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선집 1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 글항아리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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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변두리 출신이지만 버클리 대학원 영문과를 다닌 자유롭고 현학적이고 시니컬한 유대계 기자 겸 작가의 솔직 담백한 모녀간 이야기와 응답하라 1988 같이 동네 이웃과의 사람 냄새 솔솔나는 이야기를 매콤달콤한 비빔밥처럼 잘 버무린듯 읽을 맛이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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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최선의 자아. 이는 몇백 년간 우정의 본질을 정의할 때면 반드시 전제되는 핵심 개념이었다. 친구란 자기 내면의 선량함에 말을 건네는 선량한 존재라는 것. 치유의 문화에서 자란 아이들에게 이런 개념은 얼마나 낯선가! 오늘날 우리는 서로 최선의 자아를 긍정하기는커녕 그것을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우정이라는 결속을 만들어내는 것은 오히려 우리 자신의 감정적 무능—공포, 분노, 치욕—을 인정하는 솔직함이다. 함께 있을 때 자신의 가장 깊숙한 부끄러움까지 터놓고 직시하는 일만큼 우리를 가까워지게 만들어주는 것도 없다. 콜리지와 워즈워스가 두려워했던 그런 식의 자기폭로를 오늘날 우리는 아주 좋아한다. 우리가 원하는 건 상대에게알려졌다는 느낌이다, 결점까지도 전부. 그러니까 결점은 많을수록 좋다. 내가 털어놓는 것이 곧 나 자신이라는 생각, 그것은 우리 문화의 대단한 착각이다.

-알라딘 eBook <짝 없는 여자와 도시> (비비언 고닉 지음, 박경선 옮김) 중에서 - P24

순간 우리 셋은 서로 눈을 마주치고, 곧 한꺼번에 깔깔 웃어젖힌다. 웃음이 멈추자 다 같이 빙그레 미소를 짓는다. 수행은 다 같이 했고 수용은 각자가 했다.

-알라딘 eBook <짝 없는 여자와 도시> (비비언 고닉 지음, 박경선 옮김) 중에서 - P29

나는 친구들 못지않게 잠자리도 많이 해봤고 서른다섯이 되기 전에 결혼도 두 번, 이혼도 두 번 해봤다. 결혼은 2년 반씩 지속됐는데, 두 번 다 나도 모르는 어떤 여자(나)가 매한가지로 모르는 어떤 남자(웨딩케이크 위의 신랑 장식)에게 일임해버린 것이나 다름없는 결혼이었다.

-알라딘 eBook <짝 없는 여자와 도시> (비비언 고닉 지음, 박경선 옮김) 중에서 - P29

내가 막상 성적으로 무르익은 건 이 결혼들이 다 끝장난 뒤였다. 그러니까 내 말은, 욕망의 대상이 되기보다 욕망의 주체가 되는 데 골몰하는 사람이란 걸 자각하게 됐다는 얘기다. 그리고 바로이런 전개에서 배운 점이 있었다. 나는 성욕이 강한 사람이지만 성욕이 제일 중요한 사람은 아니며, 오르가슴으로 천국을 맛보기는 했어도 지구가 흔들리지는 않았고, 반년 남짓 진이 빠지도록 성적 쾌락에 탐닉할 수는 있어도 늘 그 말초적 자극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는 중이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한마디로, 사랑을 나누는 일은 숭고했지만 거긴 내 거처가 아니었다. 그 뒤로 나는 더 많은 걸 깨달았다.

-알라딘 eBook <짝 없는 여자와 도시> (비비언 고닉 지음, 박경선 옮김) 중에서 - P30

처음으로—그러나 마지막은 아니었다—남자들은 나와는 다른 종이라는 자각을 했다. 철저히 분리된 이질적인 종. 나와 내 연인 사이에 보이지 않는 얇은 막 같은 게 드리워진 것만 같았다. 욕망이 침투할 만큼 성기되, 인간적 유대는 어룽거리게 보일 만큼 불투명한 막. 내겐 그 막 너머에 있는 사람이 현실 같지 않았고, 나도 그에게 그런 것 같았다. 그 순간 남자랑 잘 일이 평생 다신 없대도 상관없었다.

