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개의 파랑 - 2019년 제4회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대상
천선란 지음 / 허블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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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이 무너트린 사람간 벽

 

SF이야기라고 하면 사람들은 대개 거시적인 세상을 상상할지 모르겠다. 어쩌면 SF 자체에 모험이 포함돼 있다고 넘겨짚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어렸을 적, 과학상상그리기 대회에서 입상한 작품들을 보면 그 배경으로 우주선이 나오거나, 하늘을 떠다니는 자동차가 나온다거나, 해양도시가 나오는 것처럼, 이전까지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세상이 도래하기에, 인류가 대항해시대처럼 모험을 할 것이라 짐작한다. 나는 이것이 또 하나의 편견이라 생각한다. 물론 이들의 상상이 맞을 수 있다는 생각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미래의 일상적인 혹은 디테일한 삶의 모습을 상상할 수 없으니, 극단적인 것들을 소재로 이야기를 만들는 것이 아니겠나 싶기도 하다. 하지만 이는 분명 거친 상상이다.

잠시 고민을 해보자. 우리는 과거의 미래인 현재에 살고 있다. 과거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기술들이 오늘날에 개발되고 또 발전해 그간 볼 수 없는 풍경을 만들어 지고 있다. 전기자동차가 만들어지고 있으며, 우주로켓은 이제 더 이상 1회용이 아니게 됐다. 덕분에 진짜 우주 관광시대가 열리기 일보직전이다. 또한, 인류는 달을 넘어 화성에까지 갈 상상을 하고 있다. 하지만, 과연 우리는 과거에 문제가 돼 골칫거리였던 것들을 현재는 완전히 해결하고 있는가?(어쩌면, 조금은 해결했는가? 라는 질문으로 할 수도 있겠다) 기술의 혜택은 우리 모두에게 돌아갔는가? 기술은 사람을 구하고 있는가? 이런 질문은 아마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도 없이 이어질 수 있을지 모른다.

2020년 신작 소설 <천 개의 파랑>에 나온 주인공들은 어쩌면 빛나는 미래의 밖에 있는 존재들이다. 이 소설은 한 가족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엄마 보경과, 딸 우연재, 우은혜가 그 가족의 구성원이다. 보경의 남편이며 연재·은혜의 아빠가 되는 사람은 이 가족 구성원 중에 없다. 소방관이었던 그는 불에 타 죽었다. 소설에 등장하는 미래에는 무너진 건물 아래에 깔린 사람을 발견하며 동시에 생존확률을 수치화 할 수 있는 로봇은 개발됐으나, 소방관이 입는 피복은 현재와 다르지 않았나 보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발전하지 않았다기보다, 자원 배분의 문제일 것이다. 그렇게 보경의 남편은 불을 진압하다가 죽었다. 은혜에게는 병이 있다. 이 시대에는 충분히 은혜를 고칠 수 있는 기술이 있으나, 가난한 보경네는 치료비를 구하지 못하고 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안경도 쓰지 않을 정도로, 의학의 힘으로 사람의 불편함이 없어진 시대에 은혜는 휠체어를 타고 다닌다. 연재는 최저임금을 받으며 일하던 편의점에서 점주가 키오스크를 들여와 짤렸다. 소설에는 지금이 서기 몇 년이라며 시간이 나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이 소설의 시간적 배경이 현재와 그리 멀지 않다고 생각하고 싶다. 상상이라곤 하지만 미래는 어찌나 현재의 사회 문제들을 닮아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미래라고 하여, 모든 존재들의 권리가 더 존중받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이 소설에 서브 캐릭터 혹은 서브 주연이라 할 수 있는 콜리란 기수 로봇과 그가 타는 경주마 투데이에 대한 처우는 현재와 다르지 않다. 아직 인간과 원활한 상호작용이 가능한 휴머노이드 로봇이 개발되지 않아 콜리의 권리에 대한 것은 그냥 넘긴다 하더라도, 경주마들이 뛸 수 없게 됐을 때 안락사를 당하는 일은 현재와 다르지 않다. 인간의 재미에 의해 만들어지고, 특정한 방향으로만 길들여지고 관리되다가, 폐기란 이름 대신 안락사가 쓰였을 뿐, 미래의 동물은 여전히 폐기된다. 물론, 콜리와 같은 로봇은 말할 것도 업다.

