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있어 책은 겉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아버지는 나의 책사랑이 학구열로 이어지기를 바랐던 것 같지만, 오히려 수업에 대한혐오감만 커졌다. 걸핏하면 상상의 세계에 빠지곤 했던 나는 저녁이면 학교에서 집까지 한달음에 달려가 아버지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했다. 아버지는 공무원이었고, 배움에 대한 열정이 넘치는 성실한 사람이었다. 책은 그저 종이에 적힌 글이 아니라, 다른 장소,
다른 삶으로 통하는 입구라고 아버지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나는책과 그 안에 담긴 무한한 세계를 사랑하게 되었고, 이는 오롯이아버지 덕분이었다. - P15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요. 그래요, 포옹하고 싶어요. 누군가에게 뭔가를 부탁해본 적은 한 번도 없지만, 내게 필요한 것을주겠다고 하니 행복한 위로를 받는 느낌이었다. - P127

"사랑은 무서우면 안 되는 거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어쩌면 난 셰인을 전혀 사랑하지 않았는지도 몰라요. 사랑인 줄 알았지만, 그게 함정이잖아요? 제대로 처신 못한 내 잘못이라고 억지로 믿게 되죠. 하지만 그게 진짜 사랑이 아니라는 걸 알았더라면 더 빨리 떠났을 거예요."

"그런 게 사랑인 줄 알았죠. 무슨 일이 있어도 곁에 붙어 있는것. 내가 사랑에 빠졌던 그 사람으로 돌아오길 기다리면서." - P191

"내 말 잘 들어, 마서 두렵지 않으면, 살아 있는 게 아니야." - P296

"젊을 땐 사랑이 뭔지 제대로 알기 힘든 것 같아요. 소설 제목이 의미하듯, 우리는 인간관계에서 나쁜 행동을 정상으로 여기기도 하고, 무조건 정상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자기한테 일어나는 안 좋은 일을 숨기잖아요. 하지만 노멀 피플이 정상적인 사람이라는 게 대체 뭐죠?" - P298

이제 셰인이 사라졌으니 더 강해진 느낌이 들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감각이 무뎌졌다. 죄책감이 들었다. 권선징악의 느낌도 없었다. 승자는 없고, 그저 상처 입은 사람들이망가진 인생의 파편들을 주워 모을 뿐이었다. 왜 셰인이 내 인생에 들어왔는지, 왜 내가 그런 일을 겪어야만 했는지 영영 알 수 없을 터였다. 내가 무언가 잘못을 저질러서 벌을 받은 걸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길 잃은 곳>을 쓴 사람은, 삶의 모든 시련이 더 큰 깨달음으로 이어지는 열쇠이며, 그 열쇠로 미래를 여느냐 아니면 문에 빗장을 지르느냐는 본인의 결정에 달려 있다고했다. - P313

"당치도 않은 소리! 남들 따라 살면 사형수나 마찬가지지. 그건안돼, 이 사람아, 자네의 남다른 점을 받아들여, 자네가 특출나니까 사람들이 싫어하는 거야. 세상 돌아가는 꼴 좀 보라지. 아이가진면목을 드러내면 부모는 혼을 내잖아. 왜냐하면, 우리도 혼났고,
우리 앞의 부모들도 그랬으니까. 남들한테 피해가 가는 것도 아닌데 왜 본모습을 바꿔야 하지?"
"글쎄요. 그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어요. 난 그냥 항상 나자신한테 너무 화가 나요. 아무리 기를 써도 인정 못 받을 텐데 노력은 해서 뭐 하나 싶고요."
오즈
"누구한테 인정받으려고? 남들이 만들어놓은 인생에 갇혀 사는인간들? 그 인간들은 자네도 자기들처럼 갇혀버렸으면 싶은 거야.
자기들만 공허감에 사무치면 억울하거든. 조심해, 마서, 계속 부르주아의 눈으로 세상을 보다간 자네만의 가치를 못 보고 말 테니까!" - P335

