 미국의 타운이라는 자치조직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당시에는 신세계였던 사회를 둘러보고 1835년 출간한 <미국의 민주주의>를 보면 미국 전역에 평균적으로 2000명이 거주하는 타운이라는 공동체가 수없이 많았는데, 이 타운 중심의 자치가 미국 민주주의의 뿌리가 되었다고 진단했다.

인구가 작더라도 미국인에게 타운은 삶의 뿌리가 되기에 단 한명이라도 제복 입은 경찰관이 있기를 원한다. 미국은 교외지역의 경우 워낙 땅이 넓고 인구가 적어 이런 미니 경찰서가 필요하다는 생각도 든다. - 74pp

 

[다양한 렵력시스템]

한국의 국가경찰은 중앙에서 통제하는 대규모 조직인 데다 집회·시위나 혼잡경비를 위한 기동부대도 상당수 보유하고 있다. 반면 미국은 집회·시위문화가 달라 상설부대가 없을뿐더러 규모가 작은 경찰서가 많아 범죄정보공유 외에도 자치경찰이 당면한 문제점이 많다. 인구가 200만 명이 훌쩍 넘는 시카고 같은 대도시는 경찰서도 커서 자연재해나 인질극, 대형집회 등 각종 사건사고에 독자적으로 대처할 수 있지만, 대다수의 자치경찰은 대형 사건이나 재난에 혼자 힘으로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래서 자치경찰들끼리 그룹인 협회를 만들어 자주 모이고 협정을 체결해 서로 돕고 지원하는 일이 자연스러운 문화가 되어 있다. jq을 위해 작은 규모의 경찰서들이 만든 협력시스템 중에는 일시적인 것도 있지만 별도의 조직을 만들어 상시체제로 꾸려놓고 상근직을 두고 운영하는 경우도 있다. - 80pp

 

[경찰서 문을 닫을지 결정하는 투표]

경찰이 훌륭한 치안행정을 하면 주민들은 그만큼 애정을 표하고 지원하지만, 반대로 부패스캔들이나 범법행위가 드러나면 애정은 분노로 변한다. 2020626일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의 시의회는 525일 발생한 시경찰관 데릭 쇼빈에 의한 조지 플로이드 사망사건을 계기로 시경찰을 해산하는 투표를 실시해 가결시켰다. 제적의원 3분의 2 이상 가결하면 시장의 거부권 행사가 불가한데, 만장일치 가결이어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시의회가 경철서를, 그것도 경찰관이 1100명이나 되는 대규모 경찰서를 투표로 통해 해산시켜버린 것이다. 미니애폴리스가 미네소타주의 가장 큰 도시이고 유명하다 보니 이번 뉴스가 더욱 충격적인데 사실 자치경찰제가 자리 잡은 미국에서는 경찰서 해산이, 물론 미니애폴리스 경찰처럼 큰 조직이 해산하는 일은 극히 이례적이지만, 아주 드문 일은 아니다.

경찰서를 닫으면 경찰관들은 직장을 구해야 하는데 일부는 보안관으로 채용되기도 하고 일부는 달도시의 신규채용 경찰서를 알아봐야 한다. 문 닫은 경찰서의 순찰차는 다른 경찰서에 팔리거나 경찰장비를 제거한 후 일반인에게 경매되기도 한다. 자신이 거주하는 도시나 마을의 경찰서가 문 닫는 것을 주민들은 매우 마음 아파한다. 자치 경찰서는 경찰관이 지역 지리와 주민 사정을 잘 알기도 하고 경찰서도 지역 안에 있어서 출동시간이 빠르지만, 보안관과 계약하면 비록 부보안관이 순찰은 하겠지만 전보다 훨씬 적은 이원과 순찰차가 배정되고 보안관사무실도 멀리 있다 보니 치안서비스의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 115pp

 

[미국식 불심검문, 테리스톱]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지도자는 시민들로부터 존경받거나 두려움을 받아야 한다면 두려움을 받는 쪽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경찰이 그 나라 시민들로부터 존경의 대상인지 두려움의 대상인지 묻는다면 한국경찰은 존경은 몰라도 두려운 존재는 아닌 것 같다. 미국은 공권력이 강하다고 알려져 있다. 확실히 공권력에 도전한다는 것은 혹독한 결과를 감수해야 할 무모한 짓이다. 경찰이라면 공권력이 강한 미국경찰이 부러울 수 있지만, 그래도 가장 좋은 것은 존경과 두려움이 건강한 균형을 이루는 것이다.