이 책 <천 개의 파란>은 이런 존재들이 만들어 가는 이야기다. 다소 극단적으로 줄거리를 압축하면 이럴 것이다. 소설의 배경은 기술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한 한 가족의 사람들과, 기술 발전으로 인해 인간과 더 많은 혹은 깊은 상호작용을 하게 된 존재들이 생겼으나, 그들의 권리가 여전히 땅바닥에 있는 시대다. 소설의 주인공들은 자신이 가진 한계에도 불구하고 일상에서의 작은 소동 하나로 인해서 자신들에게 결여된 것을 알고 또 채워가며, 내적성장을 이루는 내용이다. 작은 소동이란 것은 투데이란 경주 말의 기수인 로봇 콜리를 우연한 기회에 연재가 집으로 가져 들어오고, 투데이의 죽음을 알게 된 은혜는 투데이를 살리고자 하면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라고나 할까.

 

세 사람간의 벽

 

콜리가 연재에 의해 보경의 집으로 들어가기 전, 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벽이 있었다. 벽은 대놓고 상대방이 싫어 만들기도 하지만, 지나친 자기희생을 통해 의도치 않게 만들어지기도 한다. 배려 받는 타인이 충분한 이해를 하지 못하면 부지불식간에 형성되는 것이다. 배타성이 아닌 극단적 이타성이 만들어낸 벽. 자신의 행동에 다른 사람이 스며들 공백 혹은 여지를 주지 않았을 때 생겨나는 벽이란, 그것이 이타적이든 배타적이든 똑같은 척력을 발휘하며 사람을 밀어낸다. 상상컨대, 이런 형태의 벽은 뭔가를 쌓아서 생기는 게 아닌, 마치 모두를 위해 물을 찾겠다고 땅을 계속 파헤치는 과정에서 생기게 되는 구멍이 계속 높아지며 벽이 된 것이 아닐까 싶다. 위로 쌓아서 만들어지는 벽이든, 아래를 파서 생기는 벽이든 한 사람이 고립되고, 사람간 관계가 단절되게 만드는 벽의 기능은 대동소이하다.

보경의 딸인 은혜에게는 앞에서 이야기 한 것처럼 병이 있다. 하지만 보경은 이 병을 치료할 돈이 없다. 또한, 보경은 생업전선에 뛰어들었기에, 은혜에 대한 보살핌은 연재의 책임이 됐다. 딸 치료를 못해주는 보경, 은혜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며 내적으로 조숙해지며 무뚝뚝해진 연재, 그리고 모두에게 미안해하는 은혜 사이에는 서로가 의도하지 않게 벽을 만든 것이다. 서로에 대한 미안함이라는 이타적인 벽이.