"자, 그래요, 오스틴이 호불호가 갈리는 작가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지금까지도 오스틴의 작품이 많이 읽히는 이유는, 여전히 우리에게 유효한 주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죠. 사랑. 가족 간의 의리. 자존심. 관습에 순응할 것을 강요하는 사회적 압력. 여러분은어떤 상황에서든 여러분의 자유 의지로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마음이 원하는 것, 머리가 원하는 것, 그리고 남들의 시선에 끊임없이 영향받고 있어요."
그의 말이 옳았다. 요 몇 년 동안 정말로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제 생각에 제인 오스틴은......." 늘 내 옆자리에 앉는 은퇴한 치과 간호사 베벌리가 입을 열었다. "살다 보면 사랑의 기회가 한 번더 찾아온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부당한 것 같아서 이제 웬만하면 사람을 읽지 않으려 했지만,
가끔은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되어버릴 때가 있었다. 첫사랑이 자동차 충돌 사고로 죽은 후 베벌리는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부디 그녀를 위해서라도, 제인 오스틴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기를
"맞아요, 베벌리, 앤은 웬트워스의 앞날이 창창하지 않으니 사랑의 기회를 포기하라는 ‘설득‘에 넘어가지만, 그를 잊지 못하고 자신의 결정을 뼈저리게 후회합니다. 하지만 마지막에는, 헤어져 있던 세월 덕분에, 다시 찾아온 사랑이 더욱더 고맙게 느껴진다는사실을 깨닫죠." - P357

<설득>의 한 대목이 절로 떠올랐다. "이제 그들은 남남이었다. 아니, 남보다도 못했다. 지인으로도 지낼 수 없는 사이가 되어버렸으니. 그것은 영원한 결별이었다." - P360

또 다른 사실도 깨달았다. 다시 헨리를 읽을 수 있게 되었다는멋진 사실을 처음 만난 날처럼 그의 이야기가 선명하게 읽혔다.
그가 잠든 동안, 나는 복잡한 감정이 뒤얽힌 가운데에서도 의미깊었던 그와 아버지의 재회를 읽었다. 어쩌면 내 능력을 막았던 건사랑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그 반대였으리라. 나 자신을향한 증오, 나를 함부로 대하는 셰인을 떠나지 않으려면 나 자신을 버리는 수밖에 없었다. 무언가가 잘못됐음을 알아차린 내면의목소리를 침묵시켜야 했다. 내가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누군가의 화풀이 상대로 살기엔 아까운 사람이라고 알려주는 직감을 무시해야 했다. 나 자신과 나의 욕구를 보지 못하게 되자 셰인을 읽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마찬가지로, 내가 헨리를 사랑하고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외면하자 헨리를 읽을 수 없게 되었다. - P465

길을 잃었다고 절망하지 말아요. 길 잃은 곳에서 인내하고 기다리세요. 길을 잃는다고 영원히 사라지는 건 아니에요. 길 잃은 곳에서 다른세계가 시작되고, 과거의 아픔이 힘으로 바뀔 수 있답니다. 여러분이 항상 품고 있던 열쇠로 이 특별한 곳의 문을 열어보세요.
여기에 오기만 하면 누구든 특별한 재능을 발휘하여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어요. 기억을 통해 전해지는 이야기 말없이 모습을 드러내보이는 삶들, 여러분의 귓가에 살며시 지식을 속삭이는 책들, 친절한손길에 되살아나는 태엽 장난감들, 구조되어 새 생명을 얻는 옛 추억이 모든 마법이 이 벽들 안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죠. 이곳에는 원하는 대로 마음껏 변신할 수 있는 에너지가 있어요. 예전의 모든 걸 여전히 품고 언제든 예전 모습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그 작은 씨앗은 진정으로 믿는 사람들에게만 보이도록 숨어 있답니다.
자, 문턱을 넘어 여러분의 권리를 되찾을 준비가 됐나요? - P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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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저절로 끊기 전에 저절로 물러서게 되니 좋은 일이지너도 며칠 지나면 나처럼 되는 거야." - P12

혀가 빠지게 일했던 세월도 돌이켜보면 헛되어 보이는데, 햇볕을 쪼이면서 허송세월할 때 내 몸과 마음은 빛과 볕으로가득 찬다. 나는 허송세월로 바쁘다. - P43

