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서른둘이다. 1986년의 이 가을날, 여전히 수도원에 기거하는 서른두 명. 수도원은 낯빛이 허옇게 질릴 정도로 아찔한 길이 끝나는 곳에 자리했다. 천 년이 흐르도록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길의 깎아지름도, 그 아찔함도. 서른두 개의 굳건한 마음과 ─ 허공을 굽어보는 곳에서 살려면 그래야만 한다 ─ 젊어서는 마찬가지로 굳건했던 서른두 개의 육신. 몇 시간 뒤면 그 수가 하나 줄 터이다.

-알라딘 eBook <그녀를 지키다> (장바티스트 앙드레아 지음, 정혜용 옮김) 중에서 - P7

물론 나는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한다. 나는 인간이 점점 더 빠르게, 점점 더 멀리 나는 걸 보았다. 나는 양차 대전도, 여러 민족이 침몰하는 것도 보았고 선셋 대로에서 오렌지도 따봤으니, 내게 뭔가 이야깃거리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미안, 내가 배은망덕하게 굴고 있군. 내가 당신들 사이에서 숨어 지내겠다고 결심했을 때 당신들은 지닌 게 아무것도, 아니, 거의 없으면서도 나를 입혀 주고 먹여 줬지. 그런데 나는 너무 오랫동안 입을 닫고 살았다. 덧창을 내리게나, 햇빛에 눈이 부시군.

-알라딘 eBook <그녀를 지키다> (장바티스트 앙드레아 지음, 정혜용 옮김) 중에서 - P1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① 이 사건 계엄 선포가 사법심사의 대상이 되는지에 관하여 보겠습니다.

고위공직자의 헌법 및 법률 위반으로부터 헌법질서를 수호하고자 하는 탄핵심판의 취지 등을 고려하면, 이 사건 계엄 선포가 고도의 정치적 결단을 요하는 행위라 하더라도 그 헌법 및 법률 위반 여부를 심사할 수 있습니다.

-알라딘 eBook <대통령(윤석열) 탄핵 결정문> (헌법재판소) 중에서 - P3

② 국회 법사위의 조사 없이 이 사건 탄핵소추안을 의결한 점에 대하여 보겠습니다.

헌법은 국회의 소추 절차를 입법에 맡기고 있고, 국회법은 법사위 조사 여부를 국회의 재량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법사위의 조사가 없었다고 하여 탄핵소추 의결이 부적법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알라딘 eBook <대통령(윤석열) 탄핵 결정문> (헌법재판소) 중에서 - P3

③ 이 사건 탄핵소추안의 의결이 일사부재의 원칙에 위반되는지 여부에 대하여 보겠습니다.

국회법은 부결된 안건을 같은 회기 중에 다시 발의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피청구인에 대한 1차 탄핵소추안이 제418회 정기회 회기에 투표 불성립되었지만, 이 사건 탄핵소추안은 제419회 임시회 회기 중에 발의되었으므로, 일사부재의 원칙에 위반되지 않습니다.

-알라딘 eBook <대통령(윤석열) 탄핵 결정문> (헌법재판소) 중에서 - P4

④ 이 사건 계엄이 단시간 안에 해제되었고, 이로 인한 피해가 발생하지 않았으므로 보호이익이 흠결되었는지 여부에 대하여 보겠습니다.

이 사건 계엄이 해제되었다고 하더라도 이 사건 계엄으로 인하여 이 사건 탄핵 사유는 이미 발생하였으므로 심판의 이익이 부정된다고 볼 수 없습니다.

-알라딘 eBook <대통령(윤석열) 탄핵 결정문> (헌법재판소) 중에서 - P4

⑤ 소추의결서에서 내란죄 등 형법 위반 행위로 구성하였던 것을 탄핵심판청구 이후에 헌법 위반 행위로 포섭하여 주장한 점에 대하여 보겠습니다.

기본적 사실관계는 동일하게 유지하면서 적용법조문을 철회·변경하는 것은 소추사유의 철회·변경에 해당하지 않으므로, 특별한 절차를 거치지 않더라도 허용됩니다.

-알라딘 eBook <대통령(윤석열) 탄핵 결정문> (헌법재판소) 중에서 - P4

⑥ 대통령의 지위를 탈취하기 위하여 탄핵소추권을 남용하였다는 주장에 대하여 보겠습니다.

이 사건 탄핵소추안의 의결 과정이 적법하고, 피소추자의 헌법 또는 법률 위반이 일정 수준 이상 소명되었으므로, 탄핵소추권이 남용되었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건 탄핵심판청구는 적법합니다.

