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P 82

자화상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기없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라!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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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

P 64

참회록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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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에 맺혔다 주르륵 흘러내리는 것들

그 사실을 나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알았다. 그것을 영원히 몰랐다면좀 덜 슬프고, 덜 아팠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은 언제나 너무 늦게오거나아니면 너무 빨리 온다. 우리는 언제나 너무 빨리 만난 사랑 때문에 너무 오래만나지 못한 사람 때문에, 그리고 너무 늦게 알아버린 진실 때문에 아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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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자로 왔으니 다시 방랑자로 떠나네

* 잘 자요

방랑자로 왔으니 다시 방랑자로 떠나네
그대는 오월의 예쁜 꽃들로 나를 맞았지.
그대는 사랑을 속삭였고 어머니는 축복했지.
하지만 이제 세상은 슬픔에 잠기고
내 발길 닿는 길은 눈으로 덮였네.

나는 몰랐네. 이별이 언제 다가올지를.
캄캄한 어둠 속에서 길을 찾아 떠나야 하네.
외로운 내 길동무는 차가운 달그림자뿐.
눈 덮인 하얀 들판 들짐승 발자국 따라 걷네.

하릴없이 머문다 해도 사람들은 등을 떠밀 뿐
길 잃은 개들이 그대의 집 앞에서 짖네. 
사랑은 다만 유랑하는 것,
그것이 신의 뜻이라면 다시 떠날 수밖에.
잘 자요 내 사랑!

그대의 꿈을 깨우지 않고, 그대의 단잠 깨우기 싫어
발걸음 죽이고 살며시, 살며시 문을 닫있네.
당신의 방문에 한마디 인사를 남기네, ‘잘 자요‘
당신을 향한 나의 사랑을 그대는 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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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사라진 것들은 반딧불처럼 떠돈다
p 9
삶에는 이유가 없어도 좋다. 그러나 죽음에 명확한 근거가 필요하다. 죽음그 자체를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남은 자들의 삶을 위해서. 열아홉살의 이 겨울, 나는 그 사실을 알게 되었고 지금의 내가 되었다.

1945년 8월 15일, 전쟁은 끝났다. 갇혀 있던 사람들은 모두 풀려났지만나는 여전히 이 형무소에 있다. 바뀐 것이 있다면창살 밖에 있던 내가 창살안으로 들어왔으며,입고 있던 갈색 간수복이 붉은 죄수복으로 바뀌었다는 것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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