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테펜 A. 샤버는 1979년 니더라인에서 태어난 인물로, 코미디언이며 카바레 예술가이다."
그 뒤에 이어지는 몇 줄 안 되는 내용은 그가 크게 성공하지 못했다는 방증이다. 도라는 두 번째 링크를 클릭하여 눈앞에서 실제로 보기도 했던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바에서 볼 법한 높은 의자, 자욱한 연기, 남자 메릴린 먼로. 그 사진은 행사를 광고하는 홍보용으로, ‘무한 재미’라는 상호명의 클럽 홈페이지에 실린 것이다. 슈테펜 샤버, 새 프로그램 〈인간에 대하여〉, 2020년 4월 28일 저녁 9시 초연.
오늘이 4월 28일이고 지금 시각이 저녁 9시다. 도라는 스마트폰을 도로 집어넣고 다시 창문을 들여다본다. 웹사이트 화면에 아직도 붉은색으로 비스듬히 찍힌 안내 문구가 남아 있다.
"코로나로 취소."
노래를 끝낸 슈테펜이 홈 바용 의자에 앉아 허공에 담배 연기를 뿜어내며 가끔 숨을 들이마신다. 그 모습이 마치 뭔가 얘기하려다 지금 이 시기에 말하는 건 아무 의미가 없으므로 차라리 혼자 간직하는 게 더 낫다고 하는 듯하다. 그런데도 지금이라도 벌떡 일어날 것처럼 보이는 그가 고개를 들고 꺼져 있는 평면 텔레비전 속에 청중이 앉아 있는 듯 똑바로 쳐다본다. 아니면 검은 텔레비전 화면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는지 모른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262

"모든 걸 다 이해하는 멍청한 놈들은 정리됐어. 생존에 아주 적합한 사람들이 아니었어. 초인은 하층민이지. 역사의 흐름에 역행하는 엉뚱한 이야기가 없으면 좋을 텐데! 웃어봐! 인간말짜인 당신들은 오락용 사격장에 서 있는, 곧 제거될 표적 인형이지. 결국 새로운 시대에 배제되는 존재란 말이지. 역사의 쓰레기차가 수거해 가기를 기다리는 동안 손에 든 캔 맥주를 마셔봐."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264

"알고 있어? 그리 오래된 일도 아니야. 70~80년 전이지. 당시 당신들은 ‘초인’이고 ‘군주적 인간’이었지. 금발의 백마가 세계를 제패하러 나섰지. 철학자들은 당신들을 묘사하고 작곡가들은 당신들을 찬양하고 낯선 나라들은 당신들이 무서워 벌벌 떨고 국민들은 당신들을 졸졸 쫓아다녔지. 근데 지금은?" 슈테펜이 눈을 크게 뜬다. "지금 당신들은 캠핑 탁자에 앉아 있어. 당신들 뒤엔 트레일러가 서 있고 앞엔 따뜻한 맥주가 놓여 있지. 당신들은 폴란드산 담배를 피우고 제국 국기에 경례를 하고 당신들 신분증을 손수 만들지. 속옷 차림의 초인들." 그때 뜬금없이 슈테펜이 발작적인 웃음을 터뜨린다. "당신들은 독일을 구하지 못해. 당신들이 구하는 건 편물 산업이지." 그는 점점 더 심하게 발작적으로 웃으며 말을 잇지 못한다. "당신들은 인간말짜야. 그런 생각 든 적 없어? 당신들이 항상 소탕하려는 인간말짜가 바로 당신들이야. 당신들을 좋아하는 사람도, 필요로 하는 사람도 없어. 당신들은 낮엔 잠만 자고 밤엔 술독에 빠져 지내지. 당신들은 인터넷에 떠도는 쓰레기 같은 온갖 헛소리를 믿고 디데이를 위해 감자를 심지."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263

도라의 책상이 없어지게 될 사무실 개조에 대한 공지는 해고 통보 직후에도 느끼지 못한 불안감에 대처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에서 빠져나온 도라는 통장거래내역을 클릭한다. 실업급여 신청을 하러 관청에도 가지도 않고 주자네와 면담도 나누지 않아서 생필품 외에는 쇼핑도 할 수 없는 지경이 될 경우 얼마 동안 쓸 돈이 남아 있는지 계산해본다. 집 담보대출금 상환 유예를 신청할 수 있는지, 어떤 조건을 갖춰야 단기 신용대출을 받을 수 있는지도 살펴보았다. 돈이 바닥날 경우를 대비해 마이너스통장 한도를 올릴 수 있는지, 언제 햇감자를 수확할 수 있는지도 찾아보았다.
검색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도라는 원하는 대로 그 결과를 왜곡하고 바꿀 수 있다. 그녀는 가급적 빠른 시일 안에 이곳 브라켄에서 재택근무를 하며 다시 돈을 벌어야 한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270