콜리는 가족간의 벽을 마치 볼링공이 볼링핀 쓰러뜨리듯 문제를 일거에 해결해주는 존재는 아니다. 콜리는 이 가족이 변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나비효과를 일으킨 존재로 봐도 될 것이다. 볼링 공 하나로, 핀 하나를 살짝 건드렸을 뿐인데, 이로 인해 핀간 균형이 무너지고 모든 핀이 쓰러졌다고 할까. 로봇을 만지고 싶었던 연재가 알바해서 모은 80만원을 털어 민주에게서 망가진 로봇 콜리를 사 집으로 데려왔던 것은 어쩌면, 볼링공이 핀 하나를 건드린 장면이었다. 보경이 불편해할 일을 하지 않았던 연재가, 고장난 로봇을 집으로 데려온 일은, 그간 가족간에 없던 눈에 보이는 갈등을 야기한 사건이었다. 연재는 콜리를 수리하는 과정에 지수의 도움을 받는다. 그동안 형식적으로도 없었던 친구란 존재가 연재에게 처음으로 생기게 된 장면이다. 딸의 수상한 행적에 호기심을 품었던 보경은 우연히 콜리에게 말을 걸게 된다. 은혜는 자신의 바람이자 콜리의 바람이기도 했던 경주마 투데이를 구하고자 하는 사람이다. 콜리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가족간의 산발적인 소동들은 오랫동안 자신들도 알지 못하는 사이 조용히 쌓여 만들어진 세 사람간의 벽은 천천히 허물어진다. 콜리는 세 사람간 벽을 허무는 데 의도적으로 사용된 도구이기보다, 저절로 없어지는 역할을 한 매개체다. 그리고 이야기 속에서 세 사람간 벽은 서로가 의도해서 만든 것이 아니었기에, 그 벽이 허물어지는 과정이 대놓고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만큼 스토리상 자연스러웠다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가장 좋았던 장면을 누군가 내게 꼽아 보라면, 아래 써 놓은 부분이다([이 책의 주옥같은 문장과 대화]). 행복과 그리움에 대하여 보경과 콜리가 이야기 하는 부분. 그리고 지수와 연재가 이야기 하는 부분이다. 서로에 대한 몰이해가 천천히 벗겨지거나, 시원하게 자신의 답답함을 토로하는 장면이다. 누군가에게는 대놓고 이야기 할 수 없는 것을 다른 누군가에게 물어보는 일, 혹은 반대로 누군가에게 대놓고 자신의 답답함을 토로하는 일은,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진정성의 무게만으로 얼마나 공감이 갔는지 모른다. 비록 지수가 화내는 대상은 연재였지만, 나에게도 저런 존재가 있으면 좋겠다는 상상을 해봤다(물론, 그런 말을 할 기회들을 내가 놓친 것인지도 모르겠다).

 

소설의 특징

 

이 책에서 스펙타클 한 장면은 딱히 없다. SF인데도 말이다. SF에 대해 상상했을 때, 첨단기술이 등장해 펼치는 거대한 전투장면 혹은 거대한 괴수들이 나오는 것들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현대 물리학적 개념을 초월한 것들은 소설 전체에서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거의 가족소설 혹은 성장소설로 혹은 생태소설(로봇이 등장하기에 약간 애매하긴 해도, 저자는 로봇이든 동물이든 사람이든 모든 것을 사랑하는 사람이기에 딱히 생태라는 말 외에 무엇을 써야 하는지 모르겠다)봐도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책은 그래서 일반 문학작품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이는 그간의 SF장르 작품이 문학작품의 범주에 들어올 수 없다는 말이 아니다. 이미 우리 주변에서 나타나는 현상들, 그리고 충분히 현재로도 개연성이 있을 수 있는 사건에 로봇을 살짝 얹은 느낌의 이야기다. 그래서 이 소설에는 기술을 통한 양적 긴장은 없는 대신에, 질적 긴장은 뛰어난 작품이라 생각한다. 일반 문학작품처럼 말이다.