-알라딘 eBook <짝 없는 여자와 도시> (비비언 고닉 지음, 박경선 옮김) 중에서 - P32

나중에야 알게 됐지만, 그건 내가 줄곧 상상해온 것 이상으로 대수로운 일이었다. 한 해 두 해 지나면서 로맨틱한 사랑이 갈망과 환상과 정서로 짜인 직물 전체를 꿰뚫어 엮여 있는 내 감정의 신경계에 마치 물감처럼 스며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내 심령을 집어삼켰고, 뼛속을 파고드는 아픔이었으며, 영혼의 짜임에 워낙 깊숙하게 꼬여 있어서 그것이 일으키는 파상을 똑바로 보려고 하면 눈이 다 아플 지경이었다. 그렇게 남은 인생 고통과 갈등의 이유가 될 터였다. 나는 굳어버린 내 심장을 애지중지하지만, 지금껏 애지중지해왔지만, 로맨틱한 사랑의 상실은 여전히 그것을 갈기갈기 찢어놓는다.

-알라딘 eBook <짝 없는 여자와 도시> (비비언 고닉 지음, 박경선 옮김) 중에서 - P33

우정에는 두 가지 범주가 있다. 하나는 서로에게 활기를 불어넣는 관계고, 다른 하나는 활기가 있어야만 같이 있을 수 있는 관계다. 전자는 함께할 자리를 미리 마련해두지만, 후자는 일정 중에 빈 자릴 찾는다.

-알라딘 eBook <짝 없는 여자와 도시> (비비언 고닉 지음, 박경선 옮김) 중에서 - P36

뉴욕의 우정은 울적한 이들에게 마음을 내주었다가 자기표현이 풍부한 이들에게 마음을 빼앗기기도 하는 분투 속에서 배워나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거리는 누군가의 징역에서 벗어나 또 다른 누군가의 약속으로 탈주하려는 사람으로 가득하다. 이 도시가 그 여파로 어지럽게 동요하는 듯이 보이는 순간들이 있다.

-알라딘 eBook <짝 없는 여자와 도시> (비비언 고닉 지음, 박경선 옮김) 중에서 -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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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일은 실제로 일어났다, 대체로는 어쨌든, 전쟁 이야기는 아주 많은 부분이 사실이다. 내가 아는 한 사람이 드레스덴에서 자기 것이 아닌 찻주전자를 가져갔다는 이유로 정말로 총살을 당했다. 내가 아는 또 한 사람은 개인적으로 원수진 사람들에게 전쟁이 끝나면 총잡이를 고용해 죽여버리겠다고 정말로 협박했다. 그리고 기타 등등. 하지만 이름은 모두 바꾸었다. - P13

나는 절정과 스릴과 인물 묘사와 훌륭한 대사와 서스펜스와 대결을팔아먹고 사는 사람으로서 드레스덴 이야기의 얼개를 여러 번 짜보았다. 내가 짠 최고의 얼개, 아니 가장 예쁜 얼개는 두루마리 벽지의 뒷면에 적혀 있었다. - P18

그때도 나는 드레스덴에 관한 책을 쓰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 사건은 당시 미국에서는 유명한 공습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그쪽이 히로시마보다 훨씬 심했다는 것을 아는 미국인은 많지 않았다. 나도 그것은 몰랐다. 드레스덴은 그다지 여론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 P23

두 소녀와 나는 조지 워싱턴이 건넜던 곳에서 델라웨어 강을 건넜다. 다음날 아침이었다. 우리는 뉴욕 세계박람회에 가서, 포드 자동차회사와 월트 디즈니가 보여주는 대로 과거가 어떠했는지 보고, 제너럴모터스가 보여주는 대로 미래가 어떠할지 보았다.
그리고 나는 현재에 관해 자문했다. 현재는 얼마나 넓고, 얼마나 깊으며, 그 가운데 내 것으로 챙길 것은 얼마나 되는가. - P32

시간은 흐르지 않으려 했다. 누군가 시계에 장난을 치고 있었다. 전기 시계만이 아니라 태엽시계에도 내 손목시계의 분침은 한번 움찔거린 뒤 일 년을 흘려보냈고, 그러고 나서야 또 한번 움찔거렸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지구인으로서 시계가 말해주는 것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달력이 말해주는 것을. - P35

들어보라:
빌리 필그림은 시간에서 풀려났다.
빌리는 노망이 든 홀아비로 잠이 들었다가 결혼식 날 깨어났다.
1955년에 하나의 문으로 들어갔다가 1941년에 다른 문으로 나왔다.
그 문으로 다시 들어가니 1963년의 자신이 나왔다. 자신의 출생과 죽음을 여러 번 보았다. 그는 그렇게 말한다, 그 사이의 모든 사건과 무작위로 만난다.
그렇게 말한다.
빌리는 시간 속에서 경련성 마비를 일으켜, 다음에 어디로 갈지 정할 수 없다. 이 여행이 꼭 재미있는 것은 아니다. 늘 무대 공포증 상태에 있다. 그는 그렇게 말한다. 다음에는 자신의 인생에서 어떤 역을 연기해야 할지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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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는 아무도 모르게 머릿속 세상 안에서 살아가기 시작했다. 머리가 읽고 말하고 생각하는 방식은 부모나 집에서의 생활, 그 익숙한 거리의 삶과 철저하게 멀어지고 있었다. 우리는 속으로 숨기는 생각과 겉으로 표현하는 생각의 차이를 처음 소개받았고 하나씩 익혀 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각자의 집안에서 불순분자가 되어갔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127