도시고속전철역 승강장엔 사람들이 보란 듯 간격을 두고 서 있거나 혹은 반대로 대놓고 무리지어 있다. 어느 쪽에 서느냐는 말 그대로 정치적 입장 표명이 돼버린다. 그래도 열차는 기분 좋게 비어 있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271

이제 더는 집 밖을 돌아다닐 수 없는 외출 금지로 생각이 정지되고 감정이 마비돼버린 사람들. 그들이 삶의 의미와 자살에 대해 심사숙고하는 동안에 도라는 브라켄 마을에 자리한 숲을 산책하고 하루 종일 정원에서 시간을 보내며 담장 너머에 사는 나치 때문에 불안에 떤다. 코로나로 인해 특권이 재분배된 거다. 베를린으로 잠시 여행만 와도 이런 사실을 확실히 깨닫게 된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272

도라는 조금 차분해진 거 같다. 그래도 여전히 뭘 해야 할지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뭘 하지말아야 할지는 알고 있다. 어쩌면 이게 인간이 인생에서 알 수 있는 전부가 아닐까.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274

하지만 지금은 빠른 속도로 달리며 느끼는 쾌감을 즐긴다. 드넓게 펼쳐진 들판, 지평선에 닿아 있는 검은 숲, 귀뚜라미 우는 소리에 감도는 긴장된 공기. 자전거를 타고 가며 맞는 바람에서 여전히 한낮 뜨거웠던 봄의 따스함이 느껴진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275

사실 도라는 모든 게 아주 단순하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질문에 대한 대답은 바로 눈앞에 놓여 있다. 브라켄 마을 풍경 속에, 적막감 속에, 어둠 속에 숨어서 꼼짝 않고 삶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지켜볼 테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275

지금은 깊이 생각할 때가 아니라 생각을 멈춰야 할 때다. 이 마을 모든 것과 평화롭게 공존할 때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276

들판 위에 뜬 하얀 둥근 달이 자동차, 도로, 나무들을 환하게 비추고 있다. 도라는 자전거 핸들을 잡은 채 달빛 속으로 솟구쳐 있는 픽업트럭 옆에 서 있다. 사실 멋진 그림이다. 공허한 풍경과 픽업트럭이 미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듯하다. 지금 서 있는 곳에서 한발 물러나서 그림 밖으로 나가 이 장면을 조용히 감상하며 그림이 얼마나 훌륭하게 연출되었는지, 또 이 그림이 연속으로 일어나는 극적인 사건들이 차갑게 얼어붙은 순간에 집중된다는 점을 얼마나 많이 들려주는지 생각해볼 수 있을 거다. 그러고 나면 몇몇 사람들이 야간 주점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는 또 다른 그림 속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럴 수 없다. 그림 밖으로 나오지 않을 거다. 그녀는 달빛, 백팩, 자전거 앞 바구니에 묶어둔 털 바구니를 담은 그림의 일부니까. 그러면 그림 앞에 누군가 다른 사람이 서서 도라를 바라보며 그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궁금해할 것이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278

그때 도라의 눈에 뭔가 다른 게 띈다. 등 부분이 움찔거리더니 어깨가 위로 올라가고 가슴이 잔잔한 호흡으로 인해 살짝 부풀어 오른다. 도라는 차창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어깨뼈 사이에 갖다 댄다. 따뜻하니 살아 있다. 너무 안도한 나머지 울음이 터질 거 같다. 의도적 살인, 심각한 상해. 이제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여기 한 남자가 쓰러져 있고 그가 숨을 쉬고 있는 게 기쁠 따름이다. 도라는 남자의 등과 머리를 쓰다듬다가 뺨을 조심스럽게 두드린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279

눈이 감겨 있다. 그는 엄마를 찾는 갓난아기처럼 보인다. 도라는 그의 이마에 손을 얹는다. 건조하고 서늘하다. 그가 이렇게 가깝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도라는 다른 사람을 이렇게 가깝게 느껴본 적이 거의 없다. 지인들 간에 시도 때도 없이 안고 키스하는 걸 좋아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이젠 그런 성격을 바꾸는 것도 괜찮을 거 같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280