또한 한 가지 특이한 점. 이 소설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사회경제적으로 딱히 기득권 혹은 지배층이라고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다. 혹은, 새로운 기술에 수혜를 입은 사람이 아니다. 좀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미래의 기술을 적극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승리호>라는 영화가 곧 개봉한다고 하는데, 그곳의 주인공들이 모두 우주선에서 모험을 한다고 들었다. 하지만 이 소설의 주인공들은 가난한 우주선원도 아니요, 가난한 우주 떠돌이 혹은 타임머신을 타고 떠돌아다니는 시간 방랑자도 아니다. 그냥 일상에서 볼 수 있는 가난한 자영업자 가족이다. 김초엽의 소설을 읽었을 때, 그 점이 불편했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있다면>에는 적지 않은 수의 단편들이 실려 있는데, 그 많은 작품 중에는 뭐 하나 가난한 사람과 관련된 이야기가 없었다. 딱 봐도 금수저 티가 팍팍 나는 작가인데, 작품을 쓰던 중에도 무의식적으로 그런 쪽으로는 상상력이 발현되지 못한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SF장르를 쓰면서 기술의 수혜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 또한 나는 작가가 갖고 있는 능력이지 않은까라며 책을 읽는 내내 생각을 했던 것 같다. SF에 대한 상상력의 발현이 해당 장르에서는 다소 뻔 할 수 있는 기술 쪽으로만 치우친 게 아닌, 기술을 베이스로 사람들 간의 관계와 사건의 확장으로 옮겨간 것이니, 훨씬 고등한(?) 혹은 섬세한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천선란 같은 소설가를 미래에서 온 소설가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또한, 어찌 보면 이 소설처럼 SF장르를 일반 TV드라마로 만들고 싶어 하는 PD들에게는 제작비를 위해 필요한 서사인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이 글은 엄청나게 매끈한 소설은 아니다. 지수와 연재가 나간다는 대회의 이야기가 너무 급마무리 됐다는 느낌이 들었다. 또한, 콜리와 관련된 이야기가 너무 급하게 마무리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작가가 서론 부분에서 힘을 준 부분들이 있는데, 그 힘을 준 부분에 대한 마무리가 급해 어색하다는 말이다. 물론 급하게 끝났음에도 짜임새도와 만듬새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또 이것 나름대로 좋을 수도 있다(특히, 콜리의 인생 1막이 끝나는 부분과 2막이 끝나는 부분을 교묘하게 착각할 수 있게 만든 전략은 저자가 장면전환을 통해 얼마나 이야기를 잘 이끌어 나갔는지 알 수 있었던 부분이다). 급하게 된 느낌은 있지만 그것에 군더더기가 있다는 느낌은 아니다. 하지만, 소설의 전개가 초반에 재미있게 읽었던 부분들이, 후반에 가서 급마무리 됐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다. 앞에서 힘 줬던 이야기를 후반에 적당한 분량을 할애하여 마무리 했다면 보다 완성도가 높은 소설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을 했다. 아마 나는 이 이유를, 대회 출품을 위한 분량의 한계에도 있지만, 저자가 초반에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는 데, 후반부의 전개를 세심하게 신경쓰지 않았기에 이런 일이 발생한 게 이날까 싶다. , 여러 가지 사건을 많이 벌려 놓긴 했는데, 후반부에 가서 메시지를 주기 위한 스토리를 정하고, 나머지는 서브로 스토리로 만드는 과정에서, ‘생략됐다고 봐도 될 것이다. 모든 스토리를 균형감 있게 다룰 수 없었기에 선택한 것이지만, 재미있게 읽은 사람으로서는, 아쉬운 부분이다.

 

고민하고 망설이는 로봇이란 존재

 

로봇과 관련된 서사는 언제나 양면적이었다. 모든 로봇 서사가 양면을 갖고 있다기보다, 양면 중 한쪽만 선택돼 다뤄진다. <매트릭스>, <터미네이터>, <아이, 로봇>과 같은 영화를 보면 로봇은 공포의 대상이다. 정해진 명령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어떤 망설임도 없이 수행하도록 그려진다. 그 반대의 로봇들 또한 있다. 이들은 인간들과 함께하며 인간이 무한하게 신뢰하는 존재다. <알리타>, <트랜스포머>의 범블비나 옵티머스 프라임, <리얼 스틸>이 대표적이지 않을까. 하지만 이들 또한, 사람을 애정하는 데 있어 망설임을 보이지 않는다. 로봇이 나온 이야기들은 로봇이 어떤 식으로 그려지든 평면성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저 그들에게 주어진 미션을 풀기가 어려웠던 것 뿐이다. 그래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존재는 언제나 사람이다. 사람과 로봇과의 우정이 소재가 되거나, 인간과 인간의 대결에서 로봇이 일정정도 역할을 맡거나, 인간과 로봇이 대결이 스토리 전개의 큰 축이 된다. 로봇을 입체적으로 혹은 변화가능한 존재로 다룬 작품을 나는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천 개의 파란> 속 로봇 콜리도 큰 차원에서는 다르지 않다. 콜리는 원래 C-27이란 이름의 경마 경주의 기수로 제작된 로봇이다. 비몽사몽한 상태의 연구생은 콜리에게 하나의 칩을 꽂지 못했다. 콜리에게는 함께 제작된 로봇들과 달리 뭐 하나가 결여된 것이다. 책에는 이 칩에 대한 아무런 설명이 없다.

