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저절로 끊기 전에 저절로 물러서게 되니 좋은 일이지너도 며칠 지나면 나처럼 되는 거야." - P12
혀가 빠지게 일했던 세월도 돌이켜보면 헛되어 보이는데, 햇볕을 쪼이면서 허송세월할 때 내 몸과 마음은 빛과 볕으로가득 찬다. 나는 허송세월로 바쁘다. - P43
죽으면 말길이 끊어져서 죽은 자는 산 자에게 죽음의 내용을전할 수 없고, 죽은 자는 죽었기 때문에 죽음을 인지할 수 없다. 인간은 그저 죽을 뿐, 죽음을 경험할 수는 없다. - P50
혀를 빨리 놀리지 않게 되는 것은 좋은 일이다. 혀가 굼뜨게 되면 말이 멀어지고, 단어 한 개를 끌어오려 해도 단어는선뜻 따라오지 않아서 단어 하나가 모시기 어려운 줄을 저절로알게 된다. - P62
수컷은 남의 새끼를 잡아와서 제 새끼를 먹인다. 암컷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저 한없는 집중과 인내와 기다림. 새는 제 몸의 온도로 새끼를 깨워 낸다. 당신들과 나는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달걀을 먹었던가. - P66
허균은 책 속의 길과 세상의 길을 이으려다가 죽었고, 김득신은 책 속의 길과 세상의 길을 끊어 놓고 죽었고, 차천로는 북경 성관의 ‘인정‘을 받으면서 죽었다. 세상의 길과 이어지지 않는다면 책 속에 무슨 길이 있겠는가. 나는 김득신의 책과 화적의 밥 사이를 건너가지 못한다. 나는 밤에는 책을 읽지 않는다. - P158
물이 반죽 속에서 수행하는 작용과 들기름이 비빔밥 속에서수행하는 작용은 크게 다르다. 물은 재료의 입자들을 엉기게 하지만, 들기름은 재료와 재료 사이의 거리를 존중하고 그 사이를연결함으로써 모든 살아 있는 개별성의 조화로운 종합으로서 새로운 맛의 장르를 이룬다. 이것은 한바탕의 완연한 세계를 갖는맛이다. 그러므로 밀가루 반죽을 주무르는 손길과 비빔밥을 비비는 손길은 그 힘과 질감과 작동방식이 같을 수가 없다. 옛 옹기장이의 손길과 돌아가신 내 어머니의 손길이 이러할진대, 이 세상의 모든 갈등과 다툼과 불화와 적대관계를 버무려서서로 의지하는 세상을 만들어 내야 하는 사람의 손길과 마음은어떠해야 하는가를 생각하면서 서울로 돌아왔다. 귀로에 차가많이 막혔고, 도로는 답답했다. 차 때문에 차가 가지 못했다. 앞차 때문에 내 차가가지 못했고 내 차 때문에 뒤차가 가지 못했다. 다들 오도 가도 못했다. - P200
자동차들은 앞차가 움직이면 뒤따라서 움직였고, 혼자서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자동차들은 남이 물러선 만큼만 나갈 수 있었고 길게 이어지는 흐름으로서만 움직일 수 있었다. 저녁의 빛은 오른쪽에서 퍼졌다. 구름 뒤에서 배어 나오는 빛이 집으로 가는 사람들의 도로 위에 퍼졌다. 아침과 똑같았다. 아침이 가고 저녁이 되었다. 자동차들이 다시 분기점에서 흩어져 집으로 돌아갔다. 밤이 가고 아침이 되면 자동차들은 다시 도로 위로 나온다. - P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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