고테가 잘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머니를 뒤져 작은 담뱃갑을 꺼내 담배 두 개에 불을 붙여 도라에게 하나를 내민다. 이제껏 담배가 이리 맛있던 적도, 달빛 속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가 지금보다 더 멋져 보인 적도 거의 없었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282

그사이 담배와 남자의 땀 냄새가 뒤섞인 그의 체취가 이상할 정도로 친근하게 느껴진다. 그는 트레일러 안으로 들어가 안에서 문을 잠근다.
그 순간 줄곧 이상하다고 느낀 게 뭔지 분명해진다. 그녀가 꿈꾸는 그림에 어울리지 않는 디테일한 부분 하나. 그녀는 이제 그게 뭔지 깨닫는다. 늘 그렇듯이 고테에게서 심한 냄새가 난다. 하지만 알코올 냄새는 단 한 방울도 나지 않는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284

거실에 걸려 있는 복제한 명화 그림들은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이다.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 ‘창가의 여인’ ‘발코니의 남자’.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287

"그러려고. 편히 앉아 책 좀 더 읽고. 이언 매큐언의 소설인데 멋지구나. 이 사람은 스쿼시 게임을 베르됭 전투처럼 아주 극적으로 묘사할 수 있는 작가구나."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287

그는 역사박물관의 시민정신과 휴머니즘 부서에 사는 사람 같다. 어떤 일을 5분 이상 지속하는 능력이 없는 도라 세대에겐 살아 있는 천연기념물 같은 존재다. 도라는 그런 그가 부럽긴 해도 그의 존재와 맞바꾸고 싶진 않다. 언젠가 그녀는 왜 그러고 싶지 않은지 그 이유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287

도라는 가끔 자신과 아버지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게 뭔지 더는 이해가 안 될 때가 있다. 그녀는 왜 이따금 그가 자신에게 관심이 없다고 느끼는 걸까. 그들은 늘 한 팀이었고 늘 상대방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함께하는 일이 많든 적든 상관없이 말이다. 아버지와 딸 간의 역사는 인류 역사만큼이나 길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288

편안하게 담배를 함께 피울 수 있는 마지막 남은 사람은 나치와 의사인 것 같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288

갑자기 전화가 끊겼다. 흔히 책에 나오는 "갑자기 모든 게 순식간에 끝나버렸다"라는 구절 같은 순간이다. 도라의 눈앞에 아버지가 샤를로텐부르크에 있는 집 안을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의 영화가 펼쳐진다. 현관 복도에 있는 옷장 문을 열고 미리 싸놓은, 황동 지퍼가 달린 코냑색의 가죽 가방을 꺼낸다. 그러고는 평상시 가볍게 입고 다니는 양복 상의를 집어 들고 문을 나선다. 한 번에 두 계단씩 뛰어 내려가 그림자를 드리우며 텅 빈 자비니 광장을 지나간다. 남자는 개를 데리고 있지 않아도 외출 금지가 적용되지 않는다. 미션을 부여받은 남자는 자동차를 세워둘 장소를 빌려둔 멋진 건물의 주차장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간다. 잠시 후 그는 냉방이 잘된 재규어를 타고 사운드 시스템에서 흘러나오는 바이올린 음악을 들으며 도시를 내달린다. 그 와중에 창밖으로 도시 풍경이 소리 없이 빠르게 지나간다. 이윽고 아우토반으로 진입한 그가 속도를 높인다. 그와 함께 도라도 누군가가 등에 커다란 손을 대고 앞쪽으로 세게 미는 것 같은 가속이 느껴지는 듯하다. 차 안에 흐르는 바이올린 콘서트 음악은 아버지가 좋아하는 아람 하차투리안*의 음반으로, 도라의 취향에는 다소 자극적이다. 한데 갑자기 고조되는 긴장감 넘치는 점에서 보면 드라이브에 어울리는 음악이다.