그 칩이 무엇이었을까?”라고 나는 상상해본다. 콜리에게는 무엇이 결여됐기에, 연재나 민주에게 이상한 로봇이란 이야기를 들은 것일까. 왜 아톰과 같이 애정이 듬뿍 담기도록 뭔가가 많이 첨가된 게 아니라, 빠진 설정을 작가는 넣지 않았을까. 물론 작가는 이 설정에 대한 답을 갖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재미로 그 칩을 괜한 떡밥이라 생각해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면, 나는 그 칩의 정체가 인공지능 로봇의 자유의지를 온전히 통제할 수 있는 부품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99%의 생각을 통제할 수 있는 1%의 중앙처리장치 같은 게 아닐까. 그것은 아마 기본적으로 콜리가 질문을 하지 않게 만드는 기능을 탑재했을 것 같다. 민주에게 말을 걸지 않는, 연재에게 말을 걸지 않는 기능말이다. 인공지능을 갖고 있다는 것은,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여 스스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콜리를 제외한 다른 로봇들은 어떤 질문도 하지 않는다. 질문을 받고 대답을 한 뒤에는 또 다른 소통을 시도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인공지능을 만들면서, 그들이 자유의지를 갖는 데에는 회의적인 게 아닐까 생각한다.

소설에서 콜리가 만난 사람이 만약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었다면 콜리는 어떻게 됐을까? 과연 따스한 가슴을 가진 로봇이 될 수 있었을까? 전쟁으로 투입됐다면, 콜리는 전쟁 고아였다가, 살아남기 위해 무슨 짓이든 벌이는 병기가 되지 않았을까. 그러나 저러나 이런 상상을 해보니, 콜리가 이 소설의 주인공들을 만난 건 운이 좋았던 것이며,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는 온전한 평화를 원하는 인간이기에 할 수 있는 소리일 것이다.

 

[이 책의 주옥같은 문장과 대화]

 

딸이 두 명이나 있는데도 말을 못 꺼내겠더라고. 힘든 애들한테 힘든 거 얹어주는 걸까 봐. 엄마를 신경 써줘야 할 존재로 인식할까봐.”

미안, 인간이 원리 이렇게 주책없어, 그런데 너는 그리움이 뭔지 모르겠지? 부럽다.”

그리움이 어떤 건지 설명을 부탁해도 될까요

보경은 콜리의 질문을 받자마자 깊은 생각에 빠졌다. 콜리는 이가 나간 컵에서 식어가는 커피를 쳐다보며 보경의 말을 기다렸다.

기억을 하나씩 포기하는 거야.”

보경은 콜리가 아닌 주방에 난 창을 쳐다보며 말했다.

문득문득 생각나지만 그때마다 절대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인정하는 거야. 그래서 마음에 가지고 있는 덩어리를 하나씩 떼어내는 거지. 다 사라질 때까지

마음을 떼어낸다는 게 가능한가요? 그러다 죽어요.”

. 이러다 나도 죽겠지, 죽으면 다 그만이지, 하면서 사는 거지

보경은 민주처럼 콜 리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을 풀지 않고 더 어렵게 난해하게 대답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창을 바라보는 보경의 시선 각도와 느려진 숨이 대화를 이어가고 싶지 않다는 것을 대변하고 있어 콜리는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돌아가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건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었다. 콜리 역시 메모리에 저장된 순간으로 돌아갈 수 없음르 잘 알고 있었다. 흉내는 낼 수 있겠지만 그 순간으로는 절대 돌아갈 수 없다. 콜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식탁 끄트머리에 걸쳐 있던 노을빛이 길어져 이내 식탁을 반으로 가르듯 가로질렀다.

그리운 시절로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현재에서 행복함을 느끼는 거야.”

보경의 눈동자가 노을빛처럼 반짝거렸다. 반짝거리는 건 알므답다는 건데, 콜리 눈에 그 반짝거림은 슬픔에 가까워 보였다.

행복이 만병통치약이거든

행복한 순간만이 유일하게 그리움을 이겨

그리움이란 그런 것이구나. 콜리에게도 그리워할 순간이 생겼다. 투데이와 주로를 달릴 때다. 투데이가 행복해하는 진동을 느끼면서.

- 204~205pp

 

내 시간은 멈춰 있어.”

