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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들 - 마음의 고통과 읽기의 날들
수잰 스캔런 지음, 정지인 옮김 / 엘리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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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대회

문학은 한 사람의 삶에 얼마나 큰 변화를 가져다줄 수 있는가. 자전적인 에세이임에도 문학 작품에 대한 이야기가 가득 담겨 있다는 것은 문학이 저자의 삶 그 자체이자, 자신을 이해하기 위한 도구였음을 보여준다. 어떤 정보를 습득하거나 지식을 쌓기 위한 독서가 아니라 살아가기 위한 독서. 우리는 흔히 정신병을 치료가 필요하고, 고쳐져야 하는 상태로 여기지만, 문학을 만난 저자는 고통을 없애야 할 것이 아니라 해석해야 할 것으로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의 제목인 〈의미들〉은 복수형이다. 고통 속에서 의미를 찾아내어 문학으로 승화시키는 여성 작가들을 보면, 하나의 의미로는 설명되지 않는 인간의 삶을 드러내기 위한 제목이 아닐까 싶다. 저자의 이야기를 듣고 내가 겪는 불안과 이해받지 못한 감정들도 나만의 언어와 이야기로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가능성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여성 작가들의 책을 읽고 삶의 의미를 발견했던 저자가 글을 쓰면서 또 다른 여성들을 구원한다. 자기 이해는 곧 사회적, 인간적 이해로 확장된다. 불안과 슬픔은 개인적이지만, 그것을 언어와 이야기로 풀어낸다면 타인과의 연결고리가 될 수 있다. 문학은 나의 경험과 세상을 연결할 수 있는 힘을 준다. 책을 많이 읽으면 뭐가 좋아요? 독서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질문이다. 지금껏 나는 이 질문에 '그런 질문을 안 하게 되는 것이 장점이다'라고 답했다. 이제는 그 답변에 이 책을 덧붙이고 싶다. 문학이 사람의 삶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궁금하다면 〈의미들〉을 읽어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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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린 그림 찾기 - 차별과 편견의 경계에 갇힌 사람들
박천기 지음 / 디페랑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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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을 향한 시선은 자신과의 차이를 식별한다.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타인에게 보냈던 시선은 순식간에 자신에게 돌아와 자신과 타인의 정체성을 나눈다. 문제는, 나와 타자를 식별하는 것에 멈추지 않고 그 차이에 역학 관계를 적용하는 것에서 발생한다. 상하, 우열, 귀천, 정상-비정상, 중심-주변, 어느 쪽이든 한쪽의 정체성에는 가치를 부여하고, 나머지 한쪽에는 가치를 박탈한다. 시선 사이에 권력을 만들고 적용할 때, 단순한 차이는 비대칭적 차별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비대칭적 차별 감정이 안에서 굳어지면 편견이 되고 밖으로 노출되면 본격적인 차별이 된다. 책을 읽으며, 우리가 차별을 단순히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배척하는 행위로만 생각해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차별은 훨씬 더 미묘하고, 익숙하며, 일상적이다. 이것은 단지 사회적 태도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인식의 깊은 층위에 자리한 습성이다. 그리고 그 습성은 세대와 문화 속에서 학습된다. 우리가 차별을 '배운 감정'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그렇다면 차이를 지우면 차별도 사라질까? 겉보기에는 그렇게 보일지도 모른다. 서로 다르지 않다면 비교할 이유도, 위계를 세울 필요도 없을 테니까. 하지만 차이를 지우려는 것은 세상을 정상이라는 범주에 맞추려는 시도와 같다. 현실에서 차이를 없애려는 시도는 어떤 기준을 중심에 놓고 모두가 그 기준에 맞도록 조정하려는 압력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 기준은 대개 다수자, 혹은 권력을 가진 집단의 경험과 관습을 반영한다. 예를 들어, 왼손잡이를 생각해보자. 한때 왼손잡이는 틀린 손을 쓴다고 여겨져, 오른손을 쓰도록 강요당했다. 결과는 무엇인가? 왼손잡이의 자연스러운 행동은 억압되고, 개인의 편차는 결함으로 규정되며, 표준에 맞지 않는 사람은 적응을 강요당한다. 이와 같은 현상은 장애, 언어, 성(性), 문화 등 모든 차이에 대해 반복된다. 정치, 제도 차원에서도 동일하다. 차이를 제거하는 순간, 우리는 인간의 다양성과 개별성을 함께 지워버리게 된다. 결국 차별 없는 사회란 모두가 같은 사회가 아니라, 다름이 존중받는 사회여야 한다.