* 아르메니아의 서양 고전음악 작곡가.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291

아버지에게 ‘도시’는 유일하게 생각할 수 있는 생활 형태이고 ‘지방’은 코마나 죽음을 의미하는 또 다른 단어다. 그는 자신의 생각과 완전히 다르다는 걸 확인하려고 여기 와 있는 건 아니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293

그녀는 발걸음을 옮기면서 발아래 땅바닥을, 파릇파릇한 잔디를, 그 잔디 밑 흙을, 상상 불가한 범위의 암반층을, 엄청 큰 지구를 온몸으로 느낀다. 서커스 곰이 공을 돌리는 것처럼 그녀는 걸으면서 지구를 돌리는 느낌이다. 응축된 기다림의 시간, 결국 그 시간이 점점 사라져간다. 도라가 쓸쓸한 Sus-Y사 사무실에 남아 있는 자신의 옛 삶의 잔재를 제거한 게 언제 적 일인가? 그녀는 먼 과거의 에피소드 같은, 한때 신나 보였지만 그사이 의미가 퇴색돼버린 일을 떠올린다. 지금 이 순간은 과거가 아닌 현재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298

고테가 움직인다. 도라 앞을 지나가면서 표정 없는 얼굴로 쳐다본다. 개가 주인에게 복종하듯이 그는 요요가 부르는 소리에 순순히 따른다. 의사 세계엔 과장급 의사가 있다. 고테 같은 사람조차 그런 의사의 명령은 거역할 수 없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300

고테가 떠났다. 슈테펜이 예측한 대로 누군가가 그를 데리고 갔다. 아버지가 역사 쓰레기를 수거해 가는 수거차는 아니지만. 어쩌면 더 안 좋을 수도 있다. 경험상 도라는 누군가 어딘지 모를 곳으로 데려가는 건 의사 세계에선 보통 좋은 징조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300

사실 도라 역시 그 어떤 정보도 듣고 싶지 않다. 어쨌든, 사실 이 모든 게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아버지를 이 일에 끌어들이다니, 정신이 나갔던 건가? 고테는 그녀와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이다. 그가 아무것도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면 그녀도 알고 싶지 않다. 그녀는 대화를 끝내고 다시 침대에 들어가 이 일을 잊어버리고 싶다. 미안, 실수였어. 운이 나빴어. 계속해.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306

교아종은 거지같은 용어 중 상급에 해당되는 용어다. 알파벳 모양을 한 어둠의 최고사령관이다. 의학 용어의 다스 베이더로, 항상 ‘수술 불가능’ ‘난치’ ‘진통제’라는 이름의 부관들을 대동하고 다닌다. 도라는 곧장 지름길을 택하기로 마음먹는다. 다스 베이더를 방해하는 건 소용없는 일이므로.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308

도라의 가슴속에서 심연이 열리는데, 너무 깊어 작은 기포조차 올라오지 않는다. 인간은 자기 안에 매몰되어 사라져버릴 수 있을까? 그 후에 무엇이 남을까? 시커먼 구멍?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308

프란치가 새 발톱처럼 생긴 농기구로 땅을 파서 감자꽃 주위의 흙을 잘게 부순 다음 감자 줄기를 움켜쥐고 쭉 잡아당긴다. 그러자 흙 속에서 감자가 주렁주렁 달린 뿌리가 나오는데, 정말이지 외계인 군단처럼 보인다. 아니면 새하얀 핏줄이 엉켜 있는 흙투성이 알둥지 같기도 하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314

통통한 파리 한 마리가 큰 소리로 앵앵거리며 날아와 주방 창문에 부딪힌다. 식탁에 앉아 생각에 잠긴 도라는 더는 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확고해진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파리는 계속 앵앵거리며 유리창에 부딪히고, 몸속에선 작은 기포가 소용돌이치며 스멀스멀 올라오고. 차라리 그녀는 고테와 몸을 바꾸고 싶다. 그럼 그는 그녀가 끝장나길 기다리며 그녀를 위해 장 보러 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316

앎과 무지는 서로 조금도 방해하지 않고 공존할 수 있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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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티는 내게 말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어요. 죽음을 마주하고 어느 정도 통제하길 바라는 사람과 죽음에 관해 생각하고 싶지 않은 사람…. 나는 죽음에 관해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 P15

1994년 오리건준는 ‘16호 조치Measure 16‘를 통과시켰는데, 이는 세계 최초로 속칭‘조력자살assisted suicide‘(다만 현재는 ‘자살‘이라는 불편하기 그지없는 단어를 논제와 분리하려고 애쓰는 정치 로비스트 및 환자 들이 지칭하는 대로 의료지원사medical aid in dying(MAID)‘나 ‘의사조력사physician assisted death(PAD)‘라고 부른다)을 투표를 통해 합법화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줄줄이 이어지는 법적 문제 제기와 200만 달러(약 26억 원-옮긴이)에 이르는 천주교 기금이 지원하는 폐지 캠페인 때문에 이 법은1997년에야 발효됐다. 오리건주 ‘존엄사법Death with Dignity Act‘은 미국은 물론 세계적으로도 역사적·도덕적 전환점이 됐다. 이 법으로 세상이 유토피아로 기울었는지 디스토피아로 기울었는지는 관점에 따라 달랐다. - P20