화재가 난 빌딩 속에 있던 소방관을 기다리던 그 시간에 멈춰있어. 반드시 살아서 나오리라 믿고 있는 그 시간 안에서.

시간이 흘러 보경은 그곳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 시간은 그곳에서 1초도 흐르지 않았다. 보경이 매일 일찍 일어나 쉬지 않고 하루를 보내는 이유는 그 지긋지긋한 시간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었음을, 그곳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달리기였음을 인정해야 했다. 시간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정적이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수면 위에 돛을 펼치고 있었다.

왜요?”

콜리가 물었다.

흐르게 하는 법을 잊었어.”

시간은 고여 있어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괜찮다고 생각했다가도 여지없이 그날로 빨려 들어갔다.

슬픔을 겪은 많은 사람들의 시간은 어떻게 흐르는 것일까. 사실은 모두 멈춰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지구에 고여버린 시간의 세계가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그 시간들르 흐르게 하기 위해서는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할까

그렇다면 아주 천천히 움직여야겠네요

콜리가 보경을 향해 조금 더 몸을 틀었다.

멈춘 상태에서 빠르게 달리기 위해서는 순간적으로 많은 힘이 필요하니까요. 당신이 말했던 그리움을 이기는 방법과 같지 않을까요? 행복만이 그리움을 이길 수 있다고 했잖아요. 아주 느리게 하루의 행복을 쌓아가다 보면 현재의 시간이, 언젠가 멈춘 시간을 아주 천천히 흐르게 할 거예요.”

보경의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눈물을 손으로 닦으려다가 보경은 흘러 떨어질 수 있도록 그냥 내버려두었다. 비린 눈물이 얼굴을 가로질러 베개로 떨어졌다.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어?”

배우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이건, 하늘을 보며 파랑노랑 떠올렸던 것과 비슷한 거예요. 연재가 저를 보고 이상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고요.”

모든 휴머노이드가 너 같지는 않을 텐데

저는 실수로 만들어진 거라고 연재가 말했어요. 저를 결정하는 제 안의 칩 하나가 다른 휴머노이드와 다르다고 했어요.”

285 ~ 286pp

 

지수는 연재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연재는 지수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지수는 연재는 지수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지수는 연재의 쌀쌀맞은 태도가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고 다가갔으나 연재는 그런 지수를 친구로서 받아들이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연재는 이해받기 원하지 않았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숱한 시간 동안 이해받지 못해 상처 입은 날들이 쌓여 여기까지 오래 된 것일 터였다. 이해받기를 원하는 것은 이기적인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가 저마다의 고통과 사연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지 않은 척 숨기기 위해 노력했다. 어쩔 수 없는 사정이란 모두에게 존재했다. 적어도 연재는 그렇게 생각했고, 이해받기를 포기했다. 연재는 은혜가 도움을 필요로 할 때마다 어디서 누구와 있는 모든 것을 그만두고 집으로 행해야 했다. 친구들은 연재에게 언니가 있다는 것만 알았다. 왜 항상 갑자기 집에 가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연재는 덤덤하게 은혜가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고 말했다. 아이들은 연재의 말을 알아들었지만 이해한 건 아니었다. 이해에는 한계가 있고, 횟수가 있고, 마지노선이 있다. 그 선을 넘으면 이해해주던 사람은 어느 순간 상대방의 이기심을 지적했다.

그런 것도 한두 번이어야지, 몇 번씩 그렇게 가면 우리는 뭐가 돼

이해받기를 포기한 건 이해하기를 포기한 것과 같았다. 연재는 상대방의 모든 행동에 사사건건 이유를 붙이지 않았다. 저렇게 행동하면 저렇구나, 하고 말았다. 상대방이 자신을 좋아해서 그러는지 싫어해서 그러는지 따위를 생각하면 너무 많은 이해심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타인의 이해를 포기하면 모든 게 편해졌다. 관계에 기대를 걸지 않기 때문에 상처받지 않았다. 적어도 지수를 만나기 전까지, 연재의 세계는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고요였다. 적막이기도 했고,.