-알라딘 eBook <대통령(윤석열) 탄핵 결정문> (헌법재판소) 중에서 - P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가 가난하고 어린 이민자로 상륙했다면 어디서 살아야 했을까? 외삼촌이 알고 있는 이민법 상식에 따르면 아주 높은 확률로 미국 입국 허가가 안 되었을 것이다. 카를이 돌아갈 고향이 없다는 사실 참작도 없이 본국으로 송환되었을지도 모른다. 여기서는 동정심을 기대하면 안 된다더니 카를이 책에서 읽은 미국에 관한 내용이 다 맞는 말이었다. 이곳에는 운이 좋은 사람들만 주변 사람들의 평온한 얼굴 사이에서 진정한 행복을 누리는 것 같았다. - <실종자>, 프란츠 카프카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f3be86ce55db4ab1 - P4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반면 카를은 몸과 마음이 아주 강해진 느낌이 들었다. 고국에서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느낌이었다. 타국에서 높은 사람들 앞에서 선을 위해 투쟁하고, 아직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최후의 정복을 위해 모든 준비를 다 갖춘 카를의 모습을 부모가 보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들에 대한 생각이 바뀔까? 두 분이 아들을 사이에 끼고 앉아 칭찬하실까? 적어도 한 번쯤은, 부모님 뜻에 순응하는 아들의 눈을 한 번쯤은 바라봐주지 않을까? 불확실한 질문이다. 그런 질문을 하기에 부적절한 순간이기도 하고. - <실종자>, 프란츠 카프카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f3be86ce55db4ab1 - P29

"자신을 지켜야 해요. ‘예, 아니요’를 확실하게 말해야 해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진실이 어떤 건지 전혀 몰라요. - <실종자>, 프란츠 카프카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f3be86ce55db4ab1 - P4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벨의 의미가 탑처럼 끝없이 쌓여 무한으로 뻗는다. 바벨은 은유적 잉여다. 의미가 겹치고 겹치면서, 기호는 한 가지 의미를 안정적이고 고정적으로 띨 수 없다. 의미가 벽돌처럼 하나하나 쌓였다가 스르르 무너져 내린다. 바벨은 흰 고래처럼 모든 것을 표상하지만 아무것도 나타내지 않는 공허다.

-알라딘 eBook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 (홍한별 지음) 중에서 - P26

발터 벤야민은 앞서 말한 「번역가의 책무」라는 글에서, 언어 사이에는 매우 내밀한 관계가 있고 이것이 번역(직역)을 통해 드러난다고 했다. 번역 과정에서 출발 언어와 도착 언어의 의미와 형식이 서로 충돌하면서 보완하게 되고, 그러면서 언어가 통합되고 성장하여 보편적이고 궁극적인 잠재적 구조로 나타난다. 벤야민은 번역을 통해 도달하는 이런 하나의 진정한 언어를 ‘순수 언어’라고 부르고, 번역가의 책무는 의미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단어 대 단어로 옮기며 순수 언어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했다. 번역을 통해 바벨 이전의 언어로 돌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알라딘 eBook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 (홍한별 지음) 중에서 - P26

번역은 신이 우리에게 지운 짐이자, 바벨 이전의 순수한 상태—원초적 언어를 회복하고 다시 하나의 언어로 말하려는 노력이다. 혹은 벤야민식으로 말하면 여러 갈래로 흩어진 불완전한 언어의 속박을 풀고 순수한 의미를 정제해내는 행위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고 그것이 어떤 기호도 거치지 않고 바로 우리 마음에 와닿던 때로 돌아가는 것이다. 언어의 혼란과 오용이 없는 곳. 번역 과정에서 아무것도 손실되지 않는 곳으로.

-알라딘 eBook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 (홍한별 지음) 중에서 - P27

*영어로는 이탈리아어처럼 두운과 각운을 넣어 ‘Translator, traitor’라고 번역하고 한국어로는 ‘번역은 반역’이라고 하기도 한다. 번역 불가능성을 암시하는 말인데 정작 이 문구는 음악적 요소를 유지하면서 번역이 된다.

-알라딘 eBook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 (홍한별 지음) 중에서 - P39

번역이 배신인 까닭은, 혼란스러운 언어를, 부유하는 기의를 일시적으로나마 고정하려고 시도했기 때문이다.

-알라딘 eBook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 (홍한별 지음) 중에서 - P40

나보코프는 축어역(word-for-word)만이 진정한 번역이라고 주장하면서*, 텍스트의 축어적 의미가 아닌 텍스트의 정신을 번역한다는 자유로운 번역은 작가를 ‘중상하는(traduce)’ 일이라고 혹독하게 비난했다.11 왜 이 비난이 특히 뼈아프게 들리냐면, 영어의 ‘중상하다(traduce)’는 프랑스어의 ‘번역하다(traduire)’나 이탈리아어의 ‘번역하다(tradurre)’ 등과 뿌리가 같기 때문이다.

-알라딘 eBook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 (홍한별 지음) 중에서 - P41

데이미언 설즈는 라틴어 ‘트라두케레(traducere)’에서 이런 단어들이 생겨난 과정을 이렇게 설명한다. ‘traducere’는 ‘저쪽으로 데리고 가다’라는 뜻인데 여기에서 ‘번역하다’라는 의미가 파생되었다. 그런데 중세 교부들은 성서를 라틴어에서 속어로 번역하면 정수가 훼손될 수밖에 없다고 보았고 그래서 번역을 성스러운 텍스트를 손상하고 중상하는 위협으로 간주했다.12 그래서 ‘traduce’가 ‘번역하다’와 ‘중상하다’의 두 가지 뜻을 갖게 되었다. 번역(프랑스어로 ‘traduction’)은 그 단어 자체에 상해와 참훼의 의미를 품고 있다.

-알라딘 eBook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 (홍한별 지음) 중에서 - P4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