브루클린이나 브롱크스에 있는 집이라면 지긋지긋한 친구 대여섯 명이 시티칼리지 지하 식당에 모여 앉아 밤 열 시 열한 시까지 끝없이 토론하고 토론했다. 이 지하 식당과 카페에서 최초의 교육이 내게 뿌리를 내렸다. 이곳에서 포크너는 미국이고, 디킨스는 정치이고, 마르크스는 섹스이고, 제인 오스틴은 문화라는 개념이고 나는 게토 출신이고, D. H. 로런스는 선지자임을 배웠다. 바로 이 식당에서 문학에 대한 내 사랑에 이름이 붙었고 정신의 삶을 꽃피우고자 하는 열의에 불타올랐다. 사상 때문에 180도 바뀌는 사람들을 발견했고 지적인 대화가 그 무엇보다 관능적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127

지성에 굶주린 우리의 에너지가 그 공간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지적인 삶이라는 개념이 우리 안에서 불길같이 일어났다. 우리는 사상이나 개념을 하나씩 배우면서 그제야 자기가 누구이고 타인이 누구인지 알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드디어 세상이 이해되기 시작했고, 발 딛고 설 땅을 찾았으며 우주에 설 자리가 생겼다. 시티칼리지에서 우리는 내면의 사색과 정신의 명료함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의식했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164

엄마를 분노로 떨게 하고 우리 사이를 갈라놓은 건 내가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점이었다. 엄마는 학교에 간다는 게 곧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는 뜻이라는 것, 조리 있고 당당하게 자기 생각을 표현하게 된다는 뜻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엄마는 충격에 사로잡혔다. 강의 몇 개를 듣던 몇 달 사이에 내 문장은 길어지기 시작했다. 길어지고 복잡해지고 엄마가 모르는 단어가 섞여들기도 했다. 그 이전에는 한 번도 엄마가 모르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엄마가 따라오지 못하는 논리를 만들어내지도 않았다.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사상에 입각한 의견을 내뱉지도 않았다. 이런 변화가 엄마를 돌아버리게 했다. 내가 세 단락 안에 결론 낼 수 없는 문장을 입 밖에 내기 시작하면 엄마의 얼굴은 먹잇감을 노리는 짐승처럼 섬뜩하게 변했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130

이제 우리 사이에는 선이 그어졌고 우린 단 한 번도 서로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항상 서로가 던진 미끼를 물었다. 싸움은 폭풍처럼 집 안을 뒤흔들고 벽에 칠해진 페인트에 금이 가게 하고, 바닥의 리놀륨 장판을 찢어지게 하고 창 유리를 덜컹이게 했다. 우리에겐 단 한 번도 휴전이 없었고, 대재앙이 닥칠 뻔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131

"너 그 남자 맛봤지? 그랬지?" 이 문장은 들을 때마다 충격적이었다. 이 말은 나의 신경종말을 자극했다. 억압의 멜로드라마, 악의에 찬 수동성, 힘의 부재에 대한 분노, 이 모든 것이 저 문장에 압축되어 있었고, 처음 들었을 때부터 알 수 있었다. 엄마가 그 말을 할 때면 우리는 이름은 없지만 떡하니 존재하는 무인지대를 가로질러 서로를 마주했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134

우리는 눈앞에 보이는 이익을 따라가는 존재이지 어느 누구도 유예된 만족과 희열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137

우리는 모두 생긴 대로, 자기 욕구에 따라 살 뿐이다. 네티는 유혹하고 싶어했고 엄마는 고통받고 싶어했다. 나는 책을 읽고 싶었다. 우리 셋 중 어느 누구도 스스로를 잘 다스리고 절제하여 이상적이고 정상적인 여자의 삶을 성공적으로 추구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기실 우리 셋 중 어느 누구도 그 삶을 성취하지 못했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137

