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다정하고 살뜰한 양육자였느냐면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할머니에게 받은 가장 큰 유산, 지금도 가장 감사하게 생각하는 유산은, 할머니가 치매로 모든 기억을 잃어버리시기 전에 명주로 곱게 싸서 큰손녀인 내게만 물려주신 은수저 한 쌍이 아니라, 바로 이야기들이다. - <소설의 쓸모>, 박산호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97163 - P6

나는 스스로의 적성과 취향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그저 성적에 맞추어, 그리고 어릴 때 본 인도 영화 『신상』에 나온 코끼리가 너무 인상적이어서 선택한 인도어과가 나랑 너무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러나 재수를 할 용기도 돈도 없었던 나는 술·연애·독서라는 치명적인 조합에 몰두하며 대학 생활을 보냈다. 그때 나의 유일한 야심은 졸업 전까지 천 권의 책을 읽는 것이었지만 결국 675권을 읽고 세상으로 나가야 했다. - <소설의 쓸모>, 박산호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97163 - P8

그래서 《밤의 동물원》 속 조앤의 선택은 우리에게 영감을 준다. 평범하고 이기적인 인간이었던 조앤은 케일린을 짜증스럽게 여기고, 마거릿을 부담스러워하지만, 결국 두 사람의 진가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사력을 다해 모두를 지켜냈다. - <소설의 쓸모>, 박산호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97163 - P130

다시 메이 엄마의 말을 생각한다. 너는 인생의 구경꾼이 되어버렸다는 그 말은 실로 옳다. 어떤 노동의 외주화는 결국 경험의 외주화로 이어진다. 한 번뿐인 인생을 오로지 돈과 효율에 중점을 둔 일로만 채우다 보면 우리는 어느새 자신을, 타인을 소외시키게 된다. - <소설의 쓸모>, 박산호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97163 - P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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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내가 열심히 하지 않은 걸로 하겠다"는 장그래의 가치관은 따져보면 모든 걸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잔혹한 논리이고 절대로 사회적으로 찬양되어서는 안 될 위험한 이데올로기다(누가 좋아할 논리겠는가). 그러나 저 말은 온몸을 내던지며 사회의 장벽에 맞서 싸워온 이가 자기 자신을 추스리며 했던 다짐이기에 정서적으로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알라딘 eBook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145

사회에 필요한 다양한 재능이 적재적소에서 발휘될 수 있도록 하는 능력주의만 해도 먼저 자리를 차지한 이들의 탐욕과 벽 쌓기로 인하여 실현하기 어려운데, 맞춰야 할 과녁조차 무서운 속도로 움직이고 있다. 인간의 능력들 중 상당수가 기계에 의해 대체되고 있기 때문이다.

-알라딘 eBook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172

부와 권력이 극소수에게 집중되고 인구의 대부분이 잉여인력으로 전락하게 되면 자본주의도 제대로 작동되기 어렵다. 노동자는 동시에 소비자이기도 하다. 노동자에게 구매력이 없으면 첨단 기업이 무엇을 생산해도 소비될 수 있는 시장이 없게 된다. 시장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기업들의 생산성 경쟁이 인간을 생산과 소득에서 축출하여 결국 시장 자체를 붕괴시킬 수도 있는 딜레마다.

-알라딘 eBook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173

결국 1인 1표의 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자기파괴적인 자본주의의 폭주를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생명줄인지 모른다. 우리 중 대부분이 경제적으로 쓸모없는 노동력으로 전락할 수도 있는 미래에 보통선거 원칙이 우리의 미래를 공동구매할 수 있게 해주는 마지막 밑천일 수 있는 것이다.

-알라딘 eBook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173

상상하는 김에 아예 더 미래로 가보면, 복지 서비스, 정서적 서비스, 문화 서비스 분야에서 타인의 행복을 창출할 경우 뇌과학적인 방법으로 자동 측정하여 그것이 새로운 화폐가 되도록 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행복 자체가 가치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남을 한 번 활짝 웃게 한 선행으로 획득한 행복 화폐로 아이스크림 한 통을 구매한다. 정부를 통하지 않아도 시장에서 교환가능한 것이다. 뭐, 보통 이런 공상은 SF영화에서 이상한 부작용으로 이어져 재앙이 되곤 하지만 상상은 자유니까.

-알라딘 eBook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176

유토피아는 믿지 않는다. 다만 확실한 것은 뿔뿔이 흩어진 개인으로 살아가면서 시대의 흐름을 보지 못하고 가만히만 있다보면, 상상보다 훨씬 나빠질 여지는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다. 미래를 스스로 공동구매하지 않으면 강제배급받게 될 테니 말이다.

-알라딘 eBook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177

불편하다는 이유로 실재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없는 것처럼 취급하는 것은 궁극적인 해결책이 아니다.

-알라딘 eBook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185

인류는 자연 상태의 폭력성을 문명화 과정을 통해 극복하여 현대적인 평화를 이루고 있다. 자연은 그 자체로 옳고 그른 것이 아니다. 옳고 그른 것의 기준은 지금의 발전한 문명을 기준으로 해야 하는 것이 맞다. 그에 따라 옳은 것은 더욱 북돋우고 그릇된 것은 제어해야 한다.

-알라딘 eBook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183

상대를 몰살시키는 전쟁이 아닌 이상 중간에서 타협하는 게 현실적이다. 당파적 진영 논리는 이런 복잡하고 힘든 과정을 생략하려는 게으름이다.