하지만 차별이 제도적 문제만은 아니다. 제도를 바꾸어도 마음속의 위계가 사라지지 않으면, 차별은 형태만 바꾼 채 이어진다. 장애인을 위한 시설이 늘어도 여전히 불편하다고 느끼는 시선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차별이 사라진 게 아니라 덜 드러나게 된 것뿐이다. 이런 감정적 차별은 말보다 더 깊게 사람을 배제한다. 그것은 혐오의 형태로 드러나기도 하고, 때로는 무관심이나 거리 두기의 형태로 숨기도 한다. 그래서 진정한 평등은 사람을 대하는 감정의 구조, 다시 말해 타인을 바라보는 습관 자체를 바꾸어야 한다.

우리는 차이에 머무는 법을 배워야 한다. 누군가의 다름을 불편하게 여기지 않고, 그것을 통해 나를 다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차별이 사람을 바라보는 방식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언제나 차이가 존재할 수밖에 없고, 문제는 그 차이를 어떤 관점으로 해석하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는 서로 다르지만, 그 다름이 누군가의 우월함이나 열등함을 증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차이는 우리가 세계를 더 넓게 이해할 수 있는 출발점이 된다.

이 책의 제목인 〈틀린그림찾기〉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어릴 적부터 두 장의 비슷한 그림을 비교하며 틀린 부분을 찾아내는 놀이를 해왔다. 그러나 사실 그 그림들은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틀린 그림이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책의 제목만 보고서 어색함을 깨달은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솔직히 나도 같이 책을 읽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어보기 전에는 잘못된 점을 찾지 못했다. 틀린 그림이 아니라, 다른 그림을 찾아내는 눈. 그것이야말로 이 책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려는 시선의 전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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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쓰이지 않은 세상에서 - 소설가를 꿈꾸는 어느 작가의 고백
강주원 지음 / 디페랑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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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는 작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담겨있다. 경험을 문장으로 정리하는 과정은 글을 쓰는 것이 스스로를 돌아보고 세상을 조금씩 이해해 나가는 시간임을 깨닫게 해준다. 글을 읽는 사람들은 작가의 시선을 함께 따라가며 작가가 보고 느낀 세상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읽기와 쓰기는 서로를 필요로 한다. 우리는 타인의 글을 통해 내가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것들을 마주하며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넓혀가기 때문이다.

저자는 처음 글을 쓰게 된 계기가 남들에게 들려주기 전, 자신의 목소리가 어떤지 궁금했기 때문이라고 표현한다. 저자에게는 글쓰기가 자신의 내면을 탐색하는 시간이었던 셈이다. 초반에는 여러 공모전에서 낙방하기도 하고 원고를 완성하지 못하기도 하는 저자의 모습을 보고 책을 낸 지금과는 달리, 처음 글을 쓰던 시절은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점에서 당시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 역시 글을 처음 쓰기 시작했을 때는 아무것도 모른 채 눈에 보이는 공모전에 무작정 응모하곤 했다. 그때 응모했던 글들을 돌아보면 형편없고 부족하게만 느껴지긴 해도, 지금의 글과 비교해 보면 확실히 발전이 있다는 걸 실감할 수 있게 해주는 글들이다. 나와 비슷한 과정을 거친 저자를 보며 언젠가는 나도 저자처럼 나만의 책을 낼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도 품게 되었다.