죽으면 말길이 끊어져서 죽은 자는 산 자에게 죽음의 내용을전할 수 없고, 죽은 자는 죽었기 때문에 죽음을 인지할 수 없다.
인간은 그저 죽을 뿐, 죽음을 경험할 수는 없다. - P50

혀를 빨리 놀리지 않게 되는 것은 좋은 일이다. 혀가 굼뜨게 되면 말이 멀어지고, 단어 한 개를 끌어오려 해도 단어는선뜻 따라오지 않아서 단어 하나가 모시기 어려운 줄을 저절로알게 된다. - P62

수컷은 남의 새끼를 잡아와서 제 새끼를 먹인다. 
암컷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저 한없는 집중과 인내와 기다림. 새는 제 몸의 온도로 새끼를 깨워 낸다. 당신들과 나는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달걀을 먹었던가. - P66

허균은 책 속의 길과 세상의 길을 이으려다가 죽었고, 김득신은 책 속의 길과 세상의 길을 끊어 놓고 죽었고, 차천로는 북경 성관의 ‘인정‘을 받으면서 죽었다.
세상의 길과 이어지지 않는다면 책 속에 무슨 길이 있겠는가.
나는 김득신의 책과 화적의 밥 사이를 건너가지 못한다. 나는 밤에는 책을 읽지 않는다. - P158

물이 반죽 속에서 수행하는 작용과 들기름이 비빔밥 속에서수행하는 작용은 크게 다르다. 물은 재료의 입자들을 엉기게 하지만, 들기름은 재료와 재료 사이의 거리를 존중하고 그 사이를연결함으로써 모든 살아 있는 개별성의 조화로운 종합으로서 새로운 맛의 장르를 이룬다. 이것은 한바탕의 완연한 세계를 갖는맛이다. 그러므로 밀가루 반죽을 주무르는 손길과 비빔밥을 비비는 손길은 그 힘과 질감과 작동방식이 같을 수가 없다.
옛 옹기장이의 손길과 돌아가신 내 어머니의 손길이 이러할진대, 이 세상의 모든 갈등과 다툼과 불화와 적대관계를 버무려서서로 의지하는 세상을 만들어 내야 하는 사람의 손길과 마음은어떠해야 하는가를 생각하면서 서울로 돌아왔다. 귀로에 차가많이 막혔고, 도로는 답답했다. 차 때문에 차가 가지 못했다. 앞차 때문에 내 차가가지 못했고 내 차 때문에 뒤차가 가지 못했다.
다들 오도 가도 못했다. - P200

자동차들은 앞차가 움직이면 뒤따라서 움직였고, 혼자서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자동차들은 남이 물러선 만큼만 나갈 수 있었고 길게 이어지는 흐름으로서만 움직일 수 있었다.
저녁의 빛은 오른쪽에서 퍼졌다. 구름 뒤에서 배어 나오는 빛이 집으로 가는 사람들의 도로 위에 퍼졌다. 아침과 똑같았다.
아침이 가고 저녁이 되었다. 자동차들이 다시 분기점에서 흩어져 집으로 돌아갔다. 밤이 가고 아침이 되면 자동차들은 다시 도로 위로 나온다. - P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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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좋은 것은 자기 자신에게 줘야 한다. 가장 좋은 것이 많을수록, 향락의 원천을 자신 안에서 찾을수록 행복해진다. 
자급자족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행복은 스스로 만족하는 이의 것이다. - P46

자신의 운명을 돈으로 바꿀 수 있다는환상에서 벗어나라. -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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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고, 행동하는 대로 그에 꼭 맞는 존재가 된다. 만일 혼란스럽거나 불행하거나 불안하거나 비참하다면,
스스로를 돌아보라. 모든 고통의 근원은 다른 곳이 아닌 바로 자기자신에게 있기 때문이다. - P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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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욕구는 끝이 없는 것 같으면서도 의외로 한계가있기 마련이다. 너무 엉뚱하거나 불가능할 게 뻔한 일이아니라면 하고 싶은 일은 언젠가 다 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 일찌감치 써놓고도 여전히 실행에 옮기지못한 일이 있었다.
•미나미 쓰바사에게 내 마음을 전한다. - P18