정말로 간단했다. 사람들은 존엄성을 특정한 방식으로 정의하는데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무언가가 존엄하지 않다고 느껴지는 때는 본능적으로 아는 듯했다. 이런 사람들에게 죽음을 계획하는 일은 보통 존엄하지 않은 것을, 그 사람이 상상하기에 굴욕적이거나 모멸스럽거나 헛되거나 속박당하거나 이기적이거나 추하거나 신체가 볼품없어 지거나 재정 파탄을 초래하거나 부담스럽거나 불합리하거나 진실하지 못한 무언가를 피하는 것이었다. - P37

베티는 개한테는 약물을 주사해 빠르게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면서 사람은 마지막까지 고통받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개를 죽이는 일은 자비를 베푸는 행동으로 보는지도 이상했다. 개를 부러워하는 것 역시 이상했다! 베티는 죽을 권리를 열렬하게 지지하는 사람들이 온라인에서 공유하는 구호를 좋아했다.
"나는 차라리 개처럼 죽겠다." - 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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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천뱅이의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았다. 1. 몹시 굶주려 지나치게 음식을 탐하는 사람. 2. 어떤 일에 염치없이 욕심을 부리는 사람. 3. 탐욕이 강한 사람을 얕잡아 일컫는 말. 4. 이성(異性)에 탐심이 많은 사람을 얕잡는 말. - <사랑의 생애>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648740 - P34

그러자 아무리 먹어도 사라지지 않는 자신의 허기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자기 안의 탐심을 이해했다. 그것이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허기라는 것을 이해했다. - <사랑의 생애>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648740 - P36

그가 떠올린 것은 어떤 재료로 만들어진 어떤 맛의 파스타가 아니라 그냥 기호로서의 파스타였다. 그리고 그 기호가 가리키는 대상은 그녀였다. 파스타는 그녀를 지시하는 부호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그녀를 부르기 위해 파스타를 찾아냈다. - <사랑의 생애>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648740 - P42

"이제부터 좋아하려고." 정말로 이제부터 파스타를 좋아할 것 같은 예감이 든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말을 중의적으로 사용했다. 그는 그녀가 자기의 그런 의중을 알아주기를 은근히 바랐지만, 그럴 리 없다는 것 역시 모르지 않았다. 그러므로 분명하고 알아듣기 쉽게 말해야 한다는 것도. 말하자면 고백의 형식으로. - <사랑의 생애>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648740 - P42

그녀는 그날 오후 콩나물해장국을 먹으면서 형배의 전화번호를 자기 전화기에서 지웠다. 그것이 그로부터 벗어나는 의식이었다. 실제로 그녀는 그날 이후 그로부터 자유로워졌다. - <사랑의 생애>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648740 - P57

프란츠 카프카는 세 번 약혼하고 세 번 파혼했다. 두 번의 약혼과 파혼은 한 여자와 한 것이었다. 그는 왜 그랬을까. 세 번의 약혼은 사랑에 대한 그의 갈망을 시사한다. 그는 이성에게 관심 없는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여성을 사랑하기를 원한다. 그와 동시에 세 번의 파혼은 사랑에 대한 그의 두려움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사랑을 갈망했지만 사랑에 붙잡히는 것을 무서워했다. 사랑을 하지 못할까 봐 불안해했지만 사랑을 하게 될까 봐 두려워했다. 그는 여성을 사랑하기를 원하고, 원하면서도, 또 원하는 만큼 사랑하지 않기를 원한다. - <사랑의 생애>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648740 - P60

사랑이 없으면 살 수 없지만 사랑을 하며 살 수도 없는 이 난처한 사람은 사랑을 하지도 못하고 안 하지도 못한다. 사랑을 하려고 하면 사랑에 대한 두려움이, 사랑을 하지 않으려고 하면 사랑을 하지 않을 때의 불안이 덮치기 때문이다. - <사랑의 생애>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648740 -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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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는 짧게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주에겐 마음을 적절히 숨기면서 기자에겐 "기자님이 알게 된 것 다 알아요"라고 말하는 듯한 센스 있는 대답에 더는 장난을 치고 싶지 않아졌다. -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44336 - P277