미국경찰이 마약수색 위해 주택에 압수수색영장을 집행하는 장면을 보면 이들의 무서운 공권력을 느낄 수 있다. “문 열어라라는 경고 후에도 문이 열리지 않으면 쇠봉으로 문을 부수고 진입하고, 영장집행에 저항하는 행위는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심지어 놀라서 달려드는 개도 사살해버리고 수색을 한다는 이유로 가구나 소파도 처참히 부순다.

미국경찰의 공권력이 강한 이유는 민간인 총기소유가 가능하고 강한 경찰노조가 존재한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법적 보호장치가 확실하게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불심검문에 해당하는 테리스톱은 경찰관이 합리적 의심이 들 때 보행자나 운행자를 정지시키고 건문검색을 할 수 있는 권한으로, 통과 20분 정도 억류가 가능하다. 또한 신분확인을 위해 신분증제시나 신분을 밝히라는 요구를 했을 때 이에 협조하지 않으면 지시명령위반으로 즉시 체포될 수 있고, 구류 2일 또는 사회봉사 100시간이 부과될 수 있다. - 146pp

 

[통제의 방법]

조사의 지휘체계가 일사분란하고 인사권과 감찰권도 상부에 집중된 국가경찰제에 비해 자치경찰제에서는 경찰관의 통제가 어렵다는 문제가 있다. 자치경찰제의 원형을 보여주는 영국도 수도경찰의 경우 중앙에서 경시총감의 인사권을 통해 통제한다. 하지만 지역경찰에 가장 많은 힘을 실어주고 있으며, 주정부나 연방정부의 간섭을 최소화하면서 미국과 같은 방식으로 자치경찰을 통제한다. 미구의 자치경찰 통제방식은 인사권이나 감찰권 같은 고전적 방식을 직접통제가 아니라 간접통제한다.

간접통제는 연방대법원의 판결에 의한 통제, 연방정부에 의한 통제, 주정부에 의한 통제로 이루어진다. ‘법에 의한 통제를 가장 큰 통치철학으로 삼고 법률소송에서 넘쳐나는 미국답게 경찰의 법집행방식도 연방대법원의 판결을 통해 수립되는 많은 절차적 정의에 입각한 원칙들로 만들어진다. 한국경찰도 많이 도입해 적용하고 있는, 번인체포 시 묵비권과 변호인선임권 등의 고지의무인 미란다 원칙’, 위업하게 수집한 증거의 사용배제원칙인 독과실 원칙등도 연방대법원의 판결을 통해 수렵된 원칙이고, 이렇게 세워진 원칙이 현장에서의 공권력남용을 견제한다.

연방정부를 통한 간접통제의 경우, 경찰기능은 기본적으로 주정부의 권한에 속하는 사항을, 수정헌법에도 정해져 있기 때문에 연방정부가 자치경찰을 직접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연방정부는 경찰에 의해 시민의 헌법상 기본권이 침해되었다고 판단되면 경찰이 아니라 경찰이 소속된 자치정부를 연방법원에 고소한다. 연방정부가 자치정부의 잘못된 법집행으로 시민의 헌법상 권리가 침해되었다고 법원에 고소하는 것이다. 그리고 법원이 재판을 통해 권리가 침해되었다고 판단하면 자치정부에 벌금을 부과한다. 자치정부는 이 벌금을 피하기 위해 연방정부와 협상하여 소속 자치경찰의 개혁안을 법원에 제출한다. 연방정부는 개혁안이 충분하다고 판단되면 고소를 취하하고, 법원은 자치정부가 개혁안대로 개혁 하는지 점검한다.

