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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트르 크로포트킨 평전 - 모든 권력에 반대한 창조인 아나키스트
박홍규 지음 / 틈새의시간 / 2021년 9월
평점 :
아나키스트. 우리시대에는 이제 잊혀진 이름이다. 하지만 우리는 아나키스트의 등장 자체는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과거에 했던 활동들은 우리를 기억해야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의 활동이 오늘날의 제도를 통해서 구현됐기 때문이다.
아니키스트는 국가를 부정한 세력이다. 국가라는 것이 이제는 한 사회의 기본값이 된 현재로서는, 이를 잘 납득하기 힘들다. 하지만 과거는 그렇지 않았다. 국가라는 것은 폭력 그 자체였다. 사람들은 국가의 폭력에 대응하지 못했다. 또한 국가 폭력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피해를 치러야 했다. 프랑스 혁명은 세계사적 사건이었지만, 변화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 엄청난 희생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정기적으로 세력이 교체된다. 선거를 통해서. 뿐만인가. 사람들의 봉기도 있다. 아직도 권위주의 국가에서는 무자비하게 진압되지만,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그렇지 않다.
민주주의에도 긴장이란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그 긴장감이란 것은 어떤 측면에서는 포퓰리즘처럼 보일 것이다. 왜. 미증유의 그리고 예측하기도 힘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서 일반화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문 우리 사회는 그렇지 않다. 최장집 교수는 우리나라가 형식적 민주주의에서 실질적 민주주의로 가야 한다고 생각을 했다. 하지만 우리는 형식적 민주주의의 어디즈음에서 해매고 있는게 아닌가 싶다.
나는 아나키스트야 말로 실질적 민주주의를 구현하려고 과거에 노력했던 사람들이 아닌가 싶다. 무슨 말인가. 아나키스트들은 비록 국가는 부정하긴 했지만 사람들이 모이는 공동체 자체는 부정하지 않았다. 우리사회에서는 아나키스트들이 생각을 했던 공동체가 없다. 국가와 작은 시민이 있고, 그 안에서 시민의 힘과 국가의 엄청난 힘을 매개하는 몇몇의 세력만 있을 뿐, 가운데에 공동체가 없다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활발하게 작동을 하려면, 사람들이 결사하고 그러한 것들이 제도권 정치를 움직여야 한다. 하지만 우리사회에서는 이와 같은 것들을 볼 수 없는 게사실이다.
이번에 읽은 <표트르 크로포트킨 평전>을 읽은 이유는 이 때문이다. 아나키스트를 우리내 사람들은 단순히 무정부주의자로 생각을 한다. 국가를 부정한 사람들이고, 위험한 사람들로 안다. 하지만 너무나도 단순화 됐다. 그들의 삶과 그들의 철학에 대해서 아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표트르 크로포트킨은 가장 유명한 아니키스트이기도 하며, 아나키즘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아나키즘 하면 그의 이름은 알아야 하고, 또 그만이 아나키즘에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있다. 이 책을 통해서 오늘날의 민주주의의 위기 문제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 하나의 프리즘을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