삶에 대한 확신이 약하면 약할수록 자기 방식이 옳다고 독단을 부리게 된다. 우리 각자는 자기가 특별하다고, 다르다고, 더 숭고한 목적에 헌신할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라고 믿고 싶어한다. 서로를 분리시키면서 연민도 함께 거둔다. 남몰래 다른 사람들에게서 마음에 들지 않는 특성을 수집하기 시작하고 그들과 자신을 더욱 열심히 분리하면서 마치 나와 너의 이 차이가 구원이라도 되는 줄로 착각한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138

이제 나는 도리스 레싱의 소설 속 캐릭터가 아니라 레싱의 소설자체라 할 수 있었다. 내 세상은 집착이라는 그림으로만 채울 수 있는 액자였다. 나는 액자처럼 좁은 이 공간을 음울하고도 형형한 눈빛으로 돌아다닌다. 나는 사랑의 경험이란 이전과 비슷하지만 점점 더 실망스러워지는 것, 그러면서도 동일한 열병과 환멸과 격정과 부정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배워야만 하는 저주를 받은 현대 여성이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148

이 모든 현실의 조각을 너무 진지하게,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다. 상상력이라고는 없었다. 이 모든 사물과 외관과 감회에 바보처럼 열중했고 그것이 세계의 전형적인 얼굴이라고 여기며 뚫어져라 응시했다. 이 거리가 세상의 다른 모든 거리였고 이 건물이 세상의 모든 건물이었으며 이 여자 남자 들이 세상의 모든 여자 남자 들이었다. 나는 내 앞에 있는 것 외에는 상상하지 못했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154

이제 내 세계에는 소파에 누워 있는 여인과 창문에 매달린 소녀밖에 없다. 고립이 우리를 이 안에 봉인해버렸고 그 안에서 나는 예전과 같은 열렬한 집중력으로 인생의 모든 가능성과 불확실성을 밀어내려 하고 있었다. 몇 년이 지나서야 나는 그렇게 극단적인 집중과 고집스러운 차단이 우울의 증상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155

우리는, 그러니까 엄마와 나는 상실감이라는 필연의 조건에 처한, 나른함과 무기력 안에서 불안해하는, 연민과 분노 안에서 하나로 묶인 여자들이었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155

버클리대학교 영문학과는 그 자체로 이 세상 모든 인간관계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가장 먼저 권력자들이 있었다. 최고 권력자들은 명석하고 저명한 정교수들이고 권력을 좇는 사람들은 똑똑한 젊은 청년들로 그들의 제자, 귀염둥이, 아들, 지적 동반자가 될 준비가 된 이들이었다. 교수와 제자 들은 문명사회의 연줄과 인맥의 세계에서 서로 끈끈하게 연결되어 사업이 성장하고 지속될 수 있도록 공을 들인다. 그 사업이란 대학교 영문학과라는 세계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157

그런 두려움은 수준 낮고, 교활하고, 비딱하고, 졸렬하고 기생충 같은 것이다. 나 같은 여자를 겁내는 남자는 혀로 채찍을 휘둘러 아랫도리를 마비시켜버려야 한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160

사랑은 육지의 대부분을 덮어버리는 늪이라 할 수 있었다. 불행하고도 평화로운 고독이라는 단단한 영역에서 한 걸음만 걸어 나오면 늪이 그 땅을 뒤덮어버렸다. 남자와 자는 건 결핍감 안에서 익사되기 시작하는 일이었다. 내 연애에서 주파수를 변형하는 일은 절대적인 것, 상대적이 아니라 절대적인 필요였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161

지금 와서 보면 이렇다. 우리는 방을 하나씩 단장하면서 서로의 거리를 넓혔고, 외로움을 쟀고, 실패를 완수했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167

우리가 남편과 아내라는 두 단어의 클리셰를 생각 없이 받아들인 건 얼마간 젊음과 무지 때문이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정상과 평범함이라는 환상은 관습적인 결혼이 추구하는 방향이 아니었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169

아파트처럼, 가구처럼, 거리처럼, 자주 얼굴을 보지는 않았지만 네티는 항상 그곳에 붙박이처럼 있는 존재였다.(엄마와 네티의 싸움은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사이에도 심리적인 분리가 일어날 수 있음을 처음으로 내게 보여준 일이었다.) 결혼한 다음부터 네티는 종종 내 생각 끝에 찾아와 매달려 있었고 특히 스테판과 사랑을 나눌 때 불쑥 떠오르기도 했다. 그럴 때면 네티가 내뿜는 힘을 더 예민하게 더 불편하게 감지했다. 네티는 공기 속에서 불현듯 나타나 나에게 묻는 듯했다. ‘힘들게 배운 기술을 전부 전수해줬더니 고작 이 사람이야?’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181

