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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역학의 미래, 큐비즘이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구하다
한스 크리스천 폰 베이어 지음, 이억주.박태선 옮김 / 동아엠앤비 / 2018년 10월
평점 :
철학이 과학을 소생시키다.
고등학교 3학년 때였을 것이다. 양자역학에 대해서 배운 것이. 하지만 그 때는 정확히 내가 배운 것이 양자 역학이라는 말이 붙어 있지 않았다. 오비탈 이라는 것 이었는데, 원자 세계로 들어가면 전자의 분포도가 과거 우리가 알고 있었던 직관대로 행성 모델이 아니라, 행성을 감싸고 있는 짙은 구름과 같은 형때로 삥 둘러서 확률로서 전자가 이동한다는 것 이었다. 순간 머리가 멍 해졌다. 그리고 이 직관적이지 않은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나는 헷갈렸고, 직관적인 해석을 요구하는 문제들은 그 뒤부터 멀어졌다.
장면 둘. 나는 대학에 가서 다시한번 양자역학에 대해서 배웠다. 약대를 나오고 화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사람으로부터 일반 화학을 배웠지만 결과는 마찬가지 였다. 그 사람 또한 똑같은 피상적인 이야기만 할 뿐. 나의 무식 혹은 나의 직관은 양자역학이라는 이상한 영역을 언제나 암기로서 겉돌 뿐, 언제나 양자역학이 무엇인지 나무를 쪼게는 벼락과 같은 느낌을 받은 적이 없다. 언제나 답답했꼬, 언제나 암기로서 그 허기를 체울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암기는 다른 텍스트를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금세 사라지곤 했다.
왜 이런 어려움을 겪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양자역학이 일어나는 공간은 일종의 직관적인 실험이 가능한 공간이 아니다. 대부분의 실험은 우리의 눈을 통해서 관찰된다. 그리고 그 눈을 통한 관찰이라는 것은 ‘광자’라는 것을 통한 관찰이다. 하지만 그 광자 자체가 영향을 실험에 미친다면 우리는 그 실험 결과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너무 미시세계이기 때문에 시각적 관찰도 어렵지만, 그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에 대해서 우리는 언제나 중간 과정을 생략한 체 드러나는 결과들로만 관찰하고, 그 통계를 통해서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이다. 그리고 그 중간과정을 볼 수 없었던 우리는 해석을 통해서 미시세계에 대한 지적 허기를 채우곤 했다. 그리고 부족하긴 하지만 해석을 통한 지적 허기는 종종 채워지곤 했다.
자! 지금 그 해석이 달라지려고 한다. 창의력이라는 것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 아니다. 기존에 있던 것들을 다시 사용하는 것.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한 다른 방향의 시선을 주는 것. 그것이 창의력이다. <양자역학의 미래: 큐비즘이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구하다>는 우리에게 양자 역학에 대한 본질적인 또 다른 해석의 도구를 통해 양자역학의 이해를 돕는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다. 이 책을 보더라도 어려운건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