그간 무뚝뚝하게 굴었던 승우에게 한 번쯤 골탕을 먹이고 싶었는데 지금이 다신 없을 기회 같다는 생각을 하며. 기자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고 승우를 바라봤다. 기자의 눈빛에 무언가가 있다고 느낀 영주도 역시 고개를 돌려 승우의 옆모습을 바라봤다. 승우는 기자가 눈치를 챘다는 걸 눈치챘지만 이를 겉으론 드러내지 않았다. 그저 평소와 똑같은 표정과 목소리로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앞으론 조금 더 즐겁게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아서요." -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44336 - P277

"이 찻집도 오래도록 기억날 것 같습니다. 그런 느낌이 들어요. 미래의 수많은 순간에 지금 이 날을 기억하게 될 것 같다는 느낌이요." -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44336 - P284

"네, 앉으면 피곤이 좀 가시잖아요. 그게 싫어서. 엄청 피곤한 상태로 맥주를 마시고 싶더라고요. 그럼, 어떤 맛일까……." -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44336 - P286

"네, 행복이 그리 멀리 있지 않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요. 행복은 먼 과거에나, 먼 미래에나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바로 내 눈 앞에 행복이 있는 거였어요. 그날의 그 맥주처럼, 오늘의 이 모과차처럼요." -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44336 - P286

"이렇게 행복이 그리 멀리 있지 않다고 생각하면 사는 게 조금 수월해지는 것 같더라고요." -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44336 - P287

그는 대화를 할 때면 이 부분이 가장 어려웠다. 과연 어디까지 묻고 어디에서 멈춰야 하는 것일까. 호기심이 무례함으로 변질되는 순간을 어떻게 가늠할 수 있을까. 승우의 경험이 하나 알려준 건, 잘 모르겠을 때는 우선 멈추는 것이 낫다는 사실이었다. 질문해도 될지 모르겠을 때는 질문하지 말 것.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을 때는 듣는 역할에 충실할 것. 이 두 가지만 지켜도 최소한 무례한 사람에선 벗어날 수 있었다. -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44336 - P288

"일생 동안 공들여 만든 성취, 좋아요. 그런데 아리라는 분의 말이 나중에는 이렇게 이해되더라고요. 그가 말하는 행복이란 마지막 순간을 위해서 긴 인생을 저당 잡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요. 마지막 순간에 한 번 행복해지기 위해 평생 노력만 하면서 불행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라고요. 이렇게 생각하니까 행복이란 게 참 끔찍해졌어요. 나의 온 생을 단 하나의 성취를 위해 갈아 넣는 것이 너무 허무하겠더라고요. 그래서 나는 이제 행복이 아닌 행복감을 추구하며 살아야지 하고 생각을 바꾼 거예요." -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44336 - P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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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라는 고개만 끄덕이고 하고 싶은 말을 접어둔다. 브라켄 마을에서 과묵과 수다는 모순된 개념이 아니다. 차라리 커피 끓이는 데 집중하는 게 더 낫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226

"얼마 전에 일자리를 잃었어요."
아무렇지 않게 이런 말을 입 밖에 낸다. 이 말은 이 마을 주민이 되겠다는 선언처럼 들린다. 일자리를 잃은 도라는 이제 이 마을 일원이며 이곳 사람이다. 다음번엔 "난 백수예요"라는 말을 시험해볼 테지만 그러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하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228

적어도 지금의 그녀는 실직한 상태다. 이는 어쩜 일상을 향해 내딛는 첫걸음일지 모른다. 필터버블*과 반향실**에서 나와 진짜 삶 속으로, 그리고 프렌츨라우어베르크에선 아무도 예감할 수 없는 실제 일들이 문제가 되는 자디의 현실 세계로 들어가는 걸 거다. 어쩌면 그녀는 자신을 해고한 Sus-Y사에 감사해야 할지 모른다. 건승을 빕니다, 주자네 드림.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247

얼마 전에 여기 이 소파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고 해도 믿을 거다. 그 ‘얼마 전’이 바로 2017년 9월 22일인 것만 분명할 뿐. 그러니까 지금 도라는 버려져 아무도 살고 있지 않는 집이라는 박물관에 서 있는 것이다. 거의 3년쯤 된 스냅사진 속에, 통조림처럼 보존 처리된 과거의 한순간 속에 자리한 박물관 안에.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247

인간은 이 모든 걸, 더 나아가 이보다 더 많은 걸 생각할 수 있다. 또 인간은 정보를 왜곡하고 바꿀 수도 있다. 그러나 진실은 늘 한결같다.

-알라딘 eBook <인간에 대하여>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중에서 - P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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