P. 96

글쓰기는 놀이가 아니며 반드시 즐거워야 하는 것도 아니다. 노트 위 몸부림은 당연하다. 쉽게 쓰인 듯한 일기에도 고심과 고침의 흔적이 숨어 있는 경우 흔하다. 달콤한 고백이건 꿈같은 회상이건 기본적으로 쓰기란 쓰디쓴 고통이다. 좋아 죽을 것 같은 기분도, 딱 죽지 않을 만큼만, 죽도록 고민해서 써야 하는 게 작가다. 블레즈 파스칼은 '인간의 헛됨을 온전히 이해하려거든 사랑의 원인과 결과를 살펴보기만 하면 된다'고 했는데, 이 사랑의 원인과 결과는 글, 문학과도 닮은 구석이 있다. '형언하기 힘든 어떤 것'이며 '끔찍한 결과물'이다. 너무 사소해서 인지조차 되지 않는 그 형언하기 힘든 어떤 것이 세상을 흔든다.

헛된 인간이 글을 쓴다. 책을 읽는다.

_

아마 글을 쓰는 모든 사람들이 공감하는 부분일 것이다. 좋아서 시작했지만 막상 쓰는 과정은 늘 고통이 따른다. 어떤 날은 한 문장을 붙들고 몇 시간을 씨름하다 결국 지워 버리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내가 쓴 글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아 전부 엎어 버리고 싶어질 때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글은 완성될 수 없다. 완성된 글을 보며 느끼는 즐거움과 성취감. 아마 이런 점 때문에 내가 글을 놓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나는 '형언하기 힘든 어떤 것이 세상을 흔든다'는 부분을 글이란 인간의 헛됨 속에서 태어나지만, 동시에 세상을 흔들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힘을 지니고 있다는 뜻으로 이해했는데, 그래서인지 내가 글을 쓰면서 겪는 고통도 언젠가 누군가에게 닿을 수 있는 가능성의 일부라고 생각하니 이상하게 위로가 되기도 했다.

이렇게 한 문장, 한 문단을 씨름하며 쌓아 올린 경험들이 모여 비로소 나만의 세계가 된다. 글을 쓰는 사람은 더 이상 내가 쓰이지 않은 세상을 상상할 수 없다. '내가 꿈꾸는 작가 소개는 작품 목록으로만 채운 프로필'이라는 저자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나도 동감하는 부분이다. 책 날개를 펼치면 내 책의 제목이 가득했으면 좋겠다. 많은 이야기를 쓰고 싶다. 항상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는 없어도 내가 온전히 경험하고 표현한 순간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기에 성공과 실패, 그 모든 순간이 나를 만든다. 오늘도 헛된 인간이 글을 쓴다. 책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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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를 기회로 바꾸는 대화법 - 뱉고 나서 후회한 말 다시 주워 담는 기술
야마모토 에나코 지음, 박현아 옮김 / 영림카디널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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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한 번쯤은 뱉은 말을 주워 담고 싶었던 적이 있을 것이다. 별 생각 없이 던진 말이 뜻하지 않은 결과를 불러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가볍게 내뱉은 농담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기도 하고, 별생각 없이 건넨 대답이 대화의 흐름을 끊어버리기도 한다. 이처럼 말은 단숨에 관계의 온도를 바꾸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말을 할 때 각별히 주의해야겠다고 다짐하면서도, 늘 실수하고 나서야 깨닫곤 한다. 상대방의 표정이나 반응을 보고서야 잘못을 알아채거나, 이미 뱉은 말 때문에 어색해진 순간을 떠올리며 자책하게 된다. 말 한마디로 상황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왜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걸까?