데이비는 내 남자 역사의 재현부〔소나타 형식에서 제시부의 주제를 형태를 바꾸어 반복·강화하는 부분〕라고 할 수 있었다. 그가 강하다고 생각하면 나는 어색해지고 모질어졌다. 그의 약한 면을 보면 나는 기꺼이 사랑스러운 여자가 되었다. 단 하나 달랐던 건 데이비와 있을 때만은 처음으로 이 배치가 완벽해졌다는 점이다. 내가 어디에 구속되었는지를 보았고, 그것을 내보이면서 부끄러워했다. 드디어 눈이 환해져 나의 실체가 보일 때면 얼마나 화가 나고 두려웠던가! 그리고 데이비를 통해서 나를 볼 수 있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던가. 나는 데이비를 알았던 것이다. 그 내면의 핵심까지 상상할 수 있었다. 그의 식성과 취향을 좋아했고 그의 두려움을 바로 알아보았다. 그것들은 내 것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데이비가 어쩌다가 이런 사람이 되었는지를 알았고 그의 옆에 있으면 내가 어쩌다가 지금의 내가 되었는지도 알 수 있었다. 얼마 동안 이렇게 껄끄러움 없이 같은 생각을 공유하면서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출신과 태생이 비슷하다는 점에서 오는 조용한 이해와 다정함이 우리 사이에 흘렀다. 사랑을 나누거나 잠들어 있는 모습은 우리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었는데, 우리는 서로의 몸을 팔다리로 감은 채 얼굴을 마주하고 잤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196

우리는 침묵한다. 우리가 침묵하는 건 바깥 거리의 소음이 훨씬 더 듣기 좋기 때문이다. 그 소리는 우리가 적어도 브롱크스에 있진 않다는 사실을, 맨해튼에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엄마와 내게 브롱크스에서 맨해튼까지의 거리, 이곳에 오기까지의 여정은 지하철역 몇 개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지난했다. 그러나 오늘 밤 이 방은 옛날 그 방을 빼닮았다. 그날의 햇빛, 사위어가는 여름 햇빛은 홀연 전실에서 우리 위로 떨어지던 수척한 햇살을 흐릿하게 각색한 것 같기도 했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247

엄마가 침묵을 깬다. 이제 격한 감정이 거둬진 목소리, 그저 호기심에 대답을 바라는 초연한 목소리로 묻는다. "그러면 엄마랑 좀 멀리 떨어져 살지 그랬니? 내 인생에서 멀리 떠나버리지 그랬어. 내가 말릴 사람도 아니고."
나는 방 안의 빛을 본다. 거리의 소음을 듣는다. 이 방에 반쯤 들어와 있고 반은 나가 있다.
"안 그럴 거 알아, 엄마."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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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뒤적거려 보려고 맨 위에 있는 것을 뽑으려 하던 그는 어떤 말 울음 같은 소리에 동작을 멈췄다. 에두아르가 웃는 소리가 층계 아래쪽까지 들리고 있었다. 비브라토가 섞인 날카롭고도 폭발적인 웃음, 완전히 꺼지기 전에 공기 중에 한동안 머물러 있는 그런 종류의 웃음이었다. 어떤 미쳐 버린 여인이 터뜨리는 이상야릇한 폭소처럼 느껴지는 웃음이었다. - <오르부아르>, 피에르 르메트르 / 임호경 옮김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0748683 - P572

이 괴성보다 더 놀라운 것은 상황 자체였다. 이날 저녁 에두아르는 아래쪽으로 구부러진 기다란 부리가 달린 새 대가리 형태의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살짝 벌어진 부리 사이로 두 줄의 새하얀 치아를 드러내고 있어서, 마치 웃고 있는 육식 조류처럼 보였다. 그리고 붉은색 계통으로 칠해져 그 거칠고도 공격적인 양상이 강조된 이 마스크는 에두아르의 얼굴을, 눈알을 뒤룩거리며 웃는 듯한 두 눈구멍을 제외하고, 이마까지 온통 덮고 있었다. - <오르부아르>, 피에르 르메트르 / 임호경 옮김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0748683 - P573

그가 그토록 열심히 일하는 것은, 그렇게 힘들게 고생하는 것은 오직 이것을 위해서였다. 오로지 가족을 위해서였다. 그들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에게…… 그러니까 필요한 모든 것을 해주기 위해서였다. - <오르부아르>, 피에르 르메트르 / 임호경 옮김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0748683 - P5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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