주정부를 통한 간접통제의 경우, 주정부는 주에 소속된 자치경찰에 대한 인사권이나 감찰권이 없기 때문에 관할 내의 모든 경찰관의 교육이나 훈련에 관한 기준을 제시하고 준수여부를 통해 경찰관으로서의 자격심사와 서비스품질을 유지하는 방법으로 이들을 통제한다. 기본적으로 경찰관이 되려면 주정부가 인증한 경찰학교에서 주정부가 정한 필수 코스를 통과해야 한다. 경찰학교를 졸업해야 주정부가 발급하는 경찰공무원증을 받을 수 있고, 카운티나 시의 경찰관으로 근무할 수 있다. 각 주정부에는 관할지역 내 모든 경찰 교육과 시험을 주간하는 기구가 설치되어 있다.

연방대법원, 연방정부, 주정부가 하는 통제는 외부에 의한 것이다 보니 간접적인 반면 좀 더 직접적인 방식으로 내부에 의한 통제가 있다. 각 경찰기관의 총책임자인 경찰서장이나 경찰국장은 소속 직원들에 대해 인사권가 감찰권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를 통해 나부 직원들을 통제한다. 하지만 경찰노조가 단체협상을 통해 경찰관을 보호하는 여러 장치를 마련해놓아서, 지휘권자인 경찰서장이 잘못을 저지른 경찰관을 징계하는 과정은 복잡하고 한계가 있다.

이보다 더 직접적인 통제로는 과학기술의 발달 및 깨어 있는 시민의 의식에 의한 통제가 있다. 아날로그시대에는 많이 묻히고 사라졌던 경찰관의 비리가 이제는 곳곳에 설치된 CCTV는 물론 스마트폰으로 무장한 시민에 의해 촘촘히 관찰된다. 또한 언론이나 인터넷을 통해서도 경찰관의 비위행위가 쉽게 전파되다 보니 앞에서 언급한 그 어떤 통제방식보다 효과적인 면이 있다. - 152pp

 

[빛과 그림자]

많은 희생과 오랜 기다림 끝에 경찰노조가 생겨나면서 경찰관의 봉급과 복지가 꾸준히 향상되었다.

경찰관에 대한 처우개선이 직접적으로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경찰이 정치적으로 막강한 힘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선거에서 무지할 수 없을 만큼 노조원 수가 증가하면서 후보자들은 앞 다투어 경찰 관련 정책 등을 내세우게 되었고, 당선 후에도 법집행 분야 정책결정 시 경찰노조를 파트너로 대하게 되었다. 한때는 경찰노조가 공공안전에 위협이 된다며 끝까지 반대하던 정치인들이, 이제는 이들을 무시하기는커녕 민주당이든 공화당이든 경찰노조에 우호적인 발언을 쏟아내고 있다.

하지만 경찰 노조로 인한 부작용도 자연스럽게 나타났는데, 점점 오르는 봉급과 증가하는 복지혜택 때문에 시정부의 재정에 부담이 가기 시작했다. 몇 년에 한 번씩 있는 단체협상의 재정에 부담이 가기 시작했다. 몇 년에 한 번씩 있는 단체협상에서 고용주인 시장은 당장 경찰의 표심을 얻고자 노조에 양보하게 된다. 양보해서 발생하는 재정적 부담은 자신의 호주머니가 아니라 시민의 세금으로 충당하고, 다른 부정적인 효과도 자신의 임기 대는 바로 나타나지 않으니 무책임한 양보가 계속된다.

무엇보다 지휘부의 전횡을 없애는 데 많은 역학을 했던 경찰노조의 응집력은 동료의 잘못을 감싸고도는 침묵의 문화로 바뀌게 되어 경찰관의 잘못이 명백해 보이는 사건에 대해서도 경찰노조가 무조건 편들고 나서면서 경찰에 대한 지역의 여론은 악화시켰다. 게다가 경찰의 징계절차가 단체협상의 내용에 포함되면서 나쁜 경찰을 보호하는 여러 장치가 마련되었고, 이들이 경찰노조를 믿고 행한방만한 법집행으로 사회적 약자가 많은 피해를 보게 되었다. 흑인을 대상으로 경찰의 무리한 총기사용이 이어져 희생자가 발생하자 이를 성도하는 시위가 연일 이어졌는데, 경찰노조는 이에 대해 반성하거나 사과하기는커녕 끝가지 당사자를 감싸고 돌았고, 심지어 해당 경찰관에 대한 징계나 사법처리에 대해 시정부와 재판부를 성토하기까지 해 경찰노조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키웠다. - 180pp

 

[리스크가 큰 파업]