우리가 대화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완벽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나의 실수로 상대방의 평가가 바뀌거나 관계가 나빠질까 걱정하고, 무엇을 어떻게 말할지 계산하게 된다. 하지만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이상, 아무리 조심해도 오해는 발생하기 마련이고 엇갈리는 일도, 대립하게 되는 일도 있는 법이다. 그래서 이 책은 대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란, '절대 실수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실수를 실수로 끝내지 않으며 '실수를 수습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현실은 라이브와 같아서, 우리는 날마다 애드리브를 하며 살아야 한다. 연극이나 영화처럼 시나리오도 없는 상태에서 대화할 때마다 미리 준비한 듯이 한 번에 옳은 대답을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런 조건에서 다른 사람과 긴 시간 동안 원활하게 소통할 때 중요한 것은 실수하지 않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이 아니다. 실수를 저질러도 다시 회복해 나가려는 의식과 기술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무심코 꺼냈던 말이 실은 상대에게 콤플렉스였다는 걸 나중에 듣게 된 상황이라고 가정해보자. 처음부터 개인적인 화제를 건드리지 않는 대화 주제를 골랐다면 좋았겠지만, 이미 말을 해 버린 상태에서는 상황을 바로잡기 위한 수습이 필요하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바로 달려가 사과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라는 것이다. 뒤늦게 알게 된 사실 때문에 사과해야겠다고 그 이야기를 다시 언급한다면 상대는 이미 잊고 있던 불쾌한 기억이 다시 떠오르며 오히려 더 상처를 받을 수 있다. 사과가 상대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 불안과 죄책감을 해소하기 위한 행동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이 책에 따르면, 이럴 때 필요한 것은 무언가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휘둘리지 않고 상황을 신중하게 판단하는 것이다. 이럴 때는 상대가 편안하게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주제를 선택하거나, 이전 대화에서 반응이 좋았던 이야기를 다시 꺼내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이렇게 하면 실수에 대해서는 스스로 반성하면서도, 상대에게는 불쾌한 기억을 떠올리게 하지 않고 배려할 수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무조건적인 사과와 변명이 아니라, 이전의 좋지 않은 기억을 긍정적인 경험으로 덮으며 관계를 자연스럽게 회복하는 행동이다.

〈오해를 기회로 바꾸는 대화법〉이 정답지가 아니라 '수습 레시피'라고 불리는 이유는,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정해진 결과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책에서 제시하는 요령들은 요리를 위한 재료와 같다. 재료를 어떻게 조합하고, 언제 어떤 방식을 선택할지는 결국 독자인 우리가 결정한다. 이 책은 명확한 답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판단하고 적절히 대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도구와 지침을 제공하는 셈이다. 이런 방식으로 상황에 따라 대화를 조율하다 보면, 실수를 두렵기만 한 일이 아니라 관계를 돌아보고 배우는 기회로 받아들일 수 있다.

무엇보다 대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 편안하고 기분 좋은 상태를 만드는 것이다. 억지로 참거나 지나치게 노력하면 상황이 조금 나아질 수는 있겠지만, 내가 대화를 즐길 기회는 멀어진다. 수습의 목적은 옳은 상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편안하고 좋은 상태를 만드는 데 있다. 요령에 너무 얽매이기보다, 마음을 솔직하게 담아 전하는 것이 진정한 대화의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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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내란은 끝나지 않았다 - 지금 여기, 한국을 관통하는 50개의 시선
김정인 외 지음, 백승헌 외 기획 / 사이드웨이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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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3일, 우리는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눈앞에서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에 의해 이루어진 친위 쿠데타는 뉴스를 보자마자 국회로 달려 나간 국민들의 개입으로 저지당했지만, 계엄 세력이 도발한 내란 상황은 윤석열 전 대통령 파면이 결정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일각에서는 비상 계엄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한 데에는 윤석열이라는 인물의 개인적 특성이 아주 강하게 반영되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비상계엄의 원인을 이 정도로 단순하게 정리하기에는 내란 우두머리 혐의로 구속된 윤석열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법을 해석해 판결한 사법부 카르텔과 비상 계엄의 실패 이후 극우만이 아니라 보수 정당 전체가 보여준 윤석열에 대한 적극적인 동조 행위를 설명하기 어렵다.

12.3 계엄과 이후 내란 상황은 한국이 전형적인 엘리트 카르텔형 부패의 나라임을 재확인해 주었다. 계엄 사태를 통해 노골적으로 드러난 사업부 카르텔과 모피아의 부패 현상은 언제부터 형성된 것일까?

민주화 이후 부패라는 범죄를 수사하고 재판해야 할 법조인들은 학연에 기반한 사법 카르텔을 강화했고, 그렇게 30년이 훌쩍 넘는 세월 동안 검사들은 그 자체가 하나의 이익 집단으로서 순혈주의적인 카르텔을 형성했다. 조직 중심주의와 힘의 논리를 내세웠던 검찰 카르텔은 강고한 순혈주의로 대통령 권력까지 창출해 냈으나 결국 민주화에 역행하는 반동으로 기능하고 말았다.

