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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알드 달 베스트 단편 세트 - 전3권 ㅣ 로알드 달 베스트 단편
로알드 달 지음, 정영목 외 옮김 / 교유서가 / 2021년 1월
평점 :
내가 많이 피곤했나 보다. 기존의 플롯을 소비하는데 있어서. 하지만 돌이켜보면 나는 그 피곤함이 무엇인지 느끼지 못했다. 중독이란 게 만약 있다면 이런 게 아닐까. 스스로를 계속 힘들게 지치게 만들면서, 그것을 계속 갈구하는 것. 그것만이 전부인 것 같고, 그것만이 내게 에너지를 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 바로 그런 중독의 본질이 아닐까, 나는 로알드 달의 글을 읽으면서 스스로 소비했던 소설이든 영화든 드라마든 콘텐츠들을 고민하며 이렇게 상상해 봤다.
나를 피곤하게 만들었던 이야기들은 대개 사람에 대한 것이기보다, 구조에 과한 것 이었다. 사람은 자신이 갖고 있는 내적 욕망에 의해 움직이기도 하지만, 그 사람을 둘러싼 환경에 의한 문제 또한 피할 수 없는 존재이지 않은가. 다만, 내가 보기에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라면 후자가 훨씬 강한 이야기들이 많은 것 같다. 드라마 <스카이캐슬>의 경우 상류층의 계급재생산을 하기 위해 어떤 극단적 선택까지 하는지를 보여주었고, 최근에 본 영화인 <뮬란>은(이 영화는 정말 애매한 점이 많은 것 같다. 워낙 중국뽕이 너무 많이 들어가서) 국가를 구한 여인이라고 해야 할까(?)... 어쨌든, 대개의 영화들은 주인공이 특정한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고, 이 안에서 제한된 선택을 하게 만들고, 이 안에서의 극단성을 추구하게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주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아마 이 말에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우리나라의 이른바 신파극이 대표적일 것이다.
나를 지치게 만들었던 것은 바로 이런 서사에서 오는 것들이었다. 사람은 그렇게 무능한 존재인가 싶은거다. 세상의 힘이 아무리 절대적이라고 하더라도, 한 사람이 만들어낼 수 있는 변화라는 게 있는 것 같은데, 요즘 이야기들은 이 같은 것들은 무시하는 게 아닐까. 물론, 그 사람이 만든 변화라는 것들이 오로지 긍정적일 수만은 없다. 이 책 <로알드 달>의 단편선에 나오는 (자신의 신분을) 목사로 위장한 보기스 씨처럼. 그런 점에서 이 단편선의 가장 큰 장점은 인간 내면의 다양한 모습들을 경험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순수하게 사람들이 갖고 있는 욕구, 그리고 이것들이 맞부딪치면서 만들어내는 이야기들이 상당히 스릴있고 재미있다. 또한, 어떠한 점에서 이 책 속 단편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단순히 읽는 것만으로도, 기존 중독됐던 스토리들에 있어서 나름의 ‘해독’작용을 주기도 한다. 이것은 아마 내가 정말 한가로이 군대에 있을 때 읽었던 몇 안되는 책들에게서 느꼈던 그것과 닮아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정형화된 방법의 살인, 정형화된 방법의 사기, 정형화된 방법의 사랑 등. 요즘, 소설들에서 나타나는 특정 방향으로의 정형성을 이 로알드 달의 단편 소설집에는 볼 수 없다. 어쩌면, 이것은 소설가가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이 아닌, 우리가 이제는 ‘옛날’이라고 부르는 2차 대전 이후부터 90년가지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한 사람이라서 그럴 것이다. 그런점에서 이 책이 주는 의미는 상당히 재미있다. 모두가 악마적 재능, 사악한 재능을 갖고 있다고 하는 글솜씨와, 그 글솜씨의 배경이 되는 상황과 시대 또한 상당히 다르다. 뭐랄까. 순수한 인간들의 이야기를 접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는 내내. 또한, 평생에 소설을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단순히 결론을 안다는 게 전부가 아닌, 작가가 안내해준 길을 다시 한번 따르며, 그 이야기의 흐름을 다시 한번 느끼고 싶다는 생각을 책을 읽는 내내 나는 했던 것 같다. 글 마지막의 반전 때문만이 아니라 말이다.
그리고 다른 것을 다 떠나서, 나는 책으로 현재 중독돼 있는 서사를 또 다른 서사로 해독되는 느낌이 어떤 것인지 느낄 수 있었다. 시간이 되면 내가 지금 읽고 있는 ‘맛’편만이 아니라, 클로드의 개‘와 ’헨리슈거‘ 편 또한 꼭 읽어야 겠다. 지금은 취준과의 전쟁 중이니, 이 한 책만이라도 깊이 탐닉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