-알라딘 eBook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185

문제의 다층적인 구조를 직시하자고 하면 대뜸 비겁한 양비론이라는 비난이 쏟아진다. 양비론 아니라 삼비론 사비론이더라도 맞는 건 맞는 거고 아닌 건 아닌 거다. 재판도 양비론이다. 손해배상 책임을 정할 때 피해자측의 과실도 참작한다. 책임의 비율을 달리할 뿐이다. 현실 세계에서는 어느 한쪽만이 전적으로 옳고 전적으로 틀린 경우는 없다.

-알라딘 eBook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185

아름다운 윤리와 당위만으로는 현실을 바꿀 수 없다. 인간의 이기심, 욕망을 있는 그대로 일단 인정하고 그걸 출발점으로 타협할 지점을 찾는 냉정함이 현실적이다.

-알라딘 eBook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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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빌리가 겉으로 멍해 보이는 것은 위장이었다. 겉보기에 멍한 모습으로 흥분하여 쉬익쉬익 번쩍번쩍 움직이는 정신을 감추고 있었다. 그의 정신은 비행접시, 죽음의 하찮음, 시간의 진정한 본질에 관한 편지를 쓰고 강연을 준비하고 있었다. - P236

반향언어증상이란 주위에 있는 건강한 사람들이 하는 말을 즉시 되풀이하는 정신적 질병이다. 하지만 사실 빌리는 그런 병에 걸린 것이 아니었다. 럼포드는 그냥 그래야 자신이 편하기 때문에 빌리에게 그런 증상이 나타났다고 주장한 것뿐이다. 럼포드는 군사적인 방식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불편한 사람, 실리적인 이유에서 죽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은 역겨운 병에 걸렸다고 주장하는 방식이었다. - P239

도살장에 도착했을 때 빌리는 마차에서 일광욕을 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기념품을 찾으러 다니고 있었다. 세월이 흐른 뒤 트랄파마도어인들은 빌리에게 인생의 행복한 순간에 집중하라고, 불행한 순간은 무시하라고 예쁜 것만 바라보고 있으라고, 그러면 영원한 시간이 그냥 흐르지 않고 그곳에서 멈출 것이라고 조언했다. 이런 선별이 빌리에게 가능했다면, 그는 수레 뒤에서 햇볕에 흠뻑 젖은 채 꾸벅꾸벅 졸던 때를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 P242

하느님, 저에게 제가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차분한 마음과제가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와 언제나 그 차이를 분별할 수 있는지혜를 주소서. - P258

트랄파마도어에서는 예수그리스도에 별 관심이 없다, 빌리 필그림은 그렇게 말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트랄파마도어인의 정신으로 볼 때 가장 매력적인 지구인은 찰스 다윈이다-그는 죽는 사람들은 원래 죽게 되어 있으며, 주검은 나아졌다는 증거라고 가르쳐주었다. 뭐 그런거지. - P260

빌리 필그림이 트랄파마도어에서 배운 것이 사실이라 해도, 즉 우리가 가끔 죽은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영원히 사는 것이라 해도, 나는 그리 기쁘지 않다. 그럼에도 이 순간 저 순간을 찾아다니며 영원한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라면, 멋진 순간이 그렇게 많다는 것이 고맙다. - P260

빌리와 나머지 사람들은 어슬렁어슬렁 걸어 그늘진 거리로 나갔다.
나무들이 낙엽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바깥에서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않았다. 거리를 오가는 것은 전혀 없었다. 탈것이라고는 딱 하나, 말 두마리가 끄는 마차가 버려져 있을 뿐이었다. 마차는 녹색에 관 모양이었다.
새들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새 한 마리가 빌리 필그림에게 말했다. "지지배배뱃?" - P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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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은 코끼리를 먼저 정확히 이해하고, 그것과 맞서 싸우기보다 슬쩍 다른 길로 유도하는 방법을 택했다. 거창하고 근본적인 해결책만 고집하지 않고 당장 개선가능한 작은 방법들을 바로 적용했고, 작지만 끊임없이 균열을 일으켰다. 영웅은 이런 사람들이 아닐까.

-알라딘 eBook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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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심리학이 밝힌 인간 마음의 작동 원리를 토대로 실제로 세상을 더 낫게 바꾸는 사람들의 사례를 모아놓은 책이 있다. 칩 히스, 댄 히스 형제가 쓴 『스위치』다. 이들이 이론적 토대로 삼은 것은 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의 연구 결과들이다. 하이트는 인간의 감성적 직관적 측면이 거대한 코끼리라면 이성적 측면은 거기 올라탄 작은 기수라고 비유한다. 진행 방향과 관련하여 코끼리와 기수의 의견이 불일치할 때면 언제나 코끼리가 이긴다. 이성적인 기수가 제발 하지 말라고 뜯어말리는 일을 코끼리는 선입견에 따라 조건반사적으로 저지르곤 한다. 이것은 대니얼 카너먼이 말하는 우리 뇌 속에서 벌어지는 시스템1과 시스템2, 즉 자동으로 작동하는 직관과 합리적 추론의 분업을 비유로 쉽게 설명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코끼리가 훨씬 강력한 엔진이고 합리적인 기수는 보조적인 제어장치 역할을 하도록 진화한 이유는 그게 효율적인 생존장치니까 당연한 일이다.

-알라딘 eBook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지음) 중에서 - P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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