(경찰노조의) 쟁위행위로는 업무감속, 업무강화, 업무중지가 있다. 업무감속은 말 그대로 신고출동 등 업무처리를 느리게 한다든지 교통티켓 발부를 줄여 시정부의 재정수입을 적게 하는 방법으로, 업무강화는 티켓 발부를 몇 배 강화하는 것 으로 교통티켓 발부는 물론 경범죄단속도 강화해 시민이 경찰의 주장에 관심을 갖도록 하는 방법이다. 마지막으로 업무중지는 경찰독감, 일명 블루플루라고 불리는 것으로 경찰관들이 독감에 걸렸다는 이유로 집단병가를 내서 업무를 마비시키는 방법이다.

블루플루는 20207월 미국독립기념일에 미국 전역에서 많은 경찰관이 사용했는데, 조지 플로이드 사건 이후 계속되는 경찰에 대한 사회적 비난과 비판에 항의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현지 경찰관들의 반응을 파악하고자 쿡카운티의 보안관을 전화로 인터뷰했는데, 미니애폴리스경찰서의 경찰관 쇼빈이 조지 플로이드에 대해 비상식적으로 과도한 법집행을 하여 사망하게 한 데 대해 같은 경찰관으로서 책임을 느끼지만, 거의 모든 언론이 하나같이 경찰을 성토하고 빞나하는 데 열을 올리고 경찰의 목소리는 그 누구도 대변해주지 않는 데 절망감을 느낀다고 했다. 심지어 미니애폴리스에서는 경찰서를 해산하고 경찰이라는 이름조차 지워버리려 하는 데 대해 경찰이라는 직업에 자부심을 느끼고 일하는 모든 경찰관이 느꼈을 허탈감을 간접적으로나마 표현하고 싶었다고 한다.

사기가 저하된 경찰관의 치안활동은 위축될 수밖에 없고 이는 고스란히 시민에게 피해로 돌아가기 마련인데, 실제로 조지 플로이드 사건 이후 뉴욕과 시카고의 범죄율이 급장했다고 한다. - 191pp

 

[조지 플로이드에 대한 단상]

미국에서 흑인은 사회경제적 불평등 때문에 다수가 빈곤층이며 이로 인해 마약, 총기, 절도 등 많은 범죄를 일으킨다. 경찰관은 현장에서 반복적으로 흑인범죄자를 접하다 보니 알게 모르게 편견이 생긴다. 인종차별을 막으로고 흑인과 히스패닉 경찰관의 채용을 늘려도 이들 또한 흑인에 대한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게다가 마약에 취해 있고 총기까지 소지한 범인을 제압하다 보면 단순한 법집행이 아니라 건투를 치르는 느낌이다. 그래서 경찰관이 범인을 제압하는 매뉴얼도 한국과 달리 강하고 위압적일 수밖에 없다.

시민과 경찰 사이를 마약과 총기가 가로막고 있다 보니 친절한 경찰이 되겠노라 다짐한 신입 경찰관은 해를 거듭할수록 전투를 치르는 전사가 된다. 상대가 흑인이면 총이 있든 없든 일단 긴장하면서 접근하고, 상대방의 사소한 몸짓에도 과하게 위협을 느껴 압도적인 물리력을 행사한다. 오해와 실수 때문에 피해가 발생해도 경찰노조와 법집행의 현실을 인정한 판결이 이들을 지켜준다. 흑인에 대한 사회구조적 차별이 해소되지 않는 한, 그리고 무엇보다 마약과 총에 대한 공포로부터 경찰이 자유로워지지 않는 한 경찰의 사기를 꺾는 일방적 개혁은 치안불안과 범죄율의 증가 등 또 다른 문제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 247pp

 