모피아의 부패는 1997년 IMF 외환위기 사태를 유발한 원인으로 지적될 만큼 심각했다. 모피아의 주된 역할은 현직 재무 관료들을 상대로 자신이 속한 금융기관의 현안 해결을 위해 로비를 하는 것이었다. 최근에는 모피아를 넘어 관피아라고 불리는 전 부처의 퇴직 고위공직자들이 엘리트 카르텔형 부패에 가담하고 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은 초기엔 탈기득권을 외치며 엘리트 구조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면서 청년 세대에 더 많은 기회를 주겠다는 구호를 내세웠으나, 12.3 계엄을 통해 본인이야말로 검찰 카르텔의 기반 위에서 대통령에 오른 인물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이번 사태가 더욱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이유는, 계엄이 실패로 돌아간 후에도 윤석열을 지지하는 극우 세력이 적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들 역시 내란 세력으로부터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는 입장임에도 여전히 윤석열을 지지하며 국민의 저항을 폭도라 부르고, 계엄 선포를 정당화하는 이들의 목소리는 우리 사회가 이미 상당히 극우화되어 있음을 보여주었다. 윤석열이 권력에서 밀려난다고 해도 또 다른 윤석열이 등장할 수 있다는 불안은 바로 이 극우 세력이 여전히 한국 사회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다는 데서 비롯된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극우적 담론에 끌리게 된 것일까.

한국의 극우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한국 사회의 구조적 특성에 주목해야 한다. 개인주의와 집단주의가 기형적으로 결합하면서 가족과 공동체로부터 분리된 개인들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새로운 소속감을 찾으려 했다. 온라인 공간을 중심으로 한 개인 방송이 확산되며 가짜 뉴스와 혐오 표현이 급속하게 퍼졌고, 그 사이에서 등장한 새로운 보수 담론은 기존의 전통적 보수와는 다른 극우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온라인에서 증폭된 증오와 극단성은 결국 현실 세계의 폭력으로 이어졌고, 무고한 시민들과 사회 전체에 큰 피해로 돌아오게 되었다.

극우 세력의 확산에도 불구하고 단연코 눈에 띄던 것은 강추위 속에서 눈을 맞으면서도 광장에 나온 사람들이었다. 특히 2030 여성들은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며 집회 풍경을 바꿔 놓았다. 기성세대가 들었던 촛불을 이어받고, 거기에 자신들만의 색깔을 더한 응원봉 집회는 지금 전 세계에서 주목받고 있는 시위 문화 중 하나가 되었다. 과거에는 광장에 나온 여성들을 이색적인 현상인 양 취급했지만, 강남역 살인 사건 이후로 2030 여성들은 여성 관련 의제가 불거졌을 때마다 꾸준히 목소리를 내왔다. 지금은 2030 여성들은 부당하게 가해지는 폭력과 차별, 배제에 고통받아 온 이들에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이들과 함께하는데 누구보다 앞장서는 존재다. 과거에는 집회에서조차 대의를 위해 소수가 어느 정도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는 정서가 있었지만, 이번 탄핵 집회에서는 여성들이 평등한 공간을 만들어 나가는 주체로서 역할을 다했다. 서로를 이해하고 포용하는 광장이 될수록 소수자들도 안전함을 느끼고 자신을 드러내는 용기를 발휘할 수 있기 마련이다. 비상행동 탄핵 집회가 매주 집회 시작 전 사회자를 통해 참가자들에게 평등약속문을 안내하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그리고 이렇게 광장으로부터 힘을 얻은 이들이 이제는 기존 시민운동이 집중하던 사안들에 연대로 화답했다.

〈그러므로 내란은 끝나지 않았다〉는 우리 사회가 직면한 구조적 위기와 위험을 냉정하게 분석하면서도, 동시에 그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희망의 가능성을 시민들의 행동 속에서 발견하도록 안내하는 책이다. 나도 국회의사당 앞에 나가 있던 사람 중 한 명으로서, 낯선 이들과 구호를 외치며 혼자가 아닌 공동체 속에서 힘을 얻는다는 감각을 직접 느낄 수 있었다. 포용과 연대가 사회를 움직이는 원동력임을 실감하면서, 책에서 지적한 극우화와 엘리트 카르텔의 위험을 견제할 수 있는 실질적인 힘은 시민들의 단결이라는 것을 되새기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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