또다시 아침이 오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학교에 갔다. 어제부터 막연하게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난치병을앓기 전에는 죽음이 시간의 끝에 존재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조차 우리는 죽음이라는 테두리 안에 있다. 병을 앓고 있어도 그렇지 않아도마찬가지다.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 P45

"넌 언제 감미로운 번개에 맞은 거야?"
"감미로운 번개?"
"응, 감미로운 번개."
"사랑을 하지 않으면 인생에 의미가 없다. 상대를 그리워하고, 죽을 정도로 애절한 감정을 느끼지 않고서는 살아갈 가치가 없다. 사랑을 하지 못하는 건 노력하지 않아서다. 아무에게도 마음을 열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음을 열고 살아가라. 그러면 언젠가 감미로운 번개에 맞을것이다." - P48

"네 모습이 부자연스럽다는건 잘 알아." 
"어디가, 뭐가 부자연스럽다는 거야?"
"너는 정말로 죽는다고. 앞으로 반년이라며? 그런데 어떻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냐고! 인생을 포기한 척하는 거야? 그렇게 쉽게 포기할 수 없어. 다른 사람에게 화풀이하고 싶어지고. 평범한 사람이 미워지고. 그래서 자신도 싫어지고…………. 하지만 그래도……………."
"더 살고 싶다고 발버둥 쳐야 하는 거라고!" - P86

"응...... 그러게. 절대로 멋있는 척하는 건 아닌데, 사귀고 싶다고도 사귈 수 있을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았어."
"하지만 괜찮아. 그때가 오면 미나미와 헤어질 거야. 그러니까 걱정 마."
"아, 그렇다고 지금 미나미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사귀고 있는 건 아냐. 나는 나대로 그 애를 소중히 대하고 싶어서, 그래서......." - P158

아무것도 하지 않기에는 인생이 길지만 하루하루는 아무일 없이 무심히 지나간다…………….
이대로 정해진 길을 따라 흘러가다가 결국은 똑같은 결과물로 완성된다. 마치 컨베이어 벨트에 올라타고 있는 것같았다. - P194

미안, 이라고 말하려 했지만 그건 부모님을 슬프게 하는 말이었다. 나는 두 사람을 줄곧 슬프게 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슬프게 하려고 태어난 게 아니다.
웃고 싶다, 나는 많은 사람과 함께. 그러니까………. - P271

많이, 살아줘, 많이, 사랑하길.
이그런 걸 기원했다.
내가 떠맡은 약간의 불행만큼, 네게는 부디 행복이 쏟아져 내리기를 너의 인생에 수많은 기쁨과 웃음이 넘쳐흐르기를. - P297

"이렇게 해야 미나미가 상처받지 않고 지낼 수 있어. 내죽음에 미나미를 끌어들여서 슬프게 하고 싶지 않아."
"그러지 마……………. 마치 너, 쓰바사를 사랑하고 있는 거 같잖아." 
"그런 거창한 게 아니라 그저 미나미가 소중할 뿐이야."
죽음과 마찬가지로, 내 의식과 감각에서 멀리 떨어져있었던 것을 생각한다.
해가 지자 여느 때처럼 빛나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과거에서 온 빛이, 밤하늘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 P303

"아빠한테는 뭔가 타이밍이 좋았던 일이 있었어?"
"네 엄마라는, 가장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고 너라는 가장사랑하는 아들을 만난 거지. 전부 최고의 타이밍이야." - P308

"거짓말. 마코토는 전혀 그런 내색 안 했어."
"그렇게 보이고 싶어 했으니까. 사람은 자신이 느끼는게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하잖아. 네가 알아채지 못한다면너의 세계에서는 쓰키시마의 병이 존재하지 않아." - P325

아무 말 없이 연인의 손에서 전해져 오는 온기를 느끼며, 나는 죽음을 생각했다.로죽는다는 건 어떤 걸까. 세상에서 사라진다는 건 어떤것일까.
그건 지금의 내게는 너무나 좋아하는 사람과 손을 잡을 수 없게 되는 일이었다. 손을 잡아도 마주 꼭 잡아줄 수없게 되는 일. 두 번 다시 눈을 마주치지 못하게 되는 일.
서서히 사람들에게 잊히는 일. 과거가 되는 일. - P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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