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의 의미가 탑처럼 끝없이 쌓여 무한으로 뻗는다. 바벨은 은유적 잉여다. 의미가 겹치고 겹치면서, 기호는 한 가지 의미를 안정적이고 고정적으로 띨 수 없다. 의미가 벽돌처럼 하나하나 쌓였다가 스르르 무너져 내린다. 바벨은 흰 고래처럼 모든 것을 표상하지만 아무것도 나타내지 않는 공허다.
-알라딘 eBook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 (홍한별 지음) 중에서 - P26
발터 벤야민은 앞서 말한 「번역가의 책무」라는 글에서, 언어 사이에는 매우 내밀한 관계가 있고 이것이 번역(직역)을 통해 드러난다고 했다. 번역 과정에서 출발 언어와 도착 언어의 의미와 형식이 서로 충돌하면서 보완하게 되고, 그러면서 언어가 통합되고 성장하여 보편적이고 궁극적인 잠재적 구조로 나타난다. 벤야민은 번역을 통해 도달하는 이런 하나의 진정한 언어를 ‘순수 언어’라고 부르고, 번역가의 책무는 의미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단어 대 단어로 옮기며 순수 언어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했다. 번역을 통해 바벨 이전의 언어로 돌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알라딘 eBook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 (홍한별 지음) 중에서 - P26
번역은 신이 우리에게 지운 짐이자, 바벨 이전의 순수한 상태—원초적 언어를 회복하고 다시 하나의 언어로 말하려는 노력이다. 혹은 벤야민식으로 말하면 여러 갈래로 흩어진 불완전한 언어의 속박을 풀고 순수한 의미를 정제해내는 행위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고 그것이 어떤 기호도 거치지 않고 바로 우리 마음에 와닿던 때로 돌아가는 것이다. 언어의 혼란과 오용이 없는 곳. 번역 과정에서 아무것도 손실되지 않는 곳으로.
-알라딘 eBook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 (홍한별 지음) 중에서 - P27
*영어로는 이탈리아어처럼 두운과 각운을 넣어 ‘Translator, traitor’라고 번역하고 한국어로는 ‘번역은 반역’이라고 하기도 한다. 번역 불가능성을 암시하는 말인데 정작 이 문구는 음악적 요소를 유지하면서 번역이 된다.
-알라딘 eBook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 (홍한별 지음) 중에서 - P39
번역이 배신인 까닭은, 혼란스러운 언어를, 부유하는 기의를 일시적으로나마 고정하려고 시도했기 때문이다.
-알라딘 eBook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 (홍한별 지음) 중에서 - P40
나보코프는 축어역(word-for-word)만이 진정한 번역이라고 주장하면서*, 텍스트의 축어적 의미가 아닌 텍스트의 정신을 번역한다는 자유로운 번역은 작가를 ‘중상하는(traduce)’ 일이라고 혹독하게 비난했다.11 왜 이 비난이 특히 뼈아프게 들리냐면, 영어의 ‘중상하다(traduce)’는 프랑스어의 ‘번역하다(traduire)’나 이탈리아어의 ‘번역하다(tradurre)’ 등과 뿌리가 같기 때문이다.
-알라딘 eBook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 (홍한별 지음) 중에서 - P41
데이미언 설즈는 라틴어 ‘트라두케레(traducere)’에서 이런 단어들이 생겨난 과정을 이렇게 설명한다. ‘traducere’는 ‘저쪽으로 데리고 가다’라는 뜻인데 여기에서 ‘번역하다’라는 의미가 파생되었다. 그런데 중세 교부들은 성서를 라틴어에서 속어로 번역하면 정수가 훼손될 수밖에 없다고 보았고 그래서 번역을 성스러운 텍스트를 손상하고 중상하는 위협으로 간주했다.12 그래서 ‘traduce’가 ‘번역하다’와 ‘중상하다’의 두 가지 뜻을 갖게 되었다. 번역(프랑스어로 ‘traduction’)은 그 단어 자체에 상해와 참훼의 의미를 품고 있다.
-알라딘 eBook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 (홍한별 지음) 중에서 - P41
|