(빈민가에 사는)흑인에게 백인경찰관은 인종차별주의자이고 흑인경찰관은 배신자이다. 한 백인경찰관은 신입 시절 신고현장에서 흑인을 만나면 백인을 대할 때보다 훨씬 더 친절하게 행동했다고 한다. 하지만 자지가 아무리 노력해도 흑인에게 사사건건 트집이 잡히고 결국 인종차별주의자로 불리기는 마찬가지여서 지금은 포기하고 백인이든 흑인이든 똑같이 대한다고 한다. 한 흑인경찰관은 자신이 경찰관을 지원하자 어렸을 때부터 친했던 흑인친구들이 모두 자기를 떠났다고 한다. 인종차별적 법집행이 남긴 상처의 골은 이렇게도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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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가난이 온다 - 뒤에 남겨진 / 우리들을 위한 / 철학 수업
김만권 지음 / 혜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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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가난이라 한다. 무엇일까. 가난하면 당신이 떠올리는 풍경은 무엇인가? 길거리에서 홈리스를 생각하는가? 아니면 초록우산재단에서 제작한 어린이들이 배를 굶고 있는 모습? 혹은 세모녀 사건이나 방배동 모자사건과 같은 비극?

가난이란 말은 이 세계에서 상당히 축소된 개념이 돼 있다. 언어는 사람들의 의식을 규정한다. 그리고 사람들의 인식이 어느 한 곳에 고여있으면, 그 밖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하여 대개 특별한 혹은 유별난 일이라고 생각을 한다. 과연 사람들은 방배동 모자 사건을 혹은 세모자 사건을 혹은 일가족들이 모두 자살한 사건들을 가리켜서 우리사회의 구조적 비극이라고 봤을까, 아니면 그저 비극적인 스토리로 인식을 했을까. 나는 후자라고 생각을 한다. 사람들의 의식을 바꿀 수 있는 기사는 해당 기사들에는 나오지 않았다. 언론들은 딱 현재의 시민들이 인식하기 좋을 정도로 가공해 스토리를 만들어 냈고, 딱 그정도로 소비됐으며, 우리 사회에서는 비슷한 사건들 또한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지 않은가.

가난에 대한 그리고 빈곤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이처럼 멈춰져 있다. 그리고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사건들은 우리가 현재 어떤 단계에 멈춰져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저자 김만권은 정치 철학자다. 나는 그의 강연을 몇 차례 들은적이 있다. 그가 얼마나 밝은 사람인지, 또 얼마나 근원적인 진보된 사회를 갈망하고 있는지를 잘 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그를 지켜보면서, 몇 번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 적 또한 있다. 어떻게 보면 그는 그의 학생에게 외국에서 수학을 기회를 주었고, 추천서를 줬을 뿐인데, 그 기회에 닿을 수 없었던 나는 상대적 박탈감을 느꼈다. 애매하다. 그와 나 사이 그리고 그와 그 학생 사이. 3자 구도에서 누구도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누군가는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 존재한다. 그는 연세대에서 과거 강의하는 강사였고, 그 강의를 들을 수 있었던 학생은 그가 갖고 있는 사회적 자본을 이용할 수 있는 기회를 갖고 있었을 뿐이다. 연세대에 왜 가야하는지 그리고 해당 분야를 왜 공부해야 하는지. 혹은 공부자체를 왜 해야 하는지 모르면서도 그를 만나게 된 사람은, 그로부터 특별한 네트워크를 만들 수 있지만, 완전히 다른 길을 걸은 사람은 이 같은 선택 자체가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이 책은 감명 깊은 책이었다. 우리 사회에 등장하고 있는 구조적 불평등을 조명하고 있다. 가슴이 아팠다. 내 이야기 같아서. 그가 4차 산업혁명, 새로운 불평등의 문제들이 정면으로 들이박을 사람이 나라고 생각하는 솔직히 두려웠다. 이 책은 나 같은 사람에게는 명확한 경고가 될 것이다. 이 책은 성공했다. ‘가난에 대한 나의 인식을 넓히는데 있어서 말이다. 그리고 내용 또한 좋았다. 실력은 역시 캡숑 짱이다. 그러나 과연 이 책이 갖고 있는 의미를 우리사회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될지는 모르겠다.


나는 적어도 기자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이다. 너무 오래됐다. 그리고 굳이 기자 시험을 준비하지 않더라도, 우리사회의 기득권층은 이 책을 읽으며 새로운 사회의 도래를 위해 자신들의 사적 복지망을 구축할 것이다. !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위협이 소리소문도 없이 갑작스레 닥치겠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만반의 준비 상태에서 방어할 수 있다는 현실이 참으로 아이러니 하다. 이 책 <새로운 가난이 온다>는 나에게 아이러니를 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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