지수는 연재에게 강풍으로 불어왔다. 잠잠했던 연재의 돛을 한 방에 날렸다. 어느 날 대회를 같이 나가자고 다가와 뻔뻔하게 협박했던 지수는 특유의 당당함을 무기로 내세웠다. 연재의 차가운 반응에도 상처받지 않았다. 세상에 저런 애도 있구나, 처음에는 싫었지만 계속 싫지는 않았다. 성질에 못 이겨서 버럭 화를 내는 게 웃기기도 했다. 지수가 귀찮게 느껴지는 횟수가 확연히 있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지수가 대화를 끝으로 예전처럼 놀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그 문제는 연재가 말을 얹을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학원을 계속 빠질 수도 없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알겠다고 대답했던 것뿐인데 지수는 화를 냈고, 그 이유가 자신과 함께 서운해하지 않아서라고 말했다.

나도 네가 그런 성격인 거 진짜 이해하거든?”

지수가 그동안 쌓아두었던 서운함을 꾹꾹 담아 말했다. 목소리만 들으면 우는 줄 알았다. 실제로는 눈에 화를 품고 있었지만.

네가 로봇광인 건 알고 있었지만 진짜 로봇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줄은 몰랐지. 너보다 콜리가 더 인간적이겠다.”

연재는 악담을 쏟고 있는 것이냐고 물으려다가 참고 지수의 말을 계속 들었다. 한참 말을 토해내던 지수가 한숨 돌리리고는 조금 진정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더는 못 온다고 해도 너는 알았어가 아니라 아쉽다고 했었어야지. 아쉬웠으면. 물론 네가 아쉽지 않았으면 어쩔 수 없지만, 적어도 나는 그때

순간 지수의 말을 끊고 연재가 말했다.

아쉬웠어.”

지수가 입을 다물었다. 연재가 계속 말을 이었다.

당연히 아쉽지. 근데 내가 아쉽다고 너한테 학원을 그만두라고 할 수는 없잖아.”

그래도 아쉽다고 했어야지. 그래야 내가 어떻게든 시간 날 때마다 또 놀러 갈 수 있지. , 내가 이 나이 먹고 친구한테 이런 거 하나하나 말해줘야 하는지 몰랐다. 네가 눈치 없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지수는 여전히 성난 투로 말했지만 표정은 아까보다 한층 누그러져 있었다. 연재는 그런 지수에게 아쉽다고 다시 한 번 말했다. 아쉽다. 아쉬움이란 단어를 꺼내지 않은 지 오래도서 완전히 잊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아쉬움에는 약간의 설움이 섞여 있었다. 실로 오랜만에 아쉽다는 단어를 꺼내면서, 아쉬움에 면역되지 않은 마음이 설움에 정복당하는 듯했다.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울먹이다가는 지수에게 평생 놀림을 받을 것 같았으므로 연재는 꾸역꾸역 참았다.

콜리에게 알려줘야겠다. 인간에게는 말하지 않으면 상대방의 속내를 알 수 있는 기능이 아예 없다. 다들 있다고 착각하는 것 뿐이다.

지수는 교실로 돌아가는 길에 며칠간 쌓아두었던 이야기를 터트렸고, 연재는 혹시나 듣고 있지 않다고 오해할까 봐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수는 이따금씩 말을 날카롭게 하는 편이었지만 꾸며 말하거나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연재는 지수와 자신이 잘 맞는다고 다시금 생각했다. 지수처럼 직설적으로 말해주는 게 좋다. 빙빙 둘러 생각하다 홀로 이상한 결론을 내리지 않도록.

너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야. 이해해. 왜냐면 우리 엄마가 예전에 그랬거든. 집을 더 신경 써야 하는 사람들은 밖에서 만난 사람들과 관계가 소원해진다고. 그냥 무감각해진대. 상처받지 않으려고 달팽이집으로 들어가는 거랑 똑같다고 그랬어. 나는 너 이해해. 내가 이런 말 하는 것도 웃기지만, 그러니까 너도 나 좀 이해해봐.”

어떻게

나는 원래 성격이 급하고 싹수가 없거든. 말할 때 좀 재수가 없어. 너도 이미 나를 간파했겠지만 우리 엄마도 나한테 자주 말하거든. 그렇게 싸가지 없게 말하면 어디 가서 욕먹는다고. 그럼 나는 엄마한테 그래. 이거 엄마한테서 배운 거고, 내가 꼭 남들에게 좋은 평 듣기 위해 예브게 말해야 하는 이유가 뭐냐고. 그렇지 않니? 그러니까 엄마가 나보고 여자애니까 말을 예쁘게 하래. 난리야. 진짜. 그나저나 내가 우리 엄마한테 너희 엄마 이야기 했더니 엄청 좋아했어. 우리 엄마도 그 영화 자주 봤거든. 그래서 말힌데 나중에 엄마끼리도 같이 만날래? 우리 엄마가 외게 원하는데.”

연재는 체육대회 날로 돌아가 옆 스탠드에 보경과 은혜, 그리고 지수와 콜리를 초대했다면 레일을 이탈하지 않고 끝까지 뛰어 1등으로 들어갔으리라 확신했다. 물론 연할 살, 그때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단지 앞으로 레일을 벗어나지 않고 완주할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세상 모두에게 이해받지 않아도 된다. 오직 연재가 이해하고 싶은 사람에게만 이해받을 수 있다면.

학교가 끝난 후, 식당에서 묵은지를 넣어 끓인 찌개를 먹으며 연재는 지수가 했던 말을 보경에게 전했다. 지수의 어머니가 보경이 찍은 영화를 보며 20대를 보냈다는 것과 시간이 된다면 넷이서 함께 만나자고 했던 것을 말이다.

뭐라고? 뭐라고 했다고?”

보경이 몇 번씩이나 되물었다. 진짜로 알아듣지 못한 게 아니라 연재의 입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왔다는 것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 연재는 보경에게 줄 수 있는 가장 믿음직한 확신이 침묵이라 생각해 입에 밥을 넣었다. 보경이 휴대폰 달력으로 자신의 연휴를 콕콕 집어 말했다.

지수 어머니는 뭐 하시는 분이라니? 평일에 시간 괜찮으시고?”

꼬치꼬치 묻는 보경을 연재가 지켜보다가 연재가 입을 열었다.

나도 보고 싶어.”

그래, 보고? 뭐를

엄마 영화

보경은 찌개가 사례에 걸린 듯 갑자기 기침을 토했다.

자료가 남아 있지 않을 거라는 보경의 걱정과 달리 30분 남짓의 영화는 검색 한 번에 고화질로 구매할 수 있었다. 연재는 2층에서 콜리와 함께 벽면에 영상을 쏘았다. 제목과 감독, 그리고 주연 배우 이름이 천천히 떴다. 그 속에 있는 김보경이라는 이름이 익숙하고 낯설었다. 공포영화를 보는 것처럼 영재가 무릎을 끌어안고 웅크려 앉았다. 옆에서 지켜보던 콜리가 연재를 따라 무릎을 끌어안았다. 콜리가 옆에 있어 연재는 홀로 있다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콜리에게는 생명체가 가진 체온이 없었다. 그럼에도 콜리는 언제나 이곳에 함께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존재였다.

영화의 길고 잔잔한 오프닝을 바라보다가 콜리에게 말했다. “내가 너를 그냥 데리고 왔다고 했잖아. 사실 그거 거짓말이야.” 말하지 않으면 상대방의 속을 알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연재가 이것만은 콜리에게 사실대로 말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몸이 다 망가진 채로 건초더미에 누워서 나한테 하늘이 예뻤다고 말하는 네가 불쌍했어. 그리고 순간 내가 너를 고칠 수 있지 않을까 호기심도 들었어. 그대로 내버려두면 너무 사라지겠지만 내가 데리고 오면 사라지지 않으니까. 같잖은 연민이지. 그래도 후회 안 해. 나는 내가 좋아했던 걸 그동안 싫어한다고 믿고 살았는데, 아니더라고. 너 만지면서 알게 됐어. 그리고 지금 내 말에는 대답하지 마. 명령이야

콜리는 연재의 명령을 지켰지만 처음으로 명령을 어기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그 충동에 몸체 내부에서 실제로 일어났는지, 콜리는 영화를 보는 내내 속에서 무언가 어긋남을 느꼈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연재를 방해할 수 없어 가만 충동